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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평론에서의 초월적 논증

조회 수 6661 추천 수 0 2011.01.15 21:03:04

우리가 아는 정치평론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인민의 정치적 관심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체제가 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특수계층의 몇몇만 정치를 하게 된다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심신수양과 행정업무를 위한 구체적인 지침이 담긴 목민심서 같은 실용서이지, 정치평론은 아니다.  내가 스스로 맡지 않을 업무에 대해서도 떠드는 것이 가능하단 전제 하에, 정치평론이란 것이 성립한다. 군소정당의 경우 필드 플레이어와 관중석의 거리가 훨씬 가깝기는 하지만, 이 전제조건은 다르지 않다.


따라서 정치평론이란 것에 초월적 논증이 난무하는 것은, 애초에 이것이 본인이 할 일이 아닌 것에 대해 떠드는 일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엇보다 현실적인 것에서 출발해야 하는 정치평론에 초월적 논증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과학적 사고를 배격하는 미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인가? 그런 부분이 없지는 않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정치평론이 '실천'에 관계되는 장르이기 때문일 게다. 데이터에서 출발하는 정치평론, 예리한 직관을 통한 현실인식에서 출발하는 정치평론, 뇌내망상에서 출발하는 정치평론은 질적으로 다르며, 사실 다르게 평가되어야 한다. 하지만 가장 섬세한 경험적 데이터에서 출발하는 정치평론도 주장하는 바에 이르면 초월적 논증의 형식을 띄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는 것이다.


이 초월적 논증의 형식은 간략하게 정리해 본다면 이렇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X가 있다. 그리고 이 X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으로 A와 B가 있다. 그런데 B는 아무래도 불가능한 방책이며, A에겐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X를 해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는 A를 추구해야 한다.


놀랍게도 이 논증구조는 일반적인 정치평론에 매우 폭넓게 분포하는 형식이다. 많은 정치평론들은 일견 경험적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경험적인 얘기는 B가 어째서 불가능한 방책인지를 설명하는데 그치고 있단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X에 도달해야 하므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은 A다. 이것은 칸트가 윤리법칙의 성립을 위해 초월적으로 '자유'의 이념을 요구한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상황이 아닌가?


몇 가지의 예시를 들 수 있다. 가령 (자칭) '좌파'들이 자주 벌이는 공산주의-사회민주주의 논쟁을 생각해보자. 공산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와 복지국가가 이미 실패했음이 역사적으로 검증되었기 때문에 올바른 방책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역사적 공산주의 체제가 이미 실패했기 때문에 공산주의는 올바른 방책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여기까지가 그들이 '경험적으로' 말하는 바다. 그 이후 그들이 자신의 이념을 옹호하는 방식은 본질적으로 '초월적'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제각기 B가 불가능한 방책임을 주장할 때, 그들은 우익들이 정리하고 내세운 경험적 논거들을 쉽게 수용한다는 것이다. 사민주의자들이 공산주의 실패를 말할 때, 공산주의자들이 복지국가의 실패를 말할 때, 그들은 우익의 언어를 쓴다. 따라서 우익들은 손쉽게 두 개의 경험을 모두 받아들여 "이제 우리에겐 어떠한 좌파도 가능하지 않다."고 조소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좌익들은 이들이 내세운 경험은 일회적인 것이며, '한 번의 기회를' 더 보장해준다면 모든 일은 잘 될 (수도 있을) 거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한 번의 기회'를 더 요구하는 것은 A의 방책에 대해서만 그렇다. 그들조차 B가 불가능함을 설명할 때엔 우익들이 내세운 그 경험에 대한 설명을 반복한다.


한국 정치 영역에서 벌어지는 "민주당 강화(...내지는 진보적 견인)론" vs "진보정당 독자노선론"의 대립 역시 마찬가지다. '빅텐트'론의 주창자들은 진보정당의 독자생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빅텐트'론이 옳다고 한다. 초월적이다. 진보정당 독자노선론의 주창자들은 민주당이 개혁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진보정당의 독자노선이 당위적으로 요구된다고 한다. 역시 초월적이다. "이것 외엔 길이 없다."는 말은, 셜록 홈즈에겐 추리의 기술이지만, 정치평론에 있어서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야 하는 당위의 요구다.


햇볕정책과 대북 강경책의 대립 역시 마찬가지가 아닌가? 강경책의 지지자들은 햇볕정책이 북한 위정자들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강경책이 답이라고 말한다. 햇볕정책의 지지자들 역시 강경책이 북한 위정자들을 굴복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혹은 강경책이 진짜로 성공하여 정권이 붕괴되는 것은 결코 감내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햇볕정책이 답이라고 말한다. 햇볕정책 지지자에게 북한의 모든 도발은 햇볕이 부족해서 생긴 일이다. 반면 강경책의 지지자들에게 북한의 모든 도발은 강경책이 부족해서 생긴 일이다. 어떤 사건이 터지고, 경험이 축적되고, 분석이 쌓인다 해도, 이 양자의 초월적 논증을 넘어설 수가 없다. 그래서 양측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


초월적 논증의 구조는 종종 인과관계의 문제와 결합하기도 한다. 초월적 논증이 시작되기 전에, 현실비평 단계에서, 우리는 인과론으로 문제를 진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령 내가 이전 글
2011/01/14 - [정치/정치평론가들] - 최장집에 관한 두 가지 오해, 그리고 한국 정치 에서 제시한 최장집과 이상이의 대립을 생각해보자.


최장집(+진보신당) : 한국에 복지국가가 오지 않는 이유는 노조조직률이 10%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노조조직률이 높아지지 않으면 복지국가는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복지국가 담론에 파묻히기 전에 노조조직률 확대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이상이 : 노조조직률이 10%를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국가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국가가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어떠한 조직의 강화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노조조직률 문제를 따지기 전에 일단 복지정책 프로세스를 갖춘 정당이 집권하여 복지정책을 펼쳐야 한다.



이 상반된 인과관계 속에서도, "B가 불가능하니 A가 답"이란 초월적 논증이 횡행하지 않는가?


사실 두 사람의 논리는 둘 중 하나가 그른 것이 아니라, 모두 옳다. 현실세계의 인과관계라는 것이 한쪽이 원인이고 한쪽이 결과인 단선적인 관계를 맺기 보다 인과의 연쇄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가령 박노자는 "왜 가난한 사람들이 이명박을 지지할까?"라는 질문을 던진 후, "자영업자 비율이 많기 때문."이란 대답을 던졌다.(정확히 말하자면 하나의 가설이었다.) 이를테면 "한국에서 계급투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이유는, 자영업자 비율이 높기 때문이다."라는 원인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또 한번 그 원인에 대해, "그렇다면 한국에 유난히 자영업자 비율이 높은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면 어떻게 될까? 다른 나라의 사례와 비교하면 답은 간단하다. "한국에 자영업자 비율이 쉽게 증가하는 이유는, 노동계급이 강고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원인판단이 나온다. 결국 원인과 결과가 따로 있는게 아니라 두 마리의 뱀이 서로의 꼬리를 물듯 엉켜 있는 것이다.

(역사에서 원인을 파악하자면 한국의 자영업자 비율은 원래 선진국에 비해 높은 편이었고, IMF 이후 실업자들을 흡수하기 위해 김대중 정부가 정책을 펼치면서 더욱 높아졌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원인'이 규명된다 하여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논리적 원인'이 밝혀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원인이 결과를 낳으면, 그 결과 역시 또 하나의 원인이 되어 다음의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초월적 논증은 우리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실천'을 요구받을 때 나올 수 있는 인간적인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과학적인 세계인식'은 아닐지라도, '인간에게 필요한 세계인식'일 수 있는 것이다. 100번의 초월적 요구에서 1번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런 요구를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천의 영역에서 초월적 논증이 소거될 수 없는 이유는 아마도 논리학의 영역이 아니라 심리학의 영역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섬세한 정치평론에 있어, 초월적 논증만이 난무하는 것이 유일한 길인가 하는 의구심은 든다. 정치학자 박상훈은 "한국 정치의 발전을 위해 민주당을 개혁하는 방법과 진보정당을 키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이 중 무엇이 바른 길인지는 정치학자가 대답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말한 적이 있는데, 실천이 아니라 평론의 영역에서는 오히려 이렇게 솔직하게 무력함을 고백하는 태도가 힘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정치평론이 민주주의 국가의 일인 이상, "똑똑한 나-정치평론가가 길을 제시해 주겠노라."는 자세도 (가끔은) 필요하겠지만, "문제가 이러이러하니 같이 고민을 해서 길을 찾아봅시다."라고 사태를 밝히는 것이 문사의 임무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특히 최근 한국사회의 큰 화두인 대북정책 영역에서 초월적 논증을 벗어나는 태도가 아쉽다. 조중동과 한겨레/경향/시사in/프레시안/미디어오늘 이란 여론매체의 두 블럭은, 대북정책 보도의 99%를 앞서 내가 소개한 초월적 논증을 반복하는데 할애한다. 강경책을 택하려고 해도 미국이 전쟁까지 동의해 주지는 않고 (물론 한국인들이 전쟁을 원하지도 않지만) 햇볕정책을 택하려고 해도 민간인 사망 이후 사과도 받지 않고 지원을 하는 것에 대한 여론의 동의를 구할 수도 없는 무력한 상황에서, 양 진영이 북한에 대한 남한의 무력함을 고백하지 않고 초월적 논증의 성을 쌓아 올리는 것만 반복한다면 정치평론의 역할이 의심스럽다.


사실 두 진영의 경쟁에서 드러나는 것은, 남한 사람들은 북한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으며, 오직 그들의 존재가 남한 사람들이 쌓은 경제적 부를 위협할 때에만 그 존재를 깨닫는다는 것, 그런 북한의 존재를 심리적으로 지워버리기 원하며 그 욕망을 충족시켜 주겠다 말하는 정치인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햇볕정책이든 강경책이든 사실상 정치인들이 저 민망한 북한이란 대상을 지워버릴 수 있다고 유권자를 기망하는 것인데, 일단 이 기망을 떨쳐내고 북한의 존재를 심각하게 인지하는 시민적 합의가 있어야 어떤 식으로든 (민주적 합의에 의거한) 대북 정책이란 것이 가능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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