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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고백하자면, 나는 진중권 키드이다. 10여년 전에 인터넷을 통해 진중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진보정당의 당직자로 한 달에 80여만원의 급여를 받으며 고생을 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나 말고도 여러 명의 진중권 키드가 있는데 우리끼리는 ‘진빠’라고 한다. 이 친구들과 10년 넘게 교류를 하고 있으니 나름 대단한 우정이라 하겠다.


쌍용차 문제를 다룬 공지영 작가의 <의자놀이>

최근 쌍용자동차 사태를 소재로 한 <의자놀이>를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이 책은 쌍용자동차 사태에 대한 글을 쓴 많은 사람들의 재능기부를 통해 만들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글의 인용 방식과 원작자 등의 표기와 관련하여 생긴 갈등을 두고 책의 저자인 공지영과 원 글의 저자인 이선옥, 하종강 사이에 SNS 공간을 통한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 논쟁에서 진중권은 공지영을 향한 비판과 비난이 핵심에서 어긋나 있으며 그 정도가 과하다고 주장했다. 나는 진중권과 일부 의견을 달리한다. 내 진빠 친구들도 대개 비슷한 의견이다. 진빠니까 당연히 진중권과 비슷한 생각을 했겠거니 하고 여길 수 있지만, 사실 어떤 사안을 바라보는 방식이 진중권의 그것과 달라진 것은 꽤 오랜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진중권이 이럴 줄은 몰랐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가 변한 걸까? 최소한 내 생각엔 별로 그런 것 같지 않다. 그는 10년 전에도 똑같았다. 논쟁을 시작하면 적군과 아군을 정확히 가르고 온갖 것을 동원해 싸우며 자기가 세운 논점에 대해서는 웬만해서 타협하지 않는다. 자신의 입장이 대중의 것과 같을 때 그는 불세출의 선동가가 되지만 대중과 싸우기 시작하면 그들을 향해 끝을 알 수 없는 독설을 퍼붓는다. 대중들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에 환호했다가 저주했다가 한다. 이것이 그가 오랫동안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생명력을 이어온 비결이다.

그의 이런 논쟁 방식은 하나의 미덕을 상기시켰다. 그것은 ‘사람’보다 ‘말’이 우선이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진중권은 그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자기와 같은 편이었던 사람도 매섭게 비판하곤 했다. 오랫동안 안티조선을 함께했던 강준만과의 논쟁이 그랬고, 이후 월간 아웃사이더에서 자신과 함께하던 지식인들과 사실상의 결별을 할 때에도 그랬다. 그를 한때 이성의 화신이라느니 논리기계라느니 하고 불렀던 이유는 그가 정말 모든 것을 확고한 이성과 물샐 틈 없는 논리로만 판단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벌이는 ‘언어게임’의 영역에 들어 있지 않은 모든 것을 배제하고 게임에만 충실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 같은 진중권 키드들이 그의 활동을 통해 깨달은 미덕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 나름의 방식대로 이 미덕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공적 영역에서 다른 사람을 감상적으로 판단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정에 이끌려 내 정치적 신념을 바꾸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모두가 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 어떤 것이 혹시 집단적인 감상의 산물이 아닌지를 끊임없이 의심했다.

내가 모든 것을 잘했다고 자부할 수 없듯이 진중권도 자신의 원칙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을 게다. 어쩌면 이번 사태가 그런 종류의 것일지도 모른다. 글로는 그를 10년 넘게 바라보았지만 일면식이 없는 내게 있어서는 진중권이 같은 편이 아니라는 것에 슬퍼할 필요는 없다. 그는 또 앞으로 생길 어느 사안에 대해서는 나와 같은 입장을 가질 것이고 때로는 다시 아닐 것이다. 어쨌든 이제 진중권 키드가 할 일은 사람들에게 ‘말’에 대해서만 판단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이야기하는 것이다. 백전노장은 사라져도 싸움은 계속되는 것, 어느새 30대가 된 우리가 20대에 깨달은 것들을 이제 뒷세대들에게도 전해주어야 한다. 그런 감상에 빠져 있자니 불행한 우리의 시대가 열리는 서막인 듯 해 깜짝 놀란다.

* 이 글은 주간경향에 게재되었습니다. :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209041608381

댓글 '1'

Q

2012.09.08 15:44:54
*.134.84.197

침묵하는 진빠 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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