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미디어스 원본 주소: http://j.mp/byCUZC


“독자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한겨레신문 15일치 1면에 실린 편집국장 명의의 기사 제목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님을 사랑하는 많은 분들이 <한겨레> 편집국장의 정중한 사과를 정중하게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 “오랜 친구와 절교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입니다. 휴우”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트위터에 올린 글이다. 이렇게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문제의 발단은 한겨레신문 11일치 33면 ‘한홍구-서해성의 직설’이었다. 이 코너는 애초에 “DJ 유훈통치, ‘놈현’ 관장사 넘어라”란 제목이었다. 이에 대해 유시민이 ‘놈현’이라는 전직 대통령을 심하게 비하하는 용어를 썼다는 이유로 개탄하며 한겨레신문을 절독해야겠다고 선언했다. 트위터에서의 일이었다. 유시민이 트위터에 글을 올린 이후 많은 사람들은 그의 분노에 동참하면서 오피니언 훅 사이트 hook.hani.co.kr/ 에 항의 덧글을 다는 등 한겨레신문에 거세게 항의했다. 한겨레신문의 사과는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가르랑말이었나, 으르렁말이었나


먼저 구체적인 사건의 맥락에서 사건의 잘잘못을 가려보자. 유시민이 문제삼은 것은 ‘놈현’이란 표현이었다. 그것이 정권말기에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저주하는 단어로 쓰였는데 그걸 차용한 것은 그를 모욕하는 일이었다는 거다. 여기서 논점은 두 가지 정도가 된다. 첫째는 ‘놈현’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은 ‘노무현’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하는 것인가라는 문제이고 둘째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의 문제다.


사실 첫째 논거를 받아들이긴 어렵다. 대담자인 서해성이 무슨 생각으로 ‘놈현’이란 말을 사용했는지는 대담전문을 보면 맥락이 나와 있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민적이고 직설적인 스타일을 친근하게 표현하기 위해 그런 말을 썼던 것 같다. “먼저 범생이 털을 뽑아야 하죠. ‘놈현’처럼.”라는 발화도 그렇고 대담 말미에 실린 ‘직설 잔설’을 봐도 그렇다. 이에 대해 ‘놈현’이란 말이 원래 그렇게 쓰이던 말이 아니지 않느냐는 항변도 가능하겠지만, 적절한 것은 아니다.


어떤 말을 가르랑말(화자의 긍정적인 정서를 담아 남의 호감을 사려는 언어행위)과 으르렁말(화자의 부정적인 정서를 담아 남을 위협하거나 모욕하려는 언어행위)로 나누는 것은 탄생 당시의 맥락은 아니다. 이를테면 ‘놈현’이 처음에 어떻게 탄생했든 간에 누군가 그것을 다른 의미로 전유해서 사용하려고 한다면, 그 시도는 부당한 것이 아니다. 비슷한 사례로 ‘노빠’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애초에는 ‘노무현의 광신적 지지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탄생한 으르렁말이었으나, 참여정부 임기의 어느 순간부터는 ‘노빠’들 스스로 자신들을 자랑스럽게 호칭하는 가르랑말이 되었다. 그러더니 최근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분위기에 묻어서 “노빠라는 호칭을 쓰는 것은 수구기득권 세력 뿐이다.”라는 식의 얘기도 나온다.


이런 사례에도 보이듯 말에 담긴 정서는 상황이나 화자에 따라 바뀌기 마련이다. 특히 말을 다루는 사람들은 한 단어의 의미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할 권리가 있다. 설명이 충분치 않았다면 모르겠으나, 그럭저럭 설명이 제시된 타인의 재해석을 “노무현을 모욕하는 것”으로 재단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유시민이나 노무현 지지자들의 한겨레신문/서해성 비판의 근거는 여기에도 있었던 것 같은데, 만약 이 사태의 논점이 이 부분 밖에 없었다면 그들의 행위는 “말을 다루는 사람들에 대한 부당한 집단압력” 이상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와 미학의 문제


오히려 두 번째 논거인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의 문제가 복잡하다. 먼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와 표현의 자유가 충돌하는 문제가 있다. 다음으로 한겨레신문을 정론지로 봐야 할 것이냐 상업지로 봐야할 것이냐의 문제가 있다. 마지막으로 설령 한겨레신문이 정론지라 할지라도 ‘직설’을 표방한 지면에 주어져야 할 자유는 다른 것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문제제기가 가능하다.


사실 한국의 언론들은 정론지를 표방하면서도 대중적인 상업지의 성격을 가진다. 그렇기는 해도 한겨레신문처럼 한국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소수자의 이념을 대변하고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성격이 약한 잡지가 스스로를 ‘상업지’로 칭하면서 ‘상업지니까 이 정도는 봐달라.’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설령 상업지임을 인정받는다 하더라도, 그 경우엔 신문 소비자의 주류인 ‘노무현 지지자’의 ‘취향’에 복종해야 한다는 자본의 논리가 작동하기 때문에, 사과를 안 할 방도가 없다. 그런 점에서 한겨레신문의 사과는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이런 사태를 예상하지 못했던 기존의 편집이 의외였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한겨레신문이 ‘정론지’의 정체성으로 유시민의 항변과 한번 붙어보려고 했다면 논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예외화법의 문제다. 이를테면 한겨레신문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칭할 때마다 ‘놈현’이라고 쓴다면 그건 언론도 아니겠지만, 특정한 맥락에서 특정한 의도를 지니고 그렇게 쓸 수 있는 ‘자유’는 주장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편집한 대담자와 편집기자의 ‘양심’(이 말은 한국어의 일반적 화법에서 사용되는 ‘양심’이 아니라, ‘양심적 병역거부자’와 같은 단어에서 사용되는 그런 ‘양심’이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한겨레신문은 그런 자유를 주장했어야 했다.


한편 한겨레신문이 주장하지 않은 자유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미학적 가치에 대한 평가는 남는다. 나는 한겨레신문의 표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노무현’을 ‘놈현’으로 쓰는데, 왜 ‘김대중’은 고작 ‘DJ'로 내버려둔단 말인가. 속어 컨셉으로 제대로 가려고 했으면 그 기획의 제목은 “슨상님 유훈통치, 놈현 관장사 넘어서라”가 되었어야 했다. 김대중은 DJ로 쓰고 노무현은 ’놈현‘으로 쓰는 ’차별‘을 보이니 노무현 지지자 입장에서는 유독 노무현만 우습게 보이는가 싶어 ’화르륵‘했을 법도 하다. 물론 내가 말한 대로 썼더라도 욕은 바가지로 먹었겠지만, 의도를 강변하기는 더 쉬웠을 거다.


(참고로 ‘슨상님’이란 말도 참 재미있다. 이것은 호남 사람들이 애정을 담아 김대중을 표현하는 ‘선생님’이란 가르랑말을 호남사투리로 변환해서 만든 으르렁말이었는데, 시대가 바뀌면서 오히려 젊은 친구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의미로 ‘슨상님’이라 표현하곤 했다. 서거 국면에서 그런 말들을 듣고 말이란 게 참 조변석개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유시민의 ‘종교의 자유’를 위해


또 생각해봐야 할 것은 ‘관장사’란 표현이다. 나는 ‘놈현’이란 표현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관장사’에 문제를 삼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겠다. 이것은 절대로 고인을 모욕하는 말이 될 수 없다. 가령 “교회가 예수를 팔아 ‘천국 장사’를 하고 있다.”라고 말했을 때, 이게 어떻게 예수를 모독하는 말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 말이 비판하는 것은 명백하게 살아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살아있는 사람들은 정치인이다. 정치란 건 적당히 속된 것이고, 흔히 장사에 비유되는 것이다. 문제는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장사를 하느냐, 상도덕을 지키느냐의 문제지 장사 자체는 아니다. ‘관장사’란 표현이 다른 콘텐츠 없이 고인에 대한 애도심리에 기대는 태도를 비판한 것이라면, 이에 대해 비판하거나 반박하면 될 일이지 화를 내야 할 이유는 없다.


이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차라리 종교적인 태도다. 대형교회 앞에 가서 “교회가 예수를 팔아 ‘천국 장사’를 하고 있다.”고 말하면 내가 사탄 소리 들을 것이 분명하듯이 말이다. 하긴 조선일보에 가서 “천안함 장사 하고 자빠졌네.”라고 말하면 국가를 능욕하고 희생장병들을 모독한 빨갱이 소리를 들을게 뻔하니, 이런 식의 오도된 종교성이 한국 정치의 특징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적어도 노무현을 사랑한다는 사람들은 한국 정치를 발전시키겠다는 사람들인데, 조선일보와 비슷한 반응을 보여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백번 양보해서 나는 유시민의 종교의 자유를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게 우리나라의 국교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종교를 신앙하는 이들끼리 모여서 ‘관장사’라는 표현을 규탄하는 부흥회를 하든 말든 상관하진 않겠으나, 그 정서를 집단적으로 표출하여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을 핍박하면 그것은 크나큰 문제가 된다. 대한민국 헌법을 존중하는 유시민이 모를 리 없듯이, 우리의 헌법은 종교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다. 제 종교를 가지고 남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다. 물론 그런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광신도는 어느 사회에나(특히 미국과 한국에 많이) 존재하지만 말이다.


한겨레신문과 노무현 지지자들이 그래야 했던 맥락?


이 사건의 잘잘못의 문제는 위와 같이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사건 뒤에 숨겨져 있는 다른 맥락들에도 주목하고 싶다. 이를테면 한겨레신문이 굳이 속어를 사용하면서 민주당과 참여당 비판을 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문제가 된 한홍구와 서해성의 대담 ‘직설’을 보면, 재미있기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직설적이진 않다. 그 이유는 그들이 속어를 덜 써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민주당이나 참여당을 비판하는 위치가 그리 명료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참여당의 정치행위를 ‘관장사’라고 칭할 때, 한겨레신문은 그 ‘관장사’에 적극 동참한 신문은 아니었던가? ‘관장사’만 해서는 안 된다는 건 분명하지만, 그렇다면 한겨레신문이 제시한 다른 콘텐츠란 것은 무엇인가? 한겨레신문이 참여정부의 무엇이 계승할 만했고 무엇이 비판받아야 한다는 식의 평가를 드러내지 않는다면 허망한 얘기다. 한겨레신문은 평소 진보언론임을 자임하면서도 선거 때만 되면 진보정당을 외면하는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차마 진보정당 포지션으로도 비판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선거 이후 한겨레신문이 선거 기간 동안 기를 쓰며 도왔던 민주당과 참여당의 선거전술을 비판하는 것은 나름의 의미가 있겠다. 하지만 내용적으로 밋밋한 비판을 하려다 보니 섹시한 수사를 추구하게 된 게 아닌가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편으로 노무현 지지자들이 이번에 한겨레신문에 분통을 터트리게 된 이유도 이번 사건만으로는 해명할 수 없다. 참여정부 말기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검찰 수사 당시의 언론보도에 대해, 노무현 지지자들은 많은 불신을 가지고 있다. 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에 대해서도 그렇다. 경향신문이나 한겨레신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가장 인기가 없었을 때는 비판에 나서다가, 그의 서거 이후 여론이 반전하자 사과문을 올렸다. 그런 행동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오히려 참여정부와 노무현에 대한 모든 비판을 적대시하는 노무현 지지자들의 태도에 더 문제의식을 지닌다.


그러나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이 과거 자신들의 보도행동에 대해 제대로 된 재평가를 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이를테면 참여정부 비판이나 노무현 비판 중에서 어떤 것은 제대로 된 언론의 비판이었고, 어떤 것이 섣부르거나 편견에 의한 것이었는지를 추리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다. 매일매일 신문을 생산해야 하는 그분들에게는 무리한 주문일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지나간 사건에 대해선 아무도 잘잘못을 가리지 않고 여론에 부화뇌동하는 것이 한국 사회라면, 전망이 어둡다. 참여정부에 대한 올바른 평가도 불가능하고, 이렇게 사건이 터질 때마다 성난 독자들을 위해서 사과하는 것밖엔 방법이 없을 것이다. 한겨레신문이 나름 할 수 있는 말이 있었음에도 할 수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트위터


유시민 전 장관은 이 사건을 통해 트위터의 묘한 성격을 보여주었다. 가령 나 같은 사람에게 트위터는 사적인 공간이다. 내가 거기서 뭐라고 하든 영향받는 사람도 별로 없고, 그렇기에 내가 느낀 것들을 마음껏 기술할 수 있다. 하지만 유시민에겐 그렇지 않다. 유시민은 그저 신문을 보고 너무 화가 나서 트위터에 한마디 쓴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식의 사적인 발화가 정치적인 풍파를 일으켰다.


공적 역할을 담당하는 이들(‘공인’이라 쓰면 무슨 ‘연예인’을 가리키는 것 같아 편의상 이렇게 늘렸다.)에게 트위터가 어떤 도구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가령 미국의 경우는 기자들의 트위터에 대해서도 윤리강령을 제시한다고 한다. 기자들이 트위터에 올리는 글은 그것을 보는 이들에게는 결코 사적인 얘기일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한다. ‘유시민 사례’는 그와 비슷하게 트위터를 대하는 윤리가 사람에 따라 다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특히 유시민의 트위터를 보고 한겨레신문에 분노한 이들은 문제의 대담을 제대로 숙독하지 않은 채 감정적으로 비판에 동참했을 가능성도 크다. 트위터 상에서 이루어지는 취향의 정치, 파편화의 정치에 대한 비판적 거리두기가 필요함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미디어스] 한겨레신문이 유시민에게 사과한 이유는? [20] [2] 하뉴녕 2010-06-18 5363
1200 [레디앙] 누구를 위한 진보정당 운동인가 [35] [1] 하뉴녕 2010-06-16 7810
1199 우정호의 센스 넘치는 인터뷰 [1] 하뉴녕 2010-06-16 4619
1198 어제 경기 요약 하뉴녕 2010-06-13 2266
1197 거리응원과 광장에 관한 단상 [6] 하뉴녕 2010-06-12 1852
1196 박정석 스타리그 본선 진출 ㅊㅋㅊㅋ [3] 하뉴녕 2010-06-12 2339
1195 [한겨레 hook] 민주당이 좌파다 [8] 하뉴녕 2010-06-10 4030
1194 6.2 지방선거 결과 요약 [25] [1] 하뉴녕 2010-06-05 3992
1193 고려대 인문학포럼 file [1] 하뉴녕 2010-06-04 2846
1192 [갤리온] 사이버 공간의 쾌락과 위험 [2] 하뉴녕 2010-06-02 3026
1191 [성심교지] 대학생, 지방선거에서 무엇을 고민할 것인가 [3] [2] 하뉴녕 2010-06-01 7037
1190 [펌] 노회찬 토론회 어록 [3] 하뉴녕 2010-05-31 3786
1189 '심상정 사퇴'에 붙인 단상 [52] [5] 하뉴녕 2010-05-30 3753
1188 [펌] 노회찬 서울시장후보 장외토론회 [6] 하뉴녕 2010-05-28 3506
1187 [정책간담회] 게임, 게이머, 노동권을 말하다 file [7] 하뉴녕 2010-05-27 3216
1186 진보신당 TV광고 후원 부탁드립니다. [3] 하뉴녕 2010-05-26 2113
1185 파견노동 확대 토론회 file [2] 하뉴녕 2010-05-24 1911
1184 [작은영화제] 노동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file [7] 하뉴녕 2010-05-24 2292
1183 [펌] 심상정의 노무현 1주기 추모 발언 하뉴녕 2010-05-23 3470
1182 대세는 패패승승승! [3] 하뉴녕 2010-05-22 24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