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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은영전 비평 : 양 웬리와 탈정치성

조회 수 384845 추천 수 0 2010.07.29 16:58:19

<은하영웅전설>은 가장 탁월한 중2병 텍스트다. 가령 라인하르트를 보라. 나, 키르히아이스, 그 다음에 우주가 등장한다. 그런데도 그게 재미있다. 내가 그걸 읽은 게 하필 중2였다. 십 이년 전 즈음, 중2병에 쩔은 우리들은 언젠가 이영도의 ‘다음 소설’이 그 영광의 권좌에서 은영전을 끌어내릴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당시 <드래곤라자>의 칼 헬턴트의 ‘독설’은 알렉스 카젤느나 양 웬리의 그림자로 보였다. 하지만 이영도는 그 후 철학책을 뒤적이기 시작했고, 그의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점점 더 사변적인 대사를 내뱉기 시작했지만, 그건 저 중2병이란 병세를 개선하기는커녕 악화시킬 뿐이었다. 그래서 다른 작품들로 볼 때 다나카 요시키가 이영도보다 괜찮은 작가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여하튼 은영전은 여전히 그 권좌에 앉아 있다. 



은영전은 그것을 가장 높게 평가하는 관점에서도 SF소설이라 부르긴 어렵다. “스페이스 오페라일 뿐”이라고 말하는 게 타당하겠지만, 실은 그조차도 극찬일 수 있다. 가령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 여사가 쓴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를 보면 스페이스 오페라도 SF의 하이라이크에서 아래 쪽에 위치하긴 하나 엄연히 SF의 한 분파라는 점을 느낄 수 있는데, 은영전은 그게 아니다. 그래도 소설 초반에는 우주항행을 가능하게 하는 장비의 이름이라도 나오는데, 소설이 진행되면서 나중엔 아예 그런 서술을 생략해 버린다. 이건 은영전이 어떤 소설 계열에 속하는가라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차라리 <삼국지>나 <대망>과 같은 동아시아 전근대 서사물의 맥락의 연장선상에 위치해 있는 거다. 다나카 요시키가 ‘역(사)덕(후)’이긴 하지만, 그 중에서 특히 중국사덕후였단 점이 이런 점에서 드러난다. 힐데가르트 폰 마린돌프가 아버지에게 브란덴슈바이크 공작이 아닌 라인하르트의 편에 서야 하는 네 가지 이유를 설파하는 장면은, 가후가 장수에게 원소가 아닌 조조 편에 서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장면과 거의 동일하다. <대망>의 팬들은 은영전의 세상이 “오다 노부나가가 죽지 않고 일본을 통일한 후 조선을 침공하는 세계”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여기서 물론 우리의 양 웬리는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성웅인 이순신으로 현상한다.  


이것이 단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일본인이나 한국인에게 익숙한 서사물이 SF소설이 아니라 <삼국지>나 <대망>이기 때문에 이런 변용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생한다. 동아시아 전근대 서사물은 근대의 정치문제를 담기에 적합한 장르가 아니다. <삼국지>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택시기사 아저씨들의 정치평론이 언제나 정치인에 의해 행사되는 국가폭력을 추인하는 레벨에서 끝나버리는 건 그래서다. 그런데 다나카 요시키는 바로 그 틀을 통해 민주주의 정치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물론 역사에 해박한 그가 안배한 장치들이 있다. 이를테면 루돌프 폰 골덴바움이 은하연방을 전복하는 과정은 히틀러가 바이마르 공화국을 전복하는 그것과 비슷하다. 루돌프 대제가 ‘열악유전자배제법’을 공포하는 것도 나치의 우생학과 연관이 있을 거다.


그러나 여기서 다나카 요시키의 질문, “부패한 민주주의냐, 효율적인 전제정치냐?”가 미처 시작되기도 전에 야바위임이 드러난다. 다나카 요시키는 근대화의 속성이나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그는 파시즘과 전제군주정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히틀러와 루돌프를 포개놓았다는 점이 그렇다. 암리츠아 전쟁 등에서 묘사되는 골덴바움 왕조의 모습은 농노의 노동을 통해 지탱되는 봉건제 국가에 가깝다. 민주주의 국가가 파시즘으로 진화(혹은 역행)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과, 봉건제 국가로 역행할 수 있다는 것이 같은 것인가? 상식 수준에서 생각할 때 그럴 수가 없다. 골덴바움 왕조는 애초에 성립될 수 없는 체제였던 거다.


다나카 요시키에게 이것이 심각한 질문이었던 것 같지는 않지만, 억지로 그런 역행이 가능했다고 끼워 맞춰볼 수도 있다. 가령 우주항행이 가능한 시대가 열리면서 우주선을 소유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 심각한 무력의 불균형이 발생했고, 그것이 기사와 농민을 갈랐던 것과 비슷한 차이를 만들어 봉건제가 가능했다든지. 그런데 이는 루돌프 개인이 체제전복을 통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중국사 덕후 다나카 요시키의 역사서술은 주로 인간종족 전체의 의지의 상승과 하락으로 역사를 설명한다. 가령 동성애나 문란한 성문화의 범람은 데카당스의 증표로 해석된다. 이 서술에는 자본주의의 발전이나 생산력의 변동이라는 시각이 거세되어 있다. 근대 이전의 방식이지만, 이 모든 것을 눈감고 지나친다고 치자.


그렇더라도 공화주의자들이 탈출하여 만들어낸 자유행성동맹이 은하제국과 경쟁하는 상황은 말이 안 된다. 골덴바움 왕조가 묘사된 바와 같이 농노제 국가였다면, 자유행성동맹은 그들을 생산력 수준에서 캐바르고 애저녁에 우주를 통일했어야 했다. 민주헌정을 가진 국가와 농노제 국가가 경쟁할 수 없다는 것은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치의 문제다. 이를테면 (싱가포르의 국부) 리콴유와 김대중은 자본주의를 운용하는 다른 방식으로 경쟁할 수 있지만, 아서왕과 김대중이 자본주의를 놓고 경쟁할 수는 없는 거다. 은하제국에 그런 퇴행이 실제로 가능했다면, 동맹이 딱히 인권관념이 발달한 민주국가가 아니고 그냥 헌법만 가진 기업독재 국가였더라도 생산력의 차원에서 금세 승리할 수 있어야 했다.


이런 지적은 소설의 리얼리티에 관한 문제제기인 건데, 조금 관대하게 지나치도록 하자. 다나카 요시키의 사유실험이 현대 정치에 관한 비판이란 점을 인지하면서 말이다. 가령 병사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걸핏하면 옥쇄를 외치는 은하제국과 자유행성동맹의 호전광들은 1945년 이전의 대일본제국의 파시스트들을 연상시킨다. 상대방 체제와 공존할 수 없으니 끝없이 전쟁해야겠다 주장하는 이들은 냉전시대의 극우파들을 연상시킨다. 천안함 사태를 둘러싼 정국에서 알 수 있듯이 이건 우리들에겐 아직도 현실이다. 자유행성동맹의 정치적 난맥상들은 20세기 일본이나 한국에 대한 훌륭한 모사로 보이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은영전에 투영되는 흥미로운 정치적 현실은 두 가지 정도다. 하나는 이 소설이 버블경제 붕괴 이전 거대기업의 일원으로 살아가야 했던 ‘월급쟁이’들의 애환을 무심결에 드러내고 있다는 거다. 맨날 ‘퇴직 후 연금’ 타령하는 양 웬리 때문에만 하는 말은 아니다. 은영전의 캐릭터들은 본질적으로 다들 월급쟁이다. 미터마이어는 참 업무능력 좋고 다른 생각없이 말 잘 듣는 월급쟁이고, 로이엔탈은 나름의 야심을 가진 월급쟁이다. 은하제국은 춘추천국의 난세를 펼칠 것처럼 폼은 잡지만 결국은 단일한 정치적 공동체 내에서의 암투의 결과 로엔그람 왕조로 치장을 바꾼다. 실은 라인하르트의 패업조차도 스티브 잡스와 이건희의 ‘전쟁’보다는 <시마 과장>에서 보이는 재벌그룹 내부의 계파 다툼과 비슷하다.


다른 하나는 좀 더 현실정치에 밀착한 것인데, 일본이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와 한국 등 제3세계에서 펼쳐진 일의 반영이다. 국민들의 교육 수준이 낮은 사회에서는, 군인 장교들의 교육 수준이 평균보다 훨씬 높은 경우가 종종 연출된다. 은하제국을 생각해보자. 자유행성동맹과 항상적인 전쟁상태에 있던 은하제국으로서는, 소수의 귀족들만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사관학교엔 하급귀족과 평민들이 많아졌는데, 귀족들에 의해 차별받던 이들은 그후 고스란히 문벌귀족을 타도하는 라인하르트의 휘하로 몰려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3세계에서는, 냉전을 위해 군대를 지원하는 미국의 원조 덕분에 평민들이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루트가 군대인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한국의 경우에도 군부세력은 일본 육사에서 교육받았고 해방 이후엔 미군과의 협정에 의해 미국으로 연수를 다녀오는 경우가 많았다. 잘 교육받고 소유한 것이 많은 평민출신의 그들이 정치에 대한 유혹을 느끼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즉 은영전의 질문은 “전제정치냐, 민주주의냐”에서 “군부독재냐, 민주주의냐”로 변용되는데 이렇게 본다면 이건 얘기가 된다. 문벌귀족을 지주계급으로 바꾸고 라인하르트 파당을 교육받은 상공인과 농민 출신의 군부세력으로 바꾸면 대충 말이 된다. 많은 전함을 사병으로 소유한 문벌귀족들이 어찌 그리 전쟁을 못하는 찌질이들로 묘사될 수밖에 없었는지도 이해는 된다. (소설 내적 리얼리티는 떨어지지만) 이건 일본인들에게보다도 한국인들에게 훨씬 와닿는 현실 그 자체다. “박정희냐, 김대중이냐”라는 질문은 대한민국사를 관통하는 것이다. 이 소설이 일종의 정치극으로 내 또래 한국 청년들의 정신세계를 관통할 수 있었던 것은 소설 내적인 리얼리티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소설의 질문이 한국 현대사와 접속하는 차원에서였던 거다. 


여기서부터 양 웬리란 캐릭터가 문제가 된다. 이 차원에선 은영전의 서사를 대망과 비교하거나 양 웬리를 이순신과 견주는 것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양 웬리는 왕조국가의 장수인 이순신과는 달리 민주주의의 문제를 던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양 웬리는 자신의 파당으로 은하제국을 뒤엎은 ‘카이저 라인하르트’로부터 자유행성동맹을 수호하려는 민주국가의 군인이다. 백 명이 넘는 풍부한 남캐와 열 명이 채 안 되는 빈약한 여캐로 동인지의 시조가 된 이 작품의 허다한 인물 중에서도 양 웬리는 라인하르트와 함께 작품을 떠받치는 양대 주인공 중 하나다.


은영전이 가장 탁월한 중2병 텍스트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나카 요시키가 바로 양 웬리란 캐릭터를 조형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라인하르트는 쉽다. 그는 알렉산드로스와 나폴레옹과 비스마르크 등에게서 좋은 점만 갖다 붙이고 그들 역사적 인물들이 소요하지 못했던 꽃띠 미소년의 환상적 외모까지 부여받은 캐릭터다. 존재가능성은 에반게리온 초호기의 기동확률로 떨어지지만 소설에서 만들기는 쉬운 캐릭터다. 양 웬리는 그보다 훨씬 어려운 캐릭터였는데, 다나카 요시키는 그 사람을 만드는데 성공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아루스란 전기>와 <창룡전>을 통해 판단한다면 그건 그 소설가에게도 매우 드문 성공이었던 거다.


은영전이 한국 청년들에게 미친 영향을 논한다는 건 양 웬리가 그들에게 미친 영향을 말한다는 것과 거진 동일하다. 이는 양 웬리를 별반 좋아하지 않았던 제국빠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양 웬리는 은영전에서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는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제시카 에드워즈나 발터 폰 쇤코프나 혹은 간지나는 제국군 장성들이 그에 준하는 말들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지만, 그런 것들은 본질적으로 양 웬리의 ‘사상’의 문맥에 있다. 수많은 캐릭터가 나오고 수많은 대사가 나오는 소설이지만 양 웬리처럼 잠언의 형태로 자신의 사상(?)을 독자들에게 주입하려는 캐릭터는 없다. 양 웬리의 시시콜콜한 말도 다 복습하려는 (양 웬리의 양자인) 율리안 민츠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낸 덕분에 독자들은 양 웬리의 잠언(?)조차 소설적으로 무리없이 전해 듣게 된다.


그렇게 해서 이 소설이 해적판으로 출간되었던 90년대 중반에 사춘기를 보낸 한 세대의 남성 집단은 양 웬리를 통해 일종의 정치성을 획득하게 된다. 양 웬리보다 더 인기가 많았던 건 키르히아이스지만 그가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정치적 영향력은 아니었다. 이 또래 남성을 만나면 진보정당에 입당한 이들에게도, 노무현을 사랑했던 이들에게도, 쿨게이를 자칭하는 이들에게도, 정치에 관심이 없다 가끔 정치인과 여성을 욕하는데 동참하는 이들에게도 내면에 하나의 양 웬리가 숨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양 웬리는 이들 또래의 어떤 이들에게 386세대 운동권에게 레닌이 실존했던 인물이었던 것만큼이나 실존했던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나 자신은 고등학생이 되어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를 보았을 때 진중권이 하는 말과 양 웬리가 하는 말은 완전히 동일하다고 생각하였고, 한국에 귀국하여 채널아이 서비스에 접속한 진중권을 넷에서 마주쳤을 때 “혹시 <은하영웅전설>을 보셨나요?”라고 묻는 촌극을 연출했던 것이다. 진중권이 그 소설의 존재도 몰랐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한편으로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런 양 웬리가 탈정치의 기표라면 얘기는 어찌 되는 것일까. 양 웬리는 앞서 말했듯 다나카 요시키의 생각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 다나카 요시키가 정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이란 것은 그리 대단한 것은 못 되었다. <아루스란 전기>나 <창룡전>에서와는 달리 <은하영웅전설>에선 그것들이 양 웬리란 캐릭터의 행위 속에 매력적으로 결합해 있었다는 점이 중요했을 따름이다. 소설 속의 양 웬리는 역사학도가 되고 싶었으나 되지 못한 천재 전략가이며 군인이었기에 그가 정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이 대단찮다는 게 문제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런 양 웬리의 정서를 우리가 흉내내려고 든다면 물론 문제가 발생한다.


일신교에 대한 혐오, 신념에 대한 거부, 민주주의에 대한 애정, 이것은 양 웬리에게서 보여지는 특성들을 두서없이 모은 것이면서 다나카 요시키의 생각(혹은 편견)이다. 이 단편적인 생각을 정돈해서 서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양 웬리(다나카 요시키)는 다원주의를 형이상학의 레벨에서 사고했다.”는 것이다. 다나카 요시키는 이를테면 일신교나 특정한 이념에 대한 투철한 신념 같은 것이 민주주의에 방해가 된다고 보았다. 다신교는 일신교보다 더 문명적이고 진화한 종교의 방식이며 민주주의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은영전의 양 웬리는 명시적으로 그렇게 말하진 않았으나 다나카 요시키의 그런 사상의 흐름 속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런 생각은 얼핏 그럴 듯하게 들릴지는 모르나 하나하나 따져보면 근거는 없다. 사실 이런 생각이 그럴 듯하게 들린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정치에 대해 가지고 있는 무지를 폭로하는 것이다. 종교적 신념이 됐든 정치적 신념이 됐든 어쨌든 신념은 다원주의를 방해하는 것이기는커녕 그것을 필요하게 만드는 필수요소다. 뚜렷한 신념이 다른 사람끼리 모여 있어야 서로의 신념을 존중하자는 생각이 발달할 수 있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땐 어쩌면 일신교야말로 민주주의 탄생에 적합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교도의 신이 들어오면 그저 제 종교 내로 포섭해 버리는 포용력을 발휘한 다신교와는 달리, 포용력 따위 없고 이교도를 규탄하기에 급급했던 일신교도들이 대립했을 때 진정으로 정치적인 문제가 탄생했다. 세계관과 진리관이 전혀 다른 이들이 하나의 정치적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합의를 이루고 살아갈 수 있느냐는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그리하여 정치철학자 롤즈는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정치철학의 문제가 탄생했다고 논평했던 거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신념에 대해 혐오감을 가지는 자세는 별로 민주주의적이지 않다. 오히려 쿨한 척 정치의 문제를 회피하는 태도와 관련이 있을 뿐이다.


다나카 요시키의 일신교에 대한 혐오는 너무 심하단 느낌이 들 정도인데 이게 동아시아에서 자신을 정치적 진보로 포지셔닝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정서와 관련이 있다는 생각도 든다. ‘퀸멜 사건’ 이후 제국군은 지구교도 오딘 지부를 급습하여 고문 수사를 시작하는데, 이를 서술하는 다나카 요시키의 서술은 경악스럽게도 “당할 만하지.”에 가깝다. 이것은 샘물교회 신도들이 아랍 땅에서 납치될 만하다고 생각하는 오늘날의 우리들의 정치의식에 이어진다. 샘물교회의 선교방식에 전혀 동의하지 않고, 그들이 포교를 위해 그 나라에 들어간 행위가 우둔하다 여길지라도, 우리는 민주국가의 시민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정부의 노력을 요구하고 지지해야 한다. 그러나 일신교에 대한 혐오에 빠진 이들은 그들에게 “너희들이 믿는 신의 힘으로 빠져나오라.”고 조소하면서 그걸 진보적인 행위라고 착각한다. 다나카 요시키의 소설은 그런 ‘진보성’을 추인해 주는 역할을 한다. 일신교를 이렇게 미워하는 다원주의가 가능한 것일까? 그것은 외래산 종교에 대해 무조건적 혐오감을 가지는 부적절한 자세이거나, 종교의 정치적 보수성을 종교 그 자체와 구별하지 못하는 범주오류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양 웬리는 “신념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일은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일보다 더 나쁘다. 왜냐하면 돈은 만인에게 타당한 가치를 지니지만 신념은 그 자신에게만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신념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일은 물론 나쁜 일이지만 그게 보편타당성의 문제 때문에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일보다 더 나쁘다고 단언할 문제는 아니다. 신념 때문에 사람을 죽인다는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해놓고 신념이란 단어를 쓰는 것 자체를 기피하게 만드는 양 제독의 전술은 그의 명성답게 야바위에 가깝다.


사실 양 웬리의 일생은 ‘신념이란 단어를 쓰지 않는 인간의 신념의 실천의 역사’였다. 양 웬리는 ‘민주국가의 군인’으로 살기 위해 노력했다. 정부의 강화 명령을 좇아 생애 최초의 패퇴 직전에 몰려 있었던 라인하르트를 놓아준 버밀리언 전투의 종결은 그 정점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는 남는다. 이를테면 정부의 눈을 속여 메르카츠 제독과 일부 병력을 ‘움직이는 셔우드 숲’으로 빼돌린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양 웬리가 정부 명령에 전적으로 승복한 것도 아니었다. 또한 민주주의 관점에서 봐도 민주헌정을 파괴하기 위해 침략한 침략자의 군대에 계속 맞서 싸우는 것이 더 올바른 일이었을 수도 있다. 물론 그런 판단을 일개 군인이 자의적으로 내려서는 안 된다는 반론이 가능하겠지만, 쇤코프가 지적했듯 ‘정부의 명령이 있어도 민간인에겐 발포해선 안 된다는 윤리’와 견주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라인하르트를 놓아준 상황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면 차라리 양 웬리는 라인하르트를 죽이기 싫었다고 말하는 게 더 사리에 맞는 일이겠다. 양 웬리는 라인하르트를 죽이는 일이 은하제국 인민에게 있어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자문하고 있었다. 따라서 소설 내적으로 그런 갈등이 명시되진 않지만, 양 웬리가 버밀리언 전장에서 맞닥트린 독재자가 라인하르트보다 훨씬 덜 유능하고 더 탐욕스러운 이였다면 양 웬리는 그대로 전진해서 브륜힐트를 바수어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찌됐건 양 웬리의 상황에 대한 판단은 그 자신이 희망한 것처럼 ‘연금을 원하는 월급쟁이’의 그것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그는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에 의해 행동했다. 그 동기가 무엇이든간에 말이다.


그런 이가 신념에 대해 혐오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양 웬리라는 독특한 캐릭터와 그의 능력치 안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나, 남들이 듣고 배울만한 진술은 아닌 것 같다. 이를테면 군사적인 것 일체를 혐오하던 양 웬리는 부하를 구타하는 지휘관을 보면 가차없이 군복을 벗겨 버리는데, 그런 행동은 그런 지휘관 없이도 양 웬리가 훨씬 잘 싸운다는 전제 하에서 정당한 것이다. 실제 역사를 보면 몽고메리 장군은 부하를 구타한 패튼 장군을 옹호했더랬다. 목표수행을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에게 무심한 자세를 취하면서도 그들보다 더 잘 이기고 나름의 목표수행을 위해 진력하는 양 웬리의 캐릭터는 매력적이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그의 능력치는 모방할 수 없고 그 무심하고 시크함만을 모방할 수 있는 거다.


그 무심한 자세가 그 특유의 정치혐오의식과 결합하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양 웬리는 동맹을 무너뜨리고 독재자가 될 것을 강권하는 쇤코프에게 “나에게 있어 정치권력이란 하수처리장과 같다. 삶에 있어 꼭 필요한 것이지만 가까이 가고 싶진 않다.”고 코멘트한다. “황제 라인하르트와 독재자 양 웬리가 다툰들 그게 민주주의와 무슨 관련이 있겠는가?”라는 양 웬리와 뷰코크의 질문은 민주주의를 위해 매우 합당한 것이다. 그것은 북한의 봉건 왕조를 무찌르기 위해 남한에서 정부를 비판하면 안 된다는 유명환과 같은 관료에게 우리가 돌려주고 싶은 말이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정치혐오 의식은 민주주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양 웬리가 독재자가 될 것을 기대(우려)한 것은 발터 폰 쇤코프와 호안 레벨로였다. 그런데 이들은 양 웬리가 쿠데타를 일으킬 때 뿐만이 아니라 정치만 시작하면 곧바로 독재자로 직행할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좀 위험하다. 만일 자유행성동맹이 유지되고 양 웬리가 퇴역했다 해도, 양이 편히 살긴 어려웠을 거다. 워낙에 권력자들을 적으로 만들어 놓았고 국민적 인기도 높기 때문에 시골에서 역사책이나 읽고 살도록 사람들이 내버려 두지 않았을 거다. 나는 만일 자유행성동맹이 유지되고 양이 퇴역했다 하더라도, 그가 정치인의 길로 내몰렸을 가능성도 높다고 본다. 양 웬리의 캐릭터로선 한사코 거부하겠지만, 현실적으로는 말이다. 하지만 양이 퇴역 후 정치인으로 입문한다 해도 독재자가 될 길 밖에 없는 것은 아니다. 그건 전혀 다른 얘기다.


오히려 그런 일이야말로 ‘일레귤러’다. 민주국가의 군인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듯, 민주국가의 정치인은 헌법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양 웬리가 군인으로서 처신했듯이 정치를 할 수 있었다면, 정치 자체에도 문제가 없다. 지지율이 높다고 사람이 반드시 헌법을 어기는 것은 아니다. 브라질의 룰라는 80%가 넘는 지지율에도 헌법이 정한 임기에 의한 퇴임을 앞두고 있다. 헌법 뜯어고치고 3선하라는 베네수엘라 차베스의 권고를 무시하고서 말이다. 정치에도 이런 길이 있고 저런 길이 있는 거지 정치 자체를 더럽다고 규탄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 그런 정치 혐오 정서가 오히려 한나라당과 같이 ‘가장 더러운 정당’에게 유리하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자유행성동맹의 군인들은 “민주국가의 군인이니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한편으론 “일을 하는 건 나인데 정치인들은 방해만 한다.”는 의식을 지니고 있다. 후자를 위해 전자의 윤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쿠데타를 일으킨 구국군사동맹 사람들이다. 다나카 요시키는 양 웬리나 알렉산더 뷰코크의 편에 서긴 하지만 쿠데타를 일으킨 이들의 정서에 대해서도 일부분은 긍정한다. 그건 양이나 뷰코크도 늘상 느끼는 것이니 말이다. 여기서 ‘나’를 ‘군인’에서 ‘관료’로 바꾸면 민주주의 체제에 정말로 적대적인 ‘관료 독재’ 이데올로기가 탄생한다. 은영전은 이렇게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모든 부당한 투덜거림을 집대성한다.


양 웬리의 사상(?)과 성격은 이렇게 하나하나 뜯어보면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것이라기 보다 공격하는 것에 가깝다. 하긴 일개 군인에게서 ‘건전한 민주주의 정치의식’을 발견해 내려는 것 자체가 애초에 무리일 것이다. 양 웬리의 사상과 성격은 그가 “은하영웅전설의 그 양 웬리”인 한은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를 사랑하고 그로 인해 민주주의를 ‘학습’했던 소년들이 그를 통해 정치의식을 취득할 때, 그것은 하나의 문제가 될 수 있다. 은영전과 양 웬리는 민주주의를 위해 좋은 말도 많이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일종의 ‘탈정치적 정치의식’의 한 양태를 표현한다. 우리가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를 고민할 때, 내 마음 속에 있는 양 웬리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그래서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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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7 죄책감의 정치의 두 부류, 그리고 도덕성의 강박 [9] 하뉴녕 2011-09-15 24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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