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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정신분석과 비평의 문제?

조회 수 5904 추천 수 0 2010.12.11 19:39:15

사실 내가 이런 글을 써야 할 이유는 없지만, 왕년에 한 짓들이 있어서 쓴다. 2008년 즈음에 아이추판다 등과 함께 어우러졌던 소위 ‘라캉 논쟁’에서 나는 삽질과 오류, 정제되지 않은 헛소리를 거듭했다. 그런데도 당시의 링크나 검색어로 접속해오는 사람들이 있으니 당시에 내가 할 수 있었고 했어야 했던 말들에 대한 정리가 필요할 듯하다. 많은 오류가 대체로 그렇듯 당시의 내 오류는 무지에서 나왔다. 무지한데 왜 껴들었냐 하겠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를 모르는 게 무지의 본성인 것을. 그때의 산만했던 글들에 양해를 구하면서 얘기를 시작한다. (사실 이 글도 모든 논점을 정리하려다보니 못지 않게 산만하긴 한데, 내가 이 논의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만큼만 전부 다 말하고 치우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1. 라캉 논쟁에 대한 내 기본적인 생각
 

사실 아이추판다가 2008년부터 라캉/라캉주의에 대한 비평을 전개하면서 나도 새로 알게 된 사실들이 많다. 물론 그가 말한 것을 내가 다 이해할 능력은 없고, 그의 중심논지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배알이 뒤틀려서’ 열심히 찾아 읽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정신분석학이나 라캉의 이론이 임상적으로 적당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지젝 등이 유행시키고 있는 정치/문화평론의 영역에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심리학의 발전으로 인해 ‘정신분석 운동’의 전망과 장래가 의심스럽다고 주장한다면 나도 “그럴 수도 있다.”라고 답변할 수 있을 것 같다.


한편 라캉의 옹호자들은 라캉 이론의 속성이 인문적이라 애초에 임상적으로 적당한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고, 심리학이 발전해도 (적어도 앞으로 상당기간 동안은) 라캉 이론이 영향을 미친 주체철학이나 문화비평이 설명하는 사안들을 대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다. 나는 이런 말을 들으면 이에 대해서도 “그럴 수도 있다.”라고 답변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건 내 배움의 수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나보다 훨씬 똑똑하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 해도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뭐 이것도 내가 판단할 얘기는 아니다.) 이 경우엔 소위 ‘세월의 검증’이란 걸 믿어볼 수밖에 없다. 물론 이게 논쟁을 막자는 얘기는 아니다. 정신분석학의 옹호자와 비판자들이 계속 논쟁도 하고 심리학이 발전해야 그 ‘세월의 검증’이란 것도 가능할 테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문제라면 나처럼 남이 한 얘기를 활용해서 현실세계를 설명하려는 사람들이 끼어들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없다. 나는 지식노동의 협업관계의 하층부에서 글 쓰는 사람일 뿐이고, 내가 하는 얘기들 중에 그 근거의 근거들을 물리학 레벨에서부터 정당화할 수 있는 건 단 한 개도 없기 때문이다. 어떤 대단한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 중 몇 개는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하는 말을 전부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들은 환경영향평가를 근거로 4대강 사업을 비판하지만 그 환경영향평가가 어떤 근거로 신뢰할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리고 그렇지 못해도 주어진 복수의 환경영향평가를 근거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게 사람이다. 사실 그게 가능해야 민주주의라는 것도 기능할 수 있다. 


심리학 전공자인 아이추판다, 철학 오타쿠들인 알렙과 저련, 동물행동을 연구하는 김우재, 문화연구가인 이택광 등은 이 문제에 대해 나보다 더 발언할 것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논쟁하는 것은 그들의 자유다. 하지만 바로 위에서 말한 이유들 때문에, 나는 그들의 싸움이 마치 누구누구의 글쓰기 자체의 의미를 불가능한 것으로 모는 풍조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이런 견해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하고 논박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들의 의문에 대한 답변은 이후의 논점을 정리하면서 이루어질 것이다.


2. 라캉주의 문화비평이 사이비 과학임을 검증하는 문제


논점을 정리하다 보니 너무 많아서 핵심적인 줄기를 짚어봐야 할 것 같다. 도대체 라캉과 그에 기반한 비평활동을 공격해야 하는 이유가 뭐냐는 것이다. 아이추판다에게 있어 이 이유는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1) 라캉 이론은 사이비 과학이다.
2) 라캉 이론에 근거한 정치/문화평론은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


아이추판다에게 이 확신은 확고한 것인데, 이것들은 따져보면 좀 안이한 소리들이다. 1)은 애매하고, 2)는 멍청하다. 1)에 대해서 설명할 방법이 좀 난감했는데, 다행히 아이추판다가 괜찮은 예시를 가져왔다. 영화 <엘리펀트>에 관한 두 평론가의 평가다.


정성일 : 이 영화의 화면비율은 1.33:1이다. 대부분의 영화들이 쓰는 1.85:1을 쓰지 않았다. 왜일까? 1,33:1은 딱 폴라로이드 사진의 크기비율이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폴라로이드와 같은 1회성의 사진을 찍고 있는 셈이다

전찬일 : 그리고 덧붙이자면 1.33:1의 비율은 그냥 이 영화가 애초에 TV용으로 기획됐기 때문이다. 더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다.


나는 정성일이 TV용의 화면비율을 몰랐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 점은 넘어가고 정성일의 ‘과잉된 해석’과 전찬일의 ‘적중한 해석’의 대립만 기억하자. 이렇게 동일한 질적대상에 대한 ‘과잉된 해석’을 대체하는 ‘적중한 해석’을 내놓을 수 있다면, 후자 측이 전자 측을 사이비라 규탄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한다고 여겨진다. 아이추판다와 그 지지자들은 그렇게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도식은 이렇다.


라캉주의 :
거울단계 이론 → 주체이론 → 정치/문화비평
심리학 :
거울단계 이론 격파 → 무효 → 무효

(‘거울단계 이론 자리’에 “포르트/다 놀이”, 라캉주의자들의 글 속에 나온 인간 행동 예시 중 심리학으로 논박이 가능한 것들을 집어넣어도 된다.)


즉 이 비판 과정에서 아이추판다는 첫 출발점에 대해서만 ‘대체’를 제시할 뿐 그 후의 부분에 대해선 관여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소녀시대에 대해 말하고 있는 이택광의 글쓰기의 무의미함을 입증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이택광이 제시한 질문, (가령) “아저씨들은 왜 소녀시대를 욕망하는가?”라는 의문에 대한 심리학의 대체설명을 제시하는 것이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해 이택광이 쓴 글보다 ‘단순한 가설’은 무한하게 내놓을 수 있다. “그냥.” // “유행이라서” // “유전자는 원래 남자에게 어리고 예쁜 여자를 좋아하게 하니까?” // “최초의 흥행 이후엔 그냥 자본에 의해 고고씽! 최초로 흥행한 이유는 멜로디를 막 분석해보면 답이 나올 듯?” //  다 좋은데 이 중에서 ‘심리학만으로’ 설명이 된 예시는 하나도 없다. 즉 ‘심리학만으로는’ 이택광이 비평한 대상의 내용을 대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건 내가 심리학을 ‘까기 위해’ 하는 소리가 아니다. 심리학이 무슨 용가리 통뼈라고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그렇게 심리학이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에서 이런저런 방법론을 활용한 복수의 비평이 나오는 것은 심리학이 상관할 문제가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다. 물론 아이추판다가 하는 것처럼 정신분석담론을 전파하는 지식인들의 글에 나오는 사례 중 심리학적으로 오류임이 입증된 사례를 비판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 그러나 이 오류의 비판만으로 비평 자체를 쓸모없는 일로 만들지는 못할 것 같다.


물론 하나의 반박이 가능하다. 사실은 그 문제를 심리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단, 소녀시대팬들을 모조리 실험실로 데려와 설문조사나 브레인 스테이트 검증을 해볼 수 없기 때문에 잠정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역시 하나마나한 소리다. 그런 일은 앞으로도 할 수가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평론과 문화평론은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추판다는 심리학이 인간의 심리를 다루는데 정신분석학도 같은 대상을 다루기 때문에 심리학의 인정을 받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신문을 펼쳐보라. 대다수 정치평론들도 어떠한 조사도 없이 ‘인간 심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논하면서 그러면서 어떤 정치적 주장을 펼치지 않던가?


그렇다고 모든 정치평론가/문화평론가를 심리학자라 대체한다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 잣대로 본다면 한국에서 가장 훌륭한 정치평론가는 정신과의사 정혜신이다. 그런 그의 작업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건, 그의 인물비평이 그 자체로 ‘과학적 활동’이라 주장할 수는 없을 거다. 상담도 해보지 않은 사람의 정신상태를 해부하는 것은 심리학의 교의에 맞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심리학은 스스로 과학임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일 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담도 해보지 않은 사람의 정신상태를 분석하는 일은 여기서 저기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생겨난다. 이 짓이 어차피 과학적이지 않다면, 그 방법론이 정신분석학이든 사주팔자든 별자리 운세든 뭐가 그리 대수란 말인가?


3. 라캉 이론을 활용한 비평의 사회적 해악?


물론 아이추판다는 대수라고 말할 거다. 영화평론과는 달리 현실세계를 평론하는 일은 잘못될 경우 해악을 미치게 될 것이란 게 그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오늘 아침에 신문지상에 실린 모든 사설/논설/시론은 이 세계에 해악을 미치고 있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과학적으로 규명되지 않은 사실에 대해 모두가 아가리를 닥치는 쪽이 좋다고 말한다면 하나의 견해로 존중할 용의가 있다. 하지만 어쩌면 진화생물학 쪽에서 “그건 불가능해!! 인간은 원래 존나 떠들고 뒷담화를 까도록 진화되어왔어!!!!”라고 태클을 걸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그 문제에 관여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여기에 좀 문제가 있다. 이택광이 라캉대고 지젝이는 비평을 하여 어떤 행동을 유도했다고 가정하자.


LC → A


그리고 이 행동은 ‘호떡을 사먹는 것’이었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아이추판다가 뭔가 심리학적으로 엄밀한 비평을 하여 어떤 행동을 유도했다고 가정하자.


PC → A


그리고 이 행동 역시 ‘호떡을 사먹는 것’이었다고 가정하자.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어떤 이유로 호떡을 사먹든 그 결과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라캉대면서 호떡을 먹든 심리학학거리면서 호떡을 먹든 호떡의 영양성분은 달라지지 않는다. 뭐가 달라지는 게 있다고 믿는다면 그는 주술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일 게다.


아이추판다가 “아니야!!!! 난 호떡을 사먹지 말라고 주장할 거야!!!”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PC → A'


이래봤자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나는 라캉대고 지젝이면서 호떡을 사먹지 말자고 주장하는 문화비평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택광이 아닌 다른 비평가라면 그렇게 쓸 수도 있을 거다. (2003년도에 내가 지젝을 인용하면서 노무현을 비판했을 때, 어떤 노빠는 지젝을 인용하면서 노무현을 옹호했다.) A를 옹호하는 과학적이고 비과학적인 논변이 수천수만 가지로 가능하고, A‘를 옹호하는 과학적이고 비과학적인 논변이 또 수천수만 가지로 가능하다.


LC → A‘


행동이 같다면, 결과도 같다. 그렇다면 라캉주의 문화비평은 무슨 수로 사회에 대해 해악을 끼칠 수 있을까? 만일 그게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면 그건 ‘라캉주의’ 때문이 아니라 그 라캉주의자가 내세운 특정한 정치적 주장 때문이 아닌가?


아이추판다는 이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는 듯하다.


1) 라캉을 인용하면서 비평을 하는 걸 밟아버리지 않으면 사람들이 그걸 과학으로 믿는다.
2) 그렇게 되면 라캉 정신분석학이 현실세계에서 심리학을 대체하게 될 것이다.
3) 철학이 과학을 통치했던 소비에트의 망령이 부활한다!!!
4) 약을 먹으면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엉터리 소리를 듣다가 막 죽는다!!!! ㅠㅠㅠㅠㅠㅠㅠ 이거 누가 책임질 거야 시발....


우리는 이런 걸 흔히 ‘미끄러운 비탈길의 논증’이라 부른다. 이 논증의 문제는 도중에 내려가다가 정신 차리고 도로 올라올 수도 있는 문제를 가지고, 한번 이 비탈길에 접어들면 영원히 미끄러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실 이공계생들이 GMO나 지놈 프로젝트 논쟁하다가 인문대생들에게 짜증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뭐만 시작하면 결국엔 인간복제로 귀결될 거라고 주장하는 친구들이 있으니. 무상급식이 시작되면 사람들이 모든 종류의 복지를 요구하기 시작해서 재정이 빵꾸가 나고 세계가 멸망할 거라는 엄포도 이런 논증의 일환이다. 


아이추판다가 이택광에게 최초로 문제제기를 한 부분은, 조승희 사태 당시 이택광이 그것을 “미국식 심리학의 문제”로 언급한 것이었다. 이택광이 모든 정신질환 문제에 대해서 정신분석학이 심리학을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확실한 것은 아이추판다가 이택광 비판을 할 때 전가의 보도로 들이밀고 있는 것이 이 사건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건을 언급하지 않으면 앞서 내가 얘기한 “행위의 (비평이론에 대한) 다수 실현가능성” 때문에 라캉주의 비평을 비판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이추판다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세계는 그렇게 변하지 않을 것이고, 누군가들이 그렇게 주장할 경우 나같은 사람도 찬성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추판다가 하는 얘기가 한총련을 합법화하면 적화통일될 거라는 수준의 얘기와 얼마나 다른가? 논리적으로 멀고도 먼 에피소드를 제시한 후 이 상황이 무섭다면 라캉주의를 토벌하자고 얘기하는 것은, 아이추판다 역시 자신이 하는 얘기의 무리함을 알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리고 이택광이 조승희 사건에 대해 한 얘기는 물론 ‘과학적이지 않다.’ 어느 정도로 과학적이지 않냐 하면, 다음과 같은 진술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과학적이지 않다.


- 최진실이 자살한 이유는 악플러들 때문이다.
- 최진실이 자살한 이유는 악플러들 때문이 아니다.
- 북한이 연평도에 포격한 이유는 햇볕정책 때문이다.
- 북한이 연평도에 포격한 이유는 대북강경정책 때문이다.


다만 위 진술들은 아래의 진술들보다는 논의해볼 가치가 있다.


- 북한이 연평도에 포격한 이유는 안상수의 보온병 때문이다.
- 배추값이 폭락한 이유는 4대강 사업 때문이다.


주장의 타당성에 대한 판단은 현실세계에선 폭넓은 맥락에 견주어서 이루어지는데, 이게 심리학이나 논리학으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동등한 구조를 가진 논변도 어떤 상황에선 그럴듯하게 들리고 다른 상황에선 이상하게 들리니 말이다. 그리고 조금 더 논리적으로 따지고 들어가기 시작하면, ‘최진실 사망’과 ‘악플’이라는 두 개의 사태를,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과 ‘연평도 포격’이라는 두 개의 사태를, 인과관계가 있다고 판단할 근거도 별로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쿵저러쿵 쿵쿵쿵쿵 얘기를 하며 살아가지 않던가? 그리고 당면한 사건에서 사회문제를 추론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으로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겠고.


4. 라캉 논쟁 개략


정리하자면, 아이추판다가 최초에 라캉을 비판하면서 전개했던 주장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아이추판다 논증 1 :
1) 라캉이 다루는 대상은 심리학이란 분과학문의 대상이다.
2) 그 심리학에서 라캉은 언급되지 못하는 듣보잡이다.
3) 그러므로 라캉은 황우석이나 이재율과 같은 사기꾼이다.
4) 철학은 메타학문이므로, 분과학문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건 철학에서도 인정될 수 없다.
5) 따라서 라캉이 철학에서 의미가 있다는 것도 납득될 수 없다.
6) 그러므로 라캉에 의거한 비평활동도 사기다.


아마도 이 시점에서 아이추판다는 라캉이나 라캉주의자들의 텍스트를 별로 읽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논증을 펼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후 ‘라캉주의’는 아이추판다에게 초미의 관심사 내지는 스트레스 해소의 대상이 되었고, 그는 그후 라캉주의자들이 범하는 심리학적 오류를 논파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성립한 논증 2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아이추판다 논증 2 
1) 라캉주의자들이 비평을 하면서 언급되는 사례(중 일부)는 심리학의 지식에서 판단할 때 과학적인 오류가 있다.
2) 라캉주의는 심리학과 양립할 수 없다.
3) 그런데 여기서 심리학은 과학이므로, 라캉주의는 과학적으로 사기다.
4) 철학은 메타학문이므로, 분과학문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건 철학에서도 인정될 수 없다.
5) 따라서 라캉이 철학에서 의미가 있다는 것도 납득될 수 없다.
6) 그러므로 라캉에 의거한 비평활동도 사기다.


이 논증은 앞선 논증의 구조를 유지하면서 좀 더 구체적인 비판의 내용을 끌어들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심리학에 대한 지식은 없지만 아이추판다가 라캉주의 비판을 위해 심리학 지식을 날조할 정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아이추판다의 오류 지적은 아마도 정당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이추판다의 논증이 언제나 2)까지만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것이다. 2)에서 3)사이에 비약이 있고, 3)에서 4)사이에도 비약이 있으며, 5)에서 6) 사이에도 비약이 있다. 그리고 이 비약은 본질적으로 실험/관찰에 의해 확증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5. 토대주의는 올바른가?


이걸 하나하나 설명하려면 끝이 없겠으니 핵심적인 부분만 언급하자. 바로 ‘토대주의’다. 라캉 이론이 탄생한 임상 사례들이 심리학적으로 오류임이 밝혀졌으니 그의 이론이나 그것을 활용한 지적활동도 오류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직관적으로 설득력이 있다. 즉 라캉이 제시하는 임상 사례들에 대한 심리학의 공격은 라캉이론을 지지해야 할 심리적 근거를 상당히 약화시킨다. 문제는 지금처럼 심리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라캉이론이 임상에서부터 시작하여 데카르트의 주체 담론에 주석을 다는 철학담론으로 전화하면서 발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문화연구에 활용되는 정신분석학은 그러한 전화 이후의 일들을 반영하는 지적 전통인 것으로 보인다. ‘주체’ 담론이 한두개의 사례로부터 증명되는 게 아니라고 본다면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즉, 라캉의 임상사례는 라캉의 비평이론에 대한 ‘발생적 원인’이긴 하지만, ‘논리적 원인’은 아니라는 문제제기가 가능한 것이다.


이 답변에 대해서 아이추판다는 “철학으로 도망치면 다냐? 까방권이냐?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냐?”라고 공박해왔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지점까지 나가버리면 이미 이건 철학논쟁이지 과학논쟁도 아니다. 자기들끼리 서로 영향을 미치며 자라난 유럽의 지적 전통에서, ‘라캉’은 인용되지만 ‘의사’로 호출되는 것은 아니다.


전통철학에서 시작되었고 대륙철학에서 계승된 ‘주체’ 개념에 무슨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지는 말하기 매우 힘들다. 그런 것은 별로 의미가 없고 결국에는 생물학과 심리학이 모든 것을 설명해줄 거라고 믿을 수도 있겠다. 반면 이 담론이 과학이 설명해주지 않는 부분을 짚어내고 있다고 믿을 수도 있겠다. 나는 특정한 믿음을 강요할 생각이 없다. 다만 어떤 믿음을 가진 이들이 자기들끼리 논쟁하면서 만들어낸 지적 전통이 있고, 그것을 활용해서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흐름도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여러 가지 방법들을 활용한 비평들이 (기본적으로는) 모두 옹호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진중권은 라캉과 지젝을 그다지 옹호하지 않는 축이지만, 주사파를 분석해보다가 하도 답답해서 라캉의 ‘아버지의 법’을 거론했다. 물론 이런 모든 글쓰기가 모조리 무용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게나 자주, 열정적으로 떠들지 않던가? 우리가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한 이런 일들을 피할 수는 없다.


‘주체’라는 것이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면 그것은 선험적인 개념이 되어서는 안 될 것 같다. 만일 그것이 선험적인 것이 된다면 인간의 종적 특성에 의한 것일테고, 생물학과 심리학에 의한 분석이 요청될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적인 것이 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전적으로 개인적인 것은 공적으로 언급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닐테니까.


주체를 말하는 사람들이 이 딜레마를 모르는 것 같지는 않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데카르트가 ‘주체’를 발견한 이후에 생겨났다고 말했다. 결국 이런 논의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근대 사회가 인간에게 강요한 것들 때문에 주체나 무의식 같은 것들이 생겨났다고 말해야 한다. 진화심리학의 흥미로운 언급에 따르면, 우리는 여전히 구석기 시대의 생활에 맞추어진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문명의 탄생과 발전은 아직 인류 진화에 결정적으로 개입할 만한 시간적 연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유전자에 거슬러 새로운 세상에 집단적으로 적응하기 위해 어떤 압박을 받아 왔지 않은가? 그리고 그 공통의 압박에 대한 인간 존재의 구조적 독해를 주체라는 이름으로 분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심리학은 자신들이 적절한 설문조사와 인간 행동연구를 통해 바로 그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설명되지 않은 것들이 서로 경합하는 부분이 있다면 좀 더 지켜볼 일이다.


나도 대륙철학이 퇴조하고 분석철학이 대세가 되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분석철학’이나 ‘대륙철학’같은 말이 엄밀한 어휘는 아니지만, 그냥 넘어가자.) 이왕에 그렇다면 조금 더 못 기다릴 것도 없지 않은가? 세상이 어떻게 되든 나나 여러분은 세상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을 멈출 수도 없는데 말이다.


6. 인문학적 글쓰기의 문제


내가 읽는 책에도 굳이 과학의 관점이 아니더라도 정신분석 담론을 비판하는 주장은 심심찮게 주장한다. 많은 인문학자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정신분석 담론의 “쓸모를 모르겠다.”거나 “논의에 의구심이 든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게 아이추판다의 논변과 일치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이추판다 논변을 보면 그런 인문학자들은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는데,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지는 또 잘 모르겠고...”라면서 말꼬리를 흐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저런 인문학자들이 정신분석 담론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아이추판다를 옹호하는 어떤 인문학도들의 자세가 올바른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것과 별개로 왜 프로이트와 라캉이 정립했지만 지금은 심리학적으로 오류로 밝혀진 사례들이 현대의 학자들에게 거듭 인용되는지에 대해서도 말할 필요가 있다. 추측이지만 이렇게 답변하는게 가능할 것이다. 첫째, 그들은 심리학을 공부하지 않았고, 둘째 그들은 더 이상 임상에 종사하지 않고 프로이트와 라캉이 언급한 사례를 공부하면서 이론을 학습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오류를 진실인 것처럼 확대재생산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므로 심리학도가 이에 대해 비판을 하는 것은 타당하고 필요한 일이라 하겠다. 이걸 근거로 특정한 인문담론의 과학적 무능함을 조소할 수도 있겠지만, 과학담론이 확산되는 방식과도 관련이 있을 거다. 최신의 과학담론이 대중에게 이해되고 전파되는 데엔 일정한 시간이 소요되는데, 그리하여 그 담론에서 착상을 얻은 인문학자의 ‘썰’이 등장할 때 쯤엔 그 과학담론이 이미 오류로 판명된 ‘낡은 것’이 될 가능성도 높은 것이다. 최장집은 플라톤의 <국가>를 읽으면서 정치학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과학 영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전혀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김우재 등이 종종 “왜 인문도서만 ‘교양’이라고 하냐.”라고 투덜대는 것에 대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좀 문제의 핵심을 놓친 부분이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인문학을 과학보다 엄청나게 우대해서 인문학 중심으로 교양도서를 선정하는게 아닐 수도 있단 얘기다. (오히려 인문학이 ‘교양’이라서 다들 인문학에 무지해도 인문학을 욕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그리고 그 비슷한 욕을 한 철학자가 아마 이미 역사 속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라서 그 말을 전적으로 틀렸다고 보기도 힘들고.) 데카르트의 <성찰>은 지금 읽어도 이걸 가지고 할 수 있는 논의가 있지만, 뉴튼의 <프린키피아>를 읽어놓고 물리학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할 수는 없잖은가. 굳이 과학사의 고전들을 ‘교양’ 도서 목록에 넣는다고 해도, 이미 그것들을 읽는 것은 ‘과학교육’이라고 보기가 어렵다. 알렙이 투덜거리듯이, 지금 와서 <종의 기원>을 읽는 것은 과학책을 읽는 것이라기보단 인문학 독서 비슷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샤피어-워프 가설에서 이러쿵 저러쿵 인문학적 썰들이 나왔는데, 아이추판다가 라캉을 비판하는 식이라면 샤피어-워프 가설이 오류로 판명되었으니 거기에서 파생된 온갖 것들도 모두 ‘헛소리’가 되었다고 말해야 한다. 그냥 그렇게 말하면 되는 것일까? 그 주장이 타당한지는 차치하더라도, 그렇게 주장한다면 모든 인문학자는 자연과학을 공부하기보다는, 자연과학 담론을 무시하는 쪽이 훨씬 유리한 선택이 되는 것이 아닌가?


“인문학도라면 XXX를 공부해야 한다.”는 류의 논의들이 있다. 맞는 말이다. 문제는 저 문장에 뭘 집어넣어도 다 설득력이 있는 말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유한한 시간을 사는 존재자들이다. 인류의 지식이 근대철학이 태동하던 시기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해진 지금, 만능의 학자이면서 그 위에 철학을 정초했던 과거의 전설들의 로망을 현재의 인문학도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리한 일로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 걸까?


7. 비평의 구체성에 대해


마지막으로 이택광에 대한 저련의 문제제기에 대해 소략하게 답해야겠다. 저련은 아이추판다와는 달리 자신은 이택광의 비평의 방법론이 아니라 그 구체성에 문제제기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택광의 문화비평은 정치평론과는 달리 엄밀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라캉주의로 영화평론은 괜찮지만 정치/문화평론은 사기임요~”라고 말하는 아이추판다의 주장과 더불어, 이러한 저련의 주장이 얼마나 ‘엄밀’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이택광 비평에 대해 ‘논점선취의 오류’를 범하는 게 아니냐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가능할 것 같다. 말하자면 증명해야 할 것을 전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가령 소녀시대 비평을 다시 예시로 들어보자. 이택광은 “왜 아저씨들은 소녀시대를 좋아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과연 아저씨들이 소녀시대를 좋아하긴 하는 걸까? 이것은 이택광의 소녀시대 비평에 대한 이글루스 블로거들의 최초의 반응이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어떤 방법이 있을까? 소녀시대 팬의 연령별/성별 구성비를 조사하고 이를 다른 가수에 비교하여 첨부자료를 붙이면 되는 것일까? 과연 많은 사회과학 담론들은 그런 식으로 글쓰기를 시작한다. 통계자료나 설문조사로부터 말이다. 이런 것을 이택광에게 요구하면 되는 것일까? 그러나 통계자료나 설문조사로부터 시작하는 글이 현실에 대한 올바른 문제인식을 토대로 출발하는지도 불분명하다. 많은 논의에서 그러한 자료 인용은 자신의 편견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한 편향된 자료인 경우도 흔하다.


더구나 이택광 본인도 말하듯 그의 ‘논점선취’가 양적인 문제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점에도 문제가 있다. 이는 비판자들에겐 라캉 이론을 임상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택광의 비평을 데이터로 검증할 수 없다는 점을 증거하는 것이 되며, 따라서 그의 비평이 무의미함을 입증하는 사례가 될지도 모른다.


두 가지 믿음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을 ‘자유’로 인정하면서, 나는 이택광의 평론의 모든 것을 옹호하는 게 아님을 밝힌다. 이를테면 나는 이택광의 개개의 평론이 설득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지, 그의 평론들이 통으로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많은 이글루스 유저들이 공감하지 못한 그의 소녀시대론은 현실적으로 대단히 타당한 문제인식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국의 걸그룹은 매우 특수한 ‘아이돌’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하자면 일반적인 의미의 아이돌이 아니다. 아이돌은 원래 10대와 20대라는 특정한 세대를 대변한다. 일본에는 중장년층에도 지지를 받는 아이돌이 있지만, 그것은 아이돌 산업이란 게 수십 년을 가다 보니 과거에 좋아하던 취향을 지금까지 이어와서 그렇게 된 것이지 처음부터 그랬던 게 아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라도 세대별로 좋아하는 아이돌이 따로 있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소녀시대는 다르다. 내가 예전에 썼던 글의 한 자락을 인용하면, “세기말에 내가 서태지를 좋아할 때 아버지는 나를 마뜩찮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오늘날 아버지와 내가 2NE1이 더 매력적인지 카라가 더 매력적인지를 논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이다. 걸그룹 열풍은 파이가 작아진 가요 시장에 대한 자본의 대응책으로, 세대를 초월한 남성 소비자들의 연대를 의미한다. 20대 남성과 50대 남성이 거리낌없이 품평할 수 있는 그런 소비상품을 대중문화는 이제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게 소녀시대에 여성팬이 없다는 주장이 아님은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아이돌 문화의 바깥에 있던 윗세대들이 원더걸스를 거쳐 소녀시대에 안착하며 자녀세대와 같은 문화를 향유하게 된 ‘사건’은, 분명히 특수한 것이고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일련의 소녀시대 비평에서 이택광이 헛다리를 짚었기는커녕 매우 적절한 문제의식을 제기했다고 생각한다. 그후 이어지는 설명에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저련은 소녀시대 평론에 많은 이들이 반발했기 때문에 이택광의 논의가 현실정합성이 없을 거라고 추론하는듯하다. 그런 가설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다. “네가 화를 낸다면, 그건 내 분석이 옳기 때문이야.”라는 식의 정신분석 담론의 보편적이고 치사한 ‘방어막’에 전적으로 동의할 필요는 없더라도, 소녀시대는 자신들에게 더 밀접한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분석에 동의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 나는 이택광 글을 사람들이 싫어하는 이유는 그가 자신들과 함께 ‘덕질’을 해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가령 그가 비슷한 논지의 글을 “나는 소녀시대 중 누구를 제일 좋아하는데, 여하간...”으로 시작했다면 반응은 사뭇 달랐으리라. 자유기고가로서 나는 그런 세태에 적응하고 살아남으려는 글쓰기를 하고 있는 편이다. 은하영웅전설 비평을 하기 전에 자신이 덕덕함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가 배운 문화연구 방법론으로 사태를 해명하려는 이택광에게 내가 그런 교리를 따르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이런 논의에서도 가능한 문제제기는 이택광이 라캉을 활용한다는 점 따위가 아니다. 이택광이 현실세계의 문제를 어떻게 파악하고 취급하고 있느냐인 것이다. 이는 정신분석 같은 (반대자들이 보기에) 미심쩍은 이론이 아니라 엄밀한 ‘과학’을 동원해 평론을 하려는 모든 시도에게도 똑같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논쟁(?)이 ‘무의미’에 가까운 행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이택광이 자신의 방법론을 옹호하는 방식에 대해 검증할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에 대한 비판자들의 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나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는다. 내가 말한 것들은 어떤 종류의 글쓰기가 무의미함을 증명하려고 한 이 난장들이 매우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저련은 이것을 ‘실용적 정당화’라 불렀는데, 그보다는 범주를 정돈하는 일에 가까울 것 같다.


나는 이 세계에 나타나는 많은 사건들이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 대해 회의한다. 하지만 많은 비평은 그 인과적 연결을 당연시하며 시작된다. 그래야 우리가 뭔가 조치를 취하고, 사태를 개선시킬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정신분석담론은 인과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문제에 대해 인과성을 부여하는 하나의 가설적인 분석방식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엄밀한 지식을 추구하는 철학도라면 그것을 거부하고 싶어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연평도 포격이 햇볕정책과 인과관계인지 대북강경책과 인과관계인지 따위 저급한(?) 문제를 토론하는 나로서는, 내가 관심 있어 하는 문제들에 다른 방법론과 비슷한 수준의 설명을 제공해주는 그 가설을 굳이 거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심리학을 공부할 계획이 없다. 여러분들이 만날 욕하는 그대로, 나는 너무 무식하고, 내가 관심 있어 하는 분야들에 대해 알기 위해 아직 심리학 이전에 공부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얘기는 여기까지고, 할 말은 다했다. 그러므로, 이만 빠지겠다. 


음..

2010.12.11 20:13:54
*.214.245.94

저는 이런 글이 참 좋습니다. 적어도 제가 볼 때는 이정도의 글이라면 양쪽 입장을 충분히 고려한 후의 발언이란 생각이 드니까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p.s.: 혹시 담배피시나요?? 술은 드셔도 담배는 피지 않는 분였으면 좋겠네요... 오래 뵙고 싶습니다.^^;

김원철

2010.12.11 20:54:57
*.201.208.11

제가 보기에는 윤형님이 저련님 글을 잘못 읽은 듯싶은데요.
제가 이해한 저련님 주장은 이렇습니다:

- 이택광 정치평론은 대략 추상적(?)이라서 (윤형님 용어로) '우리 편 전문가' 취급받기에 유리하다.
- 이택광 문화평론은 좀 더 구체적(?)이어서 '우리 편 전문가' 취급받기 어렵다.

누가 맞고 누가 틀렸을까요? 저련님 나와주세요! ㅡ,.ㅡa

그리고요, 이번 논쟁의 '과거사'를 조명하는 일도 필요하지만, 이번 사건은 직접적인 원인이 김우재 열폭인데, 김우재 얘기를 거의 안 하신 까닭이 궁금합니다. 후속편을 기다려야 하나요?

혹시나 맥락을 모르실까 봐 간단 요약.

이택광: 과학이 아니라 Wissenschaften이라능.
김우재: 비젠샤프트 드립 쳐 봐야 당신 글은 '학'도 아니라능. 근데 헤겔이 그 말을 그냥 과학이라는 뜻으로 쓴 사실은 아느냐능.
이택광: 초파리 연구자가 오지랖 돋네.
김우재: 아놔!! 너님 나보고 '니까짓 게'라고 했지? 버럭버럭!! 나 '변우재'로 변신함! 결론은 언제나 이택광 개객기!!

http://twitter.com/mojito0/status/8053971851677697
http://twitter.com/Worldless/status/7962741109161984

하뉴녕

2010.12.11 21:02:50
*.149.153.7

음 저는 본문에서의 구별은 솔직히 무슨 함의가 있는지 알기 힘들었고, 덧글에서 얘기하다 보니 구체적인 비평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고 여겨져서 저렇게만 정리했습니다.

비셴샤프트는 제가 모르는 얘기라서 그냥 넘겼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논쟁(?)이 ‘무의미’에 가까운 행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이택광이 자신의 방법론을 옹호하는 방식에 대해 검증할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에 대한 비판자들의 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나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는다. 내가 말한 것들은 어떤 종류의 글쓰기가 무의미함을 증명하려고 한 이 난장들이 매우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저련은 이것을 ‘실용적 정당화’라 불렀는데, 그보다는 범주를 정돈하는 일에 가까울 것 같다."

이 부분이 그걸 넘기는 이유를 설명한 거에요. 저는 그 글을 읽을 때, "과학"이란 말과 "분과과학"이란 말은 다르다는 정도로 받아들였습니다.

김원철 님

2010.12.11 22:14:50
*.102.47.38

이상하게 논의를 흐리시네요.전에는 과학/인문 대립 구도로 유도하시고 이번에는 열폭으로 몰아가시네요. 뭐 열폭이라고 합시다. 그런데 열폭하게 만든 원인이 있지 않겠습니까? 써주신 맥락을 보니 과학을 독일어로 반복해서 말한 것에 지나지 않아 보입니다? 이택광 님이 반복헀다는 겁니다. 즉 자신은 과학을 하고 있다는 주장이면 이에 대해 말하면 그만일것을 오지랖이라고 말하면 좋은 소리 못 들을 것 같네요.

김원철

2010.12.12 11:27:51
*.201.208.11

↑ 김우재가 인문학 전체를 공격하는데도 굳이 인문학과 분리해 이해하시겠다면 뭐 님 자유겠고요. 김우재가 열폭한 원인 물론 있지요. 이택광은 맥락을 보라고 하는데, 글쎄 나는 잘 모르겠고, 어쨌거나 이택광이 빌미를 제공했다는 '추상적 진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지요. 그러니까 이 일은 이택광 잘못이에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 열폭을 너무 세게, 오래 하더란 말이에요. 논문 완성했다고 자랑하는 글에서조차 '결론은 이택광 개객기'가 되니 이쯤 되면 김우재가 아니라 변우재 아닌가요.

그리고 Wissenschaft란 말은 무조건 과학이라고 이해하시는 모양인데, 김우재도 그렇게 이해하지는 않던데요. 그리고 제 전공은 Musikwissenschaft입니다. 우왕! 그러면 나 과학자임? 몰랐다요!

하뉴녕

2010.12.12 11:41:50
*.149.153.7

김우재는 트위터에서 오랫동안 이택광에 대한 반감을 표출해왔습니다. 뭐 그게 이택광이 말한 '맥락'인 셈인데, 이택광 글 맘에 안 든다, 안 좋다, 라고 거듭 언명하는 수준에선 큰 문제도 아니었지요. 싫다는데 어쩔 겁니까. 한국 사회나 진보담론이 과학자를 제대로 대우하지 않는다는 투덜거림에선 참 여러가지 얘기거리들이 떠오르지만...


문제가 된 건 김우재가 이택광의 글을 링크를 걸면서 '학자로서의 양심' '논문같지도 않은 논문' 운운한 것인데, 이건 분명 "네 글 싫다." / "저딴 놈 글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다."와는 다른 차원의 발화죠. 이택광이 학문도 아닌 학문을 부여잡고 논문같지도 않은 논문을 써가며 학자로서의 양심을 훼손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건 굉장히 학적인 문제고 말을 꺼낸 사람이 입증해야 할 책임을 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김우재는 "지금 선생님 논문을 읽고 있다.", "곧 글을 비평해 드리겠다."라고 했으니 입증은 하기도 전에 단언부터 한 셈입니다. 뭐 트위터에서 한 소리니 좀 뒷담화일 수도 있지 않느냐고 옹호할 수도 있긴 한데 발화만 보자면 그렇습니다.


이에 대해 이택광이 트위터에서 말을 걸었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까드리겠습니다."라는 김우재의 발언에 "초파리 연구자가 문화연구에 왜 간섭하나요?"라고 대꾸했습니다. 이 발언이 과히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김우재의 발언을 이해하려 드는 잣대에서라면 별로 과한 발언도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김우재의 반응은 과학자이면서 문화연구가인 어느 학자의 견해를 블로그에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건 논리적으로 무리가 있지요. 해당 발언에서 드러나는 이택광이 '편협'함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비트겐슈타인이나 니체가 박사학위도 없이 교수임용 받은게 어떻게 박사학위 없는 다른 사람이 교수임용 해달라고 떼를 쓸 수 있는 '근거'가 되겠습니까? 별 것도 아닌 제 발화에 대해선 논리성을 검증하겠다고 덤벼드는 분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선 침묵하더군요. 이택광이 뭐라고 하든 김우재가 정교한 글로 이택광을 비판한다면 될 일입니다. "과학자를 무시한다."는 주장은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지요.


저는 이런 문제를 굳이 기술하여 누가 어느 부분에서 잘못했고 잘했고 하는 얘기를 쓰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생략한 것이지요. 그런데 원철 님도 그렇고 많은 님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말을 해대니 이렇게라도 정리를 해두어야 할 것 같네요.

김원철

2010.12.12 12:05:16
*.201.208.11

윤형님이 정리해주신 맥락 설명은 매우 타탕합니다. 그러나 제가 쓴 '추상적 진실'이라는 말에 보충설명이 필요할 듯하네요. 김현진 떡밥 때 민노씨가 쓴 말인데요: http://minoci.net/982 그러니까 맥락과 무관하게 열폭할 빌미를 제공했다는 '추상적 진실'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면 김우재는 그 빌미를 가지고 이공계 전공자 전체를 상대로 공분을 호소했고, 실제로 그게 먹혔거든요. 심지어 capcold님 같은 분마저 낚이시던데요. 그런데도 제가 이 사건을 〈과학자 vs 인문학자 싸움〉으로 정의하니 일부로 논점을 흐리네 어쩌네…-_-

하뉴녕

2010.12.12 12:16:51
*.149.153.7

그 '추상적 진실'은 <디 워> 사태 때 "평론가들이 대중에게 선빵을 날렸다."는 김규항의 주장과 같은 것이겠지요?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받아들이는 그 '추상적 진실'이란게 정말로 진실인지 아닌지 파헤쳐봐야 하는 게 아닙니까?


무슨 우주 공간 설명하기 위해 블랙 메탈을 가정하는 물리학자들도 아니고...물리적 사건이야 돌이킬 수가 없으니까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 무슨 가정이든 동원해야 하지만, 사람이야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무슨 소리들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왠 말장난이랍니까?

김원철

2010.12.12 12:45:56
*.201.208.11

그 말씀이 맞기는 한데요, 아무리 그러셔 봐야 이미 열폭한 사람들은 보고싶은 것만 보면서 '이택광 개객기'에 동참할 테니 저는 차라리 '이택광 잘못했음. 그러나 김우재는 변우재. 끗' 이러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윤리적 게으름이랄까요. -_-; 그리고 저는 김현진 떡밥에서는 민노씨가 '추상적 진실'을 앞세워 이택광을 비판한 일은 잘못이라고 못박았습니다. 왜 왔다갔다 하는지 궁금하시면 맥락을 봐 주세요. -_-;; http://wagnerian.textcube.com/581

하뉴녕

2010.12.12 12:48:10
*.149.153.7

이공계생과 인문대생의 문제는 또 별도로 중요한 논점인 것 같긴 한데...저는 이게 인터넷상에서만 보이는 미시적인 대립인지 아니면 실제로 상호간에 거대한 반감이 형성되어 있는지 잘 모르겠단 말이죠...-0-;;;

글쎄요

2010.12.12 17:09:40
*.142.98.216

김원철 님. 서로 박사학위가 있으시고 나름대로 공부를 하셨던 분들인데, 상대에게 반감이 있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 그 이유가 감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당연하고요.감정적인 표현이 자제되고 건전한 대화가 이루어졌다면 좋았겠지만 표현된 이상 거둘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두 분이 아닌 사람들이 사태를 감정싸움으로 몰아가거나, 특정 단계에서 드러난 표현가지고 열폭이네 마네 과학과 인문학 싸움이네 마네 하는 것은 좋아보이지 않네요. 진흙탕 싸움을 구경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김우재 님이 이택광 님의 논문을 읽고 과학을 전공한 학자로서 평가한 것이니 그 이유가 무엇인지 두 분의 논의를 기다려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글쎄요

2010.12.12 17:17:09
*.142.98.216

Wissenschaf에 대해서는 이택광 님이 밝혀야 하는 부분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의미는 있습니다만, 맥락을 봐서는 학문 일반을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음악학,음성학,국문학,....등에서 "학"의 개년을 말하는 듯합니다. 김우재 님이 '학'이 아니라고 말한 것은 '학'이 가져야 하는 "체계성"이 이택광 님의 논문에서 보이지 않았다는 뜻일 겁니다.제가 이해한 바는 위와 같습니다.

하뉴녕

2010.12.12 17:25:35
*.136.93.130

그건 글쎄요님 말씀대로 김우재가 이택광의 논문에 대한 코멘트를 올리면 판단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저는 (본문에 적어놓았듯) 그 문제가 제가 읽고 판단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별로 관심이 가지는 않습니다.

글쎄요

2010.12.12 17:36:46
*.142.98.216

저는 김원철 님이 사태를 열폭의 문제로 진술하셔서 했던 말입니다.

김원철

2010.12.12 19:01:25
*.201.208.11

글쎄요/ 박사학위 있는 사람은 논문 완성했다고 자랑하는 글에서조차 특정 인물을 비난하는 결론으로 끝낼 수 있는 권리 같은 게 있나요? 저는 박사 학위는 아니고 석사 학위가 있으니 반만 비난할 권리가 있을까요? 열폭을 열폭이라 했는데 학위 드립이 왜 나오는지 모르겠군요.

아참, 그러고 보니 듣보잡이 진중권 물어뜯을 때도 학위 얘기 하더군요. 진중권도 박사학위 없으니 나랑 똑같이 반만 비난해야 하는군요. 우왕, 진중권이랑 나랑 동급!

글쎄요

2010.12.12 20:12:43
*.102.47.38

원철님. 이상하게 이해하시는 같습니다. 그만한 학적 이유가 있을테니 두 분이 그 이유에 대해서 서로 논증하는 것이 바람직스럽지 않을까요? 자신의 학적근거가 비센샤프트에 있다고 했으니 그에 대해 논증하면 되는 겁니다.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기대할 수 있는 선이 이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야 열폭의 의미도 알 수 있는 것이고요.
학위 드랍이 아니라 박사학위에 맞는 두 분의 논쟁을 기대한다는 겁니다.두 분의 능력에 걸맞은 사태로 평가하는 것이 열폭이 담긴 다양한 의미 층위에서 사안과 관련된 의미를 끌어낼 수 있을 듯합니다. 가령 제가 바그너에 대한 협소한 이해를 바탕으로 평가한다면 전공자에게 좋은 소리는 못 들을 듯합니다. 그런데 제가 바그너를 철학적으로 해석하고 있으니 음악이나 들으라고 한다면 상대가 어떻게 나올까요?그리고 상대가 화를 냈다면 상대의 열폭이 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잘 모르겠지만, 당사자가 아니라면 열폭에 대해서는 그리 신경쓰지 않을 듯 합니다.

김원철

2010.12.12 20:37:46
*.201.208.11

글쎄요/

이상한 소리로군요. '과학이 아니라 비젠샤프트라능.'에서 뭘 더 논증하란 말이죠? 라캉 전후 문헌을 모두 조사해서 증거를 들이밀면서 '과학 아니니깐 제발 좀 믿어주셈 굽신굽신' 이래야 한단 말인가요? '너님 마녀지? 마녀가 아님을 증명해 봐???'

이택광이 (라캉 이론이) 과학 아니라고 못 박은 이상 논증 책임은 김우재 등이 져야 하는 겁니다. 라캉이 쓴 책에서 과학이 아닌 다른 뜻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문구를 찾아서 반례를 제시하면 끝나는 얘기예요.

"박사학위에 맞는 두 분의 논쟁을 기대한다는 겁니다." 이 말은 저한테 하실 말이 아니라 김우재한테 해야 할 말입니다. 왜 그런지는 동어반복 하기 싫으니 이 줄기에 한윤형님이 길게 쓰신 맥락 설명을 읽어보세요.

그런데 바그너 얘기를 하시니 제 블로그에도 오셨나 보네요. 그런데 바그너는 문학, 철학, 정치학 등에서 더 많이 다루는 떡밥이라서 좋은 예는 아니네요.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바로 윗 문단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야 와서 하는 얘기지만, '열폭'이라는 말은 그냥 능임체(http://capcold.net/blog/3513)와 어울리는 희화화로 쓴 말일뿐 진지하게 한 말은 아닙니다. 너무 진지하게 반응하지 마시기를. 김우재도 http://heterosis.tistory.com/265 이런 멋진 패러디를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저 이런 거 좀 좋아해요. ^^;

글쎄요

2010.12.12 20:54:22
*.102.47.38

원철님. 두 분의 학적 논의를 기다려야 한다는 점이 님의 댓글을 보면서 더 분명해지네요.
1.김우재님이 기고했습니다.
2.과학이 아니라면 무엇인지 논증은 이택광님에게 있는 듯합니다.
3.바그너는 떡밥으로 던진 것이 아니라 이해를 위한 예시였습니다.서로 잘 알 수 있는 것이 필요 했습니다.
4.저는 열폭이 환기하는 의미 중에 몇가지를 제거하고 싶었습니다.
5.패러디 재미있더군요.

4.

김원철

2010.12.12 21:03:28
*.201.208.11

글쎄요/
1. 이택광 글이 학문이 아닌 까닭을 김우재가 학술적으로 논증하는 글을 썼다는 뜻인가요? 어디요?
2. 그러니까 과학 아니라 Wissenschaften이라니까요? 너님 마녀가 아니면 뭐임? 빨리 논증해???
3-5. 정리가 됐으니 끗.

글쎄요

2010.12.12 21:28:13
*.102.47.38

1.계간지에 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그건 이택광 님이 할 일입니다. 자신이 하는 학이 과학과 구분되는 독자적 영역인지 말입니다. 주제와 방법론이 일반학이 되는지 말입니다.그리고 저는 마녀가 아닙니다.

김원철

2010.12.12 21:35:06
*.201.208.11

1. 그렇군요.
2. 이건 뭐 동어반복 로보트인 듯. 마녀 아님을 증명해 보시라니깐요. 내가 하면 로멘스?

글쎄요

2010.12.12 21:48:07
*.102.47.38

2.그래서 두 분의 성실한 논증을 기대한다는 겁니다. 제가 생각하는 학의 의미, 즉 자연과학과 구분되는 학이 있지만 이것이 이택광님이 말씀하시는 학의 의미인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두 분이 논쟁하시면 알게 되겠지요.
그리고 저는 로봇이 아니라 신중할 뿐입니다.

애독자

2010.12.11 21:32:11
*.166.176.181

결국 플라톤의 "시인들을 추방하라"의 소박(하고 조잡한) 반복이 아닌가,하고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하뉴녕

2010.12.11 21:43:23
*.149.153.7

음 뭐 플라톤의 문제제기도 부분적으로는 타당했죠. 시인이 전쟁 시를 읊는다고 지가 전쟁을 잘하는 건 아닌데 전쟁도 잘하는 것처럼 군다고 비판했으니까요. 다만 교육과정에서 그걸 빼야 한다는 논증엔 무리가 있었죠.


그와는 별개로, 종종 '과학주의자들'의 논증에서 플라톤주의나 데카르트주의를 느낍니다. 이런걸 읽으면 커서 잘못 될거라는 도킨스의 언급은 별다른 근거가 없지만 플라톤의 착상에 근거한 것이겠고, 뇌과학의 전제는 데카르트의 영육이원론의 영혼의 자리에 뇌를 집어넣은 것같은 느낌이 들죠.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내세운 테제들이 '철학적인'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과학에 근거한 것이라고 보지요. 꽤 재미있는 현상입니다. 철학논의라는 건 구체적인 쓸모는 없을지 몰라도 그렇게 부당하게(?!) 인정된 전제들의 효용성을 의심하게 하는 역할은 하는듯요.

홍공

2010.12.12 15:10:53
*.224.47.51

근대 지엽적인 질문이지만 그냥 궁금해서 그런데, 뇌과학이라면 그냥 생각하기로는 모든 정신작용을 물질적으로 환원해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어째서 데카르트의 영육이원론과 뇌과학이 유사한 논리로 볼 수 있는지 궁금하네요. 그냥 궁금해서요 ;;;;

김원철

2010.12.11 22:10:43
*.201.208.11

인지심리학 기초교재를 보면 데카르트부터 시작해서 철학 얘기를 하는데요. ^^; 논점을 하나하나 '철학적으로' 논박하고 있으니 함 찾아보시기를.

하뉴녕

2010.12.11 22:41:17
*.149.153.7

심리철학에서도 데카르트부터 얘기를 시작합니다. 물론 심신이원론을 제시하고 그걸 비판적으로 보는 맥락으로라다가....

2010.12.12 11:13:14
*.208.112.113

한윤형이 맨날 자기는 잘 모른다 드립 치니까 무시해도 너무 무시하네... 인지심리학 기초 교재에 있는 얘기가 철학적이긴 뭐가 철학적이예요...

김원철

2010.12.12 11:29:58
*.201.208.11

↑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내세운 테제들이 '철학적인'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라는 대목을 보고 혹시 모르실까 싶어서 쓴 댓글이었습니다. 아시는 모양이니 실례했습니다. 큼.

ㄴㄴ

2010.12.12 13:21:19
*.154.232.82

서로와 한윤형(떼거리)가 주고 받은 난장을 보며
뭔 개판인가 했는데...

이 글을 보니까 서로가
왜 사람들이 한윤형을 논리적이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게
무슨 뜻인지를 알아버렸다.


* 명제 : <논리> 어떤 문제에 대한 하나의 논리적 판단 내용과 주장을 언어 또는 기호로 표시한 것. 참과 거짓을 판단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이를테면, ‘고래는 포유류이다.’ 따위이다.
(네이버 백과사전 출처)

---------------
그리고 이택광이 조승희 사건에 대해 한 얘기는 물론 ‘과학적이지 않다.’ 어느 정도로 과학적이지 않냐 하면, 다음과 같은 명제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과학적이지 않다.

- 최진실이 자살한 이유는 악플러들 때문이다.
- 최진실이 자살한 이유는 악플러들 때문이 아니다.
- 북한이 연평도에 포격한 이유는 햇볕정책 때문이다.
- 북한이 연평도에 포격한 이유는 대북강경정책 때문이다.

다만 위 명제는 아래의 명제들보다는 논의해볼 가치가 있다.
---------------

위에서 한윤형이 '명제'라고 언급한 문장 중 '명제'가 없다.
위 문장은 모두 주장이고,
그 주장은 경험적 방식으로 개연성을 지지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방법론적으로 '과학적'이다.

아래 문장을 보자.
<최진실이 자살한 이유는 악플러들 때문이다.>

이 문장은 참도 거짓도 아니다.
따라서 명제가 아니다.

명제는 아니지만, 최진실 죽음의 원인을
인과적으로 설정한 '가설'에 속한다.

위 문장은 2가지 문장으로 결합되어 있다.

- 최진실은 자살하였다. (참, 명제 맞음)
- 최진실은 악플러들의 공격을 받았다. (참, 명제 맞음)

만약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결합되어 있었다면
거짓인 명제가 되었을 것이다.

- 최진실은 암으로 죽었다. (거짓, 명제 맞음)
- 최진실은 화성인의 공격을 받았다. (거짓, 명제 맞음)

명제는 논리학에서 형식의 타당성을 담보할 수 있는 둘레치기를 하지만,
그것 자체가 내용의 가치를 담보하지는 못한다.
명제가 과학적인지 아닌지, 논의해볼만한 명제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명제는 참이냐 아니냐를 밝힐 수만 있으면 된다.
명제를 '과학적'으로 평가하는 건 무의미하다.

조금 더 논의를 진전시켜보자.

p1. 최진실은 자살을 하였다.
p2. 최진실은 악플러들의 공격을 받았다.
p3. 따라서 최진실은 악플러들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자살하였다.

이때 p3은 가설이다.
최진실 자살을 둘러싼 여러 정황들 중 '유력한' 한가지 사실을
강한 인과로 연결시켜내는 것인데,

<현상->가설->검증>

이는 대표적인 귀납논증에 속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것은 과학적인 방법론으로 검증해야 한다.
가설을 검증할 다양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최진실 주요기사에 달린 악플러들의 행태를 살펴본다던지,
심리상담 결과를 살펴본다던지,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참고하면서
위 주장의 개연성을 판단할 수 있다.

따라서 위 주장이 과학적이지 않다는 이야기는
틀린말이다.
위 주장은 방법론으로 봤을 때
명백하게 과학적이 되는 것이다.

아이추판다의 논의를 요약한 것도,
사실 한윤형은 악의적 문장들을 쑤셔넣어
주장들을 '논증'이라고 포장했는데..
이는 그저 논증에 대한 한윤형의 무지만 부각될 뿐이다.

한윤형은 누군가의 논의를 압축요약하여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경향을 자주 보여주는데
대부분이 허수아비 논증에의 오류를 범한다.


모든 글이 '논리적'일 필요가 없고,
'과학적'일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한윤형의 글에게
논리와 과학을 기대할 필요가 없다.

문학이나 에세이 등과 같이
보다 차분하고 성찰적인 글로도
사회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글을 쓸 수 있다.

하지만 한윤형은 분명 스스로를
'중간지식인'으로 규정하고
전문학자와 대중 사이를 연결시키는
고리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에게 다시 이렇게 물어야 한다.
고등학교 3학년 수준의 논리학적 지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전문학자들의 논의를 본인 스스로의 관점으로 재조합하여
다시 대중들에게전달하는 것은 가능한가?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일인가?

중간지식인으로써 한윤형의 글이 대부분 쓸모없는 이유가 이거다.
그는 문장과 명제의 차이를 모르니 논증을 할 수가 없다.
그는 단지 서술하고, 검증없는 주장을 반복하고,
그리고 악의적 왜곡을 이해와 글쓰리라고 생각한다.

과연 우리는 한윤형의 글을 왜 읽어야 하는가?

하뉴녕

2010.12.12 13:27:00
*.149.153.7

예. 죄송합니다. 긴 글을 급하게 쓰다보니 형편없는 짓을 했네요. 물론 논리학에 밝지 않아서 저지른 실수이긴 합니다. 하지만 해당하는 부분의 '명제'를 '주장'이라고만 고치면 논지에 별 차이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아이추판다의 논의를 잘못 요약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머지 판단은 독자들에게 맡기겠습니다.

하뉴녕

2010.12.12 13:38:58
*.149.153.7

님의 논의 중간에 이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는 대표적인 귀납논증에 속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것은 과학적인 방법론으로 검증해야 한다.
가설을 검증할 다양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최진실 주요기사에 달린 악플러들의 행태를 살펴본다던지,
심리상담 결과를 살펴본다던지,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참고하면서
위 주장의 개연성을 판단할 수 있다.

따라서 위 주장이 과학적이지 않다는 이야기는
틀린말이다.
위 주장은 방법론으로 봤을 때
명백하게 과학적이 되는 것이다."


당연히 원론적으로 맞는 말씀입니다만 논리학 교과서에서 이렇게 저렇게 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실세계에선 같은 자료를 보고도 다른 해석을 내리고 인과관계까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여러 주장이 가능하죠. 실제로 검증에 필요한 만큼의 자료를 충분히 얻을 수 없거나, 얻더라도 여러말들이 많아집니다. (사람들이 위키리크스에 열광하는 것도 그래서 아니겠어요?) 그래서 과학이냐 아니냐를 판정내리는 게 아니라 개연성의 정도를 표시하려고 했습니다. 물론 이에 대해서도 반론은 가능하겠지요. (아마도 '개연성의 정도의 차이'가 없다는 반론은 곤란하겠고 각 주장들 중 뭐가 개연성이 더 큰지에 대해서요.)


저는 논리학 강좌를 제대로 수강한 적이 없고 기호논리학 강좌에선 열등생이었습니다. 그런고로 머리 속에 용어가 제대로 박히지 않아 부지불식간에 용어를 잘못 쓰는 일도 일어나는데요. 이런 걸 따질 수 있는 분이라면 글쓴이의 의도를 짐작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그게 어려운 일이라면 그것도 좀 곤란한 일이겠구요.

공현

2010.12.12 21:48:47
*.140.110.77

"가설"이나 "주장"도, 참과 거짓을 판단할 수 있는 명제 맞을 텐데요 --;;;
참이나 거짓이 아직 판단되지 않은 경우더라도 논리적으로 참과 거짓이 판단 가능한 문장은 명제입니다.
그래서 귀납적인 논증으로 도출된 것도 사실은 반례가 나타나서 거짓임이 입증되기 전까지는 확실하게 참이다 거짓이다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어쨌건 명제에요

ㄴㄴ

2010.12.12 14:00:49
*.154.232.82

1. 님이 제게 글쓴이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준은 아닌 것 같습니다.
2. 아이추판다는 님과 같은 방식으로 논증한 적이 없습니다.

3. 명제-> 주장, 과학적-> 개연성 용어를 이렇게 바꾼다면
제가 언급한 문제는 약간 해결되겠지만 문장이 또 기이하게 바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말고도 논리학 개념을 잘못사용하시는 것 처럼
비평, 과학, 철학 등의 기본적인 개념들을 잘못사용하고 계신 것이 너무 많습니다.
어떻게 다 바로잡아야 할지 모르겠군요.

4. 님의 글은 부분적으로는
'형식적 타당성'이나
'경험적 개연성'을 따르는 듯 하지만
대부분은 현상에 대한 '직관'적 판단에 의존합니다.
'직관'은 천재들에게만 허용된 재능이라고
사람들이 착각을 많이 하는데..
적절한 검증의 필터를 거치지 못한다면
사실은 그냥 '깜냥'일 뿐이에요.
가설 수준의 문장을 참인 명제로 설정하고
논증을 진행시키는 걸 보면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하구요.

5. 지금 제가 말씀드린 주장을 증명하려면
최소한 4~50p 이상의 글이 필요할 것 같군요.
이것 자체가 하나의 비평작업이 될 것 같습니다.
저로써는 취사선택할 수 밖에 없겠네요.

6. 제가 언급한 부분은 기호논리학 따위의 거창한 학문적 작업이 아니라,
중학교 1학년 집합론에서 나오는
명제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이해였습니다.
타당성이나 개연성에 대한 개념은 고등학교 2~3학년 수준으로 올라가지요.
그래봤자 미적분 같은 수학보다는 훨씬 이해하기 쉬운 내용입니다.

7. 심형래도 비평가들이 <디워>비판할 때
나름의 이유를 대며 '대중이 판단할 것이다'라고 말했죠.

그러면서 점점 더 종교가 되는 겁니다.

하뉴녕

2010.12.12 14:22:22
*.218.196.100

1. 제가 남들의 판단에 맡기겠다고 말한 건 님이 말씀하신바와 비슷합니다. 아이추판다가 실제로 이런 논증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설명하기 위해선 또 이만큼의 분량의 글이 더 필요한데, 그렇게까진 시간을 못들이겠다는 뜻입니다. 님이 "아이추판다는 그렇게 논증한 적 없습니다."고 말씀하시려면 제가 한 것과 비슷한 수준에서 아이추판다의 주장을 요약해서 제시해 주시면 될 일입니다.

2. 이 글에 문제가 많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리하여 거듭 이런 부분은 모른다라고 천명하고 있기도 합니다. 견적이 안 나올수가 있겠지요. 하지만 아는 분들이 제대로 논의를 안 해주셔서 생긴 일들이 아니겠습니까? 아이추판다 논의를 지지하시고 비평에 조예가 있으신다면 그런 부분에서 시간을 들여 납득할만한 글을 쓰시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논의가 충분했다면 무지한 제가 이런 글들을 쓰지도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만일 똑똑한 분들에게 시간이 없으시다면, 이런 상황도 감내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3. 이 글은 블로그에 올리는 용도 정도로 작성된 겁니다. 오류가 발견될 수 있음을 알고 있고, 지적이 있으면 수정하겠다는 전제 하에 쓰여졌지요. 매체에 보내는 글들은 대개 더 구체적인 사건에 대해 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 씁니다. 저도 님에게 무슨 글을 써라 마라 조언을 받을 입장은 아닌듯 합니다.

ㄴㄴ

2010.12.12 14:05:35
*.154.232.82

논리학이 싫으시다면
문학을 하세요.

감수성, 언어유희를 문학적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원래 문장력과 직관력으로도 좋은 문학을 할 수 있습니다.

검증의 문제는 비평가들이 알아서 해주니,
님의 약점을 커버할 수 있을 듯.

ㅇㅇ

2010.12.12 15:10:27
*.218.222.104

병시나 니는 문학이 만만허냐? 괜히 고딩 때 습작 몇 개 했다고 지가 문학을 안다고 깝치는 애들이 있어요... 니는 그냥 입을 열지 마라. 듣는 사람 속 터진다.

윤형씨.. 고생한다..

ㅇㅇ

2010.12.12 15:11:46
*.218.222.104

아유 시발 아유 속이 터져서 내가... 니는 왜 모지란 인정욕을 인터넷에서 채우려구 들어! 그거 지지에요 지지!

ㄴㄴ

2010.12.12 15:49:39
*.154.232.82

똥개 한마리 나타났네..

비아냥거리는 말인지도 모르겠냐?
병신 육갑은..

하뉴녕

2010.12.12 16:59:15
*.136.93.130

제가 끼어들 일이 아닙니다만 님의 태도를 보고 비아냥거리는 말인지 눈치채지 못할 화자는 없습니다. 아마 저님은 그 비아냥거리는 말로 '문학'이 선택된 데에 대해 화를 낸 것이겠지요.


그리고 비평을 함에 있어 "어떤 것이 비평할 만한 사건인가?"를 택하는 데부터 '직관'이 개입되고 논의를 하는 구석구석 직관이 개입을 할텐데요. 물론 직관만 있는 양반은 나중에 망가지는게 순식간인 꼴을 많이 봤던지라 저도 (만일 계속 글을 쓴다면) 어떤 식으로든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논리학을 모른다."와 "논증을 하지 않는다."가 전혀 다른 얘기라는 점을 모르시지 않을 테지요. 님은 논증은 하지 않고 그냥 자기가 아는 것으로 남을 윽박지르는 것을 즐기시는군요. 논리학을 공부하지 않았어도 일상적 언어활동에서 논증을 자연스럽게 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그런 사람이라면 논리학의 문제에 대해 함부로 얘기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리고 저는 위에 쓰여진 글이 블로그 정도에서 논의하기 위해서 쓴 글이란 점을 이미 밝혔지요. 똑똑한 분들이 죄다 침묵하니 모자란 사람이 고생을 합니다.


글쎄, 비평을 하기 위해 무엇무엇이 필요한지 자세히 생각은 안 해봤는데, 어쩌다보니 이러저러한 세세한 사안에서 비평을 하고 있습니다. 님은 제가 "논리학을 모른다."라는 이유로 그 엄연한 활동을 이제 '문학'이란 이름의 사기로 규정하고 비아냥거리시는데요. 그 정도 비아냥에 대응하는 제 합당한 대응은 이 정도 비아냥이 되겠군요.


"그래, 그렇게 사회에 관심가지지 말고, 평생 대학원에서 이택광 씹으면서 '비평 연습'이나 하며 사세요."


굿 럭.

ㄴㄴ

2010.12.12 14:15:21
*.154.232.82

님이 지적한 지식의 생성과 작동에 관한 것.
최진실 이야기는 님이 말한데로 과학적으로 검증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이택광이 할 수 있나요?
그건 아니죠.

지식과 권력의 관계를 학문적으로 성찰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체계적으로 접근한 최초의 사람은 푸코였습니다.
님이나 이택광도 푸코처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고 있나요?

푸코는 촘스키와 인간본성 논쟁, 정의 등의 논쟁을 할 때
지식계보학을 추적하면서 쌓은 면밀한 학문적 지식과 통찰력으로
잡아먹어버립니다.

이택광은 푸코의 노력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본인이 푸코의 노력을 하는 건 아니죠.

하뉴녕

2010.12.12 14:42:10
*.218.196.100

1. 제가 최진실 얘기를 왜 했을까요? 이택광의 글을 보고 이게 검증될 수 있는 얘기냐 아니냐 이러쿵 저러쿵 하는데, 그의 비평이 다루는 대상들이 그런 식의 검증이 가능한 영역에 있는지에 대해 제가 의문을 제기한 것이 아닙니까? 님은 제 논지를 받아들인 셈이네요. 저는 "이택광은 물론 과학(심리학)도 그걸 검증할 수 없다."고 말한 건데 이에다 대고 "이택광은 검증가능하냐?"라고 물으시는 건 뭘까요? 본문 중간이 왜 제가 '모두가 정치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 것'이란 불가능한 대안에 대해 언급했겠습니까?

2. "지식과 권력의 관계를 학문적으로 성찰"이라...계보학적 탐구라... 좋지요. 그런데 그 성찰이 우리가 말한 맥락에서의 '검증'이 맞습니까? 그게 논쟁할 때 유용한가 여부와는 별도로, 그 설득력은 발생론적 오류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요? 그리고 "푸코처럼 하세요."라는 훈수는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그야말로 님이 푸코처럼 하면 되는 일인데 말입니다. 그래 푸코처럼 지식과 권력의 관계를 성찰하여 님 혹은 님의 친구들은 한윤형이 좌파담론에서의 기득권을 위해 이택광을 과잉옹호한다 따위의 허황한 추론이나 남발한 겁니까? 참 재미있는 '학문'입니다...^^

ㄴㄴ

2010.12.12 15:48:13
*.154.232.82

<그런데 그 성찰이 우리가 말한 맥락에서의 '검증'이 맞습니까? 그게 논쟁할 때 유용한가 여부와는 별도로, 그 설득력은 발생론적 오류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요?>

이러니까 님이 전문적 논의를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제가 이야기한 '검증'이라는 건
고등학교 1~2학년 수준에서 다루는 논리학의 기본 방법론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이야기는 아직 대학교양수준도 안왔어요.
이걸로 푸코나 이택광의 주장을 검증한다구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고등학생 수준 논의에서 한 발자국만 벗어나도
횡설수설하는 사람과 무슨 전문적 논의를 합니까?

하뉴녕

2010.12.12 16:13:31
*.218.196.100

"나는 알고 있다."는 말씀은 충분히 들었습니다. 이제 그 '앎'을 보여주셔야지요. ^^ 님 자신이 님을 어찌 평가하든 지금껏 보여준 모습은 타인의 주장이 어떤 부분을 지적하고 있는지, 어떤 함의를 지니고 있는지 이해도 못하는 모습이었죠.

그에 반해 제 제안은 여전히 간단합니다. 동일한 질적대상에 대한 설명 프로그렘을 제시하라는 것. 푸코의 방법론으로 최진실의 죽음과 소녀시대의 인기비결에 대해 어떤 접근이 가능할까요? 그리고 그게이택광의 비평보다 방법론적으로 우월할 이유는 뭘까요? 이 부분에 답해주시면 됩니다. 직접 쓰라고 하는게 아니라, 아웃라인을 그러보라는 겁니다. 그것도 못하겠으면 이런데 나오지마시고 촘스키를 씹어먹었던 푸코의 찬란한 전과나 계속 달달 외고 계시던지요. ^^

ㄴㄴ

2010.12.12 16:59:57
*.154.232.82

풋..

'나는 알고 있다'를 이야기하는게 아니라,
님이 고등학생 수준의 논리학을
소화못하고 있다고 말한 거지요. ^^

님에게 친절해볼까 해서, 언급한 문제를
'사조방'과 연결해서 설명해주려고 했는데,
이게 정말 견적이 안나오네요. ㅎㅎ

질적대상은 뭐며, 설명프로그램은 또 뭐고,
'지식접근어려움'을 근거로 지식사회학 체계를 설립한
푸코를 이야기했더니
이걸로 최진실 죽음을 이야기하라는 허공 발차기나 하고 있고..

설명 못해줘서 미안하긴 한데,
님도 좀 그런게 한 학기 동안 대학에서
새빠지게 수업들어가며 서베이 돌리고
현장조사 나가고 하면 알 수 있는 일이에요.
그리고 너무 방법론만 익히면
사고가 경직되니까 철학이나 문학 같은
독서를 충분히 해두셔야 발전이 있어요.
명심하시구요.

일목요연한 설명과 더불어서
님의 오류까지 조목조목 짚어가며 설명해주고 싶긴 한데,
제가 님 과외 선생님도 아니고 이런 건 너무하다 싶네요.
교양수업에서도 다 가르쳐주는 거고
학부 1학년도 다 해내는 거니까 겁먹지 말구요.

그래도 영 안되겠다면,
다음 학기 쯤에 블로그에 한번 징징거려보세요.
제가 학부 후배들이랑 하는 사조방 세미나에
님 껴줄게요.

하뉴녕

2010.12.12 17:09:35
*.136.93.130

"지식과 권력의 관계를 학문적으로 성찰" // "지식계보학을 추적하면서 쌓은 면밀한 학문적 지식과 통찰력"

계보학 말씀하시려는 것 같길래 '발생론적 오류' 아니냐고 대꾸한 것이었잖아요?

"질적대상은 뭐며, 설명프로그램은 또 뭐고,
'지식접근어려움'을 근거로 지식사회학 체계를 설립한
푸코를 이야기했더니"

처음부터 이렇게 말했으면 그렇게 대꾸는 안 했겠지요. 뭐 그런게 있다는 것만 알 뿐이니까요.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진실 죽음을 이야기하라는 허공 발차기"는 했을 겁니다. 아주 간단한 문제지요. 연구조사해보기 전에는 말을 하지 말라고 주장할 것 같으면 모든 신문의 논설/칼럼이 중지되어야 하지 않겠냐는 얘기는 본문에 없던가요?

여튼 재미있는 양반입니다. 저도 학교를 다니는데 필요하면 수업을 들으면 되지 뭐하러 님처럼 자의식 그득한 헛똑똑이의 세미나에 합류할까요. 몇 년 지나기 전에 님이 잘난체 하는 그 되지도 않은 지식들은 저도 다 알게 될 것 같은데 그때엔 또 무슨 논거로 자신의 '비평 연습'을 자랑할까 궁금해집니다. 뭐 같이 딸딸이쳐 줄 동료들은 있겠지요.

그럼 이만.

ㄴㄴ

2010.12.12 17:15:54
*.154.232.82

네.. 기대할게요.. ^^

그리고 제가 님 리플에 단 지식이나 사고력은
몇년 짜리 공부가 하니라 한 학기 짜리 공부라는 것도
명심하시구요.

바이~

하뉴녕

2010.12.12 17:22:18
*.136.93.130

네, 서로 님이 출사표를 던졌듯이, 님도 나중에 '공론장'에서 만나요. ^.^

바이~

하뉴녕

2010.12.12 17:36:22
*.136.93.130

이거 참...ㅡ.,ㅡ;;; 제가 주변 사회학과 대학원생들에게 ㄴㄴ 님의 덧글을 보여주니

"이건 뭐 계통도 없고...맥락도 없고...견적도 안 나오고..."

라는 반응이 나오는군요. ㄴㄴ 님이 더 찌질댈 시간이 없는 것만큼 제 친구들은 기말이라 죽겠다고 아우성치니 자세한 설명을 바라는 건 무리일듯 합니다. 전 언제나 그랬듯 날파리는 무시하고 제 할 일이나 해야죠....

쩝.

ㄴㄴ

2010.12.12 17:42:21
*.154.232.82

하하하..
친구들한테 일러줬어요?

아.. 진짜.. ㅋㅋㅋㅋㅋㅋㅋ
하는 짓은 초딩 수준이네요. ㅋㅋㅋㅋㅋ

사회학전공한다는
친구들 한번 와보라고 하세요..

뭐라 하나 들어보고 싶네. ㅋㅋㅋㅋㅋㅋ

마지막에 빵 터졌네...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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