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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마거릿 대처와 노먼 테빗, 키스 조지프의 정치적 원조 아래에서, 그리고 밀턴 프리드먼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 쿠데타 이후 '신자유주의' 정신훈련의 세월을 보낸 오늘날, 많은 이들이 윌리엄 비버리지 경을 -영국 복지국가의 아버지가 아니라면 산파임은 분명한- 사회주의자(사회민주주의 정책에 대한 좌파 비평가가 아니라면)라기 보다 자유주의자로 생각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비버리지는 종합적인 복지국가를 설계한 자신의 청사진을 좋은 사회라는 자유주의 개념의 합리적이고 당연한 실현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근본적으로 자유주의적인 것들의 실현을 가장 바란다고 생각한다. 자유주의라는 훌륭한 삶의 전통을 지닌 새 세상으로 전진하게 하는 것들이 실현되기를 바란다.'

'모든 기본적인 자유를 평등하게 누리는' 것이 '자유주의의 궁극적 목표이기 때문에......우리는 개인의 권리를 증대시키기 위해 사회의 조직된 권력을 이용할 수 있고 또 이용해야만 한다.

'그리고 증대된 자유와 권리를 모든 개인이 평등하게 누리려면 사회는 그 구성원 모두가 '결핍과 결핍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고, 실업이 조장하는 무위도식과 무위도식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도록' 보장해야 한다.

- 지그문트 바우만, <새로운 빈곤> p87-88


좌파가 소외된 민중과 함께 하기 때문에 그에 대해 자유주의자가 예의를 갖춰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자유주의자가 좌파에 대한 예의 따위는 없는 '싸가지'라도 스스로 보편적인 국민의 '자유'의 성취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인가? 내 생각엔 후자가 더 나은 상황같다. 자유주의자가 빈곤층에 대한 도덕적 부채의식을 좌파에 대한 예의로 전환시키는 것보다는, 모든 사람이 사회의 보편적 문제와 소외계층에 대해 고민하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다.


굳이 이 논쟁을 이념논쟁으로 본다면 양측에는 각각의 논거가 있다. 한쪽은 현실사회주의의 파탄과 시장경제의 완전한 승리를 '역사적 증거'로 채택하고 상대방의 비현실성과 몽상성을 질타할 것이다. 다른 한쪽은 자본주의의 이윤축적 방식의 변동과 복지국가 모델의 붕괴를 '역사적 증거'로 채택하고 반대파의 편의적 현실인식과 패배주의를 질타할 것이다. 이런 논쟁에서 쌍방이 서로를 비난하는 논거는, 언제나 둘다 옳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한쪽은 복지국가의 성장과 몰락이 둘다 일종의 '중층결정'이었단 사실을 강조하면서, 그러므로 우리는 또 한 번의 중층결정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한쪽은 (권력을 어떻게 잡을 것인지의 문제는 일단 제끼더라도) '이번에 내가 새로 만든 계획의 방식으로 하면' 예전과는 달리 일이 잘 풀릴 수 있다고 주장하거나, 생산력의 발전이 결국엔 자본주의 이후의 체제를 불러오게 될 거라는 역사적 전망에 안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은 그것으로 되었다. 어느 쪽 주장이든 검증할 방법이 없고, 당장의 과제가 무엇인지와 그것들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데 필요한 무언가를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진보정당 운동이 어찌 되어야 하는지를 논의할 때 '정체성'의 문제는 중요하지만, 여기서 그 '정체성'이 특정한 신념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문제는 활동이며, 그 활동의 목적성이다. 내가 김규항의 문제제기에서 '진보정당 운동이 고사하는 절박한 현실'보다는 '이론적 한가함'을 느끼는 것은 그런 것이 안 보이기 때문이다.


진중권과 자유주의, 그리고 자유주의화된 진보정당의 문제를 지적하려 한다면 더 좋은 방법들이 있을 것이다. 촛불시위와 그 전후 진중권의 발언에서 드러난 '소비자 의식'(노동계급의식과 배치되는)의 의미와 한계를 고찰하고, 소비자 미학이 노동윤리를 압도한 세계에서 주변부 노동자들의 연대를 어떻게 이루어낼 수 있을지를 얘기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소비자 운동'은 종종 노동운동의 '폭력성'을 이해하지 못했고 심지어 조소했지만, 언소주의 사례에서 보이듯 그들의 활동도 효력이 미지수였고 체제는 심지어 거기에도 '불법'의 낙인을 찍었다. 문제는 소비자 사회의 뒷면에 있는 '노동'으로 표상되지 않는 수많은 파편화된 노동들을 드러내고 조직화하는 것이다. 아직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시작하지 못했다. 진보신당 내의 '자유주의자'나 '사민주의자' 누구를 도덕적으로 비판하는 일이 그런 작업과 별다른 관련이 없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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