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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진보’하란 말인가?

조회 수 8146 추천 수 0 2010.04.30 07:12:43

한신대학교 21세기 진보포럼 1차행사에 나가 강연한 원고입니다. 말이 강연원고이지 30분 강연 후 패널토론 후 질의응답이었기 때문에 이대로는 안 했습니다. 질의응답 시간 때 더 재미있는 얘기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이 글은 그냥 한 편의 평이한 글로 읽으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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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정의?


‘진보’자가 붙어 있는 정당(진보신당)의 당원인데도 진보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말문이 막힌다. 누구나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근본어휘의 정의를 물으면 할 말이 궁하다는 건, 이미 2천 5백 년 전에 소크라테스가 퍼포먼스를 통해 보여준 바 있다. 그래서 포괄적인 정의에 대한 물음은 포괄적인 답변으로 눙치며 시작해야겠다.


“그러나 진보가 별 것이던가? 구석기 시대에 돌을 깎고 갈아서 연장으로 쓰면 그것이 진보 아니었던가? 신분계급이 엄격했던 고려중기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냐며 계급을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 했던 만적의 꿈이 바로 진보 아니었나?” (노회찬, <진보의 재탄생> 서문에서) 


진보(進步)라는 말에는 본시 ‘앞으로 나아간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그래서 이 말은 왠지 멋있어 보이기도 하는데, 그래서 더 어렵다. 가령 참여정부는 한미FTA가 ‘앞으로 나아가는 결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시장주의를 강하게 관철하는 것이 ‘진보적인 태도’라고 믿는 사람들도 많다. 사실 마르크스도 자본주의는 이전의 다른 체제보다 진보적인 것이라 했다. 부르주아지는 귀족들에 대항하여 사회의 진보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적 관점에서 사회주의를 ‘진보’라고 부르는 것은, 자본주의 이후의 체제가 사회주의가 될 것이라는 역사철학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진보’의 문제는 가치지향의 문제가 아니라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구별하는 문제와 비슷한 것이 된다. 더구나 오늘날의 사람들 중 상당수는 인류 역사의 최종 귀착이 ‘사회주의’일 거라는 마르크스의 역사철학을 신뢰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이후는 없을지도 모른다. 역사는 예정된 과정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우연들의 조합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단어 그대로의 의미만으로는 ‘진보’를 정의할 수 없다. 모종의 가치지향이 필요하다.


"사회주의는 인간 영혼의 가장 고귀한 감정의 항거에서 태어난 것이다.…… 사회주의는 비참함, 실업, 추위, 배고픔과 같은 견딜 수 없는 광경이 성실한 가슴들에 타오르게 하는 연민과 분노에서 태어난 것이다. ……한쪽엔 호화, 사치가 있는가 하면 다른 쪽엔 거만한 게으름이 있는, 이 터무니없고도 서글픈 대비(對比)에서 사회주의는 태어난 것이다. 사회주의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가장 천한 인간의 동기인 시샘의 산물이 아니라, 정의의 산물이며 가난한 자에 대한 동정의 산물인 것이다."


홍세화가 소개한 프랑스의 어느 사회주의자의 말이다. 이것은 ‘사회주의’라는 이념이 탄생하게 된 근원적 정서를 소개한다. 설득력 있다. 하지만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보수 우파들과 대화를 해보면 안다. 가령 무상급식 논쟁을 생각해보자. 유럽에 가면 보수 우파 소리도 못 들을 양반들을 ‘좌파’로 몰아붙이는 악명높은 한국의 우파들도, 아이들이 밥을 굶어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가난한 집 아이들에겐 이미 밥을 주고 있고, 부잣집 아이들에게까지 밥을 줄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말한다. 보수주의자들도 입으로는 “우리는 자본가를 위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이건희를 숭배하는 이유는 어쨌든 논리적으로는 이건희가 잘 되어야 한국인들도 잘 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도 ‘서민’을 위한다고 말한다. ‘서민’을 위하기 위해선 시장경제의 경쟁이 더 효율적이라는 거다. 이런 논쟁을 보면 하나의 도식이 도출된다.


조금 낡은 도식이지만 중앙정치의 차원에서는 모든 문제를 시장에 맡기자는 쪽을 ‘보수’라 하고 국가가 직접 나서 인민의 복지를 향상시켜야 한다는 쪽을 ‘진보’라 한다. 한국의 경우 학계와 관료들의 차원에선 미국에서 공부했고 미국 사회를 따라가자는 사람들을 ‘보수’라고 하고 유럽을 따라가자는 사람들을 ‘진보’라고 볼 수도 있다. 한국 사회는 모든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동의하는 명제, ‘상식’의 지반이 빈곤한 사회다. 그런 곳에서 어떤 사람들은 미국 사회의 ‘상식’을 들여와 이러쿵저러쿵하고 다른 사람들은 유럽 어느 나라의 ‘상식’을 들여와 이러쿵저러쿵한다.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그렇다.


생활인의 차원으로까지 내려온다면 어떨까. 생활인들이 스스로를 ‘진보’로 자리매김하고자 할 때 대면하는 것은 정갈한 우익이념이 아니라 냉소주의이다. 간단히 말하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발언하다보면 어느 날 자신이 본인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좌파’로 불리게 되는 경험을 겪게 된다. 보통의 젊은이들이 ‘좌파 청년’(?)을 이상한 눈길로 바라보는 것은 그들의 이념에 동의를 못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느끼는 생소함은 이념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도대체 저 친구가 왜 토익공부는 안 하고 저런 것에 관심을 가지는지를 도통 이해하지 못한다.


대학생의 처지?


“대학에 가지 않는 쪽이 훨씬 소수다. 지금 대다수의 사람들은 평균적 사회구성원으로 인준받기 위해 대학에 간다.” (박권일, “대학의 사회적 위상과 가치의 변동” 황해문화 2010 봄호에서)


고등학교 졸업생의 80% 이상이 대학을 가는 나라다. 미국을 뛰어넘은 세계최고의 대학진학률이다. 5%의 젊은이가, 2-30%의 젊은이가 대학을 가던 시대와는 사정이 다를 수밖에 없다. 과거의 대학생은 이미 인텔리로 취급받았고, 예비 엘리트집단으로 인정되었다. 사회에서 대우받는 삶이 보장된 이들은 사회에 자신이 공헌할 수 있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할 여유도 있었다. 좀 더 넓은 문맥에서 바라본다면,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던 ‘역사적 공산주의’ 체제가 아직 건재했다. 노동현장으로 투신한 선배 대학생들의 실존적 결단들을 ‘유물론적으로’ 환원할 생각은 없지만, 그들이 그런 환경에서 태어난 이들이라는 점은 사실이었다.


오늘날의 대학생의 처지는 그와는 사뭇 다르다. 대학생이 된다는 것은 박권일의 표현대로 평균적 사회구성원임을 인준받기 위한 하나의 절차일 뿐이다. 평균적인 대학생들은 입학과 동시에 ‘취업전쟁’에 뛰어든다. 부모가 등록금을 전액부담할 수 없는 학생들은 제 이름으로 빚을 지거나 그것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88만원 세대’론이란 것이 유행이 되었다. 한국 사회의 계층불평등이 세대 문제로 전이되고 있다는 주장을 담은 담론이었다. 원래부터 ‘88만원’을 벌었던 젊은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적응하며 살아왔는데도 ‘88만원’을 벌게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진 젊은이들을 위한 담론이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이 던지는 질문은 사실 “한국 자본주의가 스스로의 체제를 재생산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한국의 중산층은 부동산 가격의 지속적인 상승을 통해 자산을 축적하면서, 그렇게 해서 훼손된 기업의 경쟁력을 신규 노동시장에 진입한 이들의 임금을 낮추면서 보충해왔다. ‘집값’은 높이고 ‘사람값’은 낮추는 체제를 운용해온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 체제를 지지해왔던 그들 중산층의 자녀조차 자신의 월급으론 독립을 꿈꾸지 못하게 된 ‘멋진 신세계’다. 청년세대는 한국 자본주의의 모순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특권을 가진 자로서 사회에 기여하고자 했던 선배 세대와는 달리, 나 자신의 문제가 바로 사회의 문제임을 인지해야 할 세대가 되었다.


하지만 이 세대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기란 너무 어렵다. 냉전 이후의 자본주의 체제는 사회주의권과 경쟁하던 그때 그 시절의 자본주의와는 너무나도 다르다. 자본주의 국가는 인민들의 불만을 수렴하기를 거부한다.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시장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주체로 인지하는 동시에 상품으로 대상화하여 시장에 내어놓아 그 가치를 평가받아야 한다. ‘자기계발’ 담론의 유행은 이런 조건에 대한 적응일 뿐이다. 자기계발하기에도 바쁜 세상에서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 자체로 ‘잉여’스러운 일로 여겨진다.    


좌파에게 다른 수식어가 필요한가


“진보란 신나고 멋있고 재미있고 부러 따라하고 싶은, 그런 것이어야만 한다. 다시 써내려가야만 한다 (...) 당위를 빼면 한줌 농담거리도 남지 않는 그들의 글에서 진보 고해성사를 한 뒤 다시 빤한 삶의 굴레로 기어 들어가는 독자들을 위해 글 쓰지 않는다. 진짜 멋진 게 뭔지, 두고 봐라.” (허지웅, “간지좌파”에서)


한 명의 젊은이가 실존적 결단을 내려 ‘잉여’의 도(道)를 걸어가기로 작정했다 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왕년의 활동가들 중 가장 윤리적인 사람들만 남아 있는 좌파정당은 젊은이들의 문화적 감수성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현실은 좌파들에게 무언가 다른 전략을 요청한다. 좌파라는 단어 앞에 몇몇 수식어를 붙이는 전략들이 ‘유행’하게 된 것은 이런 사정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한 대학생은 좀 더 구체적으로 ‘패션좌파’라는 것을 주장했다. 좌파들이 좀 더 간지나게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런 전략은 좀 ‘구좌파’적이다. 이를테면 패셔너블한 젊은이들이 좌파정당에 들어오고, 정치 얘기도 하면서 패션 얘기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 점에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그런데 좌파들이 사람들에게 다가서기 위해 ‘패션감각’이란 걸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건 대의를 위해 개인의 감수성을 뜯어 고쳐야 한다는 얘기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견해가 불가능하지는 않을 테지만, 좀 시대착오적으로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패션좌파’론은 그런 점에선 하나의 아이러니다.


최태섭은 이렇게 논평한다. “패션과 간지가 유혹의 언어인 것은 맞지만, 그것이 단지 옷 잘입고 간지나는 좌파들 그 자신을 제외하고 좌파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이미 자본의 힘으로부터 탈주를 꿈꿨던 아방가르드미학이 우리에게 준 교훈은 자본 그 자체가 최고의 아방가르드라는 것이다. 좌파가 다시금 회생하기 위해서는 단지 최신유행을 뒤따르는 것이 아니라, 유행 그 자체를 만들어 내는, 더 정확하게는 유행이라는 메커니즘을 관통하는 전략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좌파가 이 유혹의 문제, 그리고 정치의 문제에 있어서 지나친 무관심을 보여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실패했거나, 자본에 의해 도용당했거나, 사람들에게 외면당했던 미학적 실험들의 역사를 무시하고 이런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한 반복과 좌절만을 불러일으킬 공산이 크다. 유혹의 문제는 중요하지만, 좌파의 지평에서 사유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냥 마케팅업체를 찾아가면 될 일이다.“(최태섭, ”좌파의 수식어들 그리고 유혹의 문제“에서)


반면 ‘간지’라는 것은 다른 문맥에서 바라볼 여지도 있다. 이를테면 그것은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의 일상적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지 논리만이 아니라 감각의 재배치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일 수 있다. “무엇에서 간지를 느끼는가?”라는 질문은 매우 본질적이다. 주류의 간지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마케팅 업체를 찾아가야겠지만, 그것과는 다른 간지를 추구하고 인정받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그것 자체가 하나의 투쟁의 영역이 된다. 어쩌면 ‘진보’라는 정체성이 요구하는 것은 언제나 그런 종류의 투쟁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의식 과잉’에서 벗어나기


그러나 그런 투쟁이 일어나는 공간에 대한 성찰은 중요하다. 사회주의권이 몰락한 후, 다른 세상을 꿈꾸던 이들이 모이는 ‘공간’이 사라진 후, 오늘날의 젊은이들의 투쟁은 고립된 공간에서 펼쳐진다. 우리는 그곳에서 투쟁할 수밖에 없지만 그곳이 위험한 곳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간지좌파론이 생겨난 조건에 대한 최태섭의 다음과 같은 논평은 의미심장하다.


“이 좌표. 즉 역사 속에서, 오늘의 정세 속에서, 이념과 사회의 스펙트럼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에 대한 감각의 상실은, 주체를 다시금 하나의 고립된 단자로 그러나 다분히 기만적인 단자로 되돌아가게 한다.(이것이 기만인 이유는 그 고립과 완결성이 사실은 다분히 구성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골방에 갇힌 '젊은 좌파'들의 문제는 두 가지 차원에서 벌어진다. 첫째로는 오늘날 좌파를 참칭하는 이들이 그것을 역사적 맥락이 아니라 취향의 차원에서 위치시키고 있다는(그리고 객관적으로도 그럴 수 밖에 없다는)것이고, 둘째로 결국 (노동자)대중에서 그 힘의 원천을 찾는 좌파들이 다름아닌 대중으로부터 냉대와 냉소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홀로 고립된 ‘진보’의 정체성이 대면하는 것은 거대한 냉소주의다. 이 냉소주의는 그것 자체로 하나의 인식체계인데, 그것에 대해 엄기호는 이렇게 설명한다.


“대학생이 인간과 사회의 변화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지난 학기에 강의를 하던 한 대학에서 학생들과 함께 본 <브이 포 벤데타>라는 영화에 대한 토론에서였다. 이 영화에서 국가는 미디어를 완전히 장악하고 진실을 왜곡하며 국민을 바보로 만들어 통치하려고 한다. 이런 통치는 언제나 완벽할 수 없으며 진실은 누군가를 통해서 밝혀지며 우매한 것처럼 보이는 대중은 진실에 감응되고 행동에 나서게 된다. 그런데 의외로 이 영화의 메시지에 대해 학생들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한 학생이 만든 엔딩 크레디트 이후의 시나리오였다. 독재의 붕괴 이후 민주정부가 곧 들어서지만 정책적 무능으로 사회는 큰 혼란에 빠진다. 때맞춰 미디어에서는 독재를 종식시키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브이’라는 영웅의 사생활을 캐고 온갖 스캔들을 경쟁적으로 보도한다. 혼란을 틈타 종적을 감춘 것처럼 보였던 보수주의자들이 다시 세력을 규합하고 대중 사이에서 정치적 선동을 일삼는다. 결국 사회는 제자리로 돌아간다.
 
이 학생의 주장에서 만나게 된 것은 탈정치화가 아니라 정치에 대한 지나친 계몽이다. 이 세대는 정치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서 정치에 냉소적인 것이 문제였다. 이들은 정치에 대해 아무런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변화라는 것이 어떤 실체적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것에 냉소했다. 진보니 보수니 싸우는 사람들은 자신이 대단히 큰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놈이 그놈인 상황이며, 어느 놈이 되더라도 내 삶이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통찰이었다. 독일의 문제적 철학자 슬로터다이크의 논법을 따르자면 이들은 정치적으로 미각성한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정치에 대해 계몽된 존재인 셈이다. 이들은 정치를 너무 잘 알아서 정치에 무감각해졌고 모든 가치에 대해 냉소적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냉소주의만이 현실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본 장비(1)가 되는 셈이다. 냉소적 주체들은 절대적 가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새로운 가치가 단명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바로 도덕의 냉소주의가 만들어내는 속물의 정치이다. 가치의 종식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속물이 아닌가? 바로 여기에 이명박이 집권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이명박을 지지한 20대 대부분은 그가 새로운 가치를 제시해서 지지한 것이 아님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가치를 이야기하면 오히려 냉소한다. 
 
실로 우리는 속물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지금 미디어에서 성공하고 있는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은 대부분 우리가 얼마나 속물인가를 과장해 까발리는 내용이다. 얼마 전까지 선풍적 인기를 끌어모은 tvN의 <재밌는 TV 롤러코스터>를 생각해보자. 남성의 전형으로 나오는 정형돈은 쉽게 말하면 찌질이 혹은 진상이다. 머리에 든 것이라고는 예쁜 여자와 축구뿐이며 나머지에 대해서는 귀찮아할 뿐이고 제대로 일처리를 하는 것 하나 없다. 이에 반해 여성의 전형으로 제시된 정가은은 생각하는 것이라곤 오로지 멍청한 남자친구를 여우 짓을 통해 후려 처먹는 것이나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명품백’밖에 없는 된장녀다. <개그콘서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남성인권보장위원회’나 리얼리티쇼를 표방하는 대부분의 예능 프로그램은 이 연장선상에 있다. 우리 모두는 속물인 것이다.
 
그러나 이 속물주의의 이면에서 발견하는 것은 20대들의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생존 노력이다. 역설적으로 속물이 되어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다.“(엄기호, ”20대는 왜 투표하지 않게 되었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8호에서)


이 냉소주의에 대면하지만 그에 온전히 적응할 수 없는 고립된 개인은 냉소주의자와 자신의 ‘다름’을 하나의 특권으로 인지할 수도 있는 위험에 빠진다. 진보가 ‘자의식의 정치’가 되어윤리적인 재단을 일삼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에 내가 블로그에 올린 글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내가 남들보다 조금 다른 것들을 읽고, 조금 다른 것들을 생각하고, 조금 다른 것들을 쓴다는 이유로 가지게 되는 자의식은 처연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사회로부터 받은 소외감을 같은 질량의 우월의식으로 바꾸어놓기 때문이다. 그가 그런 우월의식을 지니게 될수록 소외감은 더 커지고 그렇게 생긴 소외감은 다시 우월의식으로 변환된다. 한 번 이 ‘공굴리기’의 방정식에 탑승하게 되면 사태가 악화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들은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킬힐을 신고 완벽한 화장을 마친 채 출근하는 여성을 경멸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녀들이 그들보다 훨씬 긴박한 삶을 살고 있고, 역시 실존적인 고민을 하고 있으며, 종종 어떤 종류의 우울증에 시달린다는 사실은 전혀 보지 못한다. 그렇게 그들은 ‘다르다’는 자의식으로 인해 자신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세상에서 스스로를 격리한다.”


하지만 ‘진보’를 ‘진보’이도록 유지하는 사회를 향한 비평적 시선은, 사회와 자신이 ‘같은지’ 혹은 ‘다른지’를 단정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회와 내가 전혀 같은 점이 없다면 나는 사회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반면 사회의 평균적인 구성원들과 내가 온전히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비평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관여하고 동참하는 어떤 욕망에 대한 거리두기에서 비평은 시작될 수 있다. 우리는 냉소주의와 ‘다르기’ 때문에 ‘진보’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냉소주의적 진리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그것을 보충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의식의 정치’는 그 차원을 도외시한다.


취향의 정치에서 시작하기, 그것을 벗어나기


오늘날 ‘고립된 단자’가 된 주체가 자신을 드러내는 공간은 ‘온라인’이다. 그런 점에서 2008년 촛불시위를 적절하게 분석해 내지 못한 비평적 언어들의 무능을 고려하더라도, ‘온라인 주체’의 형성과 그 한계에 대한 인식이 절실하다. 박가분은 매우 정확하게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블로그나 트위터 그리고 싸이월드는, 90년대의 그것과 매우 다른 방식으로, 오늘날 사이버 공간에서 ‘개인성’ 혹은 ‘개성’을 생산해내는 주요한 통로를 구성한다. (...) 이에 따라 인터넷 상의 블로그 서비스 역시 특정한 개인적 세계관에 하나의 사회적 인터페이스를 제공해주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블로그에 게시되는 BGM, 포토로그, 짤방, 프로필 등은 무엇보다 개인의 존엄, 인격, 품위, 취향, 분위기를 구성한다. 그리고 그의 정치적 신념 역시 블로거 개인의 개인다움을 구성하는 목록들 가운데서만 비로소 사회적으로 ‘전달가능한’ 것이 된다. 그러한 정치성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내면적 풍경의 구성요소로 환원됨으로써만 비로소 사회적으로 소통 가능한 것이 된다.

인터넷을 통해 표출되는 20대의 정치적 주체성은, 따라서 결코 개인의 인격과 취향에 우선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러한 내면적인 인격과 취향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한계를 노정한다. 이러한 일례는, 인터넷에서 확산되어 있는 ‘취존중(취향에의 존중)’이라는 유행어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용어는 특히나 정치적 논쟁에서 자주 노출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오늘날 20대가 견지하는 반MB/반한나라당 포지션이 과거 2000년 초반의 반한나라당 전선과 전혀 상이한 역사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박가분, ”신자유주의 시대, 20대의 정치적 주체성“)


한국의 소통공간, 온라인 공간은 취향으로 분절되어 있다. ‘자의식의 정치’가 취향을 근원으로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정치적 관점의 차이는 취향의 차이와 비슷한 문맥에서 이해된다. 그렇다면 ‘토론’은 있을 수 없다. 다만 그것처럼 보이는 몸짓들이 있을 뿐이다. 남자들에게 있어, DVD, 축구, 야구, 스타리그, 여자들에게 있어, 성형, 패션, 요리 등의 큰 덩어리로 분절되고 그 주변에 수많은 군소의 분절덩어리들이 있는 이 공간에서 우리는 ‘소통’이란 것을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조건이다. 하지만 ‘취향 존중’이라는 표어를 넘어 정치를 삶에 대한 이성적 고찰을 공동체에 투영하는 문제로, 윤리적 문제로 전환시키기 위한 작업이 요구된다. 당장의 정치적 성과에 대한 집착을 넘어, 온라인 주체를 정교하게 판독하고 비평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정해찬

2010.04.30 08:51:49
*.199.134.229

진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일종의 '의식화'를 필요로 하는게 아닌가 합니다.

하뉴녕

2010.04.30 08:54:48
*.49.65.16

무슨 '의식화'요?

하뉴녕

2010.04.30 09:33:54
*.49.65.16

트윗에서 정해찬 님과 이 문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허락을 구한 후 이 덧글란에 공유한다.



정해찬(jeonghaechan) @hanyhy 아 아까 당수님 블로그 글을 읽다가 느끼는건데 의식화가 없는 진보가 가능하다고 보시나요? 글을 읽다보니 그런 진보도 가능할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뉴녕(hanyhy) @jeonghaechan 흠 리플에 제가 리리플을 달았는데 '의식화'가 가능하려면 모종의 세계관이 있어야 하고 그 세계관이 자본주의 사회를 잘 설명한다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제 글은 그런 것들이 깨진 세상에서 진보가 무엇일까를 묻는 것이었죠...

하뉴녕(hanyhy) @jeonghaechan 젊은이들이 취업에 목맬 수밖에 없는 현실을 '설명'하지 않고 너희들은 스펙경쟁에서 벗어나 연대를 추구해야 한다, 라고 '의식화'를 시킨다면, 그런 의식화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우습게 보이고 무력한 것인가...라는 느낌이랄까요.


정해찬(jeonghaechan) @hanyhy 제가 아는 말중에 적절한 단어가 없어서 의식화라는 말을 썼는데 의미가 달라졌네요. 제 말에서 의식화는 '어떤 무의식적인 사고의 타성이 깨지는 계기'' 정도의 의미였어요. 각성이란 표현도 애매하고 뭐 회의?? 그 정도


하뉴녕(hanyhy) 돈오점수 ^^


정해찬(jeonghaechan) @hanyhy ㅋㅋㅋㅋ 돈오점수. 근데 그런거 같아요. 도식적으로 말해서 87년 이전에는 대학 선배와 책이 그런 역할을 했지 않았나 싶어요. 자신이 기존에 믿어왔던 세계관이 대학문턱 들어서면서 그 두가지에 의해서 깨지는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죠.

정해찬(jeonghaechan) @hanyhy 지금은 계몽까지의 의식화는 아니고 맞지도 않지만 적어도 그 위치까지, 적어도 한번은 자신이 믿어온 세계관을 회의해볼만한 계기를 마련 할 만한 매개가 없어졌다는 인상입니다.


하뉴녕(hanyhy) @jeonghaechan 예전에는 주입식 반공교육을 받다가 의식화를 통해 그것이 깨지는 경험을 했지요. 말하자면 세계관vs세계관이었던 건데, 지금은 그게 아니니까요. 경쟁에 참여하는 삶의 태도라는 것은 의식의 문제가 아니죠. 오히려 인식의 문제랄까.

하뉴녕(hanyhy) @jeonghaechan '냉소주의적 인식'이란 건 오류가 아니라 일종의 진리죠. 실제로 정치는 힘을 발휘하기 어렵고, 남는건 개인이니까. '네가 열심히 해도 안 바뀔 수가 많아.'/'알아. 하지만 정치한다고 뭐가 바뀌나?'의 무한반복.

하뉴녕(hanyhy) @jeonghaechan 그래서 냉소주의를 욕할 것이 아니라 그것의 진리치를 인정하고 보강해가는 것이 이 시대의 정치평론의 방식이 아닐까, 라고 글 중간에서 질문을 던졌던 것이죠....


정해찬(jeonghaechan) @hanyhy 확실히 자본화는 의식화의 과정이 아니라 체화의 과정이니까 그렇기는 한데...그래도 일정 지점에서 한번쯤 성찰을 불러 올 매개가 없다는 점은 분명하지 않을까요?

아물

2010.04.30 14:11:18
*.156.32.222

글 잘 읽었습니다. 적절하게 파악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글이 나아가는 와중에 등장하는 주요한 주체인,
자기계발하는 냉소주의자들과 이를테면 자폐적인 진보주의자들과의 사이에,
알바하는 10대들 내지는 이들이 넘어온 20대 진정 88만원 세대가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드네요. 오히려, 앞으로 긴 안목으로 볼 때, 이들이야말로 어떤 운동의 새로운 주체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뉴녕

2010.04.30 23:38:43
*.235.190.69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부분은 또 다른 범주라는 생각은 드는데, 이를테면 지금의 십대가 이십대와 다르다는 얘기는 부적절하다고 생각하고, 계층별 또는 학력별 의식의 차이(내지는 간극)에 대해선 따로 꼼꼼히 짚어 볼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정해찬

2010.04.30 20:18:18
*.199.134.229

이 글을 읽고 들었던 생각을 정리해서 트랙백에 붙여 봤어요.

하뉴녕

2010.04.30 23:54:40
*.71.226.237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내용이구요. 예전의 의식화와 요즈음의 의식화(?)의 차이에 대해서 고민하는 원고들이 저도 공저자로 참여한 <리영희 프리즘>에 몇 꼭지 실렸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2010.05.02 18:41:34
*.144.100.86

뭐 지만원이 피타고라스 정리를 능가하는 공식을 만든 게 생각나는군요

그러나, 현실은

2010.05.02 19:12:19
*.144.100.86

desac의 자랑질이 지만원처럼 웃기긴 하지만

"생활차원의 접근, 감성적 접근, 문화적 접근이 끊임없이 소위 '진보'라는 집단 내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사라지는 것도 결국은 그들이 과학에 기반한 분석, 제도의 구성과 작동에 대한 총체적 이해가 없다는 뜻" ----> 제도의 중요성을 설파한 것은 충분히 지적할만한 사항이지요. 그런데 20대 역시 경쟁에 체화된 "신자유주의"에서 진보적 제도를 어떻게 구성해야 하나?

하뉴녕

2010.05.02 22:51:33
*.49.65.16

포럼 주제가 '감수성'이었어요.

Desac

2010.05.08 07:49:00
*.23.212.123

진보적 제도 이야기가 아니라 제도가 어떻게 개인의 '감수성'을 좌지우지하냐는 이야기거든요?

60년대 기세좋게 등장한 구조기능주의의 아류인 System 이론말고는 지적 근원도 없는 꼴통하고 비교는 좀 웃기다. ㅋㅋㅋ 그 양반 그래도 당시엔 공부 좀 했던 양반인데 이해해줄 보수세력이 없었던 시대적 불행이랄까... 하긴 뭐 지금 진보도 머리 딸리기는 마찬가지.

블랜디드

2010.05.03 23:21:55
*.192.166.113

와, desca님 대단하네요. 덕분에 저도 엄청난 반열에 올라서네요. 디테일은 좀 다르지만 저도 desac님에게 뒤질 정도의 인생은 안 살았으니까요. 저도 비슷한 의미에서 맑스 여러번 읽었구요, 전공까지는 아니지만 논문 쓰다보니 경영학 논문들도 좀 보고 또 주변에 경영학 박사 친구들도 있고 해서 경영학도 좀 알아요. 근데 저 같은 한국사람 인간들 되게 많아요. 근데 뭐 크게 자랑할 만한 일이라고 느껴지진 않네요.

전 윤형씨 글이 좋았습니다. 이번 글도 그렇고 이전 글들 중에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놀라고 많이 배우고 갑니다. 전문가, 연구자들이란 맑스를 10번을 읽어도 실천과 활동, 운동의 맥락 속에서 고민하는 이들이 읽는 맑스와 다를 수밖에 없죠. 독자도 다르고 논해지는 맥락도 다릅니다. 아무리 훌륭한 글이라도 이론적 맥락이 다르면 저널에 실릴 수 없죠. 윤형씨 글은 아카데믹한 저널에 실릴수 없습니다. 당연하죠. 그럴라고 쓴게 아닌걸요.

같은 맥락에서 윤형씨(와 기타 치열한 글쓰기를 하는 프로/준프로급 블로거들)의 글들은 어떤 측면에서 훨씬 진지하고 고민도 깊고, 날카롭고 더욱 논리적이기도 합니다. desac이나 저같은 저널 논문 글쓰기를 업삼아서 하는 인간들은 전혀 다른 글쓰기를 하죠. 따라서 두 영역은 서로 존중하고 상화보완되어야 할 관계입니다. 이 관계가 좀 대등해지기 시작한 것은 (제 생각입니다)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간단히 뉴미디어의 등장 이후라 하죠 뭐. 블로그들을 진지하게 돌아보기 시작하면서 알량하게나마 가지고 있던 사회과학 분야의 가방끈에 대한 자부심은 적어도 대중적 글쓰기, 정치적 글쓰기를 하거나 그런 글을 읽는 순간에는 미련없이 버리겠다 생각하게 되었죠. 강호의 고수들이 바닥에서부터 때론 개싸움 때론 선문답을 넘나들며 피터지게 경쟁하는 바닥에, 어디 별 상관도 없는 가방끈을 마패랍시고 와서 행패질입니까.

미국 학계의 장점(이자 단점)은 전문가 집단으로서의 학계와 정치적 글쓰기를 하는 언론,운동,활동가들의 업계가 뚜렷하게 나눠져 있다는 거죠. 일부 교수들이 교수 명함만으로 유력일간지에 글 같지도 않은 글들을 칼럼으로 버젓이 실고 있는 한국과는 다르게요. 장단이 있다고 봅니다만, 여튼 desac씨는 미국에서 공부하신다면서 뭔가 잘 못 배우셨네요. 그쪽에서 가르쳐준 학자로서의 권위는 이런 거이 아닐텐데.

여튼, 윤형씨 훌륭합니다. 모든 글에 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늘 많이 배우고 가요. 특히 글쓰기 자체에 대해 고민을 하는 지점들을 볼 때마다 나 역시 어떤 글을 써야 할지, 나도 이처럼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끝으로 '제도'에 대한 지적에 대하여. '제도'에 대한 지적만큼 비'과학'적인 지적도 없네요. 제도를 봐야 한다고 지적하시면, 그 답은 네 그렇습니다. 제도도 봐야죠. 밖에 안되니까요. 제도를 다루지 않는 글(적어도 그 범위에 제도적 층위를 담고 있지 않는 글)에 제도도 봐야죠 하는 지적은 제가 학부생 가르칠 때 그런 비판은 별로 생산적이지 않다고 지적해주는 그런 수준이에요. '제도'란 개념 자체도 그 자체로는 '과학적'이지 않은 개념이고요 (desac님 과학 되게 좋아하시는 것 같으니까).

하뉴녕

2010.05.04 10:22:17
*.70.223.136

지적하신 대로 무슨 '제도'를 추구해야 하는지는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한편의 글에 모든 문제를 다 담을 수는 없지요. 어떤 글이 무슨 문제의식과 만나고 있는지를 파악하지 못한 채 코멘트를 하면 "그런 비판은 별로 생산적이지 않다고 지적해주"어야 겠지요. 수업 들어보면 지적을 해주는 교수님이 있고 (이 경우엔 지적이 대개 좀 짜증스럽게 나오죠. 사실 저런 비평은 '토론 수업의 적'이라...) 냅두는 교수님이 있는데 물론 저는 전자를 더 좋아했지요.


그런 문제를 떠나 글 내용으로 돌아가면...사실 어떤 '제도'를 들이민다 하더라도 개인의 입장에선 그 제도로 나아가자고 한국 사회에 요구하거나 활동하는 것은 (게임이론의 관점에서) '손해'가 됩니다. 언제나 자기 앞가림에 올인하는 쪽이 '이득'이지요. 그런 상황에서 '진보'를 고민하고 추구하는 감수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정당화되는 것이며, 이 시대의 진보를 추구하는 감수성에 어떤 위험은 없는가, 라는 것이 이 글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토론회를 해보면 동의를 안 하시는 분도 있지만 현실사회주의 체제의 붕괴 이후에 자본주의 사회 내부의 제도 변혁을 주장하는 것이 훨씬 어려워졌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자본주의 국가들이 사회주의 혁명을 두려워하여 인민을 직접 챙기고 복지 시스템을 구현하던 그 시절이 아니니까요. 북구식 사민주의도 좋고 독일식 조합주의도 좋은데 이런 체제들이 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존속하던 시절에 겁먹은 우파들의 '양보'를 통해 얻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면, 한국에서는 어떤 논리와 서사를 통해 사람들에게 변혁을 설득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너무나 절실하고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삼성문제 논쟁이나 무상급식 논쟁, 세대론 논쟁 등 구체적인 논쟁에서 그런 문제의식이 구현된 갑론을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변변찮은 재주로 자꾸 글을 쓰는 이유도 그런 생각때문이죠.

양웬리

2010.05.04 00:16:59
*.196.53.9

이글을 보니 열패당은 뭔가 거대한 음모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라는 느낌이 드는군요...

하뉴녕

2010.05.04 11:22:42
*.234.197.175

......저는 아무런 생각이 없는데 큼;;;;;;

서민

2010.05.04 11:28:16
*.102.200.1

많은 걸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블랜디드

2010.05.04 13:30:25
*.192.166.113

계급 정체성이 역사를 통해서 단 한번도 보편적 이익의 정체성을 획득한 경험이 없는 한국사회에서 별안간 혹은 장기적으로라도 그것이 가능하게 되리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죠. 노동세력이 든든한 기반을 제공해야 할 진보정당(민노당이든 진보신당이든)들의 존립 성패는 궁극적으로 어떻게 새로운 정체성을 대중들에게 어필하고 제공하는가에 달려 있겠구요.

선배들로부터 대물림되던 의식화 과정은 이제 촛불집회와 같은 집단적 운동에의 경험 등으로 대치되는 것 같은데, 문제는 그것이 '진보'의 정체성으로 더 이상 귀결되지 않는다는 점이고요. 적군이 저질이면 이쪽도 덩달아 저질을 까대는 수준 이상의 집단적 행위가 나오지 않는다고나 할까요. 세대론이 많이 까이고 있지만, 저는 어떤 식으로든 의미가 있지 않을까 주목하고 있는 편입니다.

제도와 게임이론 이야기를 하셨으니, 한 말씀 드리면, 저는 한국 사회가 전형적인 multiple equilibrium 상태에 잡혀있다고 봅니다. 다수의 약자가 피해를 보는 현 상태가 A이고 (예를 들면, 모두가 돈을 쳐들여 사교육을 하는 상태) 다수가 그런 피해를 보지 않고도 만족이 유지되는 상태가 B라면(모두가 사교육을 안해도 되는 상태), 둘 다 평형상태이기 때문에 이대로 놔두면 내생적으로 A에서 B상태로 이동할 가능성은 없죠. 가능한 대안은 외부의 강력한 중재자가 상당한 강제성을 가지고 '자 우리 다같이 B로 한번에 이동하자, 요이땅' 하는 경우 뿐입니다. 민주사회에서 그게 가능하려면 첫째, 구성원간 신뢰가 충분히 있고, 이대로 A를 고수하다간 우리 다 죽는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하고, 끝으로 그것이 정치세력화되고 정책적으로 반영되어 상당한 강제성있게 실행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한국사회에서 교육문제로만 치면, 두번째는 그나마 표면적으로나마 상당히 조성되어 있는 편이라 봅니다만, 첫번째와 세번째 조건이 거의 시망입니다. 비관적 상황이지만 이런 관점에서 진보가 아젠다와 전략, 정체성 홍보를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진보에게는 여전히 역할과 의미가 있다고도 봅니다. 마무리가 용두사미군요.

하뉴녕

2010.05.04 14:47:18
*.49.65.16

예 그런 용어를 써서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현실인식은 동감합니다. 마무리가 용두사미인 것에도 동참...-0-;; 결국 이게 어떤 천재전략가가 탁월한 원 포인트를 짚고 우리가 거기로 출격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니까요. 토론회에서도 사람들은 진보주의자란 사람들이 완결된 대안의 프로세스를 제공해 주길 바라요. 원클릭하면 자신에게 그게 제공되고 자신은 별다른 손해보지 않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기를 바라죠. 그럴 때 저는 거기에 대고 "저 혼자서 말할 수 있는 대안이란 건 없습니다..."라고 답변할 수밖에 없지요. 더군다나 저는 특정한 활동에 올인하는 활동가도 아니기 때문에...;;;

하뉴녕

2010.05.06 14:56:27
*.49.65.16

죄송한데 진보가 대학생도 아는 사회조사방법론을 몰라서 망했다고 생각하신다면, (뭐 진보정당 당직자들이 모두 이걸 잘 안다는건 아닙니다만, 개중에 아는 사람도 있죠. 이분들의 의견이 타당할 때도 있고 타당하지 않을 때도 있고요.) 당장 님이 한국에 와서 진보정당 차리세요. 금방 국회의원 되시겠네요.


그게 아니고 좀 생산적인 얘기를 하시려고 했다면 앞으로는 질문을 좀 더 명료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님의 강의를 듣다가 질문을 듣는 것과 제 포스트에다 대고 덧글로 질문을 던지는 건 전혀 다른 맥락이지요. 님의 포스트를 읽는 것과도 전혀 다른 맥락이겠구요. 저는 대가의 머리속을 파악할 능력이 없습니다. 앞으로 다른 블로그에 덧글을 달 때에는 무지한 중생들을 고려해서 처신해주시기 바랍니다.

데싹 너 뭐니?

2010.05.06 15:16:44
*.145.56.8

데싹아 왜 바닥이 보이게 그렇게 열폭하니? 주인장 글 어디가 잘난체 하는 걸로 보였단 거니? 혼자 열내기 전에 너 주위의 아무에게나 한번 읽혀보고 말을 하렴. 너가 싸논 댓글이 무척이나 재수없고 싸가지 없는 열폭의 흔적임은 보는 누구나가 다 공감할 수 있겠지만, 주인장 글을 너 글처럼 이해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에 내 돈 100원을 건다. 대체 엄한 곳에 와서 왜 이러는 거니? 뭐 잘 못먹었니?

솔직히 너 하는 짓 보면 (잘봐줘도) 386형들이 운동권에 투신하던 당시, 혼자 학교 도서관에서 책이나 파고 있던 범생이가 아닌가 싶다. 그때 주변 선후배들 사이에서 재수없는 인간으로 쿠사리 존나 먹었던 탓일까? 알수없는 적개심을 가슴 가득 꽁하니 품고 있다가, 이렇게 좋은 시절을 만나 엄한 주인장 한테로 찾아와 진보연 하는 이 개새퀴들아~를 외치는 아주 뜬금없는 니 모습.

나뿐만 아니라 니 글 보는 태반이 다 그렇게 느끼고 있을 거다. 아마 내가 너처럼 그따위로 글을 싸질렀다면, 제 정신 들고서는 쪽팔려서 다시 여기를 찾을 엄두를 못냈을 텐데... 넌 그런 염치가 없는 것을 보니 확실히 미쿡 유학파가 맞긴 맞나 보다. 미쿡에서 잔뜩 요상한 것만 배워와서는 싸가지 밥맛인 자신의 모습을 어메리칸 스타일로 포장해대는 희안한 군상들. 세수대야에 잠시 대가리 쳐박았다가 거울에 비친 니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기를 바란다.


추신:

너가 쓴 글을 다시 찬찬히 뜯어 봐도, 열폭과 잘난체 빼면 별 신선한 문제제기도 없는 것 같더라.

제도의 힘? 개인의 행위로 드러나는 제도의 힘을 분석하는 것에서 정치적 냉소주의와 속물주의를 말해야 한다? 뭐 말은 그럴 듯 한데, 솔까 너가 주인장 글 까는 식으로 삐딱하게 보자면 어차피 너가 하는 소리도 과학의 외피를 뒤집어 쓴 채 추상적인 수준에서 놀고 있는 것은 매한가진 것 같구만. 안그러냐?

게다가 넌 나는 제도를 중요하게 봐요라고 한줄 고백을 한 것 뿐, 어디에도 너 말을 입증할 구체적인 논증을 한 것도 없는데? 긴 말 필요없고 너가 말한 그 제도 우위의 관점에서 지금 주인장이 하고 있는 고민을 다시 재서술을 해보렴. 그래서 니 문제제기가 주인장이 놓치고 있는 지점을 한차원 더 높은 수준에서 훌륭하게 극복하고 있음을 글로써 보여준다면, 너한테 비아냥댄 것은 내 기꺼이 사과를 하겠다만,

그런 주제도 안되면서 여기서 잘난체하며 까불댄 거면 걍 주인장께 조용히 사과하고 짜지길 바란다...

하뉴녕

2010.05.06 19:52:10
*.49.65.16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냉소주의적 주체를 만들어내는 제도에 대해서도 좀 더 얘기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경영학에서 그런 거 분석하는 틀이 좀 있어요. 이런거 저런거 블라블라블라..." 하셨으면 "아 그런 것도 있나요? 제가 잘 몰라서. 신기하다...+_+"로 갔겠지요. 뭐 그런 말에다 대고 제가 "경영학을 읽느니 맑스를 읽으세요 ㅉㅉㅉ" 비아냥 대진 않았겠죠.


근데 애초에 이분이 하신 말씀이란게 1) 결국 잘하자는 얘기네요. 라는 비아냥과 2) 결국 잘하자는 얘기를 그럴듯하게 하는건 경영학이죠 하하핳. 3) 그러니 윤형님도 경영학을 공부하시는게 좋을듯... 뭐 이런 이중삼중의 비아냥이었는데...그래서 나중에 이분이 나는 경영학도 깐 건데 얘들 왜 난리야...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제 입장에선 이 페이퍼란게, 젊은 친구들에게 '진보'에 관심을 가지라고 할 수 있는 방법은 뭘까, 진보에 관심을 가진다는 젊은이들이 자뻑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뭐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쓰여진 거라, 제가 존트 똑똑해서 글을 더 샤프하게 썼다면 나쁠 건 없겠지만, 그래봤자 글을 보는 이의 공감을 더 사진 못했을 거에요. 그래서 그 방면은 관심사항이 아니었던거죠. 더구나 처음엔 이 분이 미국에 계시단 것도 몰랐고, 첨부터 미국에 있다고 했으면 뭐 이 글에서 제가 뭘 고민하고 있는지가 안 보이겠구나, 그냥 텍스트 문맥에서만 보겠구나, 이런 걸 이해했을 텐데, 그것도 아니니까 이건 뭔 놈의 비아냥일까, 라고 생각했던 거구요.


DESAC님이 보실지는 모르겠지만 경영학이 실제로 어떤 학문이란 것과 별개로 한국 대학에서 경영학이 하는 역할이란 것에 대한 회의는 저 혼자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김예슬의 전공이 경영학이었다는 건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뭐 그런 저런 것들에다 최근 제가 덧글러들에게 느낀 짜증까지 겹쳐, 본인이 잘 읽지도 않은 맑스 드립을 쳤던 겁니다. 저는 90년대 학번 운동권들처럼 맑스를 많이 읽지 않았어요. 학교다닐 때 선배들이 맑스-레닌 읽으라고 하면 '(철학도 입장에서) 뭐 저는 아직 헤겔도 안 읽었는데 무슨 맑스를...'이러면서 피해다녔어요. 뭐랄까, 진보정당원이라면 모름지기 이런저런거 읽어야지...라고 '교과서'를 단일화(?)하려는 그 시도가 좀 마음에 안 들었거든요. 요즘 들어서 그런 것과 별개로 그들을 읽는게 필요하다고 느끼는 중입니다.


DESAC님이 제 신경질 이후에도 "왜 갑자기 신경질이에요? 기분 나쁘네요. 제가 하려던 얘기는, 냉소주의적 주체를 만들어내는 제도에 대해서도 좀 더 얘기해볼 수 있지 않을까, 였어요. 경영학에서 그런 거 분석하는 틀이 좀 있어요. 이런거 저런거 블라블라블라..."라고 하셨으면 "어익후 죄송합니다. 제가 요새 날이 서 있어서...그런 건 뭔가요? 신기하네요.+_+"했을 것 같습니다. 뭐 DESAC님이 성인군자도 아니고 원래 제 글을 보셨던 분 같지도 않으니, 꼭 저렇게 반응했어야 했다는 건 아니에요. 공부 많이 하시고 학생 가르치는 분 입장에서 충고를 들으니까 본인도 마음이 상하셨겠죠. 그 다음 전개는 보는 바 대로입니다.


참 인터넷에서 얘기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 덧글을 달기 전에 복기를 한번 더 해봤는데, 여하간 제가 범한 무례에 대해선 DESAC님에게 사과드리겠습니다...


여기까지 하지요...DESAC님이 뭔가를 가르쳐주실 기분이 나진 않을 것 같으니...

데싹 너 뭐니?

2010.05.08 11:27:38
*.145.56.8

ㅋㅋ 너한테 별 기대는 안했지만, 딱 니 수준에서의 대꾸가 나오는 것 보니 확실히 니 유전자 깊숙이에 열폭과 잘난체의 못된 습성이 뿌리깊이 박혀 있다는 것 쯤은 알겠구나. 그게 불치병이라는 것도..ㄲㄲ

너가 주인장의 댓글을 두고 잘난체 운운했다고 열심히 강변하고 있지만, 내 눈에는 너가 애초에 주인장의 글을 잘난체하는 것으로 삐딱하게 보았기에 그따위 싸가지 없는 댓글들이 나왔던 것으로 판단해서 한 소리니, 비아냥을 한번 피해보겠다고 그렇게 본문글 댓글 구분까지 할 것도 없단다.

걍 니 글 자체가 잘난체와 열폭의 소산이었다는 게 내 말의 요지였으니.. 알간? 게다가 넌 그런 행간을 읽어낼 줄도 모르는 것 같으니 니가 한 말은 고스란히 너한테로 먼저 적용되어야 할 듯 싶네..


-> 초등학교 ㄱㄱ해서 읽기부터 배우세요 ^^


그리고 너 과학 좋아한다며? 그럼 쓸데없이 그렇게 변명 늘어놓는 시간에 나같으면 주인장 글(본문+댓글)과 니 글을 디씨나 아니면 사람들 많이 오가는 게시판에 같이 한번 걸어놓고 누가 더 잘난체 하는 걸로 보이나요? 이렇게 질문을 던진 후, 그때 수집한 설문자료 등에 근거해서 좀 설득력있게 주장을 하던가 하겠구만.

ㅋㅋ 근데 넌 뭐냐? 주둥이로는 과학적 사고로 무장한 것 처럼 떠벌려 놓고는, 결국 전적으로 니 주관적인 느낌에 근거해서 주인장 글 까고 있는 것 뿐이잖아? 그러면서 주인장이 한 말에 구체적인 논증으로 반박한 것이라도 있냐? 죄다 뜬구름 잡는 소리만 늘어놓고 있으면서 꼴에 영어몇줄 새겨 넣고 잘난체 열폭질 해대면 누가 니 앞에서 쫀다던? ㅋㅋ

그리고 386, 범생이 운운한 것은 너하는 짓을 암만 잘 봐줘도 그 정도로 찌질한 인간군상의 포스가 니 글 도처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다는 비아냥이었는데, 설마 비유를 사실로 이해한 거니? 왠 뜬금없는 상상력 부족 타령이냐? 그럼 상상력을 발휘해서 너의 그 어처구니없는 잘난체와 열폭을 너 스스로 한번 멋지게 까보시던가. 그렇게 한다면 나도 니 상상력의 수준은 어떤지 아주 솔직하게 감상을 말해줄테니..낄낄.

추신:

ㅋㅋ 너 참 웃긴다. 제도를 빼고선 개인을 말할 수 없다는 니 말이, 정치적 냉소주의와 속물주의에 빠져있는 현대사회의 개인을 분석함에 있어 (데싹은) 제도의 요소를 고려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그 말 아니었어? 그럼 뭐였는데? 참나 자기가 한 말도 금방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고 있네. 그게 너가 말하는 과학이니?

그리고 결국 너가 논증하는 수준이라는 게, 그냥 니 주관적인 느낌에 근거해 나는 제도의 요소를 중요하게 봐요..하는 딱 그 수준이었다는 비아냥을 한 거였는데. ㅋㅋ 역시 넌 행간을 읽는 능력이 없다보니 이런 것 까지 일일히 다 설명을 해줘야 하는구나. 참 그 머리로 애들은 어떻게 가르치나 모르겠다.

너는 내가 꼴같지 않게 끼어들었다고 생각하나 본데, 주인장이 만든 이 공간에 애착이 강한 내 눈에는 너가 별 시덥잖은 개소리 늘어놓으며 이 공간 자체에 끼어들었다고 생각하거든. 물론 너가 끼어든 것 자체에는 불만이 없는데,

그 황당무계한 잘난체 열폭 뻘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지니 내가 참을 수가 없어 너한테 뭐라고 하는 거고. 그러니 선후관계 인과관계 파악은 좀 제대로 하자. 이것도 과학주의자가 갖춰야 할 기본소양 아니니?

그리고 내 앞에서 영어 좀 쓰지마. 나 영어 잘 몰라. 그리고 우리말로 해도 뜻이 통하는 것을 꼭 있어보이는 척 영어로 하는 새퀴들 보면 완전 밥맛이라고 생각하는 부류거든. 그래서 안그래도 밥맛인 널, 내가 더 밥맛이라고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나 너한테 공짜로 사과한다는 소리 안했거든? 주인장 글을 너 관점에서 재서술 할 의향이 없으면(-> 이거 너가 쫄아서 백기든 것 맞지? ㅋㅋ)굳이 내 사과를 받니 안받니 혼자서 쇼할 것도 없는 문제인 건데..

ㅋㅋ 그리고 내가 빈정거리든 말던 상관없다는 양반이 머리에 핏대를 세워가며 조롱섞인 반박글을 다는 이유를 모르겠네..ㅋㅋ 너 또 내 글 밑으로 열폭성 반박글 달거지? 그럼 앞으로는 빈정거리든 말던 상관없다는 식의, 그렇게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은 좀 안해줬음 한다.

ㅋㅋ 쥐뿔 과학도 모르고 밥맛도 없는 너의 실체가 결국 구라쟁이였다는 것 까지 확인하게 하는 것은 나한테 너무 잔인한 일 아니겠니?

그리핀

2010.05.07 09:32:11
*.205.231.46

그런데 왜 이 곳에는 데이터를 추가한 '듯한', 그럴싸한 척 하려는 '듯한', 거품 걷어내면 그냥 '사보타주'로 밖에 안 보이는 덧글이 많을까요?

주인장의 글도 '좋고 큰 그림'을 그리는 과정의 '하나의 색'이라 보면 얻는 게 많은텐데 그냥 '이런 퇴비도
써봐'라는 충고가 아니라 '밭을 갈아엎어라'라는 팔짱낀
훈장질이라니...휴 (비유가 요즘 말로 '캐유치'해서
죄송한데 심정이 참 그렇네요)

여기서 엑토플라즘 같이 넘치는 자의식 토해봤자 '오오 선지자께서 강림!'이라는 반응을 얻지는 못하실텐데-_-;
(시간도 하나의 재화라면 블로그 탐방 중 '저의 재화'를
들여서 생각을 다듬는 '시금석'의 '일부'로 접하고 있는
주인장의 글입니다. '혹여라도 짙은 회의 끝에 주인장이 접기로 결정하여' 못 보게 된다면 폭이 좁은 생각을 하게될 것이 두렵네요. 그래서 좀 꼬인 비유가 나가는 것은
용서하시죠)

물론 갈등과 충돌의 과정에서 '저에게' 떨어지는 부산물 - 생각거리 - 이 많은 것은 좋습니다만 주인장께서 '아예 판을 없애고 싶은 심정'이 들 정도의 회의감을 느끼신다니 '님들아 자제 부탁요' 하고 싶네요.

안 그래도 단순하게 가려는 세상을 왜 이리 재촉들 하시는지...슬픕니다. 뭐 그냥 저를 표적삼아 비웃어 주시고 다른 방향으로 '그 열정(?)'을 돌려주시기 바라면서
끼어들어 봤습니다.

언짢으시다면 송구합니다.

cryingkid

2010.05.07 14:50:35
*.132.70.59

'취향의 정치' 이후는 잘 모르겠는데 이전 부분은 크게 와닿는 부분이 많네요. 잘 읽고 갑니다.

Desac

2010.05.08 11:26:39
*.23.212.123

생각해보니까 댓글 지우려고 왔다가 댓글 달았네?
저녁밥시간 늦어져서 헤롱헤롱 집에 왔더니 댓글 달다가 댓글 지우다가 하면서 헤롱댔나봐요. ㅋㅋ

미안해요.
굳은 머리에 자극 좀 줄까 했을 뿐인데 그렇게나 힘들어하고 헛다리짚을줄 몰랐어요.
어렵고 창피한만큼 나에 대해 화가 났겠지요.

그리고 홍위병 자처하는 꼴통들도 이렇게 많을줄 몰랐어요.
너무나 평범한 '제도' 한 단어에 엉뚱한 삽질들만 하면서 버럭버럭 거리다니...
그런 애들이 그런 머리로 살려니 세상살이가 얼마나 힘들까.... 헤아렸어야 했어.

주인장부터가 맑스읽어드립이니 후장빨기드립이니 치는데
그 떨거지들이 쌍팔년도 모범생이니 제도가 중요한게 어쩌냐느니 선지자라느니 존경받을줄 아냐느니 하는 것도 당연하지요.

"우오오오~" 하는 홍위꼴통들 데리고 선지자놀이 열심히 하길 바래요.
Farewell~

P.S. - 댓글 잘 지워지니까 티스토리가 원래 그렇다고 뻥치지 말아요. 그런 모습도 '분절' 주장(?)하는 모습과 닮은 꼴이라 신기했지만... 결과(?)까지도 ㅋㅋㅋ

장각

2010.05.09 00:53:26
*.245.213.119

왜 님은

돼지 앞에서 코를 뒤집죠?

sonnet

2010.05.11 12:20:41
*.120.2.146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냉소' 내지는 '냉소주의'의 상당부분은 보수적 정서 내지는 보수주의로 대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본문은 보수-진보를 우선 전제하고 제3의 속성으로 냉소를 별도로 잡는 구도를 설정하는데, 그게 오히려 분석을 어지럽게 만든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긍정적 변화의 가능성을 높게 보는 진보에게 혁명적 낙관주의라는 게 있다면 긍정적 변화의 가능성에 회의적인 보수에게는 보수적 냉소주의라는 게 있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어떠냐는 이야기입니다.

하뉴녕

2010.05.11 12:59:14
*.49.65.16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냉소주의의 문제가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는) 보수-진보의 문제보다 더 덩어리가 큰 문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투표를 할 수 없는/해도 소용없는 사람들이 30%가 넘는데도 불구하고 민주당 지지자들이 '투표를 하지 않는 녀석들은 바보'라고 공박하는 현실인데,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한나라당 지지층의 정서와 동일한 정서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특히 청년세대로 문제가 넘어오면 '냉소'는 참여정부를 지지했지만 그들의 통치행위에 낙담했던 이들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할 수밖에 없는 단어인 것 같습니다...

sonnet

2010.05.12 18:31:23
*.114.47.122

보수의 외연은 꼭 한나라당 지지자로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런 경험은 청년세대가 현실의 높은 벽에 부딪쳐 좌절을 겪는 과정을 나타내는 것인데, 지금의 많은 기성세대들도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현실에 순응하는 방법을 체화해 서서히 보수화되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즉 진보진영에서 보면 냉소는 우리편이 이탈의 조짐을 보이는 고민스러운 과정이지만, 보수진영에서는 우리편이 늘어날 준비를 갖춰가는 과정일 수도 있는 것이죠.

하뉴녕

2010.05.13 17:15:04
*.69.127.167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 자체를 보수의 속성으로 본다면, 그런 해석도 가능할듯 합니다. 다만 그런 경우라도 먹고 살만해서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과 먹고 살만하지 않아서 정치에 관심을 못가지는 사람은 구별해서 비평해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후자의 조류를 '보수화'라고 칭하는 건 좀 찜찜한.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제가 얘기한 '냉소'의 정서라는게 전적으로 후자에서만 나오는 거란 얘기는 아닙니다. '투표하지 않는 이들은 어리석다'는 쉬운 도덕적 질타를 거부하고 그 이면의 문제를 탐구하려는 노력으로 봐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직 지리멸렬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것조차 현실의 반영일수도 있겠구요...

잇글링

2010.05.19 01:14:12
*.122.63.205

[잇글링] 이 글이 [궁극의 랍스타]님에 의해 스크랩되었습니다.(보러가기 : http://www.itgling.com/spot/17287 )

잇글링

2010.07.30 23:27:08
*.122.63.206

[잇글링] jellyfish님이 한겨레훅님의 [당신의 진보는 몇년도 산인가]을(를) 아랫글로 연결하셨습니다. (보러가기 : http://www.itgling.com/spot/24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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