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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진보’하란 말인가?

조회 수 8152 추천 수 0 2010.04.30 07:12:43

한신대학교 21세기 진보포럼 1차행사에 나가 강연한 원고입니다. 말이 강연원고이지 30분 강연 후 패널토론 후 질의응답이었기 때문에 이대로는 안 했습니다. 질의응답 시간 때 더 재미있는 얘기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이 글은 그냥 한 편의 평이한 글로 읽으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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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정의?


‘진보’자가 붙어 있는 정당(진보신당)의 당원인데도 진보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말문이 막힌다. 누구나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근본어휘의 정의를 물으면 할 말이 궁하다는 건, 이미 2천 5백 년 전에 소크라테스가 퍼포먼스를 통해 보여준 바 있다. 그래서 포괄적인 정의에 대한 물음은 포괄적인 답변으로 눙치며 시작해야겠다.


“그러나 진보가 별 것이던가? 구석기 시대에 돌을 깎고 갈아서 연장으로 쓰면 그것이 진보 아니었던가? 신분계급이 엄격했던 고려중기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냐며 계급을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 했던 만적의 꿈이 바로 진보 아니었나?” (노회찬, <진보의 재탄생> 서문에서) 


진보(進步)라는 말에는 본시 ‘앞으로 나아간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그래서 이 말은 왠지 멋있어 보이기도 하는데, 그래서 더 어렵다. 가령 참여정부는 한미FTA가 ‘앞으로 나아가는 결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시장주의를 강하게 관철하는 것이 ‘진보적인 태도’라고 믿는 사람들도 많다. 사실 마르크스도 자본주의는 이전의 다른 체제보다 진보적인 것이라 했다. 부르주아지는 귀족들에 대항하여 사회의 진보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적 관점에서 사회주의를 ‘진보’라고 부르는 것은, 자본주의 이후의 체제가 사회주의가 될 것이라는 역사철학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진보’의 문제는 가치지향의 문제가 아니라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구별하는 문제와 비슷한 것이 된다. 더구나 오늘날의 사람들 중 상당수는 인류 역사의 최종 귀착이 ‘사회주의’일 거라는 마르크스의 역사철학을 신뢰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이후는 없을지도 모른다. 역사는 예정된 과정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우연들의 조합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단어 그대로의 의미만으로는 ‘진보’를 정의할 수 없다. 모종의 가치지향이 필요하다.


"사회주의는 인간 영혼의 가장 고귀한 감정의 항거에서 태어난 것이다.…… 사회주의는 비참함, 실업, 추위, 배고픔과 같은 견딜 수 없는 광경이 성실한 가슴들에 타오르게 하는 연민과 분노에서 태어난 것이다. ……한쪽엔 호화, 사치가 있는가 하면 다른 쪽엔 거만한 게으름이 있는, 이 터무니없고도 서글픈 대비(對比)에서 사회주의는 태어난 것이다. 사회주의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가장 천한 인간의 동기인 시샘의 산물이 아니라, 정의의 산물이며 가난한 자에 대한 동정의 산물인 것이다."


홍세화가 소개한 프랑스의 어느 사회주의자의 말이다. 이것은 ‘사회주의’라는 이념이 탄생하게 된 근원적 정서를 소개한다. 설득력 있다. 하지만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보수 우파들과 대화를 해보면 안다. 가령 무상급식 논쟁을 생각해보자. 유럽에 가면 보수 우파 소리도 못 들을 양반들을 ‘좌파’로 몰아붙이는 악명높은 한국의 우파들도, 아이들이 밥을 굶어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가난한 집 아이들에겐 이미 밥을 주고 있고, 부잣집 아이들에게까지 밥을 줄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말한다. 보수주의자들도 입으로는 “우리는 자본가를 위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이건희를 숭배하는 이유는 어쨌든 논리적으로는 이건희가 잘 되어야 한국인들도 잘 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도 ‘서민’을 위한다고 말한다. ‘서민’을 위하기 위해선 시장경제의 경쟁이 더 효율적이라는 거다. 이런 논쟁을 보면 하나의 도식이 도출된다.


조금 낡은 도식이지만 중앙정치의 차원에서는 모든 문제를 시장에 맡기자는 쪽을 ‘보수’라 하고 국가가 직접 나서 인민의 복지를 향상시켜야 한다는 쪽을 ‘진보’라 한다. 한국의 경우 학계와 관료들의 차원에선 미국에서 공부했고 미국 사회를 따라가자는 사람들을 ‘보수’라고 하고 유럽을 따라가자는 사람들을 ‘진보’라고 볼 수도 있다. 한국 사회는 모든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동의하는 명제, ‘상식’의 지반이 빈곤한 사회다. 그런 곳에서 어떤 사람들은 미국 사회의 ‘상식’을 들여와 이러쿵저러쿵하고 다른 사람들은 유럽 어느 나라의 ‘상식’을 들여와 이러쿵저러쿵한다.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그렇다.


생활인의 차원으로까지 내려온다면 어떨까. 생활인들이 스스로를 ‘진보’로 자리매김하고자 할 때 대면하는 것은 정갈한 우익이념이 아니라 냉소주의이다. 간단히 말하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발언하다보면 어느 날 자신이 본인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좌파’로 불리게 되는 경험을 겪게 된다. 보통의 젊은이들이 ‘좌파 청년’(?)을 이상한 눈길로 바라보는 것은 그들의 이념에 동의를 못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느끼는 생소함은 이념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도대체 저 친구가 왜 토익공부는 안 하고 저런 것에 관심을 가지는지를 도통 이해하지 못한다.


대학생의 처지?


“대학에 가지 않는 쪽이 훨씬 소수다. 지금 대다수의 사람들은 평균적 사회구성원으로 인준받기 위해 대학에 간다.” (박권일, “대학의 사회적 위상과 가치의 변동” 황해문화 2010 봄호에서)


고등학교 졸업생의 80% 이상이 대학을 가는 나라다. 미국을 뛰어넘은 세계최고의 대학진학률이다. 5%의 젊은이가, 2-30%의 젊은이가 대학을 가던 시대와는 사정이 다를 수밖에 없다. 과거의 대학생은 이미 인텔리로 취급받았고, 예비 엘리트집단으로 인정되었다. 사회에서 대우받는 삶이 보장된 이들은 사회에 자신이 공헌할 수 있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할 여유도 있었다. 좀 더 넓은 문맥에서 바라본다면,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던 ‘역사적 공산주의’ 체제가 아직 건재했다. 노동현장으로 투신한 선배 대학생들의 실존적 결단들을 ‘유물론적으로’ 환원할 생각은 없지만, 그들이 그런 환경에서 태어난 이들이라는 점은 사실이었다.


오늘날의 대학생의 처지는 그와는 사뭇 다르다. 대학생이 된다는 것은 박권일의 표현대로 평균적 사회구성원임을 인준받기 위한 하나의 절차일 뿐이다. 평균적인 대학생들은 입학과 동시에 ‘취업전쟁’에 뛰어든다. 부모가 등록금을 전액부담할 수 없는 학생들은 제 이름으로 빚을 지거나 그것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88만원 세대’론이란 것이 유행이 되었다. 한국 사회의 계층불평등이 세대 문제로 전이되고 있다는 주장을 담은 담론이었다. 원래부터 ‘88만원’을 벌었던 젊은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적응하며 살아왔는데도 ‘88만원’을 벌게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진 젊은이들을 위한 담론이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이 던지는 질문은 사실 “한국 자본주의가 스스로의 체제를 재생산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한국의 중산층은 부동산 가격의 지속적인 상승을 통해 자산을 축적하면서, 그렇게 해서 훼손된 기업의 경쟁력을 신규 노동시장에 진입한 이들의 임금을 낮추면서 보충해왔다. ‘집값’은 높이고 ‘사람값’은 낮추는 체제를 운용해온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 체제를 지지해왔던 그들 중산층의 자녀조차 자신의 월급으론 독립을 꿈꾸지 못하게 된 ‘멋진 신세계’다. 청년세대는 한국 자본주의의 모순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특권을 가진 자로서 사회에 기여하고자 했던 선배 세대와는 달리, 나 자신의 문제가 바로 사회의 문제임을 인지해야 할 세대가 되었다.


하지만 이 세대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기란 너무 어렵다. 냉전 이후의 자본주의 체제는 사회주의권과 경쟁하던 그때 그 시절의 자본주의와는 너무나도 다르다. 자본주의 국가는 인민들의 불만을 수렴하기를 거부한다.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시장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주체로 인지하는 동시에 상품으로 대상화하여 시장에 내어놓아 그 가치를 평가받아야 한다. ‘자기계발’ 담론의 유행은 이런 조건에 대한 적응일 뿐이다. 자기계발하기에도 바쁜 세상에서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 자체로 ‘잉여’스러운 일로 여겨진다.    


좌파에게 다른 수식어가 필요한가


“진보란 신나고 멋있고 재미있고 부러 따라하고 싶은, 그런 것이어야만 한다. 다시 써내려가야만 한다 (...) 당위를 빼면 한줌 농담거리도 남지 않는 그들의 글에서 진보 고해성사를 한 뒤 다시 빤한 삶의 굴레로 기어 들어가는 독자들을 위해 글 쓰지 않는다. 진짜 멋진 게 뭔지, 두고 봐라.” (허지웅, “간지좌파”에서)


한 명의 젊은이가 실존적 결단을 내려 ‘잉여’의 도(道)를 걸어가기로 작정했다 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왕년의 활동가들 중 가장 윤리적인 사람들만 남아 있는 좌파정당은 젊은이들의 문화적 감수성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현실은 좌파들에게 무언가 다른 전략을 요청한다. 좌파라는 단어 앞에 몇몇 수식어를 붙이는 전략들이 ‘유행’하게 된 것은 이런 사정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한 대학생은 좀 더 구체적으로 ‘패션좌파’라는 것을 주장했다. 좌파들이 좀 더 간지나게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런 전략은 좀 ‘구좌파’적이다. 이를테면 패셔너블한 젊은이들이 좌파정당에 들어오고, 정치 얘기도 하면서 패션 얘기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 점에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그런데 좌파들이 사람들에게 다가서기 위해 ‘패션감각’이란 걸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건 대의를 위해 개인의 감수성을 뜯어 고쳐야 한다는 얘기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견해가 불가능하지는 않을 테지만, 좀 시대착오적으로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패션좌파’론은 그런 점에선 하나의 아이러니다.


최태섭은 이렇게 논평한다. “패션과 간지가 유혹의 언어인 것은 맞지만, 그것이 단지 옷 잘입고 간지나는 좌파들 그 자신을 제외하고 좌파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이미 자본의 힘으로부터 탈주를 꿈꿨던 아방가르드미학이 우리에게 준 교훈은 자본 그 자체가 최고의 아방가르드라는 것이다. 좌파가 다시금 회생하기 위해서는 단지 최신유행을 뒤따르는 것이 아니라, 유행 그 자체를 만들어 내는, 더 정확하게는 유행이라는 메커니즘을 관통하는 전략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좌파가 이 유혹의 문제, 그리고 정치의 문제에 있어서 지나친 무관심을 보여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실패했거나, 자본에 의해 도용당했거나, 사람들에게 외면당했던 미학적 실험들의 역사를 무시하고 이런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한 반복과 좌절만을 불러일으킬 공산이 크다. 유혹의 문제는 중요하지만, 좌파의 지평에서 사유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냥 마케팅업체를 찾아가면 될 일이다.“(최태섭, ”좌파의 수식어들 그리고 유혹의 문제“에서)


반면 ‘간지’라는 것은 다른 문맥에서 바라볼 여지도 있다. 이를테면 그것은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의 일상적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지 논리만이 아니라 감각의 재배치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일 수 있다. “무엇에서 간지를 느끼는가?”라는 질문은 매우 본질적이다. 주류의 간지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마케팅 업체를 찾아가야겠지만, 그것과는 다른 간지를 추구하고 인정받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그것 자체가 하나의 투쟁의 영역이 된다. 어쩌면 ‘진보’라는 정체성이 요구하는 것은 언제나 그런 종류의 투쟁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의식 과잉’에서 벗어나기


그러나 그런 투쟁이 일어나는 공간에 대한 성찰은 중요하다. 사회주의권이 몰락한 후, 다른 세상을 꿈꾸던 이들이 모이는 ‘공간’이 사라진 후, 오늘날의 젊은이들의 투쟁은 고립된 공간에서 펼쳐진다. 우리는 그곳에서 투쟁할 수밖에 없지만 그곳이 위험한 곳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간지좌파론이 생겨난 조건에 대한 최태섭의 다음과 같은 논평은 의미심장하다.


“이 좌표. 즉 역사 속에서, 오늘의 정세 속에서, 이념과 사회의 스펙트럼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에 대한 감각의 상실은, 주체를 다시금 하나의 고립된 단자로 그러나 다분히 기만적인 단자로 되돌아가게 한다.(이것이 기만인 이유는 그 고립과 완결성이 사실은 다분히 구성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골방에 갇힌 '젊은 좌파'들의 문제는 두 가지 차원에서 벌어진다. 첫째로는 오늘날 좌파를 참칭하는 이들이 그것을 역사적 맥락이 아니라 취향의 차원에서 위치시키고 있다는(그리고 객관적으로도 그럴 수 밖에 없다는)것이고, 둘째로 결국 (노동자)대중에서 그 힘의 원천을 찾는 좌파들이 다름아닌 대중으로부터 냉대와 냉소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홀로 고립된 ‘진보’의 정체성이 대면하는 것은 거대한 냉소주의다. 이 냉소주의는 그것 자체로 하나의 인식체계인데, 그것에 대해 엄기호는 이렇게 설명한다.


“대학생이 인간과 사회의 변화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지난 학기에 강의를 하던 한 대학에서 학생들과 함께 본 <브이 포 벤데타>라는 영화에 대한 토론에서였다. 이 영화에서 국가는 미디어를 완전히 장악하고 진실을 왜곡하며 국민을 바보로 만들어 통치하려고 한다. 이런 통치는 언제나 완벽할 수 없으며 진실은 누군가를 통해서 밝혀지며 우매한 것처럼 보이는 대중은 진실에 감응되고 행동에 나서게 된다. 그런데 의외로 이 영화의 메시지에 대해 학생들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한 학생이 만든 엔딩 크레디트 이후의 시나리오였다. 독재의 붕괴 이후 민주정부가 곧 들어서지만 정책적 무능으로 사회는 큰 혼란에 빠진다. 때맞춰 미디어에서는 독재를 종식시키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브이’라는 영웅의 사생활을 캐고 온갖 스캔들을 경쟁적으로 보도한다. 혼란을 틈타 종적을 감춘 것처럼 보였던 보수주의자들이 다시 세력을 규합하고 대중 사이에서 정치적 선동을 일삼는다. 결국 사회는 제자리로 돌아간다.
 
이 학생의 주장에서 만나게 된 것은 탈정치화가 아니라 정치에 대한 지나친 계몽이다. 이 세대는 정치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서 정치에 냉소적인 것이 문제였다. 이들은 정치에 대해 아무런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변화라는 것이 어떤 실체적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것에 냉소했다. 진보니 보수니 싸우는 사람들은 자신이 대단히 큰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놈이 그놈인 상황이며, 어느 놈이 되더라도 내 삶이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통찰이었다. 독일의 문제적 철학자 슬로터다이크의 논법을 따르자면 이들은 정치적으로 미각성한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정치에 대해 계몽된 존재인 셈이다. 이들은 정치를 너무 잘 알아서 정치에 무감각해졌고 모든 가치에 대해 냉소적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냉소주의만이 현실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본 장비(1)가 되는 셈이다. 냉소적 주체들은 절대적 가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새로운 가치가 단명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바로 도덕의 냉소주의가 만들어내는 속물의 정치이다. 가치의 종식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속물이 아닌가? 바로 여기에 이명박이 집권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이명박을 지지한 20대 대부분은 그가 새로운 가치를 제시해서 지지한 것이 아님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가치를 이야기하면 오히려 냉소한다. 
 
실로 우리는 속물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지금 미디어에서 성공하고 있는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은 대부분 우리가 얼마나 속물인가를 과장해 까발리는 내용이다. 얼마 전까지 선풍적 인기를 끌어모은 tvN의 <재밌는 TV 롤러코스터>를 생각해보자. 남성의 전형으로 나오는 정형돈은 쉽게 말하면 찌질이 혹은 진상이다. 머리에 든 것이라고는 예쁜 여자와 축구뿐이며 나머지에 대해서는 귀찮아할 뿐이고 제대로 일처리를 하는 것 하나 없다. 이에 반해 여성의 전형으로 제시된 정가은은 생각하는 것이라곤 오로지 멍청한 남자친구를 여우 짓을 통해 후려 처먹는 것이나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명품백’밖에 없는 된장녀다. <개그콘서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남성인권보장위원회’나 리얼리티쇼를 표방하는 대부분의 예능 프로그램은 이 연장선상에 있다. 우리 모두는 속물인 것이다.
 
그러나 이 속물주의의 이면에서 발견하는 것은 20대들의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생존 노력이다. 역설적으로 속물이 되어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다.“(엄기호, ”20대는 왜 투표하지 않게 되었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8호에서)


이 냉소주의에 대면하지만 그에 온전히 적응할 수 없는 고립된 개인은 냉소주의자와 자신의 ‘다름’을 하나의 특권으로 인지할 수도 있는 위험에 빠진다. 진보가 ‘자의식의 정치’가 되어윤리적인 재단을 일삼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에 내가 블로그에 올린 글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내가 남들보다 조금 다른 것들을 읽고, 조금 다른 것들을 생각하고, 조금 다른 것들을 쓴다는 이유로 가지게 되는 자의식은 처연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사회로부터 받은 소외감을 같은 질량의 우월의식으로 바꾸어놓기 때문이다. 그가 그런 우월의식을 지니게 될수록 소외감은 더 커지고 그렇게 생긴 소외감은 다시 우월의식으로 변환된다. 한 번 이 ‘공굴리기’의 방정식에 탑승하게 되면 사태가 악화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들은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킬힐을 신고 완벽한 화장을 마친 채 출근하는 여성을 경멸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녀들이 그들보다 훨씬 긴박한 삶을 살고 있고, 역시 실존적인 고민을 하고 있으며, 종종 어떤 종류의 우울증에 시달린다는 사실은 전혀 보지 못한다. 그렇게 그들은 ‘다르다’는 자의식으로 인해 자신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세상에서 스스로를 격리한다.”


하지만 ‘진보’를 ‘진보’이도록 유지하는 사회를 향한 비평적 시선은, 사회와 자신이 ‘같은지’ 혹은 ‘다른지’를 단정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회와 내가 전혀 같은 점이 없다면 나는 사회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반면 사회의 평균적인 구성원들과 내가 온전히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비평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관여하고 동참하는 어떤 욕망에 대한 거리두기에서 비평은 시작될 수 있다. 우리는 냉소주의와 ‘다르기’ 때문에 ‘진보’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냉소주의적 진리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그것을 보충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의식의 정치’는 그 차원을 도외시한다.


취향의 정치에서 시작하기, 그것을 벗어나기


오늘날 ‘고립된 단자’가 된 주체가 자신을 드러내는 공간은 ‘온라인’이다. 그런 점에서 2008년 촛불시위를 적절하게 분석해 내지 못한 비평적 언어들의 무능을 고려하더라도, ‘온라인 주체’의 형성과 그 한계에 대한 인식이 절실하다. 박가분은 매우 정확하게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블로그나 트위터 그리고 싸이월드는, 90년대의 그것과 매우 다른 방식으로, 오늘날 사이버 공간에서 ‘개인성’ 혹은 ‘개성’을 생산해내는 주요한 통로를 구성한다. (...) 이에 따라 인터넷 상의 블로그 서비스 역시 특정한 개인적 세계관에 하나의 사회적 인터페이스를 제공해주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블로그에 게시되는 BGM, 포토로그, 짤방, 프로필 등은 무엇보다 개인의 존엄, 인격, 품위, 취향, 분위기를 구성한다. 그리고 그의 정치적 신념 역시 블로거 개인의 개인다움을 구성하는 목록들 가운데서만 비로소 사회적으로 ‘전달가능한’ 것이 된다. 그러한 정치성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내면적 풍경의 구성요소로 환원됨으로써만 비로소 사회적으로 소통 가능한 것이 된다.

인터넷을 통해 표출되는 20대의 정치적 주체성은, 따라서 결코 개인의 인격과 취향에 우선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러한 내면적인 인격과 취향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한계를 노정한다. 이러한 일례는, 인터넷에서 확산되어 있는 ‘취존중(취향에의 존중)’이라는 유행어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용어는 특히나 정치적 논쟁에서 자주 노출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오늘날 20대가 견지하는 반MB/반한나라당 포지션이 과거 2000년 초반의 반한나라당 전선과 전혀 상이한 역사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박가분, ”신자유주의 시대, 20대의 정치적 주체성“)


한국의 소통공간, 온라인 공간은 취향으로 분절되어 있다. ‘자의식의 정치’가 취향을 근원으로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정치적 관점의 차이는 취향의 차이와 비슷한 문맥에서 이해된다. 그렇다면 ‘토론’은 있을 수 없다. 다만 그것처럼 보이는 몸짓들이 있을 뿐이다. 남자들에게 있어, DVD, 축구, 야구, 스타리그, 여자들에게 있어, 성형, 패션, 요리 등의 큰 덩어리로 분절되고 그 주변에 수많은 군소의 분절덩어리들이 있는 이 공간에서 우리는 ‘소통’이란 것을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조건이다. 하지만 ‘취향 존중’이라는 표어를 넘어 정치를 삶에 대한 이성적 고찰을 공동체에 투영하는 문제로, 윤리적 문제로 전환시키기 위한 작업이 요구된다. 당장의 정치적 성과에 대한 집착을 넘어, 온라인 주체를 정교하게 판독하고 비평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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