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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소위 ‘20대의 목소리’란 것에 대해

조회 수 2014 추천 수 0 2009.02.21 23:42:51


오마이뉴스에서 릴레이 인터뷰의 한 주자로 선정되어 인터뷰를 했을 때 이런 얘기를 했었다. (인터뷰 외적인 얘기라 반영되지는 않았다.)


‘젊은이들에게’라는 타이틀을 붙여놓고 진보적입네 하는 '어른들'과 기존의 경쟁구도에서 벗어나 있는 젊은이들 우르르 데려다가 훈수를 늘어놓는 것이 보통의 20대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다고. 일단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충고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처지와 생각을 말하는 것인 것 같은데, 그런 것이 없다면 그런 것을 이끌어내는 기획을 만들어 주는 것이 오히려 언론의 역할이 아니겠느냐고.


가령 고시나 자격증 시험, 공무원 시험을 공부하는 이들, 입사 원서를 수십 개씩 내는 이들을 그들끼리 불러내어 대담(혹은 잡담) 같은 것을 시킨다거나, 학벌이나 학력에 따라 다양한 처지에 있는 젊은이들을 유형별로 불러내어 인터뷰 하거나 얘기를 나누게 하는 방법 등이 있을 것이다.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나 그나마 이런 것에 근접했던 것은 경향신문에서 언젠가 했던 “88만원 세대를 구출하라” 시리즈의 몇몇 인터뷰 정도였던 것 같다. 오마이뉴스의 경우 인터넷 매체의 특성상 이런 기획을 지속적으로 하기에 쉬운 위치에 있는데도 그 장점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 같다. 아마도 그런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어찌됐건 누구나 20대들에게 무언가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할 뿐, 그들에게서 그들의 처지에 대한 솔직한 심경을 들으려고는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 때문에 다음 인터뷰 주자를 추천해 달라는 기자님의 말에 나는 주호민 등 웹툰 작가들을 뽑았는데, 그 이유는 20대 글쟁이들에 비해서는 오히려 이 웹툰 작가들이 20대들의 삶과 정서를 더욱 대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건 웹툰 시장이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 젊은이들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글쟁이들은 자신들의 특수한 관심사에 대해 발언하기 때문에 세대와 엮이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그리고 어쩌면 엮이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88만원 세대” 담론의 유행 이후에 자신의 모든 글을 “나는 88만원 세대다.”라는 출발점에서 시작하는 글쟁이나 블로거들이 있는데, 예외도 있겠지만 그렇게 써서는 결국 깊이 있는 얘기를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시 얘기를 돌려 왜 다들 20대를 운운하면서 실제로 뻔히 눈에 보이는 평범한 20대들의 목소리를 수집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지 생각해 보자. 어쩌면 그것은, 스스로 비정규직 현장에 뛰어든 20대나, 학자금 대출과 아르바이트로 분투하는 대학생활을 보내는 지방대생 정도를 제외하면, 부모의 자산을 축내며 이런저런 준비를 하는 20대들 일반을 여전히 ‘팔자 좋은데 무능한 놈들’로 치부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특히 그들의 학벌이 ‘인 서울’ 정도라도 된다면, 더 이상 말을 들을 것도 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애써 ‘말’할 만큼 시간도 없는 그들인데 분위기도 이렇다면 아무 말도 못 하는 것이 당연하다. 말하자면 한국 사회의 계급재생산 구조였던 ‘학벌 사회’가 삐걱거리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아직 가지지 못했거나, 가졌더라도 정교화시키지 못한 것이 현재의 담론상황이라 볼 수 있다. 세대론은 비교적 이것을 ‘나이브하게’ 표현한 것이지만, 이를 정교하게 표현해야 할 시점에 어떤 이들은 세대론 자체가 오류라고 비난하는 형국이다. 


프레시안에 88만원 세대론을 둘러싼 논쟁을 두고 장문의 글을 올렸건만 그 글의 논점이 무엇인지 이해한 이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나마 하편의 경우 이택광이 직접 “20대 자질론 비판”으로 논점을 잡아주는 수고를 했지만, 상편의 경우에는 거의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세대론에 계급의 문제가 깔려 있다는 박권일의 말에 “그럼 그걸 계급이라 불러야지, 왜 세대라고 부르냐?”고 반응했던 자칭 좌파 몇 명과 변희재 등 빅뉴스 멤버들의 반응이 비판되지 않는다면 세대론을 조선일보스럽게 활용하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물론 ‘그 좌파’들의 말은 “당연히 세대론이란 건 조선일보 쪽으로 가기 마련이고, 애초에 그렇게 쓴 게 잘못이었다.”라는 것일 게다. 그들이야 그렇게 말하면 논리적으로 일관되기나 하지 일부 우석훈 지지자들은 내 글을 비판하면 우석훈을 도대체 어떻게 방어할 셈인가. 논점은 다 날려버리고, “변희재를 진지하게 상대해준 네가 더 잘못했다. 그래서 세대론이 조선일보 흙탕물에 빠진 거다.”라고 우기면 만사형통인가? 글만 읽어보면 알겠지만 나는 우석훈이 변희재를 상대해줬다는 이유로 비판한 것도 아니다.


박권일의 말을 빌리자면 “'불안정노동이 세대문제의 형태로 드러난다'는 건 주장도 아니고 그냥 사실명제”다. 불안정노동의 확산이 노동시장에 신규 진입하는 이들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끼친다는 의미다. 세대론이란 것은 그런 현상들의 다발을 모아 구체적인 피해자 집단을 상정한 것이다. 이것을 죽어도 세대론이라고 칭하면 안 되고 계급문제라고 칭해야 한다고 얘기하면, 내가 프레시안 기고문에서 비판했던 것과 같은 난센스가 생겨난다. 모든 사회문제가 자신들의 고유한 이름을 갖지 못하고 무조건 계급문제라고 불려야 한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이 한심한 논의를 보다가 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아마도 2002년, 개혁국민정당의 창당 전후일 것이다. 훗날 노빠들과 척지게 되는 강준만도 이때는 개혁당 창당을 위한 지방순회 강연의 연사로 나왔고 그 강연 내용은 동영상으로 인터넷에 올라왔다. 그때 강준만은 너스레를 떨며 이렇게 말했다. “강준만이가 좌파들이랑 불화가 있는 것처럼 묘사가 되는데... 사실 그런 불화 없습니다. 가령 학벌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이게 계급문제가 아닙니까? 이거 계급문제에요.” 2009년의 변희재가 타임머신을 타고 이 시대로 돌아간다면, “서울대 망국론이 계급문제라는 사실을 폭로한 강준만”이란 제목으로 그가 386 세대의 계급투쟁의 일환으로 학벌사회 문제를 제기했다고 규탄했어야 할 게다. 그리고 어떤 좌파들은 또 여기다 대고 “역시 학벌이라는 범주는 분석의 대상으로 가능하지 않음을 강준만 스스로 실토했다. 계급!!!! 계급!!!!!!!! 계급!!!!!!!!!” 3창하며 DDR을 쳤어야 할 게다.


부자 부모를 둔 어느 20대가 다소 학벌이 딸린다 해도 서민 부모를 둔 명문대생보다 잘 먹고 잘 살 가능성이 크다는 식의 반례가 ‘학벌사회’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되지 않듯, 세대 문제라는 문제제기는 가능하며 타당하다. 물론 학벌사회에 비하면 세대라는 규정은 훨씬 더 느슨한 것이며 계층별로 구분된 더 세밀한 분석을 필요로 한다. 좌파들의 계급성이란 것은 이런 분석을 수행하면서 드러나야지, 그냥 밑도 끝도 없이 세대론이란 건 원래 우파 것이다라고 말하고 끝날 일이 아니다. ‘가이샤의 것은 가이샤에게’ 뭐 이런 얘긴가. 부르주아에게서 물질을 뺏어야 한다고 생각할 좌익들이 담론 영역에서는 모든 개념을 부르주아에게 갖다 바치고 우리는 ‘계급’이란 단어 하나만 지키면 족하다고 믿는다면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담론 시장에서 몸소 안분지족을 실천하는 그들의 청빈한 자세는 일견 고고해 보이기는 하지만 전선에서 대립하는 이의 입장에는 짜증이 난다. 가끔 뒷통수나 치고 말이지.


박권일은 88만원 세대 담론에 한없이 가까운 이들이 이 책을 읽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리고 일부 좌파들은 ‘그건 원래 우파 담론이니까 당연하지.’라고 반응했다. 사기치고 자빠졌네. 그럼 계급 담론은 경향적으로 ‘명문대생’이 많이 보지, 고졸이 더 많이 보나? 21세기 초 잠깐 대학가를 주름잡다 사라진 어느 극좌 학생정치조직은 명문대의 치의대생들을 구성원의 축으로 삼았다. 그래서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냥 그렇다는 얘기다.


여하간 나는 88만원 세대 담론을 소위 명문대생들이 주도적으로 접한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본다. 고졸 20대 블루칼라들이야 책이 말해주지 않아도 자신들의 상황을 잘 알고 있지만, 88만원 세대론은 “너희들도 뛰어봤자 대다수가 비정규직이야.”라고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학벌사회라는 것은 균질화된 학벌 엘리트들의 대다수를 대기업들이 안정적으로 고용해줄 때에나 성립하는 개념인데, IMF 이후 이 체제는 끊임없이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래서 대학생들의 삶도 더욱 치열한 경쟁에 노출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자’의 숫자는 점점 줄어만 간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의 상황은 사실상 ‘의자’로의 신규진입이 동결되었다고 느껴질 정도다. 명문대생들조차도 몇 학번 선배나 그냥 졸업하자마자 아싸리 취직해버린 자신의 동기들에 비할 때 자신의 삶이 하늘과 땅 차이의 레벨로 벌어졌다는 사실을 흔히 경험하고 있다. 이전에는 인문대가, 경제위기 이후에는 경제/경영대 출신들까지도. 말하자면 그들 눈앞에서 문이 닫히고 있는 것이다. 달이 차오른다~~ 가자!!


어쨌든 니들은 좀 나은 편 아니냐고 한다면 그것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선배들’에 대한 이들의 열패감이야말로 세대 문제에 대한 하나의 증거가 아닐까. 사회문제가 만들어지는 문맥에서 이들이 겪는 사소한(?) 고난은 몹시 중요하다. 더구나 이 문제들을 해결할 방법을 찾는 문맥에서는 이들의 역할이 더 중요할 것 같다. 말하자면 이들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다 했고, 그래서 경쟁에서도 승리를 거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날에 희망이 없는 그런 열패자들이다. 학벌사회의 승자이면서 잉여인간이 된 것이다.


물론 이 잉여인간들 밑에는 부속품 취급을 받게 된 사람들이 있다. 동희오토를 다녀온 박권일의 말에 의하면, 기대수준과 현실수준 사이의 괴리가 제일 크고 좌절감도 큰 집단은 명문대생도 고졸 블루컬러 20대도 아닌 지방대 출신 20대들인 것 같다고 한다. 괜찮은 일자리 자체가 적어지면서 지역에 원래 존재하던 괜찮은 소수의 일자리에 수도권 명문대 출신들이 상당히 유입되는 현상이 생겼고, 그로 인해 이 집단은 말 그대로 샌드위치가 되었다. 동희오토의 20대들 상당수가 사실 대졸 또는 대학 중퇴인데, 입사할 때 학력을 많이 속이고 있다. 회사측에서 지방대 졸업생을 고졸보다 경쟁력이 없는 존재로 치부하기 때문이라 한다. 과거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정규직'같은 블루컬러라면 중간계급의 생활수준이 보장됐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런 모델이 작동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안정된 학벌사회’에서 ‘혼란스러운 학벌사회’의 이러한 이행을 한국적인 맥락에서의 포디즘에서 포스트 포디즘으로의 이행의 한 단면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상의 생각은 박권일의 얘기를 대충 내 식으로 정리한 것이고, 내 기억으로도 그는 과거 자신의 블로그에 이런 문제의식을 담은 짧은 글을 남긴 적도 있었는데, 지식과 경험의 한계로 <88만원 세대>에서 이를 정밀하게 설명하지 못한 것이 매우 아쉽다고 한다.


이런 정밀함의 한계가 아마도 이 책을 386타도를 위한 팜플렛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나오도록 한 원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한계는 향후의 정밀한 분석을 통해 돌파되어야 한다. 그것이 언급한 세태를 통째로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이 담론이 이렇게 이해받지 못하는 것 자체가 20대들의 집단적인 침묵을 강요하는 현재의 세태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 같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아직도 오늘날의 젊은이들 일반에게 어떤 시련이 닥쳤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는 토양에서 “20대들이 이러이러하게 자신들을 바꾸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를 요지로 하는 ‘20대 자질론’이란 악성 잡초도 자라나게 되는 것일 게다.


나같은 사람은 ‘20대의 목소리’를 낼 처지가 아니고 (먹고 살 생각을 하면 아득하지만 그 고민의 양상이 일반적이진 않다.) 그것들을 수집할 만한 물질적/정신적인 여유도 없다. 하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20대 자질론’이나 ‘세대론 무용론’ 등의 잘못된 담론 지형을 비판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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