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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유시민 사표 논쟁 재론

조회 수 1475 추천 수 0 2004.04.13 18:09:00
이 글에는 두 가지 사실적인 오류가 있다.
첫째는, 유시민은 '사표'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죽은 표'라는 말을 썼다는 것. 어쩌면 유시민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용어에 정통하여, 저런 식으로 말을 바꾸어 쓴 것인지도 모른다. 여하간 대다수 노무현 지지자들은 저 말을 그대로 '사표'라고 받아썼기 때문에, 노무현 지지자들의 어법에 대한 비판이라고 생각하고 내 글의 전반부를 읽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완전히 '사표'가 없는 선거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대선에서는 그게 불가능하지만, 총선에서는, 독일식으로 정당이 받은 지지율에 비례해서 지역구+전국구 국회의원 숫자를 배당하는 [100% 정당명부제]가 시행된다면, 사표 없는 선거가 가능하다. 이때 나는 이 원리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잠깐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두가지 점을 감안하고 본다면, 당시 논쟁의 지형을 알 수 있는 재미있는 글이다. 진보누리의 아흐리만씨가 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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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단 많은 사람들이 두리뭉실한 비유법으로 쓰던 사표에는 명확한 뜻이 있습니다. "선거에서 낙선자에게 간 표"가 사표이지요. 흔히 생각하듯 당선권과 거리가 먼 소수정당의 표가 사표 아닙니다. 사표는 엄밀히 결과론적인 개념입니다. 사표가 왜 문제가 되는가 하면,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 자신의 의사를 대변받지 못한 유권자의 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총선에서는 비례대표제, 대선에서는 결선투표제 등의 구제조치를 두지요. 민주노동당은 비례대표제 확대와 결선투표제 실시를 일관되게 주장해 왔습니다. 사표, 즉 자신의 의사를 발휘하지 못한 유권자를 대변하는 데에 앞장서온 정당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표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표가 없다는 것은, 한 지역구의 유권자들이 모두 동일한 후보를 지지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는 합리적인 민주주의 사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므로 사표는 대의민주주의의 한계이면서도, 해소할 수 없는 체제의 중핵입니다. 이것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아나키즘과 만장일치제 정도인데, 실현가능성이 매우 적을 뿐더러 전체주의의 유혹에 빠지기 쉽지요.  


2.
계산해 봅시다. 위의 의미대로라면, 열린우리당의 표와 민주노동당의 표 중 어느쪽이 더 '사표'가 많을까요? 열린우리당이 훨씬 더 많습니다. 민주노동당은 나온 지역구의 숫자가 얼마 안될 뿐더러, 열린우리당에 비해 경합지역도 적습니다. 그러므로 모르긴 몰라도 '민주노동당표 사표'는 '열린우리당표 사표'의 몇분지 일 수준에 머무를 것입니다.  

그럼 유시민 의원의 말뜻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언론에서 흔히 말하는 '사표 방지 심리'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표에 대한 유권자의 기대심리를 뜻합니다. 즉 유시민 의원의 말을 정확히 번역하면 이런 겁니다.

"(많은 지역구에서) 열린우리당에게 주는 표는 '잘하면 안 사표'다. 반면 민주노동당에게 주는 표는 '무조건 사표'다. 그러므로 당신의 표가 사표가 될 확률을 줄이기 위해 열린우리당에게 달라."

(*'잘하면 안 사표'와 '무조건 사표'라는 표현은 노정태 님에게 저작권이 있음을 밝혀둡니다.)


3.
'안 사표' vs '사표'의 굳건한 대립에서 '잘하면 안 사표' vs '무조건 사표'의 두리뭉실한 대립으로 변하니 좀 설득력이 떨어지지요? 게다가 위의 논법에는 크나큰 무제가 있습니다. 여기서 '사표'라는 말이 묘한 기능을 하게 됩니다. 사표는 원래 이번 선거에서 낙선자에게 간 표를 일컫는 것인데, '사표=죽은 표=정치적으로 무의미한 표'라는 연상작용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저는 유시민 의원이 머리가 좋다고 생각하지만 의도적으로 이랬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비록 그가 머리가 좋긴 해도, 용어를 엄밀하게 쓰는 편은 아니거든요. 오히려 이 연상작용은 상당수의 노무현 지지자들이 두리뭉실하게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엄밀한 용어로서의) 사표는 정치적으로 무의미한 표인가? 여기서 '그렇다'라는 결론을 이끌어내려면, 하나의 사유실험이 필요합니다. 제가 이전 글에서 제안한 사유실험이지요. 이번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후보 중 낙선한 사람의 표는 모두 '사표'가 됩니다. 이것이 정치적으로 무의미하다면, 다음번 총선에서 낙선자들은 모두 물갈이되거나 지역구를 바꿔도 투표율에 전혀 변화가 없다는 결론이 나와야 합니다.

과연 그런가요? 그렇다면 열린우리당 지도부에 한번 그렇게 하자고 건의해보시지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더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견해는, 지역구 선거에서 이번의 표는 다음번의 선거에 대한 자료가 된다는 것입니다. 당선이 되지 못하더라도 한 지역구에서 민주노동당 후보가 선전한다면, 이 후보는 지역에 당과 이름을 홍보하게 되고, 다음 선거에서 "당선 가능한 이"로 인지되게 됩니다.

당선되지 못한 민주노동당 지역구의 표는 법리적으로 '사표'가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치적으로 무의미한 표인가요? 그렇다면 열린우리당 낙선자 지역구의 표도 정치적으로 무의미한 표인가요? 그래서 가령 과거 부산에서 노무현이 분투하다가 떨어졌더라도, 그 표는 다 '죽은 표'이기 때문에 다음 선거에 노무현을 도로 내보내든 다른 정치인을 내보내든 아무 상관이 없나요?


4.
여우사냥이란 분이 아주 변태적인 논리를 구사하셔서 한마디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네요.

a. 사표의 존재는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나쁜 것이다.)
b. 결선투표제와 비례대표제는 사표를 없애려는 제도다. (좋은 것이다.)
c. 유시민의 주장은 사표를 없애자는 것이다. (좋은 것이다.)

이래놓고 묻네요.

-> d. 이 바보들아, 왜 좋은 것에 반대하냐?

사표가 나쁜 이유는, 사표가 유권자의 의사를 반영하지 못하는 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표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사표의 의사가 반영이 되지 않는 '상황'이 나쁜 것이지요.

사표의 의사가 반영이 되지 않는 상황이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우사냥님은 사표는 의사가 반영이 되지 않는 표이므로, 줄여야하고, 고로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왜곡해서) 열린우리당을 찍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사표가 나쁜 건 의사가 반영이 되지 않기 때문인데, 내 의사를 바꿔서 사표를 없애라?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이는 민주주의 체제는 다수결이기 때문에 민주적이지 않고, 만장일치제에 기반한 북조선식 민주주의가 훨씬 민의에 기반하고 있다는 북한인들의 어법과 상당히 흡사하지요.


5.
저는 전략적 투표를 인정합니다. 그래서 전략적 투표를 부추기는 선거운동 전략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작년 대선 직전의 대통령처럼 "노무현이 당선되면 진보정당의 길도 열어드리겠습니다. 밀어주십시오."라는 식으로 설득해야지요. (그 사람 그 약속 안 지킨 것 같습니다.) 평소 하시던 대로 열린우리당 지역구 의석 하나가 민주노동당의 지지율 약진보다 더욱 큰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하셔야지요. 단, 저를 비롯한 많은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토론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토론 속에서 민주노동당과 열린우리당 사이를 헷갈리는 지지자들을 설득해 나가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사표' 운운은 페어플레이가 아닙니다. 위에서 저는 그 용어가 본래의 의미에서도 변형된 의미에서도 엄밀하지 않고 자의적인, 이데올로기적인 용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의 정치적 선택 행위 자체에 간섭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이요, 민주노동당을 열린우리당의 종속변수로 취급하는 비윤리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시민 식의 '사표' 운운은 "민주노동당 찍으면 한나라당 된다."와 실질적으로 별 차이가 없으며, 실제로 그의 발언을 지지하는 많은 열린우리당 지지자들도 그 발언이 바로 그 발언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런 사고방식은 반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략적 투표를 설파하시려는 노무현 지지자들도, 그런 반칙을 범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반칙을 범하는 유시민이나 다른 노무현 지지자들을 말려주시거나 최소한 비판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또한 전략적 투표를 민주노동당의 (약한) 지지자에게 권유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민주노동당원이나 열혈 지지자에게 권유 (혹은 협박)하는 것은 '실례'라는 점도 아셨으면 합니다. 그런 점에서 현재 민주노동당 게시판과 진보누리 게시판의 현황에 대해 마땅히 '쪽팔려'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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