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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미네르바 사건에서 자그니 님이 소넷 님 등과 논쟁하다가 부지불식간에 내뱉은 '우리편 전문가'라는 말은 그의 애초의 의도와는 다르게 내가 한국 사회의 담론 형성 및 소비행태를 바라보는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다. 자그니 님은 미네르바를 향한 대중의 지지를 추인하기 위해 '우리편 전문가'란 말을 만들었지만, 내게는 그것이 한국 사회의 시민들이 지식인 및 전문가를 바라보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일전에 2010/01/10 - [문화/용어] - 글쓰기와 권위 라는 글을 통해서도 밝힌 바 있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스스로 주장하는 것처럼 먹물들에게 쉬운 글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본인이 알아먹을 수 없는, 그리고 실제로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현학적인 어휘들이 난무하더라도, 그 글의 결론이 "ㅇㅁㅂ 개새끼" 혹은 "ㄴㅁㅎ 개새끼"이기만 하면 그 결론에 동의하는 사람들에겐 환영받는다. 내기를 하자면, 결론이 그들의 생각과 동일하다면 매우 쉽고 평이한 글보다는 적당히 안 읽히고 어떤 전문용어 비스무레한 것들이 섞여 있는 글들이 더 환영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그 상황은, 어떤 '권위'가 자신의 입장을 편드는 것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오늘의 트위터에서 진중권과 조국이 당하는 고난은, 자신들을 편들어준다고 믿었던 '권위'가 자신들의 의견을 추인하지 않았을 때 그들이 그 권위에 얼마나 냉담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권위자의의견이 자신들과 일치하지 않을 때, 대중은 "지식인이나 먹물은 쓸모없는 존재이며, 그들이 대중을 비판하는 것은 하등 가치가 없다."고 반응한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다면 애초에 왜 그들은 '우리편 전문가'를 욕망했단 말인가? 그리고 대중들 사이에는 의견의 균열이 없는가? 진중권이나 조국을 사랑하는 그들은 이명박을 사랑하는 '민중'들을 경멸하지 않던가?  


이런 경우에 사람들의 욕망은 모순적이다. 기득권층이 대중의 정당한 요구를 묵살하고, 전문가나 지식인들 역시 그러한 기득권층이 만들어낸 룰 이에서 대중을 탄압하고 있다는 판단에 동의한다고 치자. 그럴 경우 사람들은 가령 곽노현 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당신들의 법으로 곽노현이 유죄인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 구속도 할 수 있고, 당선무효를 시킬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그 법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법은 우리들의 요구에 의해 다시 쓰여져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는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법이 자신들의 의사를 대변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사람들의 생각에, 법은 틀림없이 그들의 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이 밝혀지지 않는 이유는, 물론 기득권층의 방해공작과 이에 부화뇌동하는 나쁜 전문가/지식인들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곽노현을 옥죄는 법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고 곽노현이 무죄임을 논증(?)하는 법리적인 글들을 찾아 헤맨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어떤 이들은 그 욕망에 부응하는 활동을 시작한다. 판례를 읽을 능력도 없는 이들이 난해한 문장들 사이에서 자신들을 편들어줄 것 같은 문구를 찾아 내 검찰수사는 부당하다는 내용의 한편의 글을 완성한다.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그 글을 링크하고 알티하고 퍼다나른다. '우리편 전문가'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즉 사람들은 전문가가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을 경우 그들의 타당한(그렇다고 치자.) 요구를 받아 안을 수 있는 새로운 법률/원칙을 창출해 낼 것을 고민하지 않는다. 모두가 그런 고민을 한다면 사회문제들은 훨씬 더 심층적으로 논의될 것이며, 대부분의 문제들에 대해서 우리는 지금보다 나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대신에 환상적인 '우리편 전문가'를 내세워 그들의 글을 통해 현실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러한 '현실의 재구성'은 자신이 원하는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골라먹을 수 있는 인터넷 공간의 정보습득 방식을 통해 훨씬 더 수월하게 이루어진다.


뭔가를 읽었고 그걸로 세상을 바라본다고 믿는 먹물들 역시 더 나은 처지에 있지는 않다. 지식의 대중화 덕분에 우리는 사회문제를 지적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론을 습득하거나 흉내낼 수 있다. 그러나 마치 스승이나 문파에게서 내공과 초식을 배우면 강호에 출두하여 한 따까리 할 수 있다는 무협소설의 판타지를 믿는 것처럼, 그들 중 대다수가 단지 그 방법론만을 습득하며 한국 사회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살펴보지는 않는다. 시시각각 지나치게 많은 정보가 쏟아지는 세상에서, 과거의 사건에 대한 맥락은 희미해지고 서사는 실종된다. 그리하여 먹물들 역시 '비평의 방법론'을 통해 현실을 재구성하게 된다. 


가령 최근에 이소선 여사의 소천을 계기로 이소선 '어머니'란 호칭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이 논쟁에 대한 견해를 밝히자면 나는 '어머니'란 호칭에 대한 문제제기는 충분히 의미있다고 보지만, 그렇다고 그 호칭을 고수하던 모든 사람들이 갑자기 자신들의 언어습관을 바꾸어야 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이소선 어머니'는 그녀보다 나이가 많은 남성들에게도 거부할 수 없는 호칭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호칭은 일종의 억압일 수 있겠으나, 사실 억압적이었던 건 호칭이 아니라 그녀의 삶 자체였다. (피해갈 수 없는 막중한 의무를 떠안았던 의미에서) 


문제제기를 하던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어머니란 호칭을 쓰는 이들은 대부분 가부장제의 문제점을 인지하지 못하는 남성(노동자)일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발화를 통해, '나보다 어린 여공들'을 위해 희생했던 전태일의 삶과 주로 여공들로 구성되었던 청계노조의 역사는 해체되고 현실은 재구성된다. 내 블로그에 들어온 어떤 정신분석 담론의 전공자(라고 주장하는 이)는 김형태를 비판하는 이들에게서 전형적인 20대 찌질이의 욕망을 발견해내고 분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형태의 글이 당시의 20대들에게 반발을 불러일으켰다기보다는 환영을 받았다는 사건은 망각되고 그가 배운 이론의 정당성과 정합성을 위해 현실은 재구성된다.


어떤 과학도들은 위와 같은 오류는 페미니즘이나 정신분석학이 학문적인 도구가 아닌 사이비종교에 해당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환호작약할 것이다. 사태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사건과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사회에 대해 발언할 때는 과학이라 생각되는 것들을 활용해 서술해도 비슷한 일이 생긴다. 가령 페미니즘과 정신분석학을 혐오하는 것으로 유명한 어느 블로거는 과거 군가산점제 폐지에 찬성하는 남성들에 대해, 진화심리학적 견지에서 볼 때 '과시적 소비'를 즐기는 이들이라고 썼다. 이렇게만 썼다면 별 문제가 없었을 텐데 (뭐 전태일도 '과시적 소비'를 즐기다 제 몸에 불을 댕겼다고 우길 수는 있을 테니까. 여성이 아닌 남성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과시할 만한 일이겠는가?) 남성명문대생들은 공무원 시험을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군가산점 폐지에 찬성하는 '과시적 소비'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비평은 근 십 년간 한국 사회에서 시시한 직종의 대명사였던 공무원이 최고의 선망직종이 된 현실을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SKY학생들이 9급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고 호들갑을 떠는 조중동의 보도(이런 보도가 나오기 몇 년 전부터 그런 사례는 있었다.)를 무시한다.  


물론 누구든 현실파악에 실수는 있을 수 있고, 실수를 지적받았을 때 그것을 수정하거나 새로운 방식으로 종합한다면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먹물들은 (나이든 먹물이든 젊은 먹물이든 간에) 현실이란 것은 바라보기 나름이고 얼마든지 다른 형태로 해석해낼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당연히 현실은 해석되는 것이고 그런 면모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현실이 이렇게든 저렇게든 말해도 상관없는 것이라면 비평활동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을 거란 건 누구나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물들은 무언가를 지적받은 경우 수정을 하는 일이 드문데, 그러한 수정이 자신의 방법론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일이라 착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소중한 예외가 존재하겠지만, 오늘날 어떤 이가 자신의 비평의 방법론을 자랑한다는 건 그가 그 잘난 방법론의 권위 때문에 어떠한 지적에도 반응하지 않고 충실하게 자신만의 현실을 재구성한다는 것과 점점 더 같은 의미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위악적으로 단정한다면, 2010년대 한국 사회에선 그 누구도 세상을 해석하거나 변혁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들 자신의 알량한 견해와 정서에 맞춰 머리 속으로 현실을 재구성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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