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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이른바 역사교과서 논쟁에 대해 다른 사람들만큼 흥분하지는 않는 편이다. 한국 주류 사학계의 민족주의 편향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교과서포럼의 정치적인 속내야 어떻든 그들이 말하는 것들 중 ‘사실’이 있으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지 흥분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서다. 하지만 정부와 교과서포럼이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헌법정신을 운운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관이야 다를 수 있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헌법을 왜곡해서야 쓰겠는가.


지금껏 국가 설립의 기원으로 남한은 상하이 임시정부를, 북한은 항일 무장투쟁세력을 언급해왔다. 이것이 한반도의 남북을 실효적으로 점유하는 두 체제가 헌법에서 말하는 정통성의 근거다. 포럼이 관여한 문화체육관광부 책자에서처럼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을 대표하지 않았고 한국민을 실효 통치한 적도 없다고 말하면, 나처럼 건조한 인간은 “그야 그렇지”하고 넘어가지만 호시탐탐 대한민국의 전복을 노리는 북한 김정일 체제의 옹호자는 뭐라 하겠는가. “그럼 그렇지. 그렇고 말고!” 한국의 실질적인 민주주의가 1948년 정부 수립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그렇지. 그런데 그렇게 갑자기 툭 튀어나온 정부가 무슨 정통성이 있다고?!”라고 말하며 즐거워할 것이다. 게다가 그 정부의 모태는 미군정이라는데. 그리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럼 미군정의 모태는 도대체 뭔가. 그냥 화끈하게 대한민국은 일본 총독부를 계승했다고 처음부터 말하면 될 일이다. 일본 총독부가 민주주의는 안 했어도 근대 법체계를 들여와서 통치한 것은 사실이니까. 이게 대한민국의 위대한 역사를 자랑하겠다는 자칭 우파들이 진지하게 할 말일까? 도대체 어느 나라 우파가 이토록 자학적인가.


이게 헌법에 대한 거시적(?) 테러라면 미시적 테러도 있다. 방송법 개정안이 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던 한나라당은 갑자기 이전 방송법이 위헌이라서 개정안을 통과시켜야 한단다. 알아보니 위헌 판정을 받은 그 조항은 지금 방송법 반대파들이 줄기차게 문제삼는 ‘신방 겸영’이나 ‘대기업의 방송 진출 허용’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위헌 판결이 내려진 조항은 논란이 일단락된 상태이기 때문에 관련 조항을 개정할 필요성도 크지 않다고 한다. 무엇보다 한나라당이 제시한 방송법 개정안은 문제의 위헌조항을 수정하지도 않았다. 일부 조항의 위헌을 전체 법률의 위헌으로 둔갑시키는 이 마법, 요즘 집권여당이 애용하는 것이다. 종부세 일부 위헌 때에 이 법안의 입법취지가 헌법정신에 어긋난 것처럼 선전한 것과 같은 원리다.



헌법재판소는 수동적인 기관이다. 누군가가 신청을 한 사안에 대해서만 판단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정치권은 부쩍 자신들이 결정해야 할 사안들을 헌재에 떠넘기게 되었다. 이것은 적절한 일이 아니다. 법과 정치의 바람직한 관계가 무엇이냐는 정치철학의 문제를 논하기에 앞서, 한국 정치의 한심한 수준 때문이다. 토론과 타협을 통해 합의안을 이끌어내는 민주적 의사결정에 대단히 취약한 우리네 정당들은 국회의원을 ‘싸움의 달인’으로 만든다. 헌법에 대한 미시적 테러는 이렇게 정치적 판단을 회피하려는 정치인들의 편의주의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진보정당이나 운동단체들도 헌법소원을 낼 때 조심스러웠으면 한다. 장외의 그들에게 헌법소원은 매력적인 홍보도구겠지만, 만장일치로 각하당하는 소를 남발하는 것은 보기가 안쓰럽다. 헌법정신에 관한 논쟁은 좀더 중요한 문제를 얘기할 때를 대비해서 아껴두고, 제발 역사는 역사의 영역에서, 정치는 정치의 영역에서 다루자. 헌법이 ‘봉’은 아니잖은가.



<한윤형 | 인터넷 논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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