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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음주행위와 죽음충동

조회 수 925 추천 수 0 2007.12.09 02:13:17

월간 드라마틱의 조XX 편집장님은 내가 없는 자리에서, "윤형씨는 폭음에 대해 판타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 거 참 이상도 하지... 어떻게 자신이 맨날 하는 일에 판타지를 가질 수 있지?"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사실 군 전역 후 내가 한 음주는 과거에 비하면 폭음도 아니었다. 2002년에서 2004년 무렵의 나는 어떤 날엔 13시간씩 술을 먹었다. 저녁 6시부터 다음날 아침 7시까지 먹으면 그렇게 된다. 자리를 옮기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6-7차까지 가는 술자리였다. 그 술값이 다 어디서 나왔는지를 생각하면 황망하다. 그렇게 마셔야 나는 '술을 마셨다'고 인지했다. 일주일에 두번 정도는 그렇게 마셨다. 다른 날은 숙취에 괴로워하며 그것보단 조금 마셨다.


그 무렵 나는, 그렇게 폭음하는 나에 대해 죽고 싶어서 그런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세상은 엉터리 같았고 진실은 희뿌연 담배연기만도 못했다. 마시다가 죽어버리는 것만이 합당한 일인듯 싶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무렵의 나는 매우 즐거웠던 것 같다. 13시간이나 마셔가며 비슷한 관심사에 대해 떠들어줄 친구들이 있었고, 그렇게 엉터리로 살면서도 대개 연애도 하고 있었다. 물론 여자친구도 술자리에는 언제나 함께였다. 나는 술을 마시지 못하는 여자와는 사귄 적이 없다.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 것도 하지 못했던 나날들이었다.


요즈음 생각해 보면 나는 그래도 살아는 보겠다고 꾸역꾸역 술을 쳐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13시간 음주의 추억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렸고 요즈음의 나는 (물론 다른 이들의 기준으로는 여전히 종종 '폭음'을 하지만) 얌생이처럼 술을 마신다. 식사하면서 막걸리를 곁들이기도 하고 음료수 대신 먹는다는 기분으로 맥주를 마시기도 한다.


게다가 나이 들어서 술을 못 마실까봐 전전긍긍이다. 술에 시달린 육체를 치유(?)하기 위해 가끔 운동도 한다. 거미줄에 걸린 파리 꼴이 되어 그것조차 없으면 견딜 수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사실 부질없는 짓이다. 얼마 전에 어느 어른이 과메기를 사줬다. 동석한 20대 여성이 "이거 몸에 좋을 것 같네요. 몸에 어떤 작용을 할까요?"라고 묻자 그 어른이 "효능은 무슨. 알코올은 중화시켜주는 것 같다."고 말하길래 "그럼 뭐해요. 그래서 소주를 더 마시는데."라고 대꾸했다. 그렇게 모순적인 짓을 한다. 로저 젤라즈니의 <유니콘 변주곡>에 나오는 유니콘의 뿔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유니콘의 뿔에는 힐링 능력이 있어, 그걸 만지기만 하면 술이 다 깨고 숙취도 사라진다는데.


술을 마시기 힘든 상황이 될 수록 더 교묘하게 소량의 술로 효과적으로 취할 방도를 찾는다. 언젠가 잠깐 들어간 잡지 편집회의가 유난히 길어졌을 때 끝나고 나오면서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아, 술이 깨고 있어. 기분나빠. 빨리 다시 마시러 가야겠어." 숙취에 시달릴 때 한잔씩 마셔주는 그 느낌을 너무 좋아한다. 술이 깰 때는 정말로 몸이 기분 나쁘다. 그걸 피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한잔 더 마시고 찍 뻗어 자는 편이 낫다. 한잔으로 안 끝날 때가 많다는 것이 참으로 문제이긴 하지만.


술 먹는 짓이 죽음충동보다는 삶의 욕망에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팍팍해진다. 고종석은 어디선가 언제든지 자살해서 삶에서 이탈할 수 있다는 생각은 삶에 대해 평온함을 가져다 준다고 썼다. 마치 자신은 이 회사를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고 믿는 직원이 상사의 갈굼에 대해 데미지를 덜 받는 것처럼 말이다. 맞는 말인 듯 싶다. 그런데 이젠 그런 생각을 하기가 힘들다. 내가 자살할 수 있는 위인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이제는 아무런 위안도 없이 그저 한 세상을 버텨내야 한다.
   


hyun

2007.12.09 08:12:27
*.99.83.104

마지막 문단, 네 삶에 찌질하게 매달리지 않겠다는 생각은 확실히 삶을 평온하게 합니다. 그래서 저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곡기 딱 끊겠다'고 가끔 다짐하는데(아직까지 저로서는 이 세상을 버티는 제일 큰 '힘'입니다.), 이는 님의 말마따나 죽음충동이라기보다는 삶의 욕망에 결부되어 있는 것이죠.

하뉴녕

2007.12.09 18:23:20
*.176.49.134

요샌 이래저래 죽을 방법을 고민해봐도 깔끔한 게 생각이 안 나더군요. 옛날엔 (상상 속에서) 면도날로 경동맥...을 선호했었는데.

Dali

2007.12.09 10:07:11
*.75.190.174

술에 대해 제가 막연하게 느끼고 있던 감정을 완벽하게 글로 옮긴 느낌입니다. 저도 나이 들어 술 못먹게 될까봐 운동도 하고 몸에, 특히 간에 좋다는 음식은 앞뒤 안 가리고 먹고 있습니다. 저 역시 술을 못하는 남자는 남자로 안 보이기 때문에 연애는 불가능하구요. 제가 98학번인데 대학시절 다들 '그러다 오래 못 간다'고 했지만 그래도 노력이 가상했던지 아직 맛이 안 간게 다행입니다. 술을 깰 때의 기분 중에서 식은땀이 나고 체온이 확확 바뀌는 그 느낌은 정말 불쾌하죠.
죽음에 대해 결부되든 삶에 대해 결부되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술을 마실 수 있고 좋은 술친구가 있다면. 저로서는 그렇습니다. 가끔 술맛을 모르는 분들이 나서서 '너는 알콜중독이라'고 몰아세우던데, '뭘 몰라서 저러는 거지' 하고 그냥 무시해버리게 됩니다.

하뉴녕

2007.12.09 18:24:27
*.176.49.134

알콜중독은 맞습니다만 그야 엄밀한 의미의 알콜중독으로 따진다면 한국인들 중에 해당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간이 괜찮으시다니 다행입니다. 저는 사나흘 연속 빡세게 마시면 가끔 알러지가 나더군요. 군대 다녀온 이후의 증상입니다만...

ssy

2007.12.09 17:45:31
*.72.21.54

마감조차도 술에 대한 욕망을 막지 못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call?

하뉴녕

2007.12.09 18:25:09
*.176.49.134

일단 이미 십수일간 피폐한 생활을 했고... (뭐하자는 건지 나도 모르겠네.) 게다가 이번주에 다섯 개의 레포트와 다섯 개의 시험이 남아 있네. 그보다 더 어려운 건....어머니가 오셨어. ㅋㅋㅋ

ssy

2007.12.10 04:45:59
*.254.129.211

어떤 시험보다, 어떤 레폿보다 "마더"가 킹.왕.짱.이지. ㅎㅎ (혹 wife)
& 부모님들과 함께 술 마시는 것도 꽤나 좋다네. (난 특히 장모님과의 술자리를 좋아한다는^.^;)


지난 수백번의 술자리 만큼이나 앞으로 있을 수천번의 술자리를 생각하면 몸생각해야지.
다만 안드로메다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 시험치다 생각나면 들르시게나.
(이번 마감만 치면 정말 남의 작품은 안쓸거야. -.-;)


마지막으로... KDY, 당신, 세영이 마신 술값을 합하면 전셋집까진 몰라도 새차는 뽑았을 거 같구랴. ㅋㅋ
브라보 상도누리.

하뉴녕

2007.12.10 08:58:18
*.176.49.134

근데 정말로 어머니가 아니더라도 일정이 죽음이라네. 6개월전쯤에 잡지 마감과 기말이 겹치면서 "아...이렇게 괴로운데 설마 6개월 후에도 내가 벼락치기 하고 있진 않겠지???"라고 중얼거렸었는데, 이번엔 잡지도 때려쳤건만 왠걸... 전공과목 레포트가 살인적이다. 잘 버텨낸다 쳐도 토요일 새벽까지 일정이 있어. 토요일엔 할아버지 제사라서 내려가봐야 하고...

음... 그리고 우리 어머니는 술 잘 못 드신다. 친척 모임에 가면 내가 흑기사 해드려야... 아버지는 물론 여전히 나를 가볍게 제압하시지만... 내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싶어하진 않으실듯 하고...ㅡ.,ㅡ;;

어머니가 철수한 자리에 생태찌게, 시래기국, 북어국이 조금씩 남아 있는데 이 녀석들 중 무엇도 안주도 해장국도 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니 빈속에 소주 마셨을 때보다도 더 위장이 아려오는구나.

새 차라...한 SM3 정도? ㅋㅋ (하긴 한 500번은 마셨다는게 내 계산이니;; )

김대영

2007.12.11 13:39:51
*.43.144.30

아니 왜 갑자기 나를 호출하는게야... SM3가 뭐야 쏘나타 한대 마셨지...헐...ㅋㅋ

하뉴녕

2007.12.11 14:26:44
*.46.4.27

꽥 ;; 그건 상도누리 전체 예산 아닌가? 일단 우리 세명만 계산하자구...(그래도 소나타가 나오나? ...흠좀무;; )

xenogan

2007.12.12 18:22:58
*.168.180.151

음주란 어쩌면 상상계와 맞닿는 여하한 지점을 만들어내는 (그리고 미끄러지는)시도일 수도 있겠지요. 알콜이 억제제인 탓에, 음주 행위 자체가 어떠한 종류의 쾌락을 가져다주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종류의 약물에 집착하는 것은 그것이 상상계와의 접촉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중이랄까나요.

별개로, 진리란 (특히 언어적) 인식가능성의 한계지점에 존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합니다.

하뉴녕

2007.12.13 10:01:10
*.46.4.26

술이 몸에 잘 안 받으시나봐요. (;;;) 알콜은 억제제가 아니라 이완제지요. 그리고 저의 경우는 음주행위 그 자체가 쾌락을 가져다 줍니다. 물론 말이 통하는 친구들과 떠들면서 마시면 더 없이 근사하기는 하지만, 혼자서 앉아서 홀짝 홀짝 들이킨다 해도, 그 쾌락이 적지는 않아요. 어쨌든 그 결과 상상계와 접촉이 된다는 건, 뭐 그렇게 볼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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