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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에서 정치적 중심은 산출보다는 정책의 인풋사이드(input side), 즉 투입측면이 중심이라고 봅니다. 말하자면 특정한 정책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사회로부터 투입할 것인지가 민주주의의 핵심입니다. 반대로 권위주의 하에서의 정책 산출은 최고통치자와 그를 둘러싼 권위를 가진 전문가들이 모여 디자인을 하고, 반대하는 목소리는 힘으로 억압해서 만들고 추진하면 끝입니다. 민주주의는 그게 아닙니다. 모든 이해당사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그것이 정책으로 정치인과 정당을 통해 대표되고 그것이 정책결정과정에 투입되는 것이 민주주의의 요체라 하겠습니다.

현재 우리의 복지담론은 인풋 사이드에 전혀 관심이 없고 그 정책적 내용이 무엇인가, 여기에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러한 논의는 모든 정당이 다 할 수 있는 것이죠. 진보파인 민주당은 물론 한나라당도 얼마든지 복지정책을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다보니 특정의 복지정책내용을 요구하는 사회집단과 교섭하지 않고도 정치인들과 전문가 지식인들이 자유롭게 좋은 복지모델들을 취사선택해서 좋은 복지프로그램을 만들어 내놓고 있는 것 같습니다. (...)

가장 간단한 지표로 노조 조직율이 10%대로 떨어져있는 오늘의 한국정치현실에서 복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잡히지 않습니다.

오늘의 한국사회에서의 복지논의는, 한국 민주정치의 특징적인 측면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회의 중요한 이해당사자들이 정치의 영역에 들어오지 못하고 정치과정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당정치의 약화와 집행부의 권력 집중으로 나타납니다. 특정한 정책을 놓고 이해관계를 갖는 집단들이 이익집단이든 노동조합이든 정당이든 조직을 해서 스스로 자신들의 요구를 말하고, 그것을 정치적으로 조직해서 선거에서 표로서 집단화하고, 그들 스스로가 크든 적든 정치적 행위자가 돼서 정치적으로 경쟁할 수 있을 때, 복지 문제는 자연스럽게 제기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 과정이 전부 억압되고 있어요.

한 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얼마 전 재벌기업 대형슈퍼마켓들이 동네에 진출해서 기존의 영세 마켓들이 존립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이들이 길거리에서 데모하고 하는 모습이 뉴스로 나오고 정치적으로 큰 이슈가 됐지요. 이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할 수 있는 것은 길거리에서 데모밖에 없었어요. 이건 민주주의방식이 아니지요. 8,90년대에 일본의 사례는 이 문제가 정치적으로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 그 차이를 잘 보여줍니다. 이들 영세자영업자들이 조직해서 자민당의 한 영향력 있는 표의 블럭을 형성해서 자민당의 지원을 받고 통산성의 정책결정과정에 직접 참여해서 법을 만들어 내 기업 수퍼마켓의 진출을 제한했던 사례이지요. 한국사회에서 이러한 식으로 이해당사자들이 정치적으로 조직되는 것이 가능합니까? 그런 것부터 먼저 논의돼야 진정한 의미에서 사회에 기반을 갖는 복지정책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민주정부 하에서 정책결정들, 즉 산업정책, 중소영세상인 보호정책, 노동정책, 통상정책 같은 것들은 그렇게 만들어져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민주 대 반민주' 담론이 갖는 한계도 이러한 상황과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요구들이 들어오지 않으면 민주주의의 작동이 어려울 뿐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틀 속에서 권위주의 정치가 반복되게 됩니다. 한국에서는 일하는 사람, 노동하는 생산자 집단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노동 없는 민주주의'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금 정치권이 제기하고 있는 복지는, 특정의 정당, 특정의 정치세력이 집권하기 위한, 그리고 집권했을 때 그것을 시행하는 방법이 행정기구를 통한 사실상 온정주의적인 복지를 의미하는 것 이상이 아닐 것입니다.

- 프레시안 최장집 인터뷰 3편
"'빈곤화 문제'의 실종, 한국정치의 최대 문제" 에서
 

최장집이 한국 정치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정당정치의 복원'을 내건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비록 최장집과 그 지지자들이 강조하는 바를 위해 논의를 단순화해서 말하는 면이 있을지라도, 이 논의가 "정당정치" vs "운동정치"로만 흘러가는 것은 의아하다. 최장집이 스스로 제시한 이 변별을 받아들이더라도, 이 수사의 의미가 너무 단순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말하자면 어떤 이들은 정당정치의 옹호자들은 운동론을 배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고, 어떤 이들은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선 최장집의 정당정치론을 부인해야 한다고 믿는 듯하다. 이런 식의 단순화는 한국 정치의 문제를 해명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최장집의 정당정치론은 국가와 개인 사이에 있는 중간 단체들을 튼실하게 키워야 정치가 작동할 수 있다는 전제에 기초하고 있다. 가령 1950-60년대 미대사관의 문정관으로 재직하면서 한국 정치의 격변기를 지켜보았던 그레고리 핸더슨은 한국의 정치를 '소용돌이의 정치'라고 표현한다. 국가와 개인 사이에 개인을 조직할 수 있는 중간 단체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그런 구조에서 강대한 중앙 정치는 아무런 여과없이 개인을 대량으로 동원했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정치는 해방 직후의 정치 깡패의 사례에서 보듯 추상적인 이념에 대한 동의 여부에 따라 사람들을 갈라놓기는 쉽지만, 개인의 삶이 정치에 의해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를 말해주긴 어렵다.


그래서 그는 중간 단체들을 튼튼하게 하여 개인이 그 단체들을 통해 국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장집은 그의 저작에서 정치학의 개념을 빌려 이 중간 집단들의 활동을 이익 대표 체계 또는 이익 매개 체계라고 부르는 것으로 안다. 이것들은 정당, 이익집단, 운동단체 등을 포괄하는데, 넓은 의미에서는 시민사회 자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최장집의 정당정치론은 이 중간 단체들 중에서 국가에 가장 영향력을 미치기 쉬운 기구가 정당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진보주의자들은 최장집의 정당론을 운동론과 상극인 것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최장집의 주장이 노동조합의 조직률을 높여야 한다는 진보파들의 오랜 문제의식과 포개지는 부분이 있음을 보지 못한다. 위에서 인용한 최장집의 인터뷰는 노동조합 조직률이 10%인 사회에서 복지담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되물으면서 그런 인식을 깨부수는 측면이 있다. 사실 이는 최장집의 저술을 조금이라도 읽었다면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또 어떤 최장집지지자들은 역시 최장집의 정당론을 운동론과 상극인 것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최장집이 운동 자체를 되도록이면 회피하라고 했다거나, 정당영역에 포섭될 수 있는 운동만을 하라고 했다고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이 역시 옳지 않다. 위 인터뷰를 보자면 우리는 일본의 사례들처럼 자영업자(라는 특수집단의 사회경제적 요구)가 정당정치 안에 포섭되고 그걸 통해 국가를 움직이는 방책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영세자영업자들이 SSM의 침투에 맞서 거리에서 데모를 하는 것이 '운동으론 사태를 바꿀 수 없고 정당정치를 복원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이들의 무지한 행동'인가? 최장집은 이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설명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다른 방법이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을 해야 했으며, 이런 운동을 통해 영세자영업자의 조직을 만든다든지 중앙/지역 정치인과 접선하여 요구사안을 얘기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사회문제의 정당정치로의 수렴'을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노력은 (유럽이나 미국이 아니라) 최장집이 인용한 일본의 사례에 비해서도 매우 초보적인 수준의 '사회문제의 정당정치로의 수렴'을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가 겨우 걸음마 상태에 있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바이며, 그에게 갑자기 뜀박질을 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문제는 운동 그 자체를 규탄하는 것이 아니며, 혹은 정당정치론의 개량성(?)을 규탄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운동이 정책의 인풋사이드를 정례화하는 체제를 구성하는 활동이 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방법론의 문제요, 그런 운동을 실행하기 위해 어떤 종류의 조직이 필요할지를 생각하는 조직론의 문제다. 그러나 운동론과 정당론의 다소 소모적인 대립에는 양진영이 마땅히 함께 해야할 그 고민의 영역이 소거되어 있는 듯하다.


각 개인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여러 종류의 중간단체에 투입하고, 그 중간단체들이 또다시 그 요구를 정당에 투입하며, 정당이 그것들을 받아 안아 국가를 운영하면서 각 영역 사이에 지속적인 되먹임 과정이 존재하는 정치체제가 최장집이 내세운 정치개혁의 방향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얘기가 원론적이라 도무지 반박할 지점이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정당의 역할을 끝간데없이 강조하는 사람은 (가령) 정당 내의 여성위원회에서 여성문제를 수렴해야 한다고 주장할 테지만, 다른 어떤 이들은 여성단체가 여성문제를 받아 안고 활동하고 있으니 정당이 앞장 서서 그 단체들과 교류하고 의견수렴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 게다. 이 두 가지 주장은 모두 최장집의 원론 안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문제는 최장집의 얘기가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 원론을 향해 달려나갈 수 있는 제 정파/제 상황의 각론들을 제출하는 것이다.  


그 각론들엔 여러 가지가 가능하겠지만 일단은 민주당을 향한 것과 진보정당들을 향한 것, 그리고 운동의 주체들에 관한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주의해야 할 점은, 우리가 실천을 위해 부득불 그런 것을 요구해야 하는 순간도 오지만, "지금의 상황이 풀리지 않는 것은 운동주체들이 정신차리지 않았기 때문"이란 식의 진단은 사태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만들면서 특정인 몇명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데에 그칠 수 있다는 것이다.(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운동주체들이 이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고 물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먼저 민주당에 대해서는 이명박 정부를 '독재정부'로 규탄하고, 천정배가 그러하듯 "이명박 정부를 죽여버려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강하게 규탄하는 것이 정당의 집권역량이 있음을 국민에게 설득하여 집권하고, 좋은 정치를 펼치는 것과 동떨어진 곳에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민주-반민주 구도에 대한 최장집의 설득력있는 비판은 그 지점을 겨냥하는 것일 게다.


그리고 이른바 '빅텐트론'을 주장하는 이들에 대한 비판지점도 성립한다. 문제는 소수정당에게 민주당으로 합류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당이 중간단체들의 요구를 제대로 받아안지 못하고, 민주당이 정당 지지자의 의사의 변동에 따라 정당 내부의 권력을 구성하는 정당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만일 민주당 내부의 권력구조가 민주당 지지층의 의사변동에 반응한다면 소수정당들에게 내부에 들어가서 민주당 지지자들을 설득해보라는 권유가 성립할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은 (한국의 다른 정당과 마찬가지로) 의원 뱃지를 가지고 있는 여의도 정치계급 몇몇의 세력다툼으로 권력을 구성하는 정당이다. 그러므로 의원숫자가 심히 부족한 소수정당의 입장에서 그 안에 들어가서 제 정파를 구성하고 그 정파의 의견을 관철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빅텐트론을 권유하는 사람들은 주로 미국 민주당의 시나리오를 예시로 들고 있다. 그런데 미국 민주당만 하더라도 한국 민주당과는 사뭇 다른 체제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 어떤 주에서는 당원명부를 가지고 있고, 또 어떤 주에선 당원명부가 없지만, 지지층의 의사를 묻고 당 아래에서부터 창출되는 권력이 존재하는 것이다. 한국의 민주당이 미국 민주당 수준의 '아래로부터의 권력구성'을 보여주지 못하는 이상, 적어도 그것을 만들기 위한 제도/문화 변혁안을  선행적으로 논의하지 않는다면, 빅텐트론을 얘기한다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선 국민참여당이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국민참여당은 민주당 내부의 권력구성이 민주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자신들의 주요한 존립근거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참여당이 민주당에 대해 대안으로 내세우는 것은 '진성당원제'인데 (국참당/민노당/진신당이 아닌) 민주당 규모의 기성정당에서 갑자기 진성당원제로의 전환이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사실 진성당원제는 자본가의 후원금이 많이 들어올 가능성이 없는, 당비납부가 정당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미니정당에 알맞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미국 민주당처럼 후원금을 끌어모을 수 있으면 '당비를 내는 당원'이란 정체성은 그다지 큰 권리가 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미국 민주당은 사실상 진성당원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지층의 의사를 대변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만약 한국 실정에서 민주당에서 진성당원제 정당이 추구된다면, 당원으로 가입할 가능성이 높은 친노성향의 지지자들이 민주당 내부에서 '과잉대표'되는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이는 '열린우리당 실험' 내내 문제가 된 상황이었다. 친노성향의 150여명의 '당게낭인'을 국회의원 150명이 감당하지 못한다는 푸념이 나올 정도였다. 그래도 유권자의 20% 이상이 지지하는 민주당에서, 진성당원제가 부분적으로 채택된다고 한다면, 진성당원-페이퍼당원-지지자 사이에서 누구의 의중을 반영해야 하는지부터가 큰 문제가 된다. 아마도 진성당원제는 민주당을 개혁할 수 있는 현실적 모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민주당 개혁을 위해) 필요한 것은 '미국 민주당 모델의 한국 현실에 맞춘 변형' 정도가 될텐데, 빅텐트론이니 야권연대니를 말하려는 사람들은 애초에 이것부터 고민해야 할 게다. 선거 임박해서 5+4연대처럼 시민단체들을 들러리로 내세워 군소야당 후보들의 사퇴를 독려할 게 아니라, 평소에 시민단체까지 참여하는 여론수렴/정책결정 기구를 고민하는 것도 중요하다. 아마도 이는 백낙청이 말하는 '거버넌스' 구상과  통하는 것일 터이다.


진보정당들의 경우에는 진보적 시민단체들과의 교류가 (민주당에 비해서는) 활발하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 정당들이 집권역량이나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것이 실질적인 효력을 발휘하진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다만 과거의 민주노동당이 진보적 시민단체들의 주장을 각 영역에 골고루 당정책으로 받아넣는 모습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진보정당들의 처지에서 필요한 것은 지역정치(기초자치단체라든지) 레벨에서 자리를 잡는 방법에 대한 고민일테지만, 지방자치의 전통이 약하고 지역정치조차 중앙정치의 '바람'(그레고리 핸더슨이 말한 '소용돌이')에 의해 좌우되는 한국 실정에서 결코 쉬운 작업은 아니다. 아마도 진보정당들의 운명은 2012년에 진보정치인 주자들 중 누구누구가 여의도로 귀환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며, 그때문에 지금 온갖 정치/선거공학과 희망사항들이 버무려진 연합협상들이 성립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대책들은 필요하지만,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는 방법이 존재한다. 우리는 중간단체의 조직화가 정치를 위해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중간단체 조직이 매우 힘든 상황에서 오히려 정치의 성공을 통해 중간단체의 조직화를 꾀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인과관계를 바꾸어 버리는 일은 실천에 대한 고민이 절실한 정치영역에서 흔히 벌어진다. 대표적으로 복지국가 소사이어티의 이상이 교수의 주장이 그런 것이다.


그런데 진보신당은 노동 없이 복지국가는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대표적으로, 우리나라의 노조 조직율이 10% 남짓밖에 안 되기 때문에 복지국가가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노조 조직률을 이유로 복지국가가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복지국가론'을 내 놓는 것이 이해가 안 간다.

저는 한국의 조직된 노동이 10%밖에 안 되고, 그 10%도 대기업 정규직 중심으로 조직돼 있는 이 현실은 복지국가로 가는 데 도움이 안 된다고 보고 있다. 그렇다고 제가 노동 없는 복지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노동 있는 복지'를 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다. 여기서의 '노동'은 노동자의 90%를 차지하고 있는 중소기업의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10%의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90%에 달하는 노동자들은 사회적 약자다. 또 이 사람들은 지역과 시민사회에서 서민이나 시민으로 불리면서 살아가고 있다. 저는 이 부분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본다. 기존의 노동운동은 이 부분을 포괄하는 데 실패했다. 앞으로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을 더욱 강화해 나가면 이게 가능해 질 것인가? 저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이것을 실제로 가능하게 하는 방법은 국가의 제도적 복지와 시장개입을 통한 '복지 있는 노동'이라고 본다. 즉 국가가 보편적 복지를 제도화함으로써 미조직 노동이 조직될 수 있는 계기가 많아진다는 것이다. 복지국가가 있어야만 노동의 조직력도 높아질 수 있다. (...)

우리나라는 노조 조직률이 10%밖에 안 되는데, 유럽 국가들처럼 50%, 혹은 70~80%가 돼야 노동에 기반을 둔 정당이 만들어지고, 그 정당을 통해 복지국가를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러나 이것은 오래된 과거의 논리다. 스웨덴에서는 이미 80년 전에 있었던 방식이다. 80년 전의 스웨덴과 지금의 대한민국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복지국가를 향한 열망이 어디에서 주로 나오고 있는지 찾아보자. 현대 자동차나 현대 중공업 다니는 정규직 노동자들로부터 인가, 아니면 거기 다니는 또는 중소기업 다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인가? 누가 복지국가에 대한 열망이 강할까. 누가 사회적 약자이고, 누가 더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나. (...) 그 사람들은 회사에서 기업별 복지에 의존하고 있고, 강력한 조직력을 통해 임금협상이나 단체협약에서 지속적으로 자기 지분을 따오고 있다. 그 사람들은 지금 이대로도 별 문제가 없는 것이다. 
- 프레시안  이상이 인터뷰
"복지국가 단일정당 못 만들면 한나라당에 필패한다"


이상이의 말을 최장집의 입장에서 번역하면, "일단 훌륭한 아웃풋이 나와야 사람들이 훌륭한 아웃풋을 산출할 수 있는 인풋의 필요성을 확실하게 인지하게 되고, 결국 인풋사이드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가 된다. 즉 최장집의 주장은 "운동론 vs 정당론"의 대립구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혁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위로부터의 접근' vs '아래로부터의 접근'의 대립각 속에 있다. 


최장집의 주장이 정론에 가깝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중간단체가 강화되기는커녕 점점 약화되고 있는 한국 정치의 실정에서 이상이의 주장도 설득력을 지닌다. 한국 사람들은 제 의사구조를 대변하는 중간단체의 경험이 부족한 반면, 폭력적이고 중앙집중화된 권력기구에 의해 혼쭐이 나본 경험이 많기 때문에 '조직화'에 대해 부정적인 편견을 지니고 있다.


이를테면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나 진보정당을 강화하자는 주장보다는 트위터리안들이 나서서 홍대 미화원을 도와주는 것에 매력을 느낀다. 이런 자력구제의 쾌감이 달콤한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중간단체들의 조직화가 역진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길가다가 우연히 지갑을 줍거나 우연히 지뢰를 밟을 수 있는 정도의 '불안정성'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내 의사는 조변석개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욕망의 흐름 속에서 우연히 '과잉대표'되어 정치권을 압박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68혁명'의 감수성을 사랑하는 자유주의자+아나키스트 동맹은 진보담론 내에서도 (마땅히 필요한) 조직화의 길을 방해한다. 국가권력이 확실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아나키즘은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침해를 방어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아나키즘의 신념에 따라 국가권력 자체가 사라진다면 인민의 삶은 국가권력이 존재할 때보다 나빠질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한국의 국가권력은 권력을 유지하고 작동하는 측면에 아닌, 인민의 사회경제적 삶을 보장하는 차원에서는 이미 아나키적(?)-국가인 것이다. 정당정치를 말하는 사람과 운동정치를 말하는 사람은 사실 이런 이들과는 거리가 있고 어떤 식으로든 '조직화'를 말하게 되는데, 그런 점에서 사실 이들은 대립해야 하는 이들이기는커녕 동맹해야 하는 세력이다. 조직화에 대한 시민/진보주의자들의 혐오를 어떻게 합리적인 방식으로 수렴하면서 조직화를 추구할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하는 과제가 그들 앞에 던져져 있는 것이다.


사실은 이념과 정책의 차이를 도외시한 무분별한 야권단일화론 역시 '국가'와 '개인' 사이에서 별도로 존재하며 이익을 매개하는 정체성을 가진 제 정당의 존재를 부인하려는 욕망에서 나온 산물이 아닌가? 사람들은 트위터를 손에 쥐고 행정부와 직접 대결하기를 원하며, 다만 그 싸움을 정당에게 맡기는 것일 뿐이니 말이다. 이것이 '국민의 명령'이란 수사 뒤에 숨어 있는 속내인 것이다. 물론 이것이 정치학적으로 무의미하고 유해한 사고방식이라고 규탄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의 '민주주의'가 이러한 방향으로 고착화되고 있다면 이 담론 내부에서 그것을 극복할 방안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최장집의 '정론' 뒤에 숨어 있는 여러가지 고민거리는, 바로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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