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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 8점
서동진 지음/돌베개

흥미로운 책. 지겹다는 사람도 있는데, 이 책의 성격 자체가 빠르게 발췌독한 후, 나중에 어느 부분인가를 자료로 쓰고 싶을 때 그 부분을 찾아내서 인용해야 하는 그런 책인 탓이 크다. 그냥 빠르게 빠르게 통독해 버리면 지겨울 일도 없을 듯.


서동진의 논의는 간단히 말하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어떻게 '자기계발하는 주체'라는 것을 형성하는지 계보학적으로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것을 보여주기 위한 충분한 자료를 담고 있다. 그의 논의에 대해선 당연히 옳다고 생각하고, 그럼 그 다음으로 넘어가보자. 그런 '현상'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서동진은 이에 대해 프레시안 인터뷰에서, 이 책은 '자기계발하는 주체'를 규명한 것이지만 '투쟁하는 주체'가 어떻게 생겨날 수 있느냐의 문제에 대해서는 따로 생각해 봐야 할 거라고 답했다. 박권일은 이에 대해 '투쟁하는 주체'와 '자기계발하는 주체'를 구별하는 것은 사실상 (90년대의 자유주의를 부정하는 듯한 최근 서동진의 행보와 관련하여) 80년대 회귀일 수 있다고 비판했다. 박권일의 비판 혹은 우려는 옳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서동진의 정리된 논의에서 그 다음의 논의를 이어갈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이렇게 깔끔하게 여러 영역을 가로지르는 자료로 정리된 '자기계발 담론'에 관한 논의는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내게는 '투쟁하는 주체'가 필요하다는 서동진의 주장도  좀 느닷없이 들린다. 그 주장에는 필히 있어야 하는 중간단계가 생략된 것 같다.  생략된 중간단계의 고리는 자기계발의 시대에 좌파는 "도대체 무엇에 관해 투쟁하자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다. 자기계발 담론을 시대의 조건으로 정의했다면, 그 변화된 시대에 어떤 투쟁방법이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순서 아닌가? 사실 자기계발 담론은 투쟁에 대해 위협적이다. 기존의 좌파 담론을 투박하게 정리하자면, 노동자와 자본가의 갈등축을 기본으로 하고 '노동해방'을 말하면서 자본가의 양보를 얻어내는 방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방책은 '자기계발하는 주체'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계발 담론'은 경영담론이며,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주체로 인지하는 동시에 상품으로 대상화하여 시장에 내어놓는 담론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투쟁의 여지가 없다. 투쟁은 제 물건이 안 팔린다고 시장에 징징거리는 찌질한 행위로 여겨진다. '신자유주의자'의 입장에서 투박하게 말하자면 '지식기반경제'에는 '생산수단'이랄 게 없다. 내 생산수단은 농담삼아 말하자면 친구로부터 중고매입한 40만원 짜리 노트북이다. 많은 서비스 업종들은 딱히 생산수단이랄 게 없고 굳이 회사라는 틀 안에 종속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실제로 회사는 사원을 자꾸 줄이고 모든 사람들은 '자기 경영자'가 된다. 서비스 업종에서 이른바 '노동 유연화'가 관철되는 방식이다. (경제학자들은 '노동 유연화'라는 것이 한국 보수주의자들의 진술과는 달리 고용인력을 탄력적으로 늘였다 줄이는 '수량적 유연화'에만 국한되지 않는 훨씬 더 복잡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한국 사회의 '노동 유연화' 담론이 - '수량적 유연화'로서 - 어떻게 수용되었는지에 대해서만 나온다.)  


생산직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을 잠깐 잊고 이들에게만 집중하자면, 이들의 '노동 유연화'는 사실상 관념적인 차원에선 '노동 해방'이라는 점에서 좌파 담론을 심각하게 교란한다. 이런 측면에서 신자유주의는 물구나무선 마르크스주의이며, 전도된 노동 해방 담론이다. '자기계발 담론'이 단순한 허위의식이 아닌 이유는 그래서다. 그것은 마치 노동이 해방된 (아무도 당신을 종신고용하지 않는) 세상에서 당신이 가져야 할 자질, 아마도 지녀야 할 윤리, 어쩌면 갖추어야 할 존엄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의 자기계발 도서들이 그 정도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가능성은 충분하다. 푸코적 계보학으로 '자기계발 주체'를 탐구하겠다는 이 책에 인용된 자기계발 에세이스트 구본형은 '푸코'를 인용하며 자기 할 얘기를 한다. 그의 푸코 인용이 딱히 '틀렸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보고 있으면 숨이 턱 막힌다.


한편 젊어서 무슨 일을 하든 나중에 살 수 있으니 겁내지 말라는 박원순, '십 년을 또라이질 하면 인정받는다'는 격언(?)을 설파하는 진중권, 20대 문화컨텐츠 생산자들이 필요하다는 우석훈을 생각해 보라. 청년들을 향한 이들의 요구는 서비스 업종에서 관철되는 '관념적 노동해방 담론'과 얼마나 다른가? (엄기호의 표현으로) '노동해방'이 아니라 '노동시장 편입'을 갈구할 수밖에 없는 오늘날의 청년들이 공무원과 대기업 정규직을 지망하고, 이에 대해서 좌파지식인들이 젊은이들이 어째서 그렇게 사느냐고 한탄할 때, 도대체 어느 쪽이 '신자유주의자'인 것인가?


물론 나는 여기서 박원순, 진중권, 우석훈의 요구가 신자유주의적이라거나, 자기계발 담론 비판에 아무 의미도 없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자기계발 담론에 대한 첫번째 투쟁의 지점은 물론 자기계발 담론이 은폐하는 어떤 지점에 있을 것이다. 비정규직 생산직 노동자가 비정규직이란 이유로 공장에서 고용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고 볼 수는 없다. '지식기반경제'를 실천하는 대기업 노동자가 몇 년 동안 아이디어를 쥐어짜내고 퇴사를 할 때 그가 자본-노동 관계를 벗어나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니까 '모두가 경영자인 시대'라는 환상의 커튼을 걷어 버리고 '자기계발 담론의 물질성'을 폭로하는 것을 투쟁의 첫번째 지점이라 정식화해 보자. 아마도 이 지점에서는 고졸-대졸 임금격차 문제와 비정규직 문제 등을 쟁점으로 삼을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또 다른 차원도 있다. 자기계발 담론 자체 내부의 계층문제라는 것도 있는 것이다. 서동진은 '지식기반경제'를 '환상'이라 칭했다. 물론 그가 '환상'이란 단어를 쓸 때는 '지식기반경제'라는게 온전한 허구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었을 거다. 여하튼 생산노동을 위해서든 서비스업을 위해서든 노동생산성 재고를 위한 재교육이 종종 필요한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실정에서 '자기계발'의 비용이 온전히 개인에게 전가되어 있는 것은 '자기계발 담론' 내부에서도 모순적인 것이 아닌가? 형편이 좋은 이들은 '자기계발'을 할 수 있겠지만, 형편이 안 좋은 이들은 자기계발을 할 래야 할 수도 없는 이런 현실을 지적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아마도 '자기계발적 주체'가 자발적으로 사회에 불만을 터트리게 되는 고유한 순간일 것이다. 부르주아와 평등한 자기계발의 기회를 요구하는 이들의 욕망은 이택광이 '쾌락의 평등주의'라고 부른 바로 그것일 게다. 그런데 좌파 담론이 자기계발 담론 자체를 그저 해소되어야 할 것으로 취급한다면, 이들의 욕망을 셈할 방법이 없다. 이들을 부정하고 고졸 비정규직 노동자만 쳐다보면서 '투쟁'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위주체는 말할 수 없는 법인데 말이다. 촛불시위에 흘러나온, 기존의 진보진영과 거리감을 지녔던 거리의 주체들은 아마 이런 욕망을 지닌 사람들이었을 거다. 이런 이들과 이야기를 하려면 우리는 자기계발 담론의 내적 논리 자체를 잘 이해해야 한다. (가령) 자기계발 담론에 무지하고 그것을 경멸하면서도 (가령) 그 현상의 발현인 촛불시위를 무비판적으로  찬양하는 방식으로는 좌파 담론이 대중에게 다가서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평등한 자기계발의 기회를 요구'하는 목소리에서 어떻게 진보적 가치를 담지하는 정책적 접근이 가능할 것인지를 깊이 고민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필요한 차원은 자기계발의 영역 그 자체에서 필요한 담론투쟁이다. 자기계발 담론은 자본주의의 것, 혹은 신자유주의의 것이라(고만) 치부한다다고 생각해 보라. 그러므로 그것을 거부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관점을 취한다면, 좌파는 자기계발을 해서는 안 된다는 우스운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자기계발이란 건 본시 윤리적 문제와 긴밀하게 얽혀 있었고, 그런 의미에서 인문적이었다. <국가>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자기계발 도서라고 보지 못할 것은 뭐란 말인가? 현행 자기계발 담론의 (은폐된) 물질성을 폭로하는 것을 넘어, 좌파들의 구조적 분석의 틀 속에서 상대적으로 도외시했던 개인의 삶의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 박원순의, 진중권의, 우석훈의 주장은 그런 의미에서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서동진의 성실한 분석은 주로 자기계발 담론의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을 파해치면서 아마도 첫번째 차원의 문제를 제기하는데 열심인 것 같다. 거기에 대해선 비판도 우려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책의 논의가 두번째 차원이나 세번째 차원의 논의로 이어지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 이 책의 성실한 작업을 토대로 우리는 그 다음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애초에 그런 의도로 쓰여지지 않았을까? 사실 서동진을 비판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서동진의 논의를 이어받는 것이다. 이 책은 그렇게 취급될 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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