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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 2003년 재독 철학자 송두율 교수가 무려 37년만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벌어진 마녀사냥 광풍을 카메라에 담은 영화 <경계도시 2>가 지난주 18일 드디어 극장에서 개봉했다. 개봉 전부터 사회 각계 인사들이 이 영화에 특별한 응원을 보내며 프레시안에 릴레이 지지 리뷰를 기고해오고 있다. 아홉 번째 지지리뷰는 《키보드워리어 전투일지》와 《뉴라이트 사용후기》의 저자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20대 필자 한윤형 씨가 보내주셨다. - 편집자 주

솔직히 이런 영화일 줄 몰랐다. 응당 스스로 '경계인'임을 주장하는 재독철학자 송두율 교수의 관점에서 그를 옹호하는 영화인 줄 알았다. 아마 미처 챙겨보지 못한 <경계도시1>은 그런 영화였을 거다. 민주화운동
단체가 송두율을 초청하고, 송두율 부부가 귀국의 의미를 따져보면서 그 초청을 수긍하고, 귀국하여 막 활동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영화는 송두율의 시선을 따라간다. 그러나 사건이 진행되면서 영화는 그만 '송두율의 시선'을 놓쳐버린다. 감독의 시선이 송두율의 시선과 결별한 것도 아니고, 송두율 자신이 갈팡질팡했기 때문이다. 감독은 기자들의 추궁을 받은 송두율의 설명이 <경계도시1>에서 그에게 주어졌던 설명과 다르다는 사실에 당혹스러워 한다. 송두율은 자신의 입장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몰라 변호사와 상의하지만, 변호사와도 원활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 이 혼란스러움 속에서 그를 규탄하는 집단의 시선이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처음에는 분위기가 좋았다. 보수언론조차도 애저녁에 영장청구를 해둔 검찰에 대한 비판을 할 정도였다. 조선일보조차 다르지 않았다. 귀국 직후 송두율은 조선일보의 분위기도 우호적이라는 측근의 말을 듣고 즐거워한다. 분위기가 반전된 것은 검찰에 몇 번 출두하고 나서부터다. 검찰은 '송두율=조선노동당 서열 23위 최고위원 김철수'라는 도식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송두율은 독일에서의 자신의 활동이 '노동당 최고위원'의 임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양심에 의한 것임을 주장했다. 우리의 언론은 이 공방 속에서 '송두율=김철수'라는 사실관계(?)만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 <경계도시 2>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유야 어찌됐든 송두율이 조선노동당에 입당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조선노동당이 송두율을 김철수라는 이름으로 호명한 것도 '사실'이다. 김철수라는 이름이 한 사람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라기보다는, 공작대상을 폭넓게 호칭하는 보통명사에 가까웠다는 점은 고려하더라도 말이다. 송두율이 북한 당국이 자신을 김철수라 호명하는 것을 어느 시점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도 '사실'로 보인다. 그 정확한 시점에 대해서는 본인도 기억이 희미한 것으로 보이지만 말이다.

여기에서 대한민국의 '
상식'은 이렇게 발동한다. "송두율은 거짓말쟁이다. 그가 숨김없이 진실을 털어놓지 않은 이유는, 무언가 뒤가 구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대한민국의 '상식'을 경험한지 오래된 송두율은 자신의 증언을 미리 논리정연하게 정돈하고 귀국했던 것 같지 않다. 그는 그저 "나는 '노동당 최고위원'으로서 활동한 적이 없고 내 양심에 의해 행동했다."는, 자신의 양심에 대한 전폭적이고 소박한 믿음만을 가지고 귀국한 것이다. 그는 그것이 이성과 양심의 법정에서 통용될 거라고 믿었을 게다. 정말로 그가 뒤가 구렸다면 무엇하러 제 발로 한국에 돌아왔겠는가?

하지만 보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의 시선조차 기자들과, 그에 앞선 변호사의 질문에 일관된 대답을 하지 못하는 송두율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카메라와 독대한 송두율은 피곤하게 말한다. 몇 십 년 동안 냉전이데올로기가 많이 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강고하게 남아있다고. 이 지점에서 나는 하나의 의문에 직면했다. 냉전이데올로기? 과연 그것만의 문제였던 걸까.

물론 냉전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있다. 송두율이 조선노동당에 입당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것만으로 국민여론은 들끓었다. 송두율은 거짓말쟁이가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예전의' 냉전이데올로기가 아직까지도 온존하고 있다는 수준의 문제는 아니다. 만일 그런 것이라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의 강도는 더 약화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정권이 한나라당에 넘어갔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가 정권교체가 가능한 세상으로 넘어온 후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고, 북한이란 정치적 실체에 대해 느끼는 공포감도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록 수구언론에 의해 조성된 것일지는 몰라도 여론은, 송두율의 진실되지 못함을 몰아세웠다. 여기에는 지금껏 송두율에게 우호적이었던 소위 개혁세력의 여론까지 합세했다. 송두율은, 국민들 앞에서 자신의 '과오'를 소상하게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죄인'이었다. 더 작은 버전으로는, 송두율은 민주화운동을 했던 동료들 앞에서 자신의 진실을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인'이었다. 그 때문에 민주화운동 자체의 정당성이 시민들 앞에서 훼손되었다고, 그들은 규탄했다.

송두율이 자신의 양심 속에서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행동했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묻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치자. 하지만 더 흥미로운 것은 송두율을 법으로 재단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송두율이 어떤 측면에서 대한민국이란 국가에 해를 끼쳤는지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다는 거다. 사람들이 그에게 추궁한 것은 법적 판단에서, 혹은 정치적 판단에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어떤 '투명한 도덕'의 문제였다. 송두율 개인의 양심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송두율의
내면을 우리에게 낱낱이 고백해야 마땅하다는 그런 의미의 개인에게 강제된 도덕이었다. 전통적으로는 어떤 종교의 신이나 가질 권리, 몇십 년 전에는 사상을 탄압하는 국가나 가졌던 그 권리를, 신기하게도 온 국민이 다 가지고 있었다.

▲ <경계도시 2>

조선노동당적을 가졌던 그에겐, 더 이상 '경계인'을 참칭할 권리가 없었다. 이것은 그를 비판했던 수구언론만이 취했던 태도가 아니다. 대국민사과를 하고 독일국적 포기선언을 하라고 종용한 것은 그를 초청한 민주화 운동 단체의 동료였다. 송두율에 대한 '관용'을 요구한 진보언론들도 그의 '죄'는 당연시했다. 그 죄는 조선노동당에 입당한 죄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거짓말'의 죄,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의 '내면의 불투명함'의 죄였다. 시시각각 그것이 잘못이라고 몰아세우는 여론 앞에서 오랜 해외생활 끝에 돌아온 지식인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전향'은 할 수 없다고, 자신은 '경계인'이라고 버텼지만, 결국엔 대국민사과와 독일국적 포기선언을 하게 되었다.

송두율의 말들에 당혹스러워하던 영화의 시선은 그즈음에서 균형을 잡는다. 감독은 "그가 김철수라면 그게 뭐 어떠냐?"라고 했던 자신의 말을 기억해낸다. 카메라는 냉정하리만치 투명하게 그의 주변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담는다. 송두율에게 투명함을 요구했던 한국 사회는, 카메라 앞에서 화끈하게 발가벗는다.

송두율은 구속이 되고 나서야 자신의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한국 사회도 송두율을 구속시키고 나서야 분노를 잊고 그를 망각할 수 있었다. 재판정에서의 그는 기자회견장의 그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당당했다. 법은 여론에 의해 '해방 이후 최고의 간첩'이라 불리던 그에게 '북한 방문'에 대해서만 죄를 선고했다. 조선노동당 최고위원으로서 활동한 적이 없다는 송두율의 항변이
수용된 것이다. 훗날 대법원은 독일 국적 취득 이후의 북한 방문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한다. 송두율은 법적으로 무죄가 되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그를 단죄한 후 그를 잊어버렸다.

이것은 국가가 국민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아니라, 범죄집단이 공범자를 받아들이는 방식이었다. 북한은 송두율의 입국을 허가하는 조건으로 당적을 강요했다. 남한은 송두율의 입국을 허가하는 조건으로 인신구속과 전향을 강요했다. 북한의 것을 받아들인 네가 왜 남한 땅의 통과의례는 피하려고 하느냐는 정서마저 느껴졌다. 그렇게 남과 북은 한민족이었다.

송두율은 리트머스 시험지였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리트머스 시험지라면 무언가를 구별해 주어야 한다. 이를테면 국민의 정부 시절의 '사상검증' 사건인 '최장집 사건'이 조선일보와 조선일보가 아닌 것들을 구별하여 '안티조선 운동'이란 것을 촉발시켰듯이 말이다. 하지만 송두율 앞에 우리는 그저 '한국인'일 뿐이었고, 송두율은 거기에 섞이지 못하는 어떤 것일 뿐이었다. 진보를 말하는 사람들은 그 '한국인'들 사이에 섞여, 송두율에 대해 한국 사회의 모순에 대항하는, 어떤 순결하고 숭고한 존재를 투사했다. 우리는 모순을 가진 인간, 그 인간의 내면의 자유를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이 영화는 그런 환상이 좌절당한 지점에서 한국 사회를 직시한다. 여러분은 영화가 끝날 때쯤,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었던 송두율이 파괴당한 그 지점에서 새로이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 걸어나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 우리들 자신이라는 사실도. 1/n의 폭력은 잊혀지지만, 이 영화는 그 불편한 진실을 다시 끌어낸다. '경계도시'의 철창은 송두율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을 아늑하게 감싸고 있는 것이다.

<경계도시 2> 지지 릴레이리뷰 이전 글

<8> '경계인' 되기의 어려움 - 임지현 한양대학교 교수

<7> 어게인 경계인 : 경계에 갇힌 우리의 초상 - 하라 인권영화제 활동가
<6> 불가능했던 한 민족주의자의 귀환 - 이택광 문화평론가 · 경희대학교 교수
<5> 우리 안의 송두율, 망각과 기억 사이 - 박상훈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
<4> 2003년 그리고 2010년, 한국사회를 관통하는 거대한 질문 - 김이환 소설가
<3> 사라진 경계도시를 기억하기 : <경계도시 2>를 감상하는 두 가지 시선 - 이희영 대구대학교 교수
<2>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들 - 추민주 명랑씨어터 '수박' 대표
<1> 채플린과 007, 그리고 <경계도시2> - 서복경 서강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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