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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헐뜯기, 비판, 그리고 대중성

조회 수 1633 추천 수 0 2010.01.07 19:31:00

집안일은 잘 말하지 않는 편인데, 신년에 집에 내려갔다가 부모님에게 잔뜩 훈시를 듣고 왔다. 이 나이 되도록 뭐 해놓은 게 없고 게다가 작년엔 책쓰느라 허송세월한 셈이 되었으니 나로선 할 말이 하나도 없다. 친지들이 자녀의 취직, 결혼, 심지어 출산에 대해 한참 얘기하는 시기인데 내 부모님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런 상황이 하루 이틀 일이 아닐 것 같다는 직감이 사람을 더욱 맥빠지게 한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부모님으로부터의 독립을 꿈꿨다. 부모님의 지원을 당연시하면서 부모님과 함께 꾸는 미래를 준비하는 친구들과는 달리, 부모님의 지원을 불편해하면서, 되도록 피해가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의 내 꼬라지는 뭘까. 차라리 부모님이 시키는대로 살았으면 떳떳하게 독립할 기반이 마련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나는 어설프게 독립을 꿈꾸었기 때문에 더욱 철저하게 미성숙한 개체로 남았다. 다시 살 수 있다면 이렇게는 살지 않을 것 같다.


그것과 별개로 아버지가 하신 말씀은 가슴에 박혔다. 남 헐뜯고 까내리면서 인생을 사지 말란 말씀이었다. 지난 내 십 년은 그런 것이었던가?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내가 남을 쉽게 욕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나의 글쓰기란 것들이 대개 남 욕을 그렇게 쉽게 하지 말라고 '욕'하는 거라는 걸 설명드려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어차피 다 욕이고 헐뜯는 것인 걸. 아버지의 인식체계에선 제 삶을 열심히 사는 사람들과 그 삶을 헐뜯는 일부 정치인과 지식인의 이분법이 있었다. 나는 물론 거기에 동의하지 않지만, 제 밥그릇 하나 챙겨먹지 못하는 주제라서야 거기에 동의하지 않을 권리도 안 생기는 법이다.


한편으로는 '헐뜯기'와 구별해서 '나는 비판을 하고 있소!'라고 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근본적인' 생각도 든다. 그래, 어차피 헐뜯기다. 문제는 헐뜯기가 지니는 순기능이다. 아버지는 그게 없다고 보는 것일 테고, 설령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걸 하는 너는 세상에서 버림받고 소외될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일 게다. 그렇지 않다고 내가 얘기한다면, 나는 순진한 사람이 되는 것일까? 얼핏 몇 가지 사례를 머릿속에 떠올렸지만, 말씀은 드리지 못했다.


오히려 문제는 이런 거다. 블로그 글쓰기는 별도로 하더라도, 아직도 지면에 발표하는 내 글은 '점잖다'. 아버지 기준으로는 헐뜯기겠지만, 시장과 주변의 반응이 그렇다. 십 년전, '전투적 자유주의자'라 불렸던 강준만, 진중권, 유시민, 김정란, 김규항 등등의 그 탁월한 헐뜯기 능력을 생각해 본다면, 나는 중간계급 부모의 기대와 시장의 기대 속에서, 세밀한 비평의 욕망과 헐뜯기의 카타르시스 속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한심한 군상일 뿐이다. 차라리 내가 십 년간 헐뜯기로 일가를 이루었다면 아버지는 내 앞에서 헐뜯기를 비난할 생각은 하지 못했으리라.


당대의 저 지식인들의 글은 그들이 부리는 지식이나 표현의 측면에서는 분명히 오늘의 내 것보다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글이 지금의 내 것보다 훨씬 재미있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그들의 글쓰기가 탁월한 헐뜯기였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오버'하는 것이고 이 요인만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싸움 구경은 아무리 어렵더라도 집중만 하면 '재미있다'. 90년대 후반 별로 똑똑하지도 않았던 내가 그들의 '어려운' 글에 열광하면서 이 길로 빠져든 이유는 바로 그런 재미 때문이었을 거다.


그리고 기득권이 기득권을 위해 그런 재미를 사장시킨다면, 그것은 양날의 검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들은 기득권을 지킬 수 있겠지만, 그 기득권은 대중 사회에서 어떤 여흥도 제공하지 못하고 잊혀지고 고립될 것이다. 대중들의 반지성주의적 행동에 지식인들이 그토록 무력했던 이유 중 큰 부분은 그들이 헐뜯기 문화 자체를 거세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지식인'은 그들이 혀를 끌끌 차며 무시했던 헐뜯기의 대가 진중권의 개입으로 자신들의 권위를 사수할 수 있을 만큼 무력해졌던 거다.


시대를 잘못 읽은 한 청년의 밝지 않은 미래와는 별개로, 헐뜯기를 거부한 기득권의 운명이란 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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