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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음모론 권하는 사회

조회 수 2415 추천 수 0 2010.04.17 17:12:14
경향신문 '2030콘서트' 원고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4161800345&code=990000


나는 음모론을 믿지 않는 편이다. 음모론은 ‘이 세상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표현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음모론은 세상이 잘못 움직이는 이유에 대해 몇몇 숨은 권력자들이 나쁜 마음을 먹은 탓이라고 해명한다. 이 가설에서 요구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몇몇 숨은 권력자,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명백하게 나쁜 마음, △그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도록 구조화된 세상…. 이런 가정들은 불합리하지만, 한 사회의 의사결정구조가 불투명하고 지도층에 대한 불신이 강하다면, 사람들은 ‘경험적으로’ 음모론에 설득력이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음모론은 생산적이지 않다. 음모론은 별다른 노력 없이 큰 반향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비합리적이다. 남한에서 그동안 가장 강력했던 음모론은 김정일·김대중 음모론이었다. 군부독재 시절 국가가 만들어내고 ‘잃어버린 10년’ 동안 한나라당이 활용한 이 음모론의 골격은 <반지의 제왕>의 ‘두 개의 탑 동맹’이다. 저 북쪽에 ‘악의 군주’ 김정일이 있어 그의 ‘눈’으로 남한 사회를 샅샅이 훑는다. 남쪽에는 ‘백색 마법사’로 위장한, 사실은 속이 시뻘건 김대중이 매우 현명한 소리를 하는 체하며 교묘하게 ‘악의 군주’를 돕는다. 백색 마법사를 공격하는 ‘용사’들을 괴롭히는 것들은 마법사의 동조자이거나 마법사에게 세뇌당했다. 사태를 설명하고 해결할 원칙을 따져보기 전에 우리에게 손해를 주는 것들은 ‘악’이라고 설명된다. 음모론이란 게 어떤 점에서 문제가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래서 현 정부를 싫어한다 해도 그런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될 거라고 생각해왔다. 가령 ‘대통령은 일본을 위한다’와 같은 루머는 우습다고 생각했다. 이건 세상을 지배하는 모 비밀종교단체가 사탄 숭배자 집단이라는 음모이론가의 주장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설령 그들이 세상을 지배한다 치더라도, 사탄 숭배자일 이유는 뭐란 말인가? 신의 이름으로도 온갖 악행이 저질러지는 세상에서. 대통령이 ‘한국인’이라도 정치를 잘못할 수 있는데, ‘한국인’이라도 사회 기득권을 옹호하는 데는 아무 문제 없는데, 그가 싫다 하여 ‘일본인’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왔다. 정치란 게 공동체의 갈등을 해결하는 문제인데, 반대 당파를 ‘악마’나 ‘외국인’으로 만들어 버리면 얘기가 안 되지 않을까? 그런데 ‘독도 망언’ 의혹 이후 정부의 독도 문제에 대한 대처를 보니, 나조차 음모론이 맞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들 지경이다. 정서적으로 흥분한 국민과는 달리 내심 세심한 대처방안을 준비하고 있을 거라고 믿고 싶을 뿐이다.


천안함의 비극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겠다. 정부가 숨기는 것이 없더라도 충분히 복잡한 사건인 듯하고, 정부가 모든 사실을 알면서 그것을 은폐하고 있다는 상상이 너무 버겁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보수언론과 누리꾼은 마음껏 다른 상상의 날개를 펼쳐 음모론의 천상으로 날아갔다. 이들의 비행(飛行 혹은 非行)은 분명 정부의 책임이다. 정부의 어설픈 정보통제가 음모론이란 독버섯을 양산한 것이다.


한편 피의자에게 ‘죄를 안 지은’ 증거를 요구하듯 언론플레이를 하는 검찰의 모습은 어떠한가. 모 비밀종교단체의 악행을 증명(?)하기 위해 따라다니는 안티사이트 운영진을 연상시킨다. 국가기관이 음모론을 방치하고, 스스로 음모론적 사유에 의해 움직인다면 그 누가 음모론을 포기할 수 있으랴. 음모론에 시달려도 자업자득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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