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갑-노회찬, 선거환상 버려라" | ||||||||||||
[정치사회비평] 임종인 15%의 수수께끼…진보정치와 절반의 인민주권 | ||||||||||||
지난 10월 28일 경기 안산시 상록을 보궐선거에서 김영환 민주당 후보가 41.17%, 송진섭 한나라당 후보가 33.17%, 임종인 무소속 후보가 15.57%의 득표율을 얻으면서 1, 2, 3위가 결정되었다. 여기서 15.57%의 득표율을 얻은 임종인 무소속 후보의 낙선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는 종래와 달리 그가 일부 시민사회단체들은 물론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 진보신당 등 야3당의 전격적 지지를 받은 후보였기 때문이다. 한 당의 독자후보가 아닌 명실상부 야3당의 단일후보이자 17대 당시 이 지역의 국회의원을 역임했던 임종인 후보가 15.57% 득표율에 그친 채 낙선한 사실은 결코 간단히 넘길 수 없는 문제다. 그의 낙선은 현 시기 한국 진보정당들의 수준은 물론 득표율과 지지율 하락 원인이 결코 외부에만 있지 않음을 시사하고 있다.
임종인 후보 15.57%의 수수께끼
18대 선거 직전 분당, 그리고 당 내부와 지지세력들이 연관된 각종 문제들이 당 지지도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나 그 득표율은 자성의 수준에서도 혹은 한국사회의 '보수양당 구조'를 이유로 정리될 사안이 아니다. 지역구 후보를 한 명도 내지 못한 창조한국당과 진보신당의 상황은 말할 것도 없다. 말이 야3당이지 임 후보의 15.57% 득표율은 그의 고군분투 이외에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궁금하게 한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지지율 증감 추이는 공이 어디로도 굴러가지 않을 정도로 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더욱이 지난 8월 KSOI의 국민 이념성향 조사에서 51.3%가 스스로를 진보로, 44.6%가 스스로를 보수로 보는 상황에서 이러한 지지율은 난감하다. 그러나 현 시기 정당지지율을 보면 그들 중 어느 누가 쉽게 당선되리라 예측하지는 못한다. 대통령 적격자 설문조사에서도 강기갑 의원과 노회찬 전 의원이 1% 수준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근거로 선거에 도전한다는 것인가. 물론 선거라는 정당 간 최후의 전쟁에 두 정당이 참여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만큼 정당은 중요하고 따라서 정당의 위계질서를 정하는 선거 또한 중요하다. 샤츠슈나이더의 이러한 주장은 이후 서구 정당론 연구의 권위자로 불리는 피터 마이어(Peter Meyer)나 조반니 사르토리(Giovanni Sartori) 등과 같은 학자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즉 정당은 개별 이익집단들의 갈등을 사회화시키고 이 갈등을 정치적 결론으로 이끄는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개별 이익집단들은 이러한 이유로 정당에 참여 혹은 지지함으로써 갈등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결하려 노력한다. 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으로 강자들은 갈등이 사회화되는 것을 저지하고 사적 영역에서 조용히 처리되거나 은폐되기를 바라는 반면, 약자들은 자신들의 갈등 혹은 의제가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공적 영역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다뤄지길 원한다. 따라서 이들의 의제를 다루는 좋은 정당들의 출현과 활동이 민주주의에 대단히 중요한 요소라고 말한다. 결국 정당 혹은 정당 정치가 사회의 다양하고 상이한 갈등들을 공론장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면, 이러한 갈등에 방치된 수많은 인민들의 주권이 반토막난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정당 정치가 바람직하게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 인민주권을 절반의 주권으로 만드는 것이다.
좋은 정당 출현의 의미 이런 측면에서 보면 내년 지자체 선거를 준비하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모습은 아름다워 보일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절반의 인민주권 상황이 한국 정당정치를 신자유주의적 틀이라는 무언의 합의 속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경합의 공간을 독식하기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갈등은 국회 내 여야 간 몸싸움 이후 헌정주의적 권위로 위임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런 경우조차 그 갈등이 사회화되거나 공론화되었다기 보다는 정당 간 힘겨루기에서 상호비방을 위한 전술적 수단으로 사용되다 폐기되곤 했다. 한미FTA, 이와 관련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미디어 법, 비정규직 법 개정 등의 경우 한 정당이 정책적 입장을 일관되게 공론화시킨 것이 아니라, 정치적 이해관계, 집권여부에 따라 그 입장을 너무도 쉽게 바꾸어 왔다. 그리고 이런 기회는 비단 최근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2004년 17대 총선은 민주노동당에게 원내진출이라는 또 하나의 출발을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그해 가을 이후 민주노동당은 분당을 끝으로 하는 위기상황을 수없이 반복했다. 이와 유사하면서도 다른 문제는 양 당이 빠져있는 '선거환상론'이다. 의회정치를 통한 집권과 통치를 목표로 하는 정당에게 '선거'는 당연히 피할 수도 질 수도 없는 최후의 전쟁이다. 여러 갈등이 사회적으로 공론화되기 위해서는 그 갈등을 책임지려는 정당들이 선거를 통해 원내로 진출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양 당의 선거 참여는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선거를 약자들의 갈등을 사회적으로 공론화시키는 유일한 것을 생각하는 경향이 높다는 것이다. 갈등을 공론화시키는 방식은 거리에서 스피커를 크게 틀거나, 선거 시기 유권자들의 뇌리에 공약문구를 박아 넣는 것이 아니다. 누구의 정책을 반대하고 누구의 편에 선다는 것을 외치고 명패를 단다고 해서 갈등이 공론화되거나 그에 따라 진보나 보수가 분류되는 것도 아니다. 샤츠슈나이더로 돌아가 보자. 정당이 이해집단들의 갈등을 공론화시키고 그 해결의 동학을 만들어간다면, 진보정당의 역할은 바로 그들 중 특히 스스로 자신의 갈등을 파악할 힘조차 없는 사회적 약자들과 희생자들의 입장을 갈등의 한 축으로 공론화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수가 최소화되도록 개혁을 추구하는 것이다. 갈등을 공론화시킨다는 것은 갈등을 사적으로 돌리고 숨기려 하는 사회 내 강자들에게 자신들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갈등 세력의 출현은 상대방이 그 출현을 무시하지 않을 정도로 힘의 형성을 필요로 하며, 그 힘은 스피커나 공약문구 혹은 정당후보의 잘 알려진 얼굴에서 나오지 않는다. 갈등을 공론화시키는 힘은 시간과 역사에서 나온다.
정당의 힘은 시간과 역사
시간이란 약자들에 의한 갈등이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고, 그 갈등이 누가 제시하는 어떤 방향으로 해결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쌓여가는 시간이다. 역사란 신뢰가 쌓이는 과정이 선거만이 아니라 밥, 치료, 교육, 휴식 등이 절실히 요구되는 일상의 공간에서 진행되는 역사이다. 그들이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사회적 생산물에 접근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선거승리 후 입법과정을 통해서만 유일하거나 집권세력에게 강력하게 '요구'하고 '저항'해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진보정당들은 어쩌면 짧은 시간 몇 번의 선거 출마기회를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리고 법과 질서를 무시하고 위반해서 처벌을 받는 두려움이 있더라도 진보정당의 존재이유를 알려주는 자들의 의제를 공론화하기 위해서는 신뢰를 쌓아가는 일상의 공간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새겨야할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유산은 '386세대'의 조작된 신화가 아니라 바로 '진보운동의 이유'에 대한 기억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당시 사람들이 양심과 성실함으로 전개했던 약자들의 갈등을 사회적으로 공론화시킨 시간과 역사에 대한 기억이다.
진보운동의 '이유'를 되찾아라
수많은 일상의 공간에서, 예를 들어 노조를 세우고, 농민회에서 고민하고, 학교에서 밤을 새고, 야학으로 또 다른 청춘을 만나고, 새로운 학문과 글쓰기를 하고, '국풍81'에 맞서 또 다른 문화를 세워나가는 자신들의 시간과 역사 속에서 갈등을 공론화시키는 힘을 키워갔다. 정당의 틀을 갖추지 못한 이합집산의 운동이었지만 그들의 시간과 역사는 신민당 바람을 만들고 87년 6월의 역사로 이어졌다. 진보를 표방하는 정당들이 여전히 약자들의 갈등을 사회적으로 공론화시키는 방식을 몇몇 정략적이고 감각적인 수준에서만 찾으려 한다면 그들의 득표율과 지지율은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 또한 선거 공학의 함수만을 고민하는 진보판 엘리트 중심 권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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