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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진보신당 제2창당토론방에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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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신당은 창당 이후부터 언제나 ‘창당 준비 중인 당’이었다. 이것은 이 정당에겐 좋은 핑계거리이며, 한편으론 굴레이기도 하다. 당원의 처지에서도 그렇다. 누가 그 정당은 왜 그 모양이냐고 물으면 “아직 창당 준비중이니까요.”라고 말할 수 있지만, 한편으론 지금의 진보신당에 내가 동의한다고 말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의미가 있는 일인가에 대해 주저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진보신당이 총선 이후 착수하겠다고 공언한 “제2창당”은 매우 중요한 것인데, 이 중요성에 걸맞는 비전이 중앙당에서 제시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당원들의 자발적인 토론 속에서 방향이 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볼 때 신언직 동지의 제언을 통해 토론의 물꼬가 트이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일단은 신언직 동지의 시의적절한 문제제기에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나는 신언직 동지의 제언에 대해 동의하지 못하는 지점이 있는데, 그 점을 설명하기 전에 도대체 우리가 지금 왜 제2창당이란 걸 하고 있느냐는 기초적인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문제가 꼬여 있을 때 언제나 기본으로 돌아가 생각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왜 우리는 지금 제2창당을 해야 하는가? 간단하게 말하면, 총선 전에 온전한 의미의 창당작업을 끝마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끝마치지 못했던가? 분당 이후 총선에 임하기까지 시간이 너무 급해서 마땅히 해결해야 할 숙제를 ‘전술적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전술적 지연’을 나중에 해소하기 위한 방책으로 우리는 언제나 ‘제2창당’이란 핑계를 내세웠다. 이 핑계가 적절했는지 않았는지 여부는 우리가 그 지연된 숙제를 얼마나 잘 해결하느냐에 따라 소급적으로 판단될 것이다. 그러면 다시 물어보자. 그때 우리가 해결하지 못한 숙제는 무엇이었던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절차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인 것이다. 운명의 2월 5일 당대회날 분당을 결심하고 민주노동당을 이탈한 진보신당의 창건자들에겐 ‘당원 민주주의’의 절차에 입각한 정당을 건설할 시간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실상 이들은 민주노동당에서 이탈한 당원들과 새로이 합류한 지지자들의 의사를 ‘위임받아’ 서둘러 당을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제2창당은 그때 결여된 절차적 정당성을 보충하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 한편 민주노동당의 탈당파들은 탈당 당시에 정치적으로 제대로 된 명분을 쌓은 상태가 아니었다. 그들이 종북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한 이들과 8년동안이나 정당활동을 해왔으니, 만일 그 비난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사실상 유권자를 기만하는데 동조한 행위에 대해 떳떳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자주파(NL)의 이념이 구리다면 너희들 평등파(PD)의 이념도 도찐개찐이 아니냐, 평등파만의 정당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대답을 유보했다. 우리는 평등파만의 정당이 아니라, 좀 더 넓은 틀로 정당을 운용할 생각인데.... 그러니까 진보의 재구성!! 그것을 총선이 끝나면 보여주겠다능?! 대충 이런 정치적 회피기동으로 ‘제1창당’을 둘러싼 잡음을 없앴던 것이다. 그러므로 제2창당은 당시 생략된 정치적 정당성을 보충하는 작업도 되어야 한다.

 

이 두 가지 작업은 어떤 의미에선 동전의 양면같은 것일 수도 있다. 오히려 분당 직후 그리고 총선 전의 진보신당이었다면 시간이 약간 소요되더라도 ‘민주노동당 분당파’들의 의결에 의해 절차적 정당성이 쉽게 확보되었을 것이며, 정치적 정당성의 문제는 차후의 숙제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총선 직후 노회찬-심상정 두 스타의원의 낙선으로 인한 ‘지못미’ 열풍과 촛불정국을 통해 진보신당에는 민주노동당적을 가진 적이 한번도 없는 새로운 당원들이 대거 입당했다. 따라서 절차적 정당성의 문제를 좀더 심도있게 고려한다면, 이렇게 여러 가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입당한 뉴타입 당원들을 기존의 운동권적 정파조직들로부터 소외시키지 않고 (페이퍼 당원이나 거수기로 만들지 않고)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하나의 정당원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도 아울러서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에 대해 대략의 해답이 제시된다면, 이 정당은 더 이상 민주노동당에서 분당한 평등파 운동권들의 정당이라 부를 수 없을 테니 정치적 정당성의 문제도 해소되는 셈이다.

 

절차적 정당성의 문제는 아주 단순하게 받아들인다면 당원들의 의결을 통해 창당하면 해결되는 문제고, 사실 NLPDR을 벗어나는 새로운 운동지향의 이론적 노선도 분당정국부터 레디앙에서 이재영을 비롯한 여러 논자들을 통해 설득력있게 논의된 것으로 안다. 그러니까 아주 초보적인 차원에서의 ‘제2창당’은 아무런 어려움도 없다. 어려움은 이 두가지 과제를 좀더 실천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였을 때 발생하는 것일 터인데, 이것을 나는 위에서 서술한 이유들에 의해 “어떻게 민주노동당원이었던 이들과, 다양한 이유 때문에 처음으로 정당에 입당한 당원들이 서로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대략의 노선에 동의하면서 좌파적인 정당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로 이해하고 있다. 즉, 문제는 오히려 우리의 눈앞에 던져져 있는 셈이다. 하지만 중앙당은 물론이고, 중앙당에 문제를 제기하는 신언직 동지나 정치공학적으로 생각이 빠른 여러 활동가들은 이 문제를 보지 못하고 “진보신당은 어느 조직과 손을 잡아야 하는가?”라는 문제에만 천착한다. 신언직 동지는 중앙당의 행태가 “상층 중심의 5% 당원의 당”을 만들 수 있다고 우려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신언직 동지의 논의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조직과 손을 잡아야 하고, 어떤 조직을 잡아먹어야 할지 궁리를 하자는데 95%의 당원들이 무슨 얘기를 할 수 있겠는가?

 

정치공학적으로 따지면 나는 주대환이 말이 딱히 틀린게 없다고 생각한다. 무능한 건 자주파만이 아니라 평등파도 마찬가지였고, 평등파만의 당으로는 할 수 있는게 없다는 말은 100% 옳지 않더라도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문제는 이러한 정치공학을 벗어나는 새로운 변수의 도입이다. 만일 진보신당이 평등파의 이론가들이나 활동가들이 비정파 평당원들을 소외시키는 정당이 된다면 그것은 ‘평등파만의 당’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정말로 진보신당의 운용자들이 상이한 성격의 당원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줄 수 있는 체계를 고민한다면 이 정당의 성격은 완전히 달라진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그러한 고민이 아닐까? 진보신당 내부에 다양성을 품고 있다면, 그 외부의 다양성과 접속하는 것은 훨씬 쉬운 일이다. 반면 ‘외부’를 ‘외부조직’으로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수십개의 조직을 잡아먹어도 여전히 운동권들만의 리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운동권과 시민 사이에 대립각을 세우겠다는 것도 아니고, 전자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진보의 재구성’이나 ‘진보정치 재편’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해야 하느냐를 묻는 것이다. 조직역량은 눈에 쉽게 보이고, 설득력이 불러일으키는 자발성의 힘은 보이지 않거나 매우 더디어 보인다. 하지만 진보신당이 한국 사회에서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후자에 대한 고민이 절실하다. 신언직 동지의 “진보정치 재편 5년 로드맵”이 전자에 치우친 대안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신언직 동지의 주장 중에서 “정파실명제”의 경우 나 역시 진보신당에 당위적으로 있어야 하는 제도라고 생각하고, “진보신당 서울시장 후보 조기 가시화”라는 전략 역시 매우 설득력있는 제안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다양한 진보신당 구성원들을 포괄하는 기본노선으로 “민주주의를 위한 사회연대”를 내세우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중앙당 뿐 아니라 신언직 동지의 제언 역시 ‘제2창당’의 문제를 ‘외부 조직역량들에 대한 외연 확장’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 이유는 상당 부분 이 노선 때문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를 위한 사회연대”는 “평등, 생태, 평화, 연대”보다 더 후퇴한 슬로건이다. 신언직 동지는 “평등과 생태와 평화를 관통하는 것”은 “다양한 계층계급의 정치 사회경제적인 권리 요구인 ‘민주주의’ 문제”이며 “연대는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방향의 문제라 생각한다.”고 말한다. 나는 평등, 생태, 평화와 연대를 이런 식으로 구별하는 것에 대해 동의한다. 하지만 신언직 동지의 생각처럼 평등, 생태, 평화의 가치가 민주주의 문제에 수렴되지는 않는다.

 

왜 평등, 생태, 평화의 가치가 실현되지 못하는가, 라고 물었을 때, 신자유주의가 국가의 권력을 시장으로 내줬기 때문에 국민이 국가에 요구한다 하더라도 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고 답변할 수는 있다. 즉, “우리가 평등, 생태, 평화의 가치를 실현하지 못하는 이유는 민주주의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더 많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는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말이 평등, 생태, 평화의 가치가 민주주의라는 하나의 가치에 수렴된다는 것과 같은 의미는 아니다. 양자는 전혀 다른 문제다. 민주주의가 충분히 확립되었더라도 다수 민중은 좌파들이 원하는 것만큼 평등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고, 생태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고, 평화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당이 추구해야 할 기본가치인 것이지, 정당이 드러내야할 이념은 되지 못한다. 맥락상의 적절함의 차이는 현격할지라도, “민주주의를 우리 정당의 기본노선으로 삼아야 한다.”는 견해는, 논리적으로는 “실용주의를 우리 정당의 기본노선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과 비슷한 수준의 코미디다. 누구나 다 가지고 있어야 마땅한 것을 우리만의 강점으로 만들겠다고 내세우는 것이다.

 

“가치는 나열되면 안 된다. 분산되면 힘을 하나로 모으기 어렵고, 최악의 경우 내부가 갈라지게 된다. 민주노동당의 '자주'와 '평등'이 정파 패권주의와 맞물려 결국 갈라지는 뼈아픈 경험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에도 전혀 동의할 수 없다. 가치는 나열되어야 한다. 나열하지 않으면 “무엇이 근본문제인가?”라는 유사철학적인 문제에 휩싸이게 된다. 자주와 평등이 패권주의와 맞물리게 된 이유는 이 두 정파의 사상에서 이 두 단어가 근본문제의 위상을 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NLPDR의 체계에서 자주파는 자주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사회의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평등파는 그 반대였다. (물론 평등파는 소련붕괴 이후 이런 식의 근본주의자에서 이탈한 이들도 많았던,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세력이었지만 말이다.) 말하자면 80년대 이념의 문제는 가치를 나열하는 법을 몰랐다는 것이다. 신언직 동지의 발화는 자주파와 평등파를 비판하면서도 오히려 그 시대의 어법에 갇혀 있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다른 요구도 생길터인데 그 요구들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선 앞선 신언직 동지의 구별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면 된다. 즉 앞의 세가지 문제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문제들은 ‘연대’라는 가치 밑에 수용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진보신당의 슬로건엔, 완전하진 못할지라도 어떤 고민은 담겨져 있다. 신언직 동지의 문제제기는 이 고민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거꾸로 돌아가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위한 사회연대”라는 단어에서, 물론 “민주주의”라는 단어에 대한 신언직 동지의 생각이 가령 민주당의 어느 보수주의자나 자유주의자가 이해하는 ‘민주주의’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굳이 이러한 슬로건으로 당의 기본노선을 정립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은, 지금까지 얘기했던 그 주장의 논리적 타당성 여부와는 별개로, 정당의 노선을 현 시대상황에서의 선거전략에 종속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든다. 신자유주의를 제어하기 위한 민주주의라는 논점은 의미가 있고, 나는 진보정당이 그 논점을 정치적으로 제기할 수도 있고 선거전략으로 써먹을 수도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현시대의 단기과제일 수가 있고, 다른 정치세력을 압박하는 정치적 무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노선으로 가져가자고 말하는 것은 선거연합 등의 정치공학을 더 쉽게 실현시키기 위한 무엇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다.

 

“민주주의를 위한 사회연대”라는 노선의 정립 뒤에 “진보정치 개편”이나 “서울시장 후보 조기 가시화”가 배치될 때, 나처럼 우둔한 평당원은 이 노선이 정치공학적 땅따먹기에 대한 요구에 부응해 만들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전략은 언제나 필요하고, 우리는 이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그 전략이 기존의 구도에 안주하기 위한, 관성의 법칙에 몸을 맡기는, 도전한다 말하지만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무언가라면 어떨까. 그런 전략이 우리의 ‘기본’을 잠식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 민주노동당 시절 저 많은 평등파의 활동가들이 자주파의 전횡에 입을 열지 않는 데에도 다양한 전략적 고려와 현실적 이유들이 있었다. 그때의 오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제2창당’ 작업을 조금 다른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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