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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뉴라이트 사용후기>는 아주 안 팔리는 것은 아닌데, 출판사나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은 안 나가는 중이다. 그리고 판매량과 상관없이 반향이 너무 없다. 거기에는 글 자체의 퀄리티 문제를 포함해서 (이건 저자인 나 스스로 반성해야 할 부분이고) 여러 가지 문제가 있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다룬 문제들이 사람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정확히 표현하면 “뉴라이트가 하는 말에 관심을 가지고, 뉴라이트의 ‘좌파’(사실 그들이 비판하는 것은 좌파가 아니라 민족주의자이지만) 비판에 수긍해야 할 부분도 있음을 인지하면서, 그들의 관점을 극복해서 진보주의자들을 위한 더 설득력 있는 역사적 관점을 형성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거의 나 하나 뿐이었다는 거다. 뉴라이트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뉴라이트는 ‘뉴또라이’일 뿐이고, 그저 욕이나 하면 족할 집단일 뿐이다. 그들의 말을 세심하게 논박하는 것은 그다지 재미없다.


단행본과 웹진이라는 매체의 차이를 넘어 이야기한다면 딴지일보에 연재하는 변희재 이야기에 대한 반응도 비슷하다. 사실 이 글들은 좀 재미없게 쓰여졌다는 문제도 있지만, 여하튼 변희재의 논변을 논변으로 검토하는 일 자체에 대해 사람들은 거부감을 드러낸다. 말하자면 변희재가 듣보잡이고 그의 말이 엉터리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일인데, 대꾸하는 것은 시간낭비거나 변희재를 잡고 뜨려는(?) 내 욕망과 관계있다는 식이다.


여기서 내 글쓰기는 하나의 본질적인 문제점에 봉착한다. 이를테면 내가 상정하는 독자층이 한국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런 문제 말이다. 가령 <뉴라이트 사용후기>를 예로 들어 이야기해 보자. 이 책은 결코 학술적인 책이 아니다. 만약 학술적인 책을 의도했다면 2차문헌만 보고 쓰는 만용을 부리진 않았을 거다. 문제제기를 크게 치고 나갔다는 점에서 이왕 할 바엔 이 책을 쓰는 데 걸린 시간의 세배 정도(내가 이 책 쓰는데 반년 걸렸으니 그럼 일년 반이 된다.)를 들여 학술적인 영역을 포섭했어야 했다는 의견도 있다. 물론 그런 짓을 하기엔 시간도 능력도 충분치 못하니, 그렇게 해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나는 이런 주제로 작업을 안 했을 거다. 잘 알지도 못하는 놈이 1차문헌을 직접 본다는 것은 로망을 걷어내고 말하면 사소한 구절에 삘이 꽂쳐서 헛소리를 주절주절 늘어놓을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히려 2차문헌만 본 사람은 헛소리를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알려진 헛소리’를 하는 경우가 많지만, 1차문헌만 본 사람은 ‘창조적인 헛소리’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까 비전공자 입장에서는 결국 두 개를 다 봐야 한다. 일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거다. 그렇게 할 수 없었던 나는 이 책에서 ‘상식인’이란 범주를 들고 나왔다. 이 책의 부제인 “상식인을 위한 역사전쟁 관전기”라는 말이 이와 관련이 있다.


이 책에서 내가 말하는 ‘상식인’은, 이 사안에 대해서 기술해본다면 뉴라이트와 민족주의자 양측의 주장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전문적인 역사학 지식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제한된 정보로 사태를 판별해 보려는 사람을 의미한다. 아주 잠깐 지나가는 생각으로라도 저들의 논변보다 더 설득력있는 논변이 있는지를 궁금해 한 사람을 의미한다. 나 역시 이런 사람들이 많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다만 한 명의 저자가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지반은 되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일 테다. 그건 게시판 시대엔 그런 이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었다는 나 자신의 경험과 관련이 있다. 진중권과 함께 키워질을 하면서 나는 상대편의 논리를 우리 편이 알아듣기 쉽게 신속하게 논파하여 우리 편을 결속시키는 글쓰기를 할 수는 없었다. 그런 글쓰기는 (아무런 과장도 보탬도 없이) 우주에서 진중권이 제일 잘 했고, 그의 속도와 명료함에 비교우위를 갖춘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키보드워리어로서의 하뉴녕은 진중권이 설복하지 못한 사람들, 진중권의 (전체 논지맥락에서는) 사소한 팩트 오류를 물고 늘어지는 사람들을 향한 글을 쓰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진중권의 논변과 반대파의 논변 그리고 객관적인 자료들을 합쳐서 종합하는 듯한 글을 썼던 것이다. 그런 글을 위해 필요했던 것은 물론 진중권의 논변과 상대편의 논변을 숙지하고 양쪽 모두에서 조금씩 답답함을 느끼던 일군의 독자들이었다. 나는 애초에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글을 써왔던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극히 제한적인 게시판 키워질 시대의 유산일 뿐 독자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사람들이 논리적인 글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탄하는 건 우둔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조차가 분석의 대상이 될 테니까. 사람들이 논박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건 논박의 무의미함을 뿌리깊게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친구에게 들은 얘기다. 학교에 고위층까지 올라갔던 법조인이 와서 강의를 할 때 어떤 학생들이 “전관예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도전적인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친구는 솔직히 말하면 그런 종류의 질문들을 초청된 명사가 한방에 제압해 줬으면 했다 한다. 차라리 강단있게 “검사/판가 거친 애들이 훨씬 더 일을 잘하는 게지 전관예우는 무슨 소리?!”라고 반문하길 바랐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냉소적 실력주의(?)는 이른바 넷우익들이 많이 활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명사는 그런 식의 견해조차 표출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전관예우? 그런 게 있나요?”라고 반응했다고 한다. 애초에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여지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말하자면 그 명사의 인식에는 ‘정당화’라는 차원이 결여되어 있다. 내가 가진 것이 있을 때, 남들 앞에서 왜 내가 이것을 가져야 하는지를 설명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내 것은 그냥 내 것이다. 다른 이들은 그것에 대해 토를 달지 못한다. 설령 토를 단다고 해도 (그는 그것을 듣지도 않을 테지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테니 상관이 없다. 딴지일보는 먼 옛날에 “한국의 기득권 세력에게는 ‘콩사탕 싫어, 기득권 좋아.’ 여섯 글자 밖에 없다.”고 논평했는데 이는 정확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판단이 ‘수구 기득권 세력’을 비난하는 데에 쓰이는 것 이상으로 ‘한국적 현실’을 규정하고 있다는 거다. “전관예우? 그런게 있나요?”라는 반응과 “법원(혹은 검찰)은 정권의 개일 뿐.”이란 진술을 생각해 보자. 정당화라는 차원이 결여된 사회에서의 상호 비판 담론은, 법조인의 구체적인 판단의 정당함과 부당함을 논의하는 세밀한 차원에서 이뤄질 수가 없는 거다. 자신의 정당함을 방어하려고 하지 않는 이들 앞에서 우리가 세밀한 차원의 반론을 하기는 심정적으로 매우 어렵다. 도대체 그런 작업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아무도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법조인이 정권의 개라 하더라도 그들을 모조리 몰아내고 우리가 그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 대안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정치에 대해 논하려면 그런 세밀한 논의가 필요하고, 사실은 그런 논의 자체가 정치이건만, 이런 작업들은 우리의 정치담론에서 추방된다. 


뉴라이트 문제 역시 그렇다. 오늘날 사람들이 뉴라이트를 거론할 때 뉴라이트 역사논쟁에 관심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뉴라이트 스스로가 사실 그런 문제들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최근 ‘뉴라이트’라고 불리는 이들의 관심은 오직 하나, 좌파 학자들을 쫓아낸 밥상에 내 숟가락을 올려놓는 것 뿐이다. 진중권은 고별강연에서 이 사태에 대해 “내가 주장을 하면 반박을 하지 않고 존재의 기반을 치러 들어온다.”고 표현했다. 이것이 권력의 본질적인 속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시민들의 동의를 구하려는 작업이 생략된 한국적 권력에 특히 강하게 드러나는 현상이라 말할 수 있을 거다.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권력과 폭력의 분리는 적어도 한국의 국가권력의 역사에선 불가해한 영역이다.


뉴라이트의 과거와 현재는 바로 이 지점을 여실히 증명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이 소리높여 주장하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존재론적으로 허문다. 뉴라이트의 이데올로그들은 대개 왕년의 진보인사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김대중-노무현의 ‘잃어버린 십년’이 되어서야 우익들의 지원을 받으며 마르크스주의(?)와의 이념적 싸움을 고민할 수 있었다. 신지호는 2004년 탄핵 반대 촛불의 거대한 물결을 보면서 뉴라이트를 고민했다고 한다. 보수진영의 절박함이 뉴라이트라는 이데올로그 집단을 고민하게 만든 것이다. 그 뉴라이트라는 집단에 그간 자신이 발전시켜온 식민지 근대화론을 풀어놓을 수 있었던 안병직은 다시 사상투쟁을 할 수 있게 되었다며 ‘피가 끓어 오른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과연 지금 안병직이 사상투쟁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가? 이명박 정부가 권력을 잡은 지금 뉴라이트는 안병직도 이영훈도 신지호도 아닌 어떻게든 교수 한 자리 해먹으려고 뒤늦게 합류한 모리배들의 집합으로 전락하는 중이다. 이명박 정부의 집권이 뉴라이트라는 기획의 최초의 의도를 해체해 버린 셈이다.


한국의 우익들은 이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뉴라이트는 우익에 이념이 없다는 사실에 개탄하며, 좌파정권 척결을 위해 우익의 이념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일종의 이념투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정권재창출에 성공하면 우익들은 다시 이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익들에게 이데올로그는 쉽게 쓰고 버릴 수 있는 ‘비정규직’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한국 정치사의 ‘변절’에 대한 어떤 구조적인 설명이다. 우익은 담론의 재생산을 못하고 좌익은 일자리를 못 주는 사회에서, 오늘의 진보담론에 맞서 싸우는 것은 왕년의 진보투사일 수밖에 없는 거다. 뉴라이트는 우익을 견인해야 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컷 이용만 당했고, 이제는 실체도 사라져 버린 셈이 되었다. 뉴라이트의 이데올로그들이 이 사실에 개탄하고 나선다면 그들은 지식인적 양심을 지킬 수 있겠지만 권력으로부터 점점 소외될 것이다. 반면 이 사태를 그저 방치한다면 뉴라이트와 변희재 사이의 거리는 점점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이념 투쟁은 존재하지 않는가? 그렇기는 하다. 매우 간략해진 형태로 말이다. 결국 이 투쟁은 내가 이걸 가지고 있는게 당연하다는 쪽과 저놈이 저걸 가지고 있는게 부당하다는 쪽의 싸움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이념투쟁은 상대방의 논변에 대한 세밀한 논의를 생략한 채 패키지로 포장된 특정한 세계관을 선택하는 문제가 된다. 가령 김기협의 뉴라이트 비판이 그런 식인데, “뉴라이트는 ‘이기적 인간’이란 전제에서 논의를 출발한다. 그게 잘못 되었다.”라고 하는 식이다. 처음부터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되니 얼마나 간편한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논쟁을 성선설 성악설로 환원하여 뭐를 선택할 것이냐고 묻는 그런 종류의 야바위와 흡사하다. 반대편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아서, “이영훈의 경제사학에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하면 “그래도 마르크스주의보단 낫다.”는 식으로 답변한다고 한다. 그야말로 ‘세계관에 대한 원 클릭 쇼핑몰’이다. 당신은 클릭 한번으로 세계관을 선택하고 어느 정파의 입장을 수미일관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소위 진보들의 훈수라는 것도 결국엔 이 원 클릭 쇼핑몰의 매대에 우리 상품도 좀 올려달라고 떼를 쓰는 것에 지나지 않은지도 모른다.


이렇게 논변적 검토의 필요성이 없다고 강요되는 사회에서 무엇이 가능한가? 일단은 나 자신의 생존이 문제가 된다. 이를테면 내가 정말로 열심히 글을 써서 일 년에 단행본을 세권쯤 낸다고 하더라도, 그 각 권이 평균 5천부씩은 팔려야 나는 연봉 1500만원이 될 수 있다. 이 수준은 아마 한국 사회에서 내가 미치지는 않고 우울해 하고 선배들과 친구들에게 술값이나 뜯어내며 정치평론을 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의 마지노선일 거다. 그런데 지금 실정으로는 내겐 권당 5천부의 판매가 불가능하다. 이건 내가 ‘시장’에 적응하는 방법에 대한 물음이다. 말하자면 지금의 글쓰기와 다른 그 ‘무엇’을 갖추어야 나는 생존할 수 있는 거다. 그런데 생존을 위한 이러한 노력은 어느 정도까지는 어떤 정치적 비전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라는 물음과 겹친다. 어느 정도까지는 공적인 필요성과 사적인 필요성이 함께 가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지인에게 ‘서사’를 고민해 보라는 얘기를 들었다. 공감한다. ‘감동’을 말했던 노무현 지지자들이 공유한 ‘정서적 설득력’을 고민하지 않으면 나도 생존할 수 없고 좌파 담론도 생존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내가 죽으면 좌파가 망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이 문장에서 ‘나’와 ‘좌파’ 사이엔 인과관계가 없다.) 이를테면 논변에 대해 로망을 지니고 있는 나같은 사람도 정치가 논리만으로 해명될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심지어 경제학자들의 책을 봐도, 구체적인 사안에서는 명료할 때가 있지만 “그래서 한국경제는 어떻게 가야 한다는 건데?”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제각각이고 또한 나름의 문제를 가지고 있어서 고민스러울 때가 많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경제정책적 대안이란 것도 이 사람을 살리고자 하면 저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봉착하기 쉽고, 이 문제에 대해 뾰족한 대답을 내놓지는 못한다. 정치가 극단적으로 말할 때 어떤 사람을 살리고 어떤 사람을 죽이는가의 문제가 된다면, 여기에서 논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동’의 승리를 거두었던 노무현 지지자들이 좌파들에게 논리적으로 우리를 논파해 봤자 너희는 무력하다는 조소를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좌파정당이라는 진보신당이 특유의 감수성을 만들지 못하고 ‘노빠 정서’와 ‘운동권 정서’ 사이에서 묘하게 줄타기를 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동’을 공유하는 노무현 지지자들이 나와 같은 이의 글에 관심을 가져야 할 터럭만한 이유를 말할 수 있다. 나는 그들이 과거에 거두었던 정서의 승리가 2007년 대선 이후에 불가능해졌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감수성으로 사태에 접근하는 것은 2007년과 2008년의 패배와 동일한 패배를 부를 뿐이다. 민주당도 그 지지자들도 ‘3년 반’ 남았다고 믿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지금 상태로라면 한나라당 집권은 ‘8년 반’ 동안 이어질 거라고 생각한다. 개혁세력과 그 지지자들이 과거의 승리의 도식을 반복하려 든다면 유권자들은 정말로 한나라당이 꼴보기 싫어서 미치게 될 정도가 되지 않을 때까지는 민주당에게 승리를 안겨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독자로 찾아내는데 실패한 ‘상식인’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신뢰할 만한 이들을 찾아 움직이는 저 부동층들 때문이다. 이것은 2007년 대선 이전부터 내가 가지고 있던 ‘추측’인데, 이 추측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현실에서 반증되지 않고 있다. MB시대가 지나면 지날수록 내 느낌에 본능적으로 동의하고 좌절하는 개혁세력의 지지자들도 더 늘어날 거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나 자신의 문제는 한편으로 세상의 문제가 된다. 살아남기 위한 나의 노력은 한편으로 새로운 정치적 비전을 찾아내기 위한 노력이기도 한 것이다. 블로그 글쓰기와 매체의 글쓰기와 단행본 글쓰기는 모두 다 그런 노력의 반영일 뿐이다. 나는 블로그를 낙서장으로 활용할 수 있는 학자들과는 다르게, 그 문제의식을 벗어난 글쓰기를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있지 않다. 물론 나는 매체에 따라 호흡을 달리 해야 하고, 어떤 경우에는 설득력을 위한 전략도 다르게 짜야 하기 때문에 이 각각의 매체를 향한 글쓰기들이 호환될 수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것을 호환시키고 싶어 하는, 그것을 통해 블로고스피어의 위상을 높이고 싶어 하는 어떤 이들이 존재하겠지만, 그건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내 관심사는 아니다. 그래서 나는 블로그는 블로그로, 기고문은 기고문으로, 책은 책으로 가져가려고 한다. 남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거나,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는지는 지금으로서는 별 관심이 없다. 


이 지리한 글에 숨어 있는 내심을 요약하자면, 너무 우울하다고 징징대지는 말기로 했다. 보기 흉하다더라...나도 그렇게 느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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