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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단적으로 말해, <태왕사신기>의 인물과 배경은 전혀 한국적이지 않다. <태왕사신기>의 무국적성은 ‘천손민족’을 텅 빈 기호로 만든다. 공들여 찍었을지언정, 초반부 ‘신화’는 ‘판타지’도 살리지 못하고 ‘민족’도 묘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라이트노벨의 한 획을 그었고 애니매이션으로 제작되어 많은 이의 사랑을 받은 <슬레이어즈>. 이 <슬레이어즈>의 세계는 혼돈의 바다 위에 네 개의 지팡이가 떠 있고 그 지팡이 위에 세계가 얹혀 있는 판타지 세계다. 이 네 개의 세계를 주관하는 마왕은 각각 루비 아이(붉은 눈의 마왕), 다크 스타(어둠을 뿌리는 자), 카오틱 블루(창궁의 왕), 데스 포그(백무)다. 이들의 색깔은 물론 붉은색, 검은색, 푸른색, 흰색인데 세계의 지도를 보면 얼추 중국의 오행의 방위와 색깔에 대응하도록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사실이지만, 판타지물이라면 설령 독자가 찾아보지 않을지라도 이렇게 세계관이 내적으로는 일관성을 지녀야 한다.


<슬레이어즈>에 스며든 오행의 원리는 저 유명한 고구려의 사신도(四神圖)에 나오는 사방신을 규정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청룡은 하늘의 동방을 지키는 신이며 동방은 오행에서 목(木)의 위치다. 현무는 하늘의 북방을 지키는 신이며 수(水)를 의미한다. 백호는 서방이며 금(金)이 되고, 주작은 남방이며 화(火)를 뜻한다. 이 네 마리 상서로운 동물의 색깔은 각 방위의 색깔과 정확히 일치한다. 


<태왕사신기>에서 주작이 불의 힘을 주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드라마 제작진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태왕사신기>는 단군신화에 나오는 풍백, 우사, 운사를 나머지 삼방의 신에 대입하고 있다. 바람, 비, 구름의 담당자와 수(水), 목(木), 금(金)의 담당자를 포개놓다니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바람, 비, 구름이라고 해봤자 모두 수(水) 안에 포함되는 것일 텐데. 오행설은 중국에서 발생한 매우 견고한 형이상학이다. 고구려 벽화 사신도엔 그 견고한 형이상학이 반영되어 있다. 반면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풍백, 우사, 운사는 초기 농경민족의 소박한 종교적 믿음을 드러낸다. 양자는 전혀 다른 상징체계인데, 그럼에도 드라마는 그것들을 융합(?)한다. 세계관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두는 사람이라면 놀라서 뒤로 자빠질 일이다. 이렇듯 <태왕사신기>는 판타지이면서도 “이 세계의 세계관을 조사해서는 안 돼!”라고 미리 시청자들에게 금지명령을 내리는 드라마다. 역사를 소재로 삼고 있으니 오히려 <슬레이어즈>보다도 더 철저하게 고증해야 할 입장일 텐데도.


도대체 왜 이런 무리한 일을 저질렀을까. 2천년을 격한 두 개의 나라의 신화가 왜 하나로 이어진다고 주장해야만 하는 걸까. ‘고조선=고구려’라는 등식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등식은 하나의 가치체계를 공유하는 천손민족(天孫民族)의 역사가 바로 우리 역사라는 환상을 표현한다. 그것 자체에 딴지를 걸고 싶진 않다. 정신분석학적 견지에서 바라보더라도, 주체는 환상을 통해 자신을 정립하며 건강한 주체일 경우 나중에 그 환상의 허구를 인식한다. 그러나 어쨌든 주체는 환상을 통해 구성되기는 하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아직 ‘민족’을 실감하지 못해 고대사를 헤맨다면, 이런 식의 ‘민족판타지’의 구축이 어느 정도는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처럼 상징체계의 일관성마저 파괴하며 획득한 ‘고조선=고구려’라는 기호 뒤에 어떤 ‘민족’이 있는지를 살펴보면 대단히 우울해진다. 단적으로 말해 <태왕사신기>의 인물과 배경은 전혀 한국적이지 않다. 일본식 표창을 던지는 화천회의의 살수들에게서 어떤 ‘민족’을 느낄 수 있을까? <태왕사신기>의 무국적성은 ‘천손민족’을 텅빈 기호로 만든다. 이 텅빈 기호 안에는 말갈과 거란을 쥬신의 후예로 칭하며 그 내용의 부재를 팽창적 민족주의로 채우려는 욕망만이 그득하다. 그 욕망은 현재의 시점으로 돌아와 이 드라마를 일본에 팔아먹으려는 욕망과도 포개질 것이다. 이처럼 <태왕사신기>의 초반부 ‘신화’는 ‘판타지’도 살리지 못하고 ‘민족’도 묘사하지 못하고 있다. 공들여 찍은 고구려의 모습을 보건대, 드라마의 재미를 위해서나 품위를 위해서나 신화적 세계관의 묘사는 절제되는 쪽이 더 나았을 것이다. -한윤형 (드라마틱 27호,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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