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유시민은 특정한 성향을 가진 집단이 있었고, 이들이 ‘노무현’을 계기로 삼아 정치성을 분출하기 시작했다고 봤다. 중요한 대목이다. 투박하게 정리하자면 유시민은 2000년 이후의 정치적 사건들인 안티조선 운동, 여중생 사망으로 촉발된 촛불 시위, 노무현 바람, 탄핵 반대 촛불 시위, 이명박 당선,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를 주도하거나 관망했던 새로운 정치적 주체들에 대해 이야기한 셈이다. (...) 그렇다면 노사모를 만들어 냈고, 혹은 나중에 노사모에 합류하고, 혹은 훗날 노무현의 가장 강력한 지지층이 된 이들의 성격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 일단 유시민의 좀 더 정교한 설명을 들어보자.
이들을 학력, 소득, 세대를 통해 규정하는 유시민의 방책은 유효하다. 그것은 당시의 여론조사 결과에 근거를 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정서적으로 볼 때 그들은 자신들이 새로운 시대를 주도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졌던 듯하다. 학력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은 한나라당 지지층에게는 우월 의식을 지니면서도, 지식인들의 기득권(?)을 경멸하는 태도를 취하게 했다. 이를테면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무식하다고 공박하는 반민중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것도 그들이지만, 지식인들이 글을 알아먹게 쓰지 않는다고 인터넷에서 비난하는 민중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것도 그들이었다. 즉, 유시민이 구별해 낸 ‘노무현 지지층’은 스스로 ‘지식인’도 아니고 ‘민중’도 아닌 그 중간에 있는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라 생각했고, 지식인과 민중 양쪽에 대해 우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들의 ‘상식’이 ‘보통 사람’의 그것이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엘리트와 민중을 동시에 경멸한 셈이다.
정치의식 면에서도 그들은 역시 이와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유시민이 혹은 유시민 이전에 당대의 ‘노무현지지’ 논객들이 ‘발견’해 낸 이 새로운 정치적 주체들은 재벌을 옹호하는 수구 세력도 싫어했지만 기존의 노동 운동 진영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즉 이들은 부르주아(자본가) 계급 의식에 대해서도, 프롤레타리아(노동자) 계급 의식에 대해서도 배타적인 태도를 취했다. ‘보통 사람’과 ‘상식’의 역할은 여기서도 분명했다. 여기서도 그들은 중간자적인 입장을 취했다. 노혜경 시인은 참여정부 출범 이후 노무현의 정책에 비판적인 자세를 취한 진중권을 비롯한 진보누리 논객들과 논쟁을 벌이며 그러한 의식을 명시적으로 천명했다. 다음은 서프라이즈 칼럼방에 2003년 7월에 올라온 글이다.
혹자는 세대와 지역에 주목하여 이들을 ‘수도권 386’이라 칭한다. 물론 이것은 사회학자들이 통계적으로 검증한 적이 없는 명칭이며, ‘민주당 지지층’을 ‘호남’으로 표현하는 것만큼의 단순화의 우려가 있다. 더구나 당시 노무현 열혈 지지층 중에서는 20대가 많았고, 그 20대들 중 일부는 오늘날 30대가 되어 ‘20대 보수화’를 비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의에는 나름의 미덕이 있다. ‘수도권’이라 함은 이들이 지역주의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들이었음을 뜻한다. ‘386’이라는 규정은 세대의 규정이기도 하고, 사회운동에 대한 태도의 규정이기도 하다. 광주 경선 이후 하루 1만 명씩 노사모 회원이 유입될 때 가장 일반적으로 볼 수 있었던 게시물은 이런 것이었다.
이 진술을 하나의 표본으로 받아들여도 좋다면, 이들의 정서는 기존 정치권과 운동권에 대한 불신을 기반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의 진술은 학창시절에 열심히 운동을 했던 ‘386 운동권’의 진술과도 사뭇 달랐다.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 있으면서도, 적극적인 참여는 부담스러워 했던 과거에 대한 진술이 많았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자신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도 도덕적 잣대를 가지고 접근할 수 있는 어떤 대중적인 운동이었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운동권은 다음과 같은 요소로 구성되어 있었다. 자신의 몸을 불사른 전태일과 그 계승자들, 군사 정권의 탄압을 받으며 글을 썼던 리영희와 같은 지식인들, 마르크스주의 이론으로 한국 사회를 판단하던 이론가 대학생들, 대학을 나와 공장에 침투해 노동자를 계몽하려 하던 활동가 대학생들, 그리고 현장 노동자 출신으로 노동조합을 건설하려던 활동가들……. 엄혹한 사회의 반영이긴 했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소박한 잣대로 접근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진보’라는 가치는 한마디로 말해 평범한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무엇이었다.
그러나 노무현은 단순명쾌한 언어로 진보주의자와 시민들 사이에 존재하던 벽을 넘어섰다. 그는 요트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희생했는지를 강변하는 게 아니라 운동은 했어도 돈은 좀 있다고 얘기했다. 장인어른의 빨치산 경력이 언급되었을 때 노무현은 “그래서 저더러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라고 대꾸했다. 좌파들이라면 “연좌제는 그릇된 것입니다. 그것은…….”으로 시작되는 답변을 했으리라. 노무현은 제 자랑도 하고 아픔도 털어놓으면서 윤리의식을 지향했다. 멋있는 정치인이었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은 노무현에게 자신의 죄책감을 사면받고 다시 정치를 얘기할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노무현을 상징하는 구호는 ‘상식’ 혹은 ‘희망’이었다. 거대 담론이나 거창한 자기희생을 말하지 않고 각자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덕성으로 공공선을 지향하려는 사람들이 따르게 된 구호였다.
그 ‘집단’이 ‘노무현’에게 그토록 열광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집단은 노무현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히 확립하고,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셈이었다. 그렇다고 그 집단이 오로지 노무현하고만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 집단에 이름을 짓기가 어려웠다. 유시민은 2002년 당시 이들을 다소 애매하게 ‘신주류’라 칭했다. 한편 이들은 스스로를 ‘시민’ 혹은 ‘순수한 시민’이라 불렀다. 하지만 이것 역시 적당한 호칭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시민은 사회의 특정한 부분을 칭하는 말이 아니라, 고유의 권리를 가진 사회 구성원 전부를 칭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노무현과의 관계에만 포박되어 퇴행적인 행태를 보일 때, 진보주의자들은 이들을 비하해서 ‘노빠’라고 불렀다. 그런가 하면 이들이 특정한 의제에 맞춰 대규모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자 진보주의자들은 그 혁신성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며 이들을 ‘촛불 시민’이라 부르고 민주주의의 희망으로 축성했다. 문화평론가 이택광도 이들에게 이름을 부여하기 위해 고심했는데, 계급론의 용어를 차용하여 중간 계급Middle Class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하고 ‘계급 의식 없음’에 착안하여 중성 계급Neutral Class이라 칭하기도 했다. 그 이름이야 어찌 됐든 우리는 그들의 특성에 대해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들의 숫자다. 나는 그들이 많은 숫자이긴 했지만 기존의 민주당 지지층만큼 많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조금 단순하게 생각해서 민주당 지지층을 25%라고 해보자. 그리고 노무현 지지를 선도한 이 집단을 10%라고 해보자. 둘이 합쳐야 겨우 35%다. 2002년의 투표율이 70%였고 그중에서 노후보의 득표율이 48.9%였으니 위의 가정이 산술적으로 오류를 범하지는 않았다. 10%의 노무현 지지층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 자신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리고 후보가 노무현이 아니었다면 이 선거에서의 승리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한편 25% 민주당 지지층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는 자신들이 노무현 후보의 ‘대주주’였다. 둘 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이 두 집단이 노무현에 대해 가진 생각의 차이는 훗날 참여정부의 통치를 불안하게 만드는 큰 요인이 됐다. 민주당 분당, 열린우리당 창당, 대통령 탄핵으로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의 뒷배경에는 이 두 집단의 대립이 숨어 있었다. 그것은 오늘날의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의 대립으로까지 이어지는 현재 진행형의 역사다.(...)
- <안티조선 운동사>, p243~251
소위 '강남좌파'라 칭해지는 이들을 분석하려 한다면 그냥 이 설명을 그대로 가져다 써도 될 거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엔 유시민의 '신주류'가 십년 지나서 된 것이 '강남좌파'다. 굳이 양자 간에 차이를 찾고자 한다면 그 사람들이 십년 동안 돈을 좀 더 벌었다든가, 일부 20대와 10대(386세대의 자녀들도 포함된)들이 그들의 특성을 공유하게 되었다는 것 정도가 있을 것이다.
물론 왜 예전에는 명확한 이름을 가지지 못했던 이들에게 '좌파'란 이름이 붙게 되었는지에 대해선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하다. 이종석이 그 불편함을 고백하는데에서 보여지듯, 원래 한국 사회에서 '좌파'는 배제의 어휘였다. 이를테면 1998년의 최장집 사건 당시 조선일보가 최장집을 '좌파'라고 주장했을 때, 최장집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2011년의 조국은 "나를 강남좌파라고 불러도 좋다."고 얘기한다.
일단 이 사이에 하나의 간극이 있다. 이 간극은 어떻게든 설명되어야 하는데, 일단 나의 가설은 이렇다. 2010년 지방선거 직후 쓴 글의 일부다.
1997년부터 2007년 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다. IMF 사태라는 국가적 위기상황 속에서 극적으로 집권한 민주화 세력은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스스로의 정체성으로 삼게 되었다.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세력의 경제정책이 역설적으로 독재정권의 그것보다 덜 민중적이게 된 역전현상이 벌어졌다.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던 좌파들은 1991년 소련 붕괴 후 우왕좌왕하다 합법적 좌파정당 운동을 시작했다. 민주노동당의 창당과 성장은 ‘좌파=친북’이라는 연결고리를 완화시키고 ‘좌파’란 단어의 시민권을 되찾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했을 것이다. 한편 한나라당은 지극히 보수적인 집권당의 경제정책에 대해서까지도 ‘사회주의적’이란 수사를 남발하면서 이념에 대한 혼동을 조성하는데 지대한 기여를 했다. ‘좌파’란 말은 예전보다 덜 위험한 말이 되었지만, 점점 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 되어갔다.
민주당의 보수적 경제정책에 과격하게 가속 페달을 밟은 듯한 이명박 정부의 미칠듯한 반서민 정책은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 한나라당은 김대중과 노무현을 ‘좌파’로 몰아붙인 대가로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대한 반감은 또 한 번의 역설로 돌아와 민주당이 스스로를 ‘좌파’로 규정하게 했다. 사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시대에 그들은 ‘좌파’를 철지난 유행으로 규정했더랬다. ‘신자유주의’라는 말은 좌파 꼴통들이나 쓰는 어휘로 치부했더랬다. 그런데 그들이 요즘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말을 한다. 경기도지사 후보 토론회에서 진보신당 심상정 후보는 민주당 김진표 후보에게 물었다. “스스로를 좌파라고 생각하십니까?”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대표적인 보수 경제관료였던 그가 대답했다. “예.” 세상이 뒤집혔다.
선거 직후 어떤 대학생들의 대화를 들었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이겨서 다행이야.” / “왜?” / “한나라당은 우파고 민주당은 좌파잖아. 좌파가 승리하면 사회가 어지럽거든.” 이들의 대화는 어찌해서 한나라당 지지자와 민주당 지지자들이 모두 “민주당이 좌파다.”란 명제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한마디로 말하면, 민주당이 좌파라야 한나라당도 존립근거가 생기고 민주당도 존립근거가 생긴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민주당으로의 폭력적 쏠림을 방치하는 ‘야권단일화’를 논할 수 있고 노회찬이 완주하면 진보신당 홈페이지를 폭격하고 노회찬 정계은퇴 서명운동을 전개할 수 있다. 공당의 대변인이라는 사람이 떳떳하게 다른 정당 후보의 사퇴를 촉구한다. 이 모든 것들이 가능한 세상이 되었다.
조중동은 언제나 좌파의 준동을 두려워한다. 그들이 말하는 좌파는 “사회질서를 교란하고, 체제에 위협이 되며, 대한민국을 언제든지 조선노동당에게 팔아먹을 준비가 되어 있는 나쁜 놈들”이다. 조선노동당 문제를 제외하고 생각하면, 꽤 멋있어 보인다. 그런데 진보신당 당원이란 나란 사람은 그렇게 위협적이고 무시무시한 존재일까? 내 꼬라지를 돌이켜보니 한숨이 나온다. 민주당이 좌파가 된 세상에서, 좌파정당의 지지자들은 한줌도 안 되는 일종의 오타쿠 집단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진보신당이 국민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고 규탄한다. 국민이란 건 민주당 지지자들만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란 정치적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보편적인 수사인데 말이다. 정상인의 말로 번역하자면, 그들은 노회찬에게 진보신당 당원 말을 듣지 말고 민주당 지지자 말을 들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는 거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요구가 가능해진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미 답을 말했다. 민주당이 좌파니까.
아무래도 사람은 자신이 죽여버린 것에 대해서 환상을 가지는 모양이다. 가령 영화 <아바타>를 보라. 인디언과 숲을 죽여 버린 인간이 첨단 테크놀러지로 그것을 가상적으로 재현하는 것을 볼 수 있지 않던가. 좌파가 아닌 사람들이 ‘좌파’라는 말을 멋으로 알고 유행처럼 그것을 걸치게 된 현실은 좌파정치의 진정한 죽음을 의미한다. 그 지지자들에게 ‘진정한 보수’이기도 했고 ‘진정한 진보’이기도 했던 한 매력적인 정치인의 죽음은 그를 따르는 정치세력을 부활시켰고 그들이 좌파를 ‘대체’하게 했다. ‘좌파’란 것이 ‘사회에 있어서는 안 되는 위험한 것’으로 치부되었을 때는 차라리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민주당이 경제정책의 뚜렷한 변경없이 손쉽게 ‘좌파’라는 구호를 접수한 이 사회에서 심상정은 ‘국민’의 뜻을 떠받들어 왕년의 두 전직 대통령처럼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정치’를 이야기한다. 도대체 좌파는 어디에 남아있단 말인가.
- 한겨레 훅 : <민주당이 좌파다> http://hook.hani.co.kr/archives/5377
사실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이 제각각 반성하고 유럽식 사회국가 노선으로 통합하는게 좋다."는 식의 주장은 좀 하나마나한 말이다. 우리는 이 말을 "민주당이 반성하고 유럽식 사회국가를 (혹은 복지국가 노선을, 혹은 미국 민주당을) 지향한다면 야권 단일정당을 추구할 수 있다."로 바꿀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건이 올바르다면 이 주장은 가치를 지니지만, 전건이 실현이 안 되는 상황에선 하나마나한 말이다. 그리고 이런 주장들은 왠일인지 어느 순간엔 바로 그 전건을 실행시키기 위해서 (군소정당들이 유럽식 사회국가 노선에 합의하기 위해서, 혹은 민주당이 미국 민주당과 같은 자유주의-사회주의 정당이 될 수 있도록,) 후건을 실행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뒤집힌다.(...통합해야 한다.)
그런데 이 정치적 주장의 타당성과는 별개로, 진중권이 과거의 '신주류'와 현재의 '강남좌파'들을 별도의 집단으로 보고 있다는 점은 의아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진중권은 양자를 별도로 보고 있다기 보다는, 그냥 그들이 어떤 집단인지에 대해 별다른 고민이 없어 보인다.) 진중권이 진보신당 독자파에 대해 '명령'을 받들라고 말하는 '그들'은, 과거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던 진중권에게 권영길을 포기하고 노무현을 지지하기를 명령했던 바로 그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민주노동당에게 교차투표하여 2004년 총선에서 전국구 의원 8석을 얻게 만들어준 것도 아마도 그들일 것이다.)
즉 진중권은 과거 그들의 명령을 받들지 않았던
이와 별개로, 십년 전의 상황을 정리하면서 우리는 "노무현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노무현도 처음엔 미미했으니 유시민도 곧 대통령이 될 수 있다."와 같은 주장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도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도 민주당에게 무언가 요구를 하는 것은 1) 한나라당을 개혁대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2) 영남인구가 많아서 한나라당에겐 영남 지역기반이 훌륭한 자산이 된다. 물론 세월이 흐르면서 수도권과 충돌할 때가 있기는 하지만... 정도의 이유 때문이겠지요. 물론 이 정세파악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서 글쓴이가 '견상도'라서 그렇다고 단언하실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dd
그리고 열린우리당 시절에 구민주당 세력은 무현이랑 시민이 일파가 다 쫏쳐냈잖아 정동영의 힘이 해찬이랑 광재, 명숙이 시민이보다 못했는데 ㅎㅎㅎㅎ
누가 뭐랴ㅐ도 참여 정보 보수화의 공은 우리 권양숙이 아들처럼 생각한다는 광재랑, 노무현이 공을 들여 데려오신 삼성가 일원 홍석현, 그리고 우리 위대한 경남의 도지사 김혁규 행님이시지ㅎㅎㅎ
제 입장을 요약하자면 민주당 리모델링?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참여당 계열 인사들이 어째서 민주당과 끝내 함께 할 수 없다고 하는지를 따져보자면 결국 탄핵과 후단협에 대한 원한, 적개심 차원의 감정적 문제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일어난 일안가를 따지다 보면 대북특검이 나오겠고, 그 원인을 따지다보면 노무현의 경선 직후 상도동 방문까지도 또 거론이 되겠지요.
참여당 지지자들은 다른 어떤 이유를 들려고 애쓰겠지만 여태까지의 경험상 따지고 들어가보면 다 지지부진하고 근거가 허약한 것들이었습니다. 사실 위의 ".."님의 논변도 딱히 새로울 것 없다고 보구요.
구민노당이나 현재의 진신당이 민주당과 통합할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합니다. 저는 희망하지만, 상대가 설득이 안 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죠. 그러나 그런만큼, 우리당에서 보수주의적 경제 정책을 펼쳤던 사람 중 하나인 유시민이 민노당과 합당을 하겠다는 건.. 솔직하게 말하자면 유시민 스스로가 공격대상으로 삼았던 그 어떤 야합과 비교해서도 질이 높다고는 할 수 없은 것 같습니다. 저는 명분과 실리를 둘 다 잃는 길로 봅니다.
본문은 한나라당 지지층도 민주당 지지층도 아닌 모종의 진보적 지향을 가진 유권자층의 형성과정에 대한 설명이었기 때문에, '노무현 지지세력'의 착각(?)이란 문제에 대해 쓸 필요는 없었습니다. 저 지지층은 민주당 중심의 야권단일 정당에 찬성하는 이, 국민참여당 지지자, 민주노동당/진보신당/창조한국당에 표를 던지는 사람을 포괄하고 있다고 생각되거든요.
hwal-in
저는 저 두 집단이 살짝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전자가, 20대 운동권 '따까리'의 추억을 먹고 사는 존재라면, 지금의 '강남좌파'는 '웨스트윙'을 보고 감동을 먹는 사람이라는 느낌? 물론 교집합은 있지만, 초점이 다르다는 거죠. 근거 같은 건 없습니다.
여튼 확실한 건, 민노-참여-진보가 합쳐져도 저 집단을 잡을 수는 없을 겁니다. 이 셋을 합쳐도 웨스트윙의 그림은 도저히 안 그려지거든요-
그런 면에서, 지금의 통합 논의가 무의미하다는 윤형님의 의견은 정곡을 찌르고 있다고 봅니다. 그냥, 나이가 드는데 스스로 변화시킨 건 없고, 지금이 꽤 큰 기회라고 느껴지니초조한거겠죠. 진중권씨나, 심상정씨나. 모두. 윤형씨가 저랑 동갑인데, 우리도 20년 후에 저 정도 기회가 오면 저럴지도 모르죠-하핫.
렌즈
한윤형빠-이챠
자신의 태도와 공격성에 대한 사과는 사과대로 했지만, 뻔히 서로 누군지 아는 사람을 '어떤 사람들' 같은 걸로 안 보이게 막아 놓고, 툭툭 건드리면서, 글 앞 쪽에 나온 '민감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이것은 논쟁을 위한 것은 아니다'가 글 읽는 내내 계속 상기되니, 귀여워보여서 불편했다. 차라리 대놓고 욕하고 조롱을 하는 게 더 깔끔하지 이건 더 비겁한 방법이다.
최소한 박가분의 바로 전 글과 이번 글은 큰 틀에서 입장 정리가 된 것 처럼 보인다.
(둘 다 진짜 운동이다. 그런 운동이 가짜라거나 하며 폄하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그 모든 문제를 가능하게, 탈근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전지구적 자본주의고 따라서 여기에 대한 투쟁은 다른 개별적인 투쟁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개별적 운동만 있다는 것은 속임수고 반자본주의가 근본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도 추상적이고, 각자의 종교적 황홀경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전망과 진정성을 체험하는 저 퇴행적인 태도들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자유 평등 해방에 관한 변혁적 전망을 검증할 수 있는 주요한 정치적 장소들에 대해 이론적으로 구체화해야한다..... 정도?)
그리고 나머지 번호 붙인 개별 부분도 2번, 4번은 나도 잘 몰라서/혹은 나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들이 많을테니 큰 틀에서 내가 걸어 볼 건/걸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어쨌든 이 글을 지난 글과 한윤형의 글에 이어서 보면, 그들의 지난 글이 말마따나 '최소한 얼마나 못 쓴 글인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얼핏 찾아봐도 '그냥 못썼다.' 그 정도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지난 글이 이번 내용을 제대로 표현해 내고 있지 않다는, 계속 제시 된 문제도 문제지만. 원글보다는 그 뒤의 대응이 뚜렷하게 정리 된 입장이 있는 사람의 반응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걸 자기 표현 능력의 무능으로 봐야 될지 그냥 말부터 뱉어놓고 사후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봐야할지 모르겠지만. 평소 논리적 정합성으로 자기 의견을 잘 표현해 왔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면 후자에 가깝다 의심되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말했듯이 전체적으로는 맞춰봐도 맞지도 않고.
이해를 하려고 노력하려면 관심법을 쓸 수 밖에 없는 걸 써 놓고, '나 지금 관심법 쓰고 있다는 건 아는데. 니들 글이 워낙 그 모양이라. 쓴다.'라고 선언한 다른 이의 글에 대해서 '조롱하고 관심법 쓰는 거 말고는 하는 게 없는 글들 밖에 못봤다는'라는 말을 하면 어쩌라고.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군. 애초에 좀 잘 써주시든지요. 당신이 거울을 볼 때 거울에 비친 게 흐트러져 보이는 이유는 뭘까요?
만일 내가 박가분과 앞으로 뭘 못해나가겠다고 생각한다면 그의 공격적인 발화나 태도에 의해 받은 상처 때문이 아니라. 싸우지도 않고 싸우지 않지도 않겠다는 이상한 태도 때문일 것이다. 논쟁이나 키배가 의무는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면 더 하지 않겠다고 선언할 때 제대로 뒤로 빠져야 한다. 하나하나 뒤집으며 까기는 귀찮거나 무서운데, 혹은 불가능한데. 자기 잘못은 인정하기 싫고, 자기 잘못을 지적한 상대방은 잘못이 있든 없든 까고는 싶다는 상대와 뭘 같이 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스스로가 혁명론자인지는 애매하나, 나 역시 혁명에 대해서 누구보다 심각하게 고뇌하고 고려하는 사람으로서, 앞으로 저들과 큰 연대를 통해 뭔 일을 같이 해 나갈 수야 있겠으나, 저들이 더 발전하기 전까지는, 소위 '슈가분'으로 전면에 드러난 저 공동체에 대해 부당한 환상과 기대들을 품지 않기로 했다.
새침한 이모티콘을 쓴 것으로 보아(^^;;), 혹시 농담으로 한 말이라면 미안하지만. 한윤형의 해당 글은(혹은 누군가의 해당 글) 결코 박가분이 말하는 것처럼, 심리를 알 수 없는, 그들의(슈가분) 글이 문제제기가 의미 없다고 말할 뿐인, '장문의 의미 없는 글'이 아니라.... 그들의(슈가분) 글이 고정 된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는 이유로 장문이든 단문이든 매우 의미 있는 활동이었는데. 그것은 그들(슈가분)의 첫 몇 개의 아스트랄한 글을 두고, 일정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며, 안 이어지는 문맥 사이를 늪속처럼 헤매야만했던 일부 불운한 사람들을 수렁에서 건져내고, 애초에 그 글을 작성한 이(슈가분)에게 제대로 된 정리를 해야만하도록 압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윤형은 (크게보자면)그 글이 문제제기가 의미 없다는 말을 한 게 아니라, 전개가 그 모양이면 억지로 호의적으로 봐줘도 두 오류 중 하나로 결정 해야만 하는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는 텍스트라고 했다.(그 텍스트를 쓴 의도나 나중의 설명의 의도가 뭐든간에 사람은 그 텍스트와 설명만 있을 때 그 텍스트와 설명만으로 의도를 판단한다 - 의도야 당연히 별개로 있겠으나 관심법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나도 그 글이 둘 중 어떤 식으로 망한 건지 해명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번 글에 그런 말은 없고 그들이 쓴 첫 몇 개의 글은 한윤형의 정합한 지적에도 불구 그런 지적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언급되고 있다.
혹시 지난 삽질에 대해서 인정은 하지만 언급을 안하고 그냥 다음 글을 쓰거나 할 때 언행과 태도로 자신이 그 문제에 대해 이미 인지했음을 보여줄 수도 있다고 본다. 잘못했다는 걸 아는데, 아는 사람에게 자꾸 자기가 잘못했다고 선언시키고, 자꾸 지적한 거 또 지적하고 이런 게 별로 좋은 문화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글을 보면 별로 그런 생각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기본적인 게 무너져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 그의 반응은 "의미 없는 장문의 글" 인데. 참 누구 말처럼 당당함이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솔까, 난 조갑제를 볼 때도 좀 그런 느낌이 들곤 하는데....
한윤형의 해당 글은 단순하고 논지가 확실한 글인데 시비투나 조롱이 섞여 있다고해서 개싸움의 유도가 되진 않는다고 본다. '혹시나' 그렇게 생각하는데다 '만일' 그것을 증명하고 싶다면 한윤형이 햇님반 아이처럼 곱고 예쁘게 말 안하고 시비를 걸어서 예쁘게 말할 때의 가정 될 수 있는 문장보다 논지가 흐트러지거나 더 잘못 된 부분이 뭔지 말을 확실히 해야한다.
한윤형빠 입장에서 이 부분이 제일 억울한데. ㅋㅋ
당 글의 전체 맥락과는 별 관계도 없어 따로 빼서 말해도 될 초월론적 논쟁의 정확한 정의 가지고 ㅋㅋ 아놔. 하필 이 타이밍에 그거 하나 끌어가지고 와서 허영심 들먹이며 찌질대기는...... ㅋㅋㅋ 내가 보기에는 한윤형은 아직 그 나이 먹도록 학부도 못 뗀 반편 철학도라 일반적인 용법으로 초월론 + 논증 해가지고 쓴 다음에 따로 칸트 들고 와서 찌질 댄 거 같아 보이는데. 이건 뭐, 나의 착각일 수 있으니 넘어가고.
이게 전체적 논증에는 별 문제가 없다는 건 박가분 입으로 말했고. ㅋㅋ 이건 딱 이 용어의 오용 이것 하나 만으로 떼서 보면(박가분이 언급한 용법이 정확한 것이라 칠 때. 한윤형이 그걸 처음에 거부하며 누굴 가르치려 든 적도 없다.) 슈리나 한윤형이나 실제 그렇게 썼고 그렇게 틀린거라 하더라도 용법의 착각 정도로 볼 수 있지 않나. 이 정도에대고 허영심 운운하는 건 정말. ㅋㅋ
그리고 굳이 둘 다 허영심을 가졌다는 걸로 본다 치면, 슈리의 문제가 더 큰 이유는 해당 글에서 글 전체가 그 꼬라지라서 그 용어의 오용 하나만이 지적할 거리는 아니라는 거지. ㅋㅋㅋ 거기다 글 쓰고 난 다음에 지적하자 대응은 어땠지? 그 다음의 대응과, 그 다음의 대응은? 슈리 본인이 잘못했다고 인정했기에 계속 더 말하기도 미안한데. 자꾸 말하게 만든다.
한윤형은 글 전체로 볼 때 해당 글 외에도 대개의 글에서 제일 쉽고 평이하고 앞 뒤에 논리 뿐 아니라 읽는 쪽의 흐름에 맞도록 쓰려고 노력하는 사람 중 하나인데. 여기에 대고 용어하나 놓고 범주 들먹이며 슈리보다 한윤형이 더 추가 된 허영을 가졌다는 식의(혹은 나는 한윤형이 더 추가 된 허영을 가졌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라는)뉘앙스를 포함하는 데에야 박가분의 의도를 너무 뻔히 볼 수 있지 않나? 이거야 말로 그 현상 자체로 한윤형이 허영으로 그 일을 했다고 말하면 유사 관심법이다. 단순 오류일 수도, 인용의 잘못일 수도, 일상적 용어의 합성 후 같은 철학적 용어가 있어서 잘 모르고 따 왔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글 전체에서 칸트라는 단어는 하나 들어간다. 너도 똑같은 짓을 했다는 걸 보여줘 신경 한 번 건드려 보겠다는 거 아닌가?
하지만 또 그렇다쳐도 그게 똑같다면 이건 근본주의적인데? 하나 잘못하나, 전부 말아먹나 다 이단이라는 건가? 좋아. 관심법이다. 인정한다. 아니라는데 어쩌겠나. 워낙 눙치며 까는데 나도 관심법 좀 써 보자.
"그래서 싸울거면 싸우든지." 여기에는 어떠한 공격적인 의도도 없음을 알아줬음 좋겠다는 무슨.ㅋㅋ
딱봐도 제대로 걸 건 없고, 이상한 거 하나 가지고와서 시비구만. 뭐, 아니라 하시니. 내가 심증만 갖고 이 이상 뭐라고 할 수도 없는 부분이고.
보면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니까. 이 정도만 말하면 더 뭐라 안해도 글 읽는 사람들이 알아 판단하겠지.
너무 의도가 훤해서. 내 보기에는 ㅋㅋㅋ 여기가 이번 글에서 찌질 갑인 부분. 물론 이 글에서도 찌질 갑인 부분이다.
새 논쟁은 피하고 그러면서도 대명사 뒤에서 조롱은 다 하고, 이런 약골에 새가슴으로 참 반자본주의 혁명 잘도 되겠네. 박가분은 매우 급진적 위치에서 글을 쓴다고 자타가 생각하는데. 그 포지션에서 입다물고 눈치 보는게 아니라 제대로 한번 살아갈라 치면 여기저기서 한윤형이 거는 시비나 조롱 수준은 쌈싸먹게 덤빌 놈들이 얼마나 많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리고 한윤형보다 개별분야에서 더 배워서 기본만 걸고 넘어가 주지 않는 놈들도 많을테고.(실제로 이번에도 맑스주의 잘못 써서 당했고.)
우리가 뭐 신도 아니고 그때그때 실수하는 건데. 실수 하고 난 다음에 인정하는 각도와 타이밍이 정확하고 빠를 수록 자기와 자기 발전을 위해서 좋다고 생각한다. 맑스주의 삽질은 인정하고, 그거보다 글에서 더 기본적인 부분은 '그래, 좀 맛간 부분도 있었지. 그런데 이렇게 더 깔끔하게 정리 됐잖아.' 식의 인정이나 수용이 안되나? 끝까지 애초에 잘못을 저지른 의도도 허영의 크기도 다르기에 말도 안되는 거 하나 가져와서 "장문의 의미 없는 글이다." '너도 똑같은 놈이야.' 식의 공격 밖에 안되나. 조롱투 때문에? 만약에 상대방이 옳아도 말하는 투가 기분 더러웠다면 스스로에게 솔직하게 그냥 딱 그만큼만 말해야 한다. "말은 옳다지만 이러저러 고치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니 이번 태도는 기분 더러웠다."고 말하면 되고. 만약에 아직도 상대방이 틀린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다시 말하지만 끝까지 논쟁을 하고 싸우는게 옳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하나 받아서 싸우기 싫다면 애초부터 시비 걸지 말고 빠져야되고.
이 모양은 논쟁을 거는 것도 아니고 안 거는 것도 아니다.
슈리가 저지른 실수가 그의 논지에 있어 치명적인가? 라는 부분에서 '노동자 운동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고 슈리가 말함.'에 관한 조명만 있는 이 글은,
"슈리 님과 그의 글을 (부분적으로) 옹호하는 박가분 님은 슈리 님 글에 대한 비판 가운데 오직 “슈리는 맑스의 이론을 오해했다.”는 측면의 것만 받아들이고 있다. 하긴 맑스주의로 사태를 재단하려던 사람이 맑스주의에 무지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본인에게 돌아갈 정서적 데미지만 보면 그 지적이 가장 중요해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내겐 그 부분이 사태의 핵심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슈리 님의 글이 활용한 근거가 모두 타당하다고 인정할 때라도, 그의 글은 논증적인 부분에서 좌충우돌하고, 결과적으로 ‘무의미’를 발생시킬 뿐이라는 지적을 하였다. 그런데 슈리 님이나 박가분 님이나 그 사실을 수용할 생각은 없는 것 같다."
라는 한윤형의 지난 글 첫 언급 이후로 발전이 없다. 한윤형은 지난 글을 살짝만 고쳐 거의 다시 들고와도 될 지경이다.
흠....
긴 논쟁은 싫고, 본격적으로 삽질을 인정하기도 싫고, 그렇다고 인정을하되 그냥 인정을 언급만하지 않은 것 뿐이라고 보기에는 반성도 변화도 없는 듯한 태도의 시비와 보복성 발언이 새 글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니.....
사실 인터넷에서 토론의 태도야 말만 통할 정도고 쌍욕만 아니면 지적하는 사람이 적다. 하지만 서로 기본적인 것에 합의가 안되면 끝이다. 정작 지금 말한 그 논리가 처음에 말하는 그 논리가 아니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안하면서 태도가 공격적이었던 것은 직접 자신의 잘못을 짚어 말하며 고개까지 숙여 사과한다는 것은 사람을 욕해 미안하지만 말 씹는 건 괜찮다는 건가? 내 태도는 까여도 좋지만 어쨌든 난 무오류라는 것인가?
이건 뭔 보는 사람 헷갈리는 포지션인지. 토론에 있어 어느 쪽이 더 근본적인 잘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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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고보니 삽질이 많아서 그냥 대충 덜어냄.
최종본.
박가분 블로그는 비로긴인간 차단 돼 있어서 어차피 여기 쓰면 볼 거 같아서 여기서 함.
박가분 님, 나는 밥벌러 가는데. 답글 남기시면 일주일 내에 한 번 확인하고 답함. 그 시간 넘기면 저 아주 오래 못 올지도 모름. 걸어놓고 시간 제한 미안하지만 일주일은 충분하다고 봄. 어쨌든 답글 남기면 재답글 꼭 하겠음.
그리고 한윤형 너 이 새끼. 사랑한다. 나 게이 아님. 안녕~.
송한테도 안부 좀.
이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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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평론과 초월론적 논증의 댓글을 다시 읽어보니
한윤형이 그 단어를 끌어 쓴 동기가 지적 허영과는 별 관계 없거나 아예 무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슷한 지적을 받았으나 끌어쓴 의도를 설명하는 대응이 매우 겸손하고, 칸트의 그것과 관계 적은 것, 글의 내부의미로 글의 사후 의미 수정을 유도하는 것에서 슈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도 어떤 더 큰 문제가 있지는 않은가 질문(아, 질문만큼 겸손한 행위가 있으랴.)하는 모습에서 나는 책 팔려고 이렇게까지 겸손한 척 해야되나. 진짜 애쓴다. 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게하고 나서도 논지 자체에는 영향이 없으나 유비가 개념이 비추어 적절하냐에 대한 판단을 다를 수 있다는 말까지 남긴다. 까일까봐 무서운지 일말의 까일 여지도 남기지 않는 치밀함을 보라. 이렇게 겸손한 한윤형에 대한 박가분의 태도를 보자.
이 시점에서 다시 박가분의 본문 세번째 단락을 읽어보면 우리는 선연히 드러나는 박가분의 악의를 경험 할 수 있다.(는 반 농담이고) 일단 박가분도 나처럼 본문 쓸 때 댓글은 안 읽은 듯.
애초에 표면의 일부만 같다고 전후 이어진 사정은 하나도 보지 않고, 둘 다 같은 허영이라는 게 할 수는 있는 말이겠지만. "장문의 무의미한 글"과 연결해 보면 참 거슬린다. 위에서는 꼴받는다고 너무 막했고, 제대로 하자면 이 정도 지적할 수 있을 듯.
표면과 글쓰기 시작한 시점의 허영이 둘 이 비슷한 형태였더라도. 이게 진짜 같은 레벨의 허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하지만 이 글을 읽으면 사람에 따라 그렇게 생각할 수는 있을 거다. (대체 어디로 읽는 사람을 유도하고 있는 거임?) 이건 진실을 말하면서 유리한 것만 말해서 읽는 사람의 심리를 유도하는 방식인데, 보수고 진보고 기자들이 잘쓰는 스타일이다. 박가분이 워낙 학적인 인물이다보니 이런 쓸데없이 정치적 키배적인 부분은 모르고 이랬기를 바란다.
사실 악의적인 인물이라면 나중에 "자세히 읽었어야지. 왜 할 수 없는 착각을 해." 정도 말해주면 퍼펙트.
'슈리가 지적 허영이 좀 있었더라도 그 시점에서 정신차리고 제대로 논리방어 했으면 이 지경까지 안 왔지. 이 부분은 왜 쏙 뺄까나? 하는 거라곤 선생짓하며 철학 가르치거나, 예예. 제가 틀렸습니다. 니들이 이겼다치자.(그리고 지금은 돌변) 두 개 뿐이었는데. 어쩌라고? 딱 이것만 들먹이나' 하고 우리 독자는 생각해야 한다. 그 뒤로는 남들의 의견을 받아들일 것을 받아들이며 한윤형 겸손함의 그림자라도 좇아가자는 미덕으로 어쩌면 그럭저럭 잘 돼 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지금 해 놓은 짓을 보면 안습이다.
그리고 실은 이보다 더 큰 문제도 있다. 이 대목을 다시 읽어보니까. 다른 논지나 지적은 안중에도 없고 한윤형이 두번째 글에서 지적한대로 EM님이 말씀하신 용어의 엄밀함에 대한 지적에만 반응하고 있다는 걸 다시 확인 할 수 있다. 지금 위층 상황도 안 좋은 건 알겠는데. 더 기본적인 것, 대들보가 무너지고 있는 건물을 4, 5층에서 어떻게 해봐서 끝까지 유지하려는 꼴이다.
있을지 모르는 오해를 없애고자 박가분의 의견을 약간 희화화했으나 슈리의 지적 허영만 떼놓고 보자면 논지에 큰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정도의 의견이라면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 만으로 커버를 하려는 마음도 없었다면 모를까, 그걸로 슈리에 대한 커버는 안 된다는 것도 사실이다.
요약 : 겨우 가릴 수 있는 데를 가려주는 걸로 커버해주고 싶고겠지만. 커버해야 할 게 어디 그것 뿐인가. 가릴 수 있는데를 가리는 게 아니라. 가려야 할 데를 가려야 하는 것을...... 배는 어떻게 가렸지만 아랫도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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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의 문제에서 현재에 이어지는 문제를 보자는 식으로 주로 썼고,(그래서 균형이 맞지 않는다.- 실재로 다시보니 그런 식으로만 글을 보려해서 '장문의 의미없는 글'의 해석에 관한 내 첫번째 글의 다섯번째 단락에 해석의 악의와 삽질이 다소 있다) 또 첫 번째 글은 슈리와 박가분을 섞어서 써서 엄밀하지 않은 데가 보이는데. 슈리가 이미 논쟁이나 키배의 의사가 전혀 없어 보이므로, 만약에 박가분 님이 제게 호된 지적이나 본격적 시비를 은혜롭게 내려주신다면, 가장 최근에 쓴 그 글을두고, 이 글은 호의적으로 보면 지난 다른 사람의 지적글에 대해서 어떤 의미로 대답이 될 수 있는 가에 대해서 새로 고민해보고 까겠다. 내가 엄밀한 글에는 좀 약한데. 글 지우고 도망가거나 악의가 있었던 부분을 끝까지 인정하지않고 수정하지 않거나 하는 처량한 짓을 하지는 않는다. 이번이 한윤형 빠질로 한윤형에 내가 동조하는 부분을 놓고 말 한 것이라면(그래서 다시 나올 한윤형의 의견과 오히려 전혀 관계 없을 한윤형이 이전 글에 대한 옹호일 분이라면), 그때는 순수하게 나와 박가분님의 글만 놓고 슈리에 관련 된 건 다 빼고 한윤형이 지적한 사실이 한윤형의 의견대로 특별한가 (커버해야할 사람이 커버해야 하는가) 박가분의 말대로 조금도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 보편적인가....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이러이런 논점이 생겼을 때 설득의 책임은 누가 갖고 있는가에 대해서 순수하게 써보겠다.
그래서 본인도 호남과 민주당의 자연스러운 결별이 필요하다고 보지만 그 방식이 호남 배제라는 폭력적인 방식이어서는 곤란할것임. 열린우리당이 했던 것 처럼.
따라서 그냥 호남은 한나라당을 찍는게 낫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정두언 같은 사람이 나서서 한나라당의 반호남 정서를 불식하는게 야권의 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점이 될수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