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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아주대학교 교지 아주문화 44호에 실린 원고입니다. 작년 11월에 나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읽어보니 제대로 '반지성주의적'이네요. ㅎ 공대생들이 많다고 하여 그런 부분에 좀 신경을 썼습니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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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에도 ‘교양’은 가능할까


반지성주의 시대의 글쟁이의 고백


세기말엔 지식인들이 “요즘 대학생들은 사회과학도서를 보지 않고 ‘인물과 사상’이나 보고 있다,”고 비판했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나는 <인물과 사상>을 읽고 있었는데 내가 인생을 잘못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뜨끔했다. 그 후 십년이 지나기 전에 ‘인물과 사상’은 망했고 대학생들은 시사잡지는커녕 소설책도 보기 힘든 시대가 도래했다. 나는 이 에피소드를 떠올릴 때마다 오늘날의 ‘인물과 사상’은 무엇일까를 고민한다.


사회과학 도서를 읽던 시대가 있었다. 마르크스를 알지 못하면 대학생 취급도 못 받던 시대였다. 이 시대가 망하게 된 과정엔 두 개의 기점이 있었는데, 하나는 소련의 붕괴였고, 다른 하나는 IMF였다. 이 시대가 끝나자 대중교양도서를 소비하려는 대중의 욕망이 생겨났다. 그 욕망에 조응한 이들은, 후배들에게 세미나 커리를 전해주던 전 시대의 운동권들이었다. 이제는 몰라도 되는 사람도 아는 진중권과 여전히 아는 사람만 아는 이진경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시대도 끝났다.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내 글은 진중권과 이진경에 비해서도 가볍다. 그건 물론 나 자신의 배움이 모자란 탓이지만, 한편으로는 시대가 그런 배움과 글쓰기를 허용해 주지 않는 탓이기도 하다. 나는 언제나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교과서 이외엔 한권의 책도 읽지 않았다고 가정하고 글을 쓴다. 최소한 언어영역 문제나 논술고사의 제시문보다는 쉽게 쓰려고 한다. 학자가 아닌 나는, 그렇게라도 해야 먹고 살 길이 열린다. 그런데 요즘은 내 글을 보고도 어렵다는 사람들이 있다. 현기증이 나게 변동이 빠른 세상이다. 십 년 전에 나온 진중권의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를 읽는다. 갑자기 이 책이 어렵게 느껴진다.


교양이란 무엇일까


사람들이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한다고 탓하지 말자. 이것은 한국 사회의 조건이며, 실은 유럽이나 미국이 도달하지 못한 자본주의의 최첨단이다. 한국의 대학생들은 그 사이버 펑크보다도 현기증 나는 공간에서 실시간으로 싸우고 있는 전사들이다. 이런 사회에서 ‘교양’은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를 자본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럴 수 있을까?


어느 게시판에서 공대생으로 보이는 친구가 내게 대들 듯이 질문한다. “교양을 뭐라고 정의합니까?” 나는 대답한다. “어디에 쓸모가 있는지 똑 부러지게 얘기는 못 하겠는데, 여하튼 남들이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그런 것.” 그는 흡족해 한다. 그럴 법도 하다. 이 정의에 입각하여 그는 그런 걸 퇴출시키자고 주장할 생각이니까. 물론 나는 그의 생각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에게 동의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시대에 가능한 ‘교양’에 대한 두 가지 정의(definition)의 방식이 있을 것 같다. 하나는 교양지식을 그냥 그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취미생활로 만드는 것이다. 가령 ‘회사원 철학자’로 유명한 강유원은 말한다. 2천 년 전 그리스에서 쓰인 책이 지금 현실에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고. 그런 걸 묻는 것 자체가 멍청한 거라고. 여기서 강유원과 그의 지지자들은 ‘인문 오타쿠’들로 전락(?)한다. 물론 나는 서구 사회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해 ‘쓸모’를 묻는 이들이 존재할 거라고는 보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런 질문은 인문학을 소중하게 여기는 이들의 ‘성질’을 긁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우리는 인문학의 쓸모에 대한 질문의 대답을 포기해서는 안 될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돌아 돌아서라도 쓸모가 있기 때문에 인류가 이 돈 안드는 한심한 취미생활을 수천년 간 지속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필요성을 잃어버린 시대에, 그 필요성은 언제나 현재의 관점에서 재서술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교양 독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다른 방법은, 이 책에 어떤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말도 믿지 않는다. 교양도서가 중요한 이유는 거기에 실제로 뭔가가 들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고민들을 해결할 방향에 대해 조언해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에 거기에 ‘진리’가 들어 있다면, 과학도서처럼 수 년 마다 갱신되고 이전의 것들은 버려져야 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났음에도 ‘읽어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책이 있다면,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과학적 진리와는 뭔가 다른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인문학적 진리’라고 포장하는 것은, 말을 하는 순간 뭔가 있어 보일 수는 있겠지만 본질적으로는 ‘비겁한 변명’일 뿐이다.


지상의 4원소와 천상의 제5원소를 구별하는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이 세상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을 하고 있다고 믿는 지구인은 이 세상에 단 한명도 없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민주주의’라는 테마를 가장 열심히 붙들고 있다고 평가받는 정치학자 최장집은 여전히 플라톤의 <국가>를 읽는다. 학부생 시절이 아니라, 원로 학자가 되어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을 차츰 심화시키던 몇 년 전에 감명깊게 읽었다고 한다. 플라톤은 민주주의의 문제점에 대한 가장 탁월한 비평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왜 최장집은 <국가>를 읽어야 하는 것일까? 왜 우리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여전히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걸까? 그들이 영원히 불변하는 천상의 진리를 적어놓았기 때문이라고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들이 수천 년 수만 년 동안 인간들이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와 씨름했기 때문이라고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날엔 아리스토텔레스가 확정지은 수많은 학문 분과들이 존재하고, 그들은 각자의 학문의 방법론들로 현재의 문제와 씨름한다. 그런데 그러는 그들조차도, 가끔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으며 ‘아하, 이런 관점도 있었지!’라고 경탄하게 되는 것이다. 이 정도면 그 그리스의 할아버지들을 우리가 존중해야 하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여기서 우리는 그들을 존중하면서도 그들이 필요한 맥락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필요한 이유는 분명, ‘지금 여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길잡이로서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의 문제를 호출할 수 없다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필요가 없다. 실례가 필요하다면 잠시 내 글을 읽는 것을 멈추고 인터넷에 가서 아무 철학자의 이름이나 검색해 보라. 학자들이 아니라, 그저 인터넷의 장삼이사들도 아무 학자 이름이나 주워대면서 제 지식의 풍성함(?)을 자랑한다. 그런 ‘인문 오덕’들이 한국 사회에 절실히 필요하다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도대체 그들이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도 평가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후배들이 ‘어떤 철학자의 책’을 읽어야 좋겠느냐고 물을 때 나는 고민이 된다. ‘교양’이 되는 것은 물론 누구나 합의할 수 있는 철학의 대가들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같은 영감님들, 그리고 슬쩍 현대로까지 넓혀보자면 니체나 비트겐슈타인 같은 간지나는 (혹은 나고 싶어 했던) 험담꾼들이 그들이다. 그런데 나는 그들이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고민을 붙들고 있다고 물론 믿지만, 읽는 사람이 ‘지금 여기’에 대한 고민을 아직 확실하게 정리하지 못한 경우 그들의 말은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릴 수 있다. 가령 칸트가 <순수이성 비판>이라는 황당하게 긴 글을 쓰면서 해명하려는 문제는 “선험적 종합판단이 가능한가?”이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더라도 도대체 무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어진 질문인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 책을 읽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 경우에는 오늘날의 사회 문제를 직접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현대의 온갖 철학자들의 글이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철학자들의 글을 읽다가 대가들의 글을 읽을 마음이 날 수도 있는 거다. 그러나 요즘 철학자들의 글을 읽을 때라도 ‘지금 여기’의 문제에 주목하게 된다는 보장은 없다. 다시 인터넷으로 가보라. ‘요즘 철학자’들의 이름을 들이밀면서 무능하고 무력한 잘난 척을 하는 인문 오덕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그들의 글을 보면서 인문학의 필요성을 느낀다는 것이 도무지 가능한 일인지.


나는 그래서 ‘철학도’가 아닌 일반인들에게 필요한 철학 교양의 출발점은 여전히 그리스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늘날의 학자들처럼 전임자들이 던진 문제의 숲 속에서 씨름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의 현실과 직접 맞붙어 싸웠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기 쉽고, 배워야 하며, 우리 사회에서 실현해야 할 비평은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여전히 그리스는 우리에게 소중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펼쳐보라. ‘윤리학’이란 말에 쫄지 마라. 그는 인간이 추구하는 바는 ‘행복’이라고 설명한다. 누구나 다 그렇게 말하지 않던가. 그러니까 윤리학은 그 ‘행복’이란 것이 어떤 방식으로 달성될 수 있는지를 말해주는 실천적인 학문이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쟁자는 종교경전이 아니라 자기계발서인 거다. 그는 당대 그리스 사회의 현실에서 흔히 사람들이 ‘행복한 상태’라고 칭하는 경지에 도달하려면 어떤 짓들이 필요한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대단히 논리적으로, 대단히 현실적으로. 행복하려면 돈도 좀 있어야 한다는 사실까지 말한다.


나는 ‘지금 여기’있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우리 시대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종종 한다. 당신이 그 말에 동의할 수 있다면, 아마도 나같은 사람이 ‘자네가 그런 걸 쓰고 싶다고 욕망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 할아버지를 한번쯤은 만나봐야겠지.’라고 지껄이는 것도 용납할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


비평의 욕망에 대해


그런데 아마 당신은 아직 그 말에 동의할 준비가 안 되었을 거다. 왜냐하면 그 말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미리 동의해야 할 명제들이 조금 있기 때문이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나 자신의 이성으로 고찰해 보지 않은 삶은 가치가 없다. (혹은 덜하다.)’는 명제다. 윤리 교과서에서 나온 고상한 말로 바꾸면 ‘주지주의’가 된다. 물론 오늘날엔 주지주의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철학들도 있다. 그러나 주지주의 자체가 철학을 탄생시킨 욕망이란 건 분명한 사실이다. 교양지식은 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들의 컬렉션 같은 거다. 욕망이 없다면 그 컬렉션은 아무 의미도 없다. 그러므로 한번 이렇게 물어보자. 당신은 당신의 삶을 이성적으로, 혹은 객관적으로 고찰해 보기를 원하는가?


여동생과 대화를 한다. 그녀와 또래집단들이 공유하는 관심사들이 있다. 연애, 성형, 그리고 취업. 대화의 80% 이상이 그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얘기들을 지겨워하는 그녀 자신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 경우 우리는 묻는다. ‘도대체 왜 나는 이렇게 사는 걸까?’라고. 누구나 다 하게 되는,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가 고도화될수록 구성원들에게 망각시키려고 애쓰는 그런 고민이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할아버지의 시대엔 그런 고민이 상시적으로 떠올랐던 모양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펼친다. 첫구절이 이렇게 시작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앎을 갈망한다.(All men by nature desire to know)" 슬프다. 이 영감탱이는 인간은 원래 그렇다고 써놓았는데, 요즘 나는 인간이 정말로 그런지 모르겠다. 하지만 ‘앎’이라는 단어에 쫄지 말자. 다음 문장을 보니 소용에 닿건 닿지 않건 우리가 무언가를 똑바로 보고 싶어 눈을 깜빡 깜빡한다는 얘기를 써놓았다. 그럼 그렇지. 그런 식으로라면 우리가 앎을 갈망하지 않을 리가 없지. 그리고 그런 구체적인 ‘앎’들 위에, ‘앎에 대한 앎’, ‘앎이 무엇인지를 반성하는 앎’이란 것이 존재한다. 이런 걸 우리는 ‘메타(meta)'적인 것이라 한다. 형이상학은 영어로 Metaphysica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앎을 갈망할까? 알 수 없다. 그런 사람도 있지만, 안 그런 사람도 있잖은가. 너는 왜 성형하고 싶어 하느냐고 물으면 어쩐지 기분이 나쁠 것 같다. 남들 다 하고, 하면 남들이 더 좋아할 것 같아서, 남들의 욕망 때문에 하는 건데, 그걸 그렇게 대놓고 물어보면 안 하던 생각을 해야 하잖아.


그렇다. 그 욕망은 이렇게 남, 그리고 나 자신조차 불편하게 하는 욕망이다. 그러니까 당신은 늘상 이것을 욕망할 순 없을 거다. 그러나 아무리 그것을 싫어하는 당신이라도, 아주 가끔은, 그것을 욕망할 때가 있다. 생각없이 사는 게 불안하거나, 원하던 일이 안 돼서 짜증난다거나, 읽고 있는 이 글이 심히 마음에 안 든다거나, 혹은 필자의 유려한 필체에 감탄했다거나, 이유는 수없이 많다. 그런 욕망이 들었을 때, 당신이 들춰볼 텍스트가 조금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나같은 사람이 밥을 먹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이런 식으로 설득한다.


그런데 당신이 이에 동의했다 하더라도 문제는 많다. 그 ‘앎에 대한 앎’을 성립시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말해봐야 하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은 위험한 학문이다. 질문에 대해 요상한 대답을 내렸다가는 신기한 사람이 된다. 가령 빵상 아줌마와 허경영 본좌님을 보라. 그분들은 자신들만의 확고한 형이상학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부럽지는 않다.


이런 길로 빠지지 않고 진짜로 ‘앎에 대한 앎’을 가지고 싶다면 필요한 게 많다. 공부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비평의 방법론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고, 비평의 재료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근데 말이 쉽지 이걸 둘 다 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나는 20대들의 삶을 서사화하기 위해선 웹툰에 대한 비평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런데 비평을 하려면 뭔가 비평의 잣대도 있어야 하고, 웹툰도 많이 봐야 한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웹툰을 안 본다. 그리고 대부분의 웹툰 소비자들은 비평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 아마도 그러니까 이런 일은 나같은 사람이 해야 할 거다. 그런데 이건 능력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독자층도 문제가 된다. 지식인들은 웹툰에 관심이 없고, 웹툰 소비자들은 비평에 관심이 없다. 그렇다면 ‘웹툰 비평’이 무슨 맥락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교양의 컬렉션을 의미가 있도록 하는 비평적 욕망에 대한 씁쓸한 성찰은, 나같은 사람이 끝까지 가져가야 할 질문이다.

 
‘인터넷 주체’에게 주는 조언


이 글이 독백으로 끝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시 주제로 돌아가자. 우리 시대에도 ‘교양’은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성찰적 앎이란 것을 우리가 필요로 하고, 그 앎에 대한 길잡이를 요구하는 한,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대답은 낙관론이 아니다. 특히 교양이 없는 시대에 교양을 희구하는 개인의 차원에서 따져보자면 더욱 그렇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적어도 대학생’일 게다. 나는 대학생이 알아야 할 것을 모른다고 질타하는 진보좌파 지식인들의 꼰대질을 반복할 생각은 전혀 없다. 나는 우리의 소통의 토대가 될 어떠한 공통지식도 소유하지 못한 이 ‘세계 없음’의 현실이 우리 세대의 근원적인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당신도 그곳에서 산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당신이 대학생이라면, 그리고 교양을 희구한다면, 당신에게 주어진 기회가 무엇인지 정도는 얘기할 수 있다. 하나는 도서관이다. 대학이 취업학원으로 전락할 지라도 책은 서가에 꽂혀 있을 거다. 다른 하나는 인터넷이다. 네트에서의 소통은 종종 당신에게 책이 전해줄 수 없는 ‘맥락’의 진리를 전해줄 거다. 양쪽 모두 잘못 쓰면 독이긴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그것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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