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슈리 님의 네 편의 글.hwp

그가 지운 네 편의 글을 한글 파일로 만든 것이다. 내가 그의 글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하는데 글 자체의 항변권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굳이 확인하고픈 분만 받아가시길 바란다. 


2011/05/24 - [문화/기록물] - 슈리/박가분 재비판 (1) - 오류도 명백해야 의미를 가진다.

2011/05/25 - [문화/기록물] - 슈리/박가분 재비판 (2) - 노동계급, 맑스주의의 아포리아?


그러나 일련의 ‘논쟁(?)’들은 이런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았고, 상상적 적대감과 인맥 중심의 감정싸움으로 얼룩진 추악한 것이 되고 말았다. 일이 이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었던 구조적 이유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이 문제는 지금 생각하지 않기로 하자. 어쨌든 이 단계에서 나의 두 번째 큰 실수는, 상황을 재빨리 파악하지 못하여, 초기에 쓸데없이 성실하게 대응을 하려 한 데 있다. 그 덕분에 나의 몇몇 주변 사람들이 불필요한 고생을 해야 했다. 나는 오직 그들에게만 미안할 뿐이다. 내가 인터넷 사용법에 익숙하지 못했던 탓이 크다. 반성하는 뜻에서, 앞으로 나는, 진리를 탐구하기보다는 어떻게든 논쟁 상대를 깔아뭉개려는 데 목적을 두는 저 ‘논객’들과 내가, 서로 다른 지반 위에 서 있으며, 같은 대화 규칙을 공유하지 않는 존재라는 사실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적극적으로 피력하고자 할 것이다.
- 슈리 : 맑스의 가치론을 위한 메모 (1) 




0.
내 생각에도 우리는 같은 대화 규칙를 공유하는 존재가 아니다.  내가 관찰한 바 슈리 님이 주장하는 대화의 규칙은 1) 나를 기분나쁘게 하지 말 것. 2) 내가 똑똑한 존재란 사실을 인정할 것, 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건 대놓고 비아냥대는 것이 맞다. 내 기억으로는 이전엔 이 정도까지 비아냥대지는 않았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라도 비아냥 댄다고 할 때, 그 비아냥이 내 글의 나머지 논지를 무력화시키는 근거가 될 수 있을까? 내 '대화의 규칙'은 그렇지 않은데, 슈리 님의 대화의 규칙은 그런 모양이다. 기분이 나쁜 건 기분이 나쁜 것이고 논지는 논지다. 더구나 나는 그의 글에서 받은 불쾌감을 차마 다 표현할 수가 없어서 충분히 절제했다. 물론 그 절제의 결과 "진리를 탐구하기보다는 어떻게든 논쟁 상대를 깔아뭉개려는 데 목적을 두는 저 ‘논객’ "이란 말을 듣게 되었다. 도대체 누구시길래 나로 하여금 "어떻게든 논쟁 상대를 깔아뭉개려는" 욕망을 불러일으킨 것일까? 자뻑도 이 정도면 병이다. "세계의 밤"이란 멋드러진 블로그 제목을 쓰는 짱 멋진 헤겔주의자 님을 이번에야 알아봐서 송구스럽다. 쓰던 글만 다 쓰고 앞으로는 무슨 일을 하시든 고개숙이고 지나치도록 하겠다. 당신은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고, 나는 장터에서 노가리나 까는 사람 아닌가. 서두는 이만하면 됐다. 


1.
슈리 님은 논란이 되었던 자신의 모든 글과 덧글을 지웠고, 박가분 님은 논쟁에 대해 코멘트하면서도 트랙백을 보내지 않고 있으며, thehole 님은 더 이상의 논쟁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글은 더 이상 트랙백을 보낼 필요가 없다. 하지만 쓰던 가라가 있고 보던 사람이 있으니까 매듭은 짓겠다.


'인맥중심의 감정싸움'? 난 이번에 슈리 님도 thehole 님도 처음 알았다. '상상적 적대감'? 내가 뭐하러 박가분이나 슈리에게 그런 걸 가진단 말인가? 물론 저게 다 날 겨냥한 얘기는 아니라고 그들이 변명할 수 있겠으나 애초에 일부러 두루뭉술하게 써놨으니 내가 구태여 이렇게 반응하는 것도 적절할듯 하다. 이것은 요약이고 이것은 추정이란 걸 구태여 다 표기해주는 내 글쓰기에 대해 '관심법'이라 규탄하던 치들이 남을 지탄하는 수준이 이렇다. 


곁가지부터 치고 넘어가자. 박가분 님은 이렇게 말한다.


(...) 세번째, 슈리가 저지른 실수가 그의 논지에 있어 치명적인가?
 
  결론을 앞질러 말하자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본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친히 트랙백을 걸어준 한 논객이 일전에 썼던 글을 하나의 '비유'로 들어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

결국 이러한 함의를 갖고 있는 '초월론적 논증'이라는 개념 및 용어를 단지 '거짓 딜레마에 의한 논증'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라면, 그것은 좀 지나치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오류'가 "거짓 딜레마에 의한 논증"을 "자제해야 한다"는 그의 논지 자체를 저해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슈리의 오류가 '좀 더 노동자 운동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그의 논지에 있어 치명적인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오류는 좀 더 엄밀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물론 슈리의 사례와 이번 사례는 경우가 좀 다른데, 전자의 경우 동일한 개념적 영역에서 잘못된 범주구분을 적용하고 있다고 한다면, 여기서 그는 아예 다른 영역의 개념을 잘못 끌어들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후자의 잘못은 물론 담론적 현실 속에서 거의 관행처럼 굳어졌으니 이해할 여지는 있겠다. 이를테면 현실의 '우발성'을 강조하기 위해 갑작스레 양자역학 이론을 부적절하게 참조하는 경우처럼 말이다.
 
슈리의 글에 관해 어떤 지적 허영심이 개재되어 있다는 평가는 있을 수 있겠다. 굳이 '초월론적 논증'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여가며 자신의 정치평론을 전개해야 했던 한 논객의 허영심처럼 말이다. 나 역시 이 두 사람의 허영심을 일정부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내 입장은 결국 '이해할만하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고질적이지만 앞으로 고쳐나갈 문제인 것이다. 결국 여기에 대해서 얼마나 냉정하게 평가해야 할지는 각자가 판단할 몫이다.(...)  - 박가분 : 최근의 논란에 대한 최종진술



즉 그가 말하려고 하는 바는 슈리 님이 범한 실수는 내가 2011/01/15 - [정치/메타-비평] - 정치평론에서의 초월적 논증 에서 범한 것과 비슷하거나 덜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얘기에는 두 가지 크나큰 문제점이 있다. 작은 것부터 얘기해보자. 


첫째, 해당 글에서 내가 칸트의 '초월적 논증'이란 말을 끌어들인 것은 정치평론에 흔히 등장하는 어떤 종류의 주장들에 대해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였다. 즉 현상이 있었고 그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개념어가 동원되었다. 만일 그 개념어가 현상을 포착하기에 부적절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비판하고 다른 개념어를 고민할 수 있다. 이 조어에 대한 비판은 글을 썼던 당시에도 있었으며 나는 '그렇다면 다른 말을 추천해 달라.'고 반응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판을 했던 한 전공자도 "그런데 그렇게 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라는 식으로 말씀을 하셔서 일단 그냥 내버려둔 상태다. 박가분 님이 구태여 나를 공격하기 위해 논점과 상관없이 뒤적인 논문에 나온 것처럼 그 적용이 잘못일 수도 있지만, 그럴 경우엔 또 새로운 용어를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가 제시한 '거짓 딜레마에 의한 논증'이란 조어는 해당 논의의 맥락에 부적합하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그런 종류의 논증에서 그 딜레마가 '진실'인 경우도 왕왕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가 내 글 요약이랍시고 해놓은 것을 보면 해당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지만, 내 부족한 글에 대한 논의는 이쯤에서 접어야겠다.)  

반면 슈리 님의 글은 애초에 "우리가 노동에 대해 말할 때, 의미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개념은 맑스의 것인데, 그 맑스의 노동 개념에서 성매매가 노동인지 아닌지를 검증해 보자."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어떤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그 유사한 현상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는 개념어를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 애초에 한 개념의 기준에 의거하여 이 현상을 평가하고자 한 것이다. 이럴 경우 그가 '맑스의 노동 개념'을 잘못 이해했다면 당연히 그것은 논지에 치명적이다. 박가분 님이 문제삼은 내 글이 비판받을 때 다시 고민해야 할 것이 새로운 조어 하나라면, 슈리 님의 경우 사실상 그가 쓴 1절 자체를 다 날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정도도 구분을 못하고 어차피 우리는 다 허영 덩어리가 아니냐고 강변한다면 별로 할 말이 없다. "아, 우리는 다른 대화의 규칙을 공유하는군요."라고 물러날 수밖에. 


물론 박가분 님은 슈리 님 글의 1절 논지가 아닌, 전체 논지를 상정해놓고 이 논의가 논지에 치명적이지 않다고 우긴다. 1절의 논지가 "맑스의 노동 개념에서 성매매는 노동이라 볼 수 없다."이고 이 논지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전체 글의 결론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하는데, 1절이 다 날라가도 결론에는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따지고 보면 이것도 진짜 생뚱맞다. 가령 나는 진화론이 진리에 가깝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설령 어떤 멍청한 학생이 잘못된 생물학적 논거로 진화론이 옳다는 레포트를 써냈다고 해서 그게 진화론의 타당성에 흠집을 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박가분 님 식으로 반응한다면 그 잘못된 생물학적 논거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은 기본적으로 옳기 때문에, 그 학생의 레포트는 기본적으로 타당하다고 말해야 한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결론에 "2+2=4"라고 기입한 모든 엉터리 같은 논의에 최소한 70점은 줘야 한단 말인가?


슈리 님의 논지를 '옹호'하는 박가분 님의 논의는 매양 그런 식인데, 가령 페미니즘 논문을 뒤져봐도 성매매가 '노동'이 아니라는 얘기가 있으니 슈리 님의 주장이 무리가 없다고 우기는 식이다. (최종진술의 두번째 질문.) 인류의 역사는 오래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아무렇게나 내뱉는 주장들이 과거의 누군가가 치밀하게 검토하여 내세운 주장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우리의 주장이 그 치밀하게 검토된 주장과 비슷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는 해도 "너도 비슷한 놈이잖아."라고 뿔잡기를 하려고 했던 박가분 님의 시도는 가능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일 내가 슈리 님의 맑스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대해 시비를 걸었다면 말이다. 문제는 내가 그런 적이 없다는 데에 있다.  


슈리 님과 그의 글을 (부분적으로) 옹호하는 박가분 님은 슈리 님 글에 대한 비판 가운데 오직 “슈리는 맑스의 이론을 오해했다.”는 측면의 것만 받아들이고 있다. 하긴 맑스주의로 사태를 재단하려던 사람이 맑스주의에 무지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본인에게 돌아갈 정서적 데미지만 보면 그 지적이 가장 중요해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내겐 그 부분이 사태의 핵심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슈리 님의 글이 활용한 근거가 모두 타당하다고 인정할 때라도, 그의 글은 논증적인 부분에서 좌충우돌하고, 결과적으로 ‘무의미’를 발생시킬 뿐이라는 지적을 하였다. 그런데 슈리 님이나 박가분 님이나 그 사실을 수용할 생각은 없는 것 같다. 
-2011/05/24 - [문화/기록물] - 슈리/박가분 재비판 (1) - 오류도 명백해야 의미를 가진다.



그들을 '재비판'한 내 글이 무려 이렇게 시작된다. 난 도대체 박가분 님이 무슨 생각으로 내 예전 글을 물고 늘어졌는지 이해가 안 된다. 왜 그는 슈리 님의 '지적 허영심'이나 '맑스주의에 대한 무지'를 논점으로 삼지 않은 내 글을 가져다 놓고 "너도 비슷한 허영심 있고 비슷한 수준으로 무지하잖아!"라고 외치고 있었던 걸까? 상대방의 논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들을 비판하는 이들은 모두 한통속이라 치부하고 되는 대로 욕했다고 추정할 도리 밖에 없겠다. "(...)상상적 적대감과 인맥 중심의 감정싸움으로 얼룩진 추악한 것이 되고 말았다.(...)" 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정리인가? 본인들이 논쟁을 그 수준으로 밖에 못 끌고 간다고 이렇게 자백하고 있으니 말이다. 


2.

그래서 나는 슈리 님의 글이 활용한 근거가 모두 타당하다고 인정할 때라도, 그의 글은 논증적인 부분에서 좌충우돌하고, 결과적으로 ‘무의미’를 발생시킬 뿐이라는 지적을 하였다. 그런데 슈리 님이나 박가분 님이나 그 사실을 수용할 생각은 없는 것 같다.
-2011/05/24 - [문화/기록물] - 슈리/박가분 재비판 (1) - 오류도 명백해야 의미를 가진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이게 핵심이었다. 

2011/05/18 - [문화/기록물] - 슈리, "좌파는 성매매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비평
2011/05/19 - [문화/기록물] - 슈리 님의 답변에 대한 코멘트
2011/05/24 - [문화/기록물] - 슈리/박가분 재비판 (1) - 오류도 명백해야 의미를 가진다.
2011/05/25 - [문화/기록물] - 슈리/박가분 재비판 (2) - 노동계급, 맑스주의의 아포리아?


이 네 편의 글에서 얘기한 것이 모두 그것이었다는 거다. (굳이 따지자면 네 번째 글만 다소 결이 다르다.) 앞선 두편의 글을 통한 비판에 대해 두 사람이 응대를 하지 않으니 다시 '재비판'을 쓰게 된 것이 아닌가? 슈리 님은 1절에 대해선 포기하고 2절에 대해서만 답변했다가 재차 질문하자 논의를 멈췄고, 박가분 님은 그냥 슈리 님 얘기를 그대로 수용하여 내가 '오해'했다고 재단한 후 내 논지에 대해서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 언급을 안 하는 건 자유라고 볼 수도 있는데, 그랬으면 적어도 툴툴대지나 말아야지. 박가분 님이 저 긴 글을 통해 이상한 뿔잡기는 시도하면서 이 '무의미'론에 대해 언급한다는 방식이 고작 이거다. 


어떤 사람은 이번 문제제기가 의미가 없다는 요지의 장문의 글을 쓰는 (그야말로) 의미 없는 일을 한 것으로 안다. (이건 대체 무슨 심리인가?^^;;) 
 - 박가분 : 최근의 논란에 대한 최종진술



이런 걸 답변이라고 할 거면 차라리 내가 쓴 글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 쪽이 더 낫지 않겠는가? '무의미'란 말에도 여러가지 층위가 있다. 이론적 무의미함도 있고 실천적 무의미함도 있다. 그런데 내가 말한 무의미는 논지가 구성이 안 된다는 차원에서의 무의미함이다. 즉 슈리 님 글이 나중에 슈리 님/박가분 님이 주장하는 논지를 구성하는 논증을 펼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들은 곧잘 '무의미'에 관한 얘기를 '실천적 무의미'로 받아들이고, "이론적인 얘기가 실천적인 의미를 어떻게 담보하지 못한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그러는 당신들의 글은 실천적으로 무슨 의미를 가지나?"라고 답변하는 행태를 반복해 왔다.


실제로 나는 슈리 님의 글이 논지의 수준에서 무의미하고, 이론적으로도 무의미하며, 실천적으로도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문제삼는 것은 첫번째 것인데, 왜냐하면 나는 내가 쓰는 대부분의 글도 이론적으로/실천적으로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슈리 님의 글을 비판하는 글을 쓸 때의 내 글 역시, 이론적으로도/실천적으로도 무의미할 게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글이 슈리 님의 글처럼 논지 수준에서 무의미하지는 않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면 한 번 찬찬히 정리해 보자. 


1) 어떤 글이 실천적으로 무의미하다면, 그 실천적 무의미함을 파헤치는 것도 대개 실천적으로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2) 어떤 글이 이론적으로 무의미하다면, 그것이 이론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을 파헤치는 것도 물론 이론적으로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레포트를 채점할 때 교수님들이 '노동'을 하고 있다고 여기지 '연구'를 하고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3) 그러나 논지의 수준에서 무의미하단 얘기는 어떨까? 내가 한 편의 글로써 슈리 님의 글이 논지의 수준에서 무의미하단 주장을 펼친다면, 내 글은 슈리 님의 글과 비슷한 무의미의 지경에 빠지는가? 그럴 수는 없다. 내 글에는 적어도 논지가 있기 때문이다. 슈리 님의 글이 무의미하다는 그 논지 말이다.
 


도대체 이런 것도 설명을 해줘야 한단 말인가? 비아냥 대려면 내가 애써 설명한 그 글의 구조적 무의미를 논파한 다음에 할 일이다. 학자들 책을 읽을 때 '논증'은 안 보고 멋잇게 남 놀리는 세레모니만 기억해뒀다가 그대로 따라하는 꼬맹이들을 보는 것 같다.  


3.
"같은 대화 규칙을 공유하지 않는다." 정말로 기찬 표현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들은 내가 질문한 것에 대해 대꾸하는 법이 없다. 중요하지 않다 생각해서 대꾸하지 않았다면 내 얘기를 언급도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들은 딴소리를 늘어놓고 나를 반박했다고 으스댄다. 칼 한번 부딪혀본 적 없으면서 세레모니부터 한다. 책 보면서 그런 것만 보는가?


물론 나한테만 그러는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thehole 님이 쓰신 thehole/ 치안과 정치 : 슈리 님께 던지는 질문 말미에 나오는 '치안'과 '정치'의 구분에 대한 질문은 슈리 님 글의 3절을 지탱하는 뼈대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다. 그들은 이런 비판에 대해 입을 닫는다. thehole 님은 줄곧 '슈가분'이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에 무지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고 박가분 님의 최근 글에 대해서도 코멘트를 했지만, 이에 대해서도 답변을 바라기는 힘들 것이다. 대신 그들은 자신을 향한 비판을 "
상상적 적대감과 인맥 중심의 감정싸움으로 얼룩진 추악한 것"이라 질타하고 자신이 쓴 모든 글을 지우거나(슈리), "드디어 여러 사람들로부터 우려하던 반응들"이 나왔다며 질문과 상관없는 장광설을 늘어놓는다(박가분).



왜 장광설이냐고? 박가분 님은 '최종진술'에서 스스로 네 가지 질문을 던졌다.

첫 번째, 이 문제제기는 완전히 의미가 없는가?
(...)
두 번째, 성노동이라는 개념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 분개할 일인가?
(...)
세 번째, 슈리가 저지른 실수가 그의 논지에 있어 치명적인가?
(...)
네 번째, 맑스 정치경제학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
 - 박가분 : 최근의 논란에 대한 최종진술 



마지막 순간까지 슈가분을 비판하던 이는 서넛이라고 알고 있다. 글의 논지가 구성이 안 된다고 비판하던 나, 슈리/박가분 님이 맑스주의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비판하던 thehole 님, 그리고 페미니즘 관련해서 논쟁하던 논자가 두엇 있었다고 알고 있다. 나는 그중에서는 thehole 님 글 밖에 안 읽었다. 박가분 님은 적어도 첫 번째와 세 번째 질문을 통해 나나 thehole 님을 비판하고 있는 것 같다. 세 번째 질문이 "과거 한윤형의 글을 쓴 오늘의 thehole"이나 "오늘날 thehole의 논지에서 슈가분을 비판하는 한윤형"이라는 '상상 속의 동물'을 향한 것이라는 지적은 1절에서 했다. 두 번째 질문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결론이 같으면 논의의 가치도 같다는 해괴한 전제에서 나온 질문이란 지적도 이미 1절에서 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생각하는 그들의 글의 '무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밝혔다. 


박가분 님의 첫번째 질문은 그간 내가 주장해왔던 그 '무의미'에 대한 나름의 해명이라 봐야 할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아무것도 해명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그의 답변을 다시 한번 검토해 보자.


(...) 어떤 사람은 이번 문제제기가 의미가 없다는 요지의 장문의 글을 쓰는 (그야말로) 의미 없는 일을 한 것으로 안다. (이건 대체 무슨 심리인가?^^;;) 여기에 대해 다시 할 말을 해야겠다.
 
우선 나는 저번 슈리의 글이 (프리스티가 사석에서 지적했듯이) 사실은 그렇게 '새롭고' '파격적인' 주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 만일 이 논쟁이 성적, 인종적, 생태주의적, 다문화적 투쟁들의 연쇄 속에서 계급투쟁이 갖고 있는 지위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면, 슈리가 제기한 쟁점 자체는 그렇게 '생뚱맞은' 것은 아니라는 게 내 판단이다. (...) 그러나 만일 새로운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성매매와 같은 주변적이고 지하경제적 성격을 띄는 경제활동의 지위, 혹은 그것에 연루된 사람들의 정치적 지위에 대한 판단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  나도 지젝과 마찬가지로 (누군가 애써 그렇게 보고 싶어하는 것과 달리) 슈-가분(?)의 입장이 그렇게 무모하거나 별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더 나아가 어떤 의미에서는 여타 성적, 인종적, 생태주의적 투쟁을 구조화하는 '반자본주의적 투쟁'이 (이론을 떠나) '현실적인 차원'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변혁할 수 있는 핵심세력과 역량을 기르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결국 최종적으로는 '현실의' '자본주의 경제' 속에서 그러한 역할에 적합한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해 판단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제대로 된 노동운동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는 여타 성적, 인종적, 생태주의적 투쟁들에 대해 정세 속에서 실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환상을 깨서 미안하지만 이 점에 관해서 프리스티는 나와 전적으로 같은 입장이다. 그와 나와의 차이가 있다면 현실의 인간관계에서 누가 더 현명하고 능숙하게 그 점을 발화했느냐는 능력의 차이일 뿐이다.) 나는 이마저도 그렇게 무모하거나 별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그 점에 대한 반론에 있어 비아냥이나 관심법을 시전하는 것 외에 나는 별로 설득력 있는 설명을 듣지 못했다. (...)
* 강조는 내가 했다. 
 - 박가분 : 최근의 논란에 대한 최종진술

 
 
그가 무의미하게 허공을 때리고 있다는 사실은 아래 인용문으로 증명된다. 


이게 박가분의 입장에서 읽어낸 슈리의 논점의 합리적 핵심일 것이다. 그리고 슈리 님이 단지 그렇게만 말했다면 비판받아야 할 하등의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2011/05/24 - [문화/기록물] - 슈리/박가분 재비판 (1) - 오류도 명백해야 의미를 가진다.



환상을 깨서 미안하지만 이 점에 관해서 하뉴녕은 슈가분과 별로 다른 입장이 아니다. 나와 슈가분의 차이가 있다면 나는 슈리의 첫 번째 글이 결코 저 논지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나는 슈리 님의 첫 번째 글이 '잘못' 쓰여졌다는 점에 대해서만 줄곧 말해왔다. 나는 슈리 님이 박가분 님이 정리한 논지만을 얘기했다면 "비판받아야 할 하등의 이유도 없었을 것"이라 이미 천명한 바 있다. 지젝과 라클라우의 논쟁에 대한 이야기는 내 관심사항이 아니다. 그거야 자본주의가 망하면 검증할 수 있겠지.


나는 이마저도 그렇게 무모하거나 별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그 점에 대한 반론에 있어 비아냥이나 관심법을 시전하는 것 외에 나는 별로 설득력 있는 설명을 듣지 못했다.



내가 지젝-라클라우 논쟁을 보고 라클라우 편을 들고 있는 게 아닌데 거기다 대고 뭘 반론(?)하란 말인가? 슈리 님이 두 번째 글에서 그 논쟁에 대해 언급했다는 사실은 나도 안다. 하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비겁한 변명이다. 구체적인 논지에서 밀리니 진영을 호출하여, 내가 이 깃발을 수호하려고 이런 글을 썼다고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뭐 진짜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게 무슨 변명이 되는가? 논지가 파탄난 글이지만 계급투쟁이 다른 투쟁보다 중요하다는 요지만 지키면 뭔가 이루어지는가? 앞의 내용이야 어찌됐든 결론이 "2+2=4"로 끝나면 의미를 가지는가? 


논지가 구성이 안 되는 글을 붙들고 내용 요약하고, 내용이 이렇게 비약하는 건 아마도 이런 문제의식 때문일 것이다, 라고 친절하게 적어주는 것은 '관심법'이고, 그 얼토당토 않은 글을 보고 "아, 지젝-라클라우 논쟁에서 지젝 편을 드는 글이군요!!!"라고 반응하는 것은 올바른 독해인가? 정말이지 맑스-지젝 팬픽을 쓰자는 건지 정치평론을 하자는 건지 모를 친구들이다. 


4.
다시 한번 정리한다면, 이렇다. 슈리 님의 첫 번째 글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자신의 글을 모두 날렸지만, 내가 저장해 놓은 것은 한글파일로 첨부해 드릴테니 궁금하신 분은 언제든지 확인하시라. 슈리 님의 사후적 설명을 모두 받아들여 그의 첫 번째 글,  "좌파는 성매매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의 논지를 구성해 보자.


1절 성노동이라는 것이 있는가?
성매매는 맑스적 의미에서 노동이 아니다. 좌파들은 이 규준을 따라야 한다. 
(논지파악에는 다들 이론의 여지가 없으나, 맑스의 논의를 잘못 파악했다는 논란을 일으킨 부분)

2절 성과 도덕
- 1안 : 성매매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쪽은 주로 자연주의적인 논거를 댄다. 이에 반대하면서, 철학적/사변적으로 성매매의 부도덕함을 입증해보자. 칸트주의는 충분한 답을 주지 못한다. 그래도 대략적으로 그것이 부도덕이되, 크나큰 부도덕은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냥 그렇게 될 것 같다. 우리는 어떤 좌파들이 수월하게 그렇게 하듯 도덕 문제를 완전히 배격해서는 안되지만, 부르주아 도덕과는 다르게 '상대적'으로 그것을 적용해야 한다.'칸트적 의미의 자유'와 사회적 관계를 모두 고려하여 '상대평가'해야 한다.  

- 2안 : 성매매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쪽은 주로 자연주의적인 논거를 댄다. 이에 반대하면서, 철학적/사변적으로 성매매의 부도덕함을 입증해보자. 시도해본 결과 잘 입증이 되지 않는다. 즉 성매매의 부도덕함의 논거는 명제적으로는 찾을 수 없고 맹목적인 듯하다. 
우리는 어떤 좌파들이 수월하게 그렇게 하듯 도덕 문제를 완전히 배격해서는 안되지만, 부르주아 도덕과는 다르게 '상대적'으로 그것을 적용해야 한다.
(내 비판에 대한 슈리 님의 해명으로 재구성한 것이 2안이다. 박가분 님은 2안을 지지하면서 내가 '오해'에 기반해서 슈리 님을 비판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2안을 따르더라도 2절의 내용이 명료하지가 않다. 그 자체로 논지가 구성되지도 않고, 1절과 3절의 내용을 통해 그 의미가 해명되지도 않는다.)

3절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성매매 합법화/금지 문제 같은 것은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부르주아 국가 기구 내의 치안의 문제다. 그것은 정치적 진리의 장소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아무리 바뀌더라도 맑스가 분석한 자본가-노동자의 기본 틀을 바탕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좌파는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 는 얘기도 분명히 있지만 슈가분이 절대 그런 주장이 아니었다고 박박 우기니 할 수 없이 뺀다.) 




자, 그리고 박가분 님이 정리하는 이 글의 '논지'를 들어보자. 


(...) 결국 슈리의 최종적 논점은 좌파들에게 정치적 진리(혹자에게는 이 단어가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당파성이라는 용어를 차용해도 무방하겠다)를 판가름할 수 있는 유일한 객관적 장소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그 자체이며, 거기서 일어나는 유의미한 변화에 관해 취할 수 있는 당파적 입장을 제외한다면, 그 나머지 영역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갈등은 말 그대로 '열려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 영역에 대해 좌파가 정치적으로 취할 수 있는 입장은, '상황'에 대해 열려 있는 문제이며, '실용적 판단'에 의해 대답되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
박가분/ 슈리의 글과 논쟁을 읽고서 - 맑스주의의 아포리아




(...) 만일 이 논쟁이 성적, 인종적, 생태주의적, 다문화적 투쟁들의 연쇄 속에서 계급투쟁이 갖고 있는 지위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면, 슈리가 제기한 쟁점 자체는 그렇게 '생뚱맞은' 것은 아니라는 게 내 판단이다. (...)
 - 박가분 : 최근의 논란에 대한 최종진술



내가 3절의 내용을 이 '정리'에 맞춰서 요약해준 측면이 있다. 그걸 감안하지 않더라도, 이 글의 내용은 저 논지를 충족할까?


1) 왜 성매매란 대상을 선택했을까? 성매매는 성적/노동적 투쟁이 중첩된 문제인가? 아니 근데 그게 '노동'은 아니라며. 게다가 슈리 님은 글 도입에서 '여성'의 문제라 이해하진 않는다고 했지. 그럼 대체 '성매매'란 특수가 우리가 드러내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2) 왜 성매매가 맑스적 기준의 노동이 아니라고 말해야 했을까? 그런 규정을 통해서 성매매에 대해선 뭐가 해명되는가? 더구나 그가 말했던 것처럼 공무원 교사 비정규직 시간강사 등이 맑스적 의미의 '노동자'는 아니어도 노동조합을 설립하는 것이 정당하다면(그는 이것이 정당하다고 했다.), 성매매 여성들이 '노동'운동을 하는 것도 정당하지 않은가? 그걸 금지할 것도 아니라면 이 논의의의 의미는 무엇인가? 맑스주의가 성매매에 대해 별로 할 말이 없다면, 왜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의 잣대로 성매매를 바라봐야만 하는가?

3) 왜 성매매와 도덕의 관계에 대해서 탐구했을까? 전체 논의에서 이 부분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그리고 대체 그 탐구의 '내용'은 무엇인가?  슈리 님은 이 부분에 대해서 일관된 입장이 있는가? 박가분 님은 슈리 님의 입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4) 이런 얘기들이 엮여서 어떻게 저런 결론을 낳을 수 있는지 납득할 수 있을까? 어떻게 어떻게 생각을 잘 꼬아보면 그럴 수도 있을까? 그런데 왜 저들은 자신이 쓰고 옹호하는 글들에 대해 '설명'은 하지 않고 남들이 '오해'한다는 말만 반복하는 걸까? 



이런 문제에 대해 글만 봐서는 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저 글이 '무의미'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비판에 대한 반응 속에서도 저들은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던져주지 않으니 나는 저들이 한국어를 사용하지 않는게 틀림없다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맑스주의, 페미니즘, 성매매 여성의 현실 같은 이 글을 분석하는데 필요한 굉장히 중요한 요소들을 고려하지 않고도 나는 이와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아마 어떠한 비난을 들어도 그들이 의기양양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저 세 가지에 정통한 부지런한 사람'이 존재하기 힘들다는 그 확률적 현실에 있을 게다.) 저들의 반응을 보건대 이 결론을 바꿀 일은 없을 것 같다. 도대체 왜 저들에겐 일말의 회의도 없는 것인지, 자신들이 나름대로 믿는 바가 있다면 왜 그것을 글의 논지에 맞추어 설명해주지 않는 것인지, 에 대한 순수한 의문이 나로 하여금 이 다섯 편의 글을 쓰도록 했다. 그러나 나도 더 이상 밑빠진 영혼에 찬물을 들이붓는 수고를 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장터로 갈테니 당신들은 진리탐구를 하길 바란다. 그 진리가 몇 사람의 진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P.S 왜 '슈가분'이란 경멸적(?) 조어를 만들었냐 항변하는 이들도 있더라. 굳이 밝히자면 의도는 이렇다. 몇몇 선배들이 메일을 보내 '그들이 말하는건 맑스주의적이지도 않으니 맑스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처럼 쓰지 마라'고 조언했다. 그래서 나는 맑스의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사람들의 주의를 잡아챌 다른 단어를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이 조어는 그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다. '슈가분'이 당하는 고난(?)이 개인의 것이 아니라 맑스주의의 고난으로 느껴지는 것, 그것이야말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좌파 정치경제학이나 맑스주의나 운동담론 등등이 얼마나 게토화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징후' 아니겠나 싶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341 유럽, 덜 떨어진 자본주의? [30] 하뉴녕 2011-06-16 4086
1340 홍진호 은퇴 file [8] 하뉴녕 2011-06-16 4674
1339 당신과 나의 전쟁 용화사 상영회 file 하뉴녕 2011-06-14 3862
1338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교보문고 강연회 file [2] 하뉴녕 2011-06-14 3844
1337 청춘상담앱 정혜신 인터뷰에 대한 아이추판다 님의 비판에 대한 답변 [59] [1] 하뉴녕 2011-06-07 5729
1336 "그냥 압니다"와 '방법적 신뢰'의 문제 [9] 하뉴녕 2011-06-06 4576
1335 인식의 문제와 실천의 문제 : 누가 마르크스를 우습게 만드나? [15] 하뉴녕 2011-06-05 4517
» 슈리/박가분 재비판 (3) - 글의 논지가 안 보이는게 내 책임인가? file [15] [1] 하뉴녕 2011-06-04 5527
1333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과 한국 사회? [11] 하뉴녕 2011-06-04 4819
1332 진보진영 대표자 연석회의 합의문과 이후 상황에 대해 [11] [1] 하뉴녕 2011-06-02 4630
1331 강남좌파의 기원과 형성 [86] 하뉴녕 2011-05-28 9318
1330 2001년 8월-10월 : 박용진-강준만-주대환의 비판적 지지 논쟁 [57] 하뉴녕 2011-05-26 6643
1329 슈리/박가분 재비판 (2) - 노동계급, 맑스주의의 아포리아? [21] 하뉴녕 2011-05-25 6121
1328 슈리/박가분 재비판 (1) - 오류도 명백해야 의미를 가진다. [8] 하뉴녕 2011-05-24 4229
1327 임금노동vs비임금노동 / 생산적노동vs비생산적노동 [4] [1] 하뉴녕 2011-05-19 3819
1326 슈리 님의 답변에 대한 코멘트 [8] 하뉴녕 2011-05-19 2693
1325 슈리, "좌파는 성매매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비평 [9] [2] 하뉴녕 2011-05-18 5117
1324 뒤늦은 5.16 기념(?) 포스트 [22] [2] 하뉴녕 2011-05-18 5787
1323 안병진의 예측과 박근혜 문제 [16] 하뉴녕 2011-05-08 4564
1322 최원 님의 세 개의 트랙백에 대한 답변 [11] [1] 하뉴녕 2011-05-07 5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