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한국 보수와 진보의 판타지

조회 수 5079 추천 수 0 2011.01.26 11:57:55

원래부터 하던 생각이지만 한일전 패배 이후 축구팬들의 반응을 보다가 조금 더 명확하게 정리된 사안을 끄적여 보도록 한다. 아시안컵 한국 대표팀의 경기에 대한 반응들에 대해서는 따로 한번 더 쓸는지도.


1.
내가 생각하는 정치는 공동체의 삶을 이성적으로 조직하려는 노력의 총체다. 개인이 자신의 삶을 관리하듯이 공동체는 자신의 삶을 관리하고자 한다. 그런데 공동체의 삶은 나만의 일이 아니기에 이런 '관리'를 위해선 타인을 통제하는 권력이 필요하다. 이 권력을 창출하는 방법에 따라 정치체제가 갈린다. 민주주의란 그 권력 창출의 과정에 공동체의 모든 성원이 개입하는 정치제도를 의미한다.


2.
사실 '자기지배'란 민주주의의 이념은 환상에 가깝다. 군주제 국가에 살든 민주주의 국가에 살든 내가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권력 창출의 과정에 공동체의 모든 성원이 개입하게 되면 되도록 모든 사람의 권리와 이익을 배려하는 명령이 창출될 거라고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모두가 남들이 만든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사실이 인지될 때, 그들은 그 명령을 좀더 보편적이고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산출하고자 할 것이다. 그 결과 공동체 성원은 이 명령이 그들을 위한 것이라 믿을 수 있고, 오늘 따른 명령이 내일의 내 삶을 위협할 거라는 걱정없이 생활에 임할 수 있다.


3.
보수와 진보는 그런 민주주의 국가 안에서 공동체의 삶을 이성적으로 조직하려는 '정치'란 장 안에 존재하는 상이한 방법론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공동체 '관리'의 방법론이며, 그 방법론을 실현하기 위해 다수 시민의 동의를 조직하려는 하나의 운동이다. 그것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시민들의 '이념'으로 정치의 장에 '투입'되며, 전문가 집단과 활동가들의 적절한 도움을 받아 '정책'으로 '산출'되어야 한다.
 

4.
한국의 보수와 진보 역시 그와 비슷한 역할을 조금은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심히 부족하다고 생각된다.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많은 사건과 논쟁들을 살펴볼 때, 그것들은 정치의 장 안에 존재하는 방법론이라기보다는 정치의 영역에 개입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시민들이 지닌 상이한 판타지로 여겨진다. 진보의 판타지는 민중주의다. "민중은 옳다. 혹은 민중 중엔 잘난 놈들이 있으므로, 그들을 가려내어 중용하면 사회는 발전될 수 있다. 이것을 자신의 탐욕 때문에 체계적으로 가로막는 기득권 세력의 패거리 집단이 있다. 그들을 몰아내면 세상은 좋아질 것이다." 보수의 판타지는 엘리트주의다. "많은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면서 떠든다. 이때는 A라 말하고 저때는 B라 말한다. 현혹되면 안 된다. 결국 사회를 발전시켜 온 것은 아무말 없이 묵묵히 주어진 권력을 행사하며 제 일을 해온 사람들이다."


5.
따라서 진보의 판타지를 지탱하는 서사는 음모론이다. 누구누구가 패거리를 만들어 무슨 진실을 체계적으로 왜곡하고 우리들을 배제하고 있다더라는 이야기가 그들을 결집시킨다. 보수의 판타지를 지배하는 정조는 냉소주의다. 결국 그런 종류의 유언비어는 근거도 없이 창궐했다가 사그라들었고, 그동안에 묵묵히 일한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결정되어 왔다는 현실인식이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를 따질 때, 이런 인식이 들어맞는 경우도 물론 있다. 하지만 사례별로 적용해야 할 그런 인식을 '보편적으로' 적용하고자 하는 것이 한국의 진보와 보수다.


6.
그렇다면 보수의 판타지는 관료들의 것이고, 진보의 판타지는 생활인들의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진보의 판타지가 실패한 지점들 때문에, 보수의 판타지는 생활인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 또한 제 할 일만 하는 관료들은 생활인들의 기대보다 한국 사회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을 지니고 있지 않다. 특정한 일을 하는 관료들은 자신의 영역에서만 보수의 판타지를 가지고 있고, 나머지 영역에 대해선 진보의 판타지를 지니고 있을 가능성도 높다. 이를테면 재경부 모피아라도 축구협회의 패거리주의가 한국 축구를 좀먹고 있다는 인식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반대로 모든 종류의 개혁정책을 옹호하고 이를 방해하는 기득권 세력의 준동을 엄중하게 규탄하던 사람이더라도 자신의 삶의 영역에 개혁이 틈입하면 "당신들이 언제 이 일을 해봤다고 이러냐?"라고 반응할 공산이 크다.


7.
이 두 개의 판타지는 근본적으로 탈정치적이다. 좀 단순하고 편협하게 말한다면 군주정이나 독재국가에 어울리는 정치의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탈정치적 의식이 정치의 향방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한국의 민주주의다. 이것 역시 민주주의라는 것을 인지하고 분석해야 한다. 분명 이 판타지들은 시민을 움직이며, 그 움직임은 권력을 교체할 수 있다. 이 점을 인지하지 않고 "한국 사회는 아직 왕조국가나 전근대에 가까우므로 일단 근대화."라고 인식한다면 잘못된 결론을 내리게 된다.


8.
그렇다면 이 모순적인 상황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 권력을 교체할 수 있다는 점에선 민주주의지만, 그 민주주의를 움직이는 정치의식이 민주적이지 않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서술은 완전하지 않다. 이 상황을 '제도 vs 의식'의 이분법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제도는 다 갖춰줬는데 의식이 안 따라주는 상황이 아니라, 의식을 키워낼 제도가 미흡한 상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큰 틀에서 시민이 권력을 교체할 권리를 가지고 있고 그 가능성이 실현되고 있지만, 그 권력들을 통제할 제도적 방책들이 매우 부족하다. 그런데 두 개의 탈정치적 판타지에선 그 판타지를 대변하는 대표선수의 교체에만 신경을 쓰지 그런 제도적 방책들의 확보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여기서 문제는 빙빙 돌게 된다.


9.
보수의 판타지와 진보의 판타지는 기실 먼 거리에 있지 않고, 상호 보완적이다. 국가를 위해 일하는 이들을 믿고 묵묵히 내 삶을 살아왔는데 그 삶이 각박해진다면 당연히 누군가 내 몫을 뺏어가고 있다는 음모론에 빠져들게 된다. 선거에서 기득권 세력의 대변자들을 물리치고 '우리편 수호자'를 뽑았더라도 그들도 권력을 행사해야 하는 사람임은 분명하고 그 행사과정에 '민중'이 개입할 방법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그들은 '또 다른 기득권 패거리'로 인지되게 된다. 한국 민주주의의 정권교체는 이 두 개의 판타지가 교환가능하기 때문에 성립하는 것이다.


10.
그러나 그 교환의 와중에서도 민주주의의 요구는 실현되지 않는다. 민주주의에서 얘기하는 정치는 군대나 축구 행정처럼 과업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삼성과 현대의 국제경쟁력을 끌어올리는 정책들은 국가 주도로 만들어낼 수 있지만, 산업재해에 시달리는 노동자를 보호하는 정책을 광범위한 시민의 요구 없이 국가권력이 자본을 통제하며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통제가 가능했던 것이 과거의 독재권력이었다. 그래서 독재권력은 과업달성을 위한 최소한의 민중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그런 통제를 통해 제한적인 복지정책을 만들었다. 가령 의사의 몫을 제한하는 의료보험제도는 박정희 때에야 실현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보수의 판타지를 믿는 이들에게, 그들의 선택이 결과론적으론 오히려 더 '민중적'이라 믿게할 충분한 근거가 된다. 그들에게 진보의 판타지를 유포하는 이들이란 거기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진보 엘리트주의자일 뿐이다.


11.
양측 판타지의 신봉자들이 팽팽하게 맞서면 진보의 판타지가 수세에 몰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보수의 판타지는 그들이 과정으로 보면 엘리트주의를 따르지만 그 결과 민중주의를 실현한다고 '일관성있게' 주장할 수 있다. 그리고 진보의 판타지는 그것이 실현될 때엔 보수의 판타지와 마찬가지로 '과정의 엘리트주의와 결과의 민중주의'를 추구하게 되지만, 그 실현태는 진보의 판타지의 내용 자체를 침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측면에서 보수가 진보보다 더 일관성이 있다는 사실이, 그들이 더 나은 지향을 주장하고 더 나은 정책을 산출한다고 믿어야 할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12.
꽤 괜찮은 정치평론가들도 이 두 개의 판타지를 넘어서지는 못하고, 다만 이 판타지가 옳은지 그른지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판단하는 수준에 그친다. 그러나 이 정도만 되어도 매우 사려깊은 경우다.


13.
결국 현재 한국 사회를 조직하는 룰에 문제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겐 세 가지 선택지가 가능하다. 하나는 어찌됐건 실현가능한 정책역량을 지닌 판타지의 대변자를 선출하여 룰을 바꾸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지적했듯 '보수의 판타지'의 내용에 가까운데, (한나라당과 민주당, 그리고 복지소사이어티 등의 시민단체를 포괄하는) 복지국가 담론과 김광수 경제연구소의 활동 등이 모두 이것에 포함된다.


14.
둘은 판타지에 기반하여 권력을 잡은 후 권력 자체를 개조하여 판타지를 해소하고자 시도하는 것이다. 노무현과 참여정부가 스스로 꿈꿨던 것이 이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개혁 먼저"라는 그들의 노선이 말했던 그것. 그러나 그들은 정치권력이 시민들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는 경제개혁에 무심하거나 실패할 경우, 더 이상 시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혹은 그들이 추구했던 정치개혁('지역주의'라는 것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던)이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개혁의 핵심이 아니었다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15.
마지막으로 선출된 권력들을 통제할 제도적 방책, 즉 시민들의 정치적 요구를 투입하는 기제를 만드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방법이 있다. 의심할바 없이 최장집의 노선이 이것이다. 물론 최장집의 견해는 이 세번째 노선의 유일한 방법은 아닐 게다.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 최장집의 정당정치론 이외의 견해가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6.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문제해결을 위한 고민이며, 그 고민의 결과로 나온 실천이다. 세가지 방책 중 하나를 잡고 그 안에서 가장 현명한 이들과 함께 활동할 수도 있고, 세가지 방책을 모두 염두에 두고 정치적 실천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세가지 방책 이외의 다른 방책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의식없이 김광수 경제연구소보다, 참여정부의 지지자보다, 최장집이나 진보정당들보다 '왼쪽'에 있다(고 스스로 자임한다)는 이유로 급진적인 정치적 실천을 하고 있다고 믿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만일 그가 생각하는 급진좌파의 노선이 그저 '진보의 판타지'를 좀 더 과격하게 추구하는 것일 뿐이라면, 그리하여 한나라당 뿐만 아니라 민주당도 노무현도 혹은 최장집도 혹은 민주노동당도 혹은 진보신당도 엘리트 패거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딱지를 붙이고 있다면, 그는 그저 한국 사회의 탈정치성을 유지하는 두 개의 판타지 중 하나에 적극적으로 기대고 있는 것일 뿐이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301 '타블로의 딜레마'에 빠진 조선일보 [26] 하뉴녕 2011-03-15 3715
1300 안티조선 운동사 2쇄 수정 사안 [7] 하뉴녕 2011-03-15 18189
1299 이전 글에 대한 변명 [32] 하뉴녕 2011-03-14 7930
1298 '음모론 시대'의 이면 [32] 하뉴녕 2011-03-09 4015
1297 안티조선 운동사 해설강의 1강 (11. 3. 7 두리반) [8] 하뉴녕 2011-03-07 3335
1296 동아일보의 문제 [9] 하뉴녕 2011-02-28 5560
1295 진보신당의 쩌는 위엄 [29] 하뉴녕 2011-02-23 6270
1294 [경향신문] 인도 축구대표팀의 로망 [2] 하뉴녕 2011-02-19 3006
1293 의미 부여 [25] 하뉴녕 2011-02-16 3265
1292 박가분에게 다시 답함 [19] 하뉴녕 2011-02-15 7962
1291 박가분에게 답함 [15] [1] 하뉴녕 2011-02-15 6096
1290 진보신당, 생존의 방법은 없는가? [113] [1] 하뉴녕 2011-02-13 9433
1289 박가분의 최장집주의 비판과 진보정당 운동론에 대한 논평 [15] [1] 하뉴녕 2011-02-11 14950
1288 이영훈은 종군위안부가 '자발적 성매매'라고 주장했던가? [88] [1] 하뉴녕 2011-02-07 11090
1287 키워질의 진화심리학적 기원 [2] 하뉴녕 2011-02-05 3374
1286 평양성 : 다시 돌아온 코미디 현실풍자 사극 file [17] 하뉴녕 2011-01-31 3879
» 한국 보수와 진보의 판타지 [28] [2] 하뉴녕 2011-01-26 5079
1284 <안티조선 운동사>, 닫는글 : 다시 언론 운동을 꿈꾸며 [1] 하뉴녕 2011-01-20 8304
1283 그 과학자의 독백에 대해 [9] 하뉴녕 2011-01-19 5794
1282 정치평론에서의 초월적 논증 [40] [1] 하뉴녕 2011-01-15 66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