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고대와 중세에는, 그러니까 자본주의가 성립하기 전에는, ‘노동하지 않는 시간’으로써의 ‘여가’의 개념이 없었다고 한다. 그들은 여가를 하나의 행위로 보았기 때문에 ‘여가한다’라는 말을 사용했고, 오히려 ‘여가하지 않는 시간’이란 단어로 각종 허드렛일을 하는 시간을 지칭했다. 특히 중세인들은 여가하는 시간을 신의 축복이 내리는 시간, 인간의 노력을 뛰어넘을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럼 도대체 ‘여가한다’라는 말은 뭘 한다는 말일까?
그들의 ‘여가한다’라는 말을 현대인이 알아듣도록 바꾸려면 ‘잡생각한다’라고 표현해야 하는게 아닌가 싶다. 육체적 노동을 하는 시간도 아니고, 책을 읽거나 무언가를 공부하거나 하는 식으로 정신적 노동을 하는 시간도 아니라, 그냥 유유자적하게 조금씩 움직이면서 이 생각 저 생각 잇따라 하고 떠오른 생각들을 덧붙여 보기도 하는 그런 시간 말이다. 그러니까 이건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한 여가시간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가령 멍하니 TV를 쳐다보는 시간은 현대적 의미에서는 여가시간에 포함될 지언정 고중세인의 ‘여가한다’라는 개념에는 들어맞지 않는 것 같다.
잡생각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특히 한국사회와 같은 곳에서는, 잡생각하는 능력을 철저하게 상실한 사람이 꽤나 많을 것이다. 당장 TV를 꺼놓고 멍하게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해 보라. 좀이 쑤셔서 TV가 아니더라도 뭔가 주의를 집중시킬 수 있는 사물을 가져오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생각 속만을 부유할 수 있다는 건, 축복받은 일이다. 그리고 아마도 조심스레 추측해 보건대, 창조적이고 인문적인 사고라는 것도 반드시 정신적 노동을 하는 시간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여가 시간 속에서 나타나는 것일 게다. 그러니 이 시간이 ‘신의 축복이 내리는 시간’이며 ‘인간의 노력을 뛰어넘을 수 있는 시간’이 되는 것일 터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돈이 없어서 오는 게 아니라 잡생각이 사라져서 오는 것이다.
내 얘기를 좀 하자면 나는 잡생각이 너무 많아서 탈이다. 나는 하루 일과 중에서 주의를 집중해야 하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 경비행기를 모는 진중권의 취미가 멋있다고는 생각되지만, 막상 한번 따라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면 피로감부터 몰려오는데, 그건 멍하니 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멍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기 시작하면 나는 미쳐서 죽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현금인출기에서 돈 뽑으려고 기다리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세발자국쯤 뒤에 서서 멍하니 이 생각 저생각 하다가 블로그에 올릴 글감을 하나 떠올렸다고 치자. 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여유로운 사람이다. 비록 통장잔고에 찍힌 0의 개수는 몇 개 안 되지만.
독서하는 시간과 잡생각하는 시간이 좀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데 나의 경우는 후자에 제법 치우친다. 독서를 할 때도 몇구절만 읽으면 그에 관련된 나의 다른 생각들이 밀려온다. 이러면 책 읽는 시간이 길어지지만 그렇다고 잡생각을 아예 배제하며 책을 읽을 수는 없다. 급할 때는 물론 그렇게도 해봤는데, 영 독서할 맛이 나지 않았고 그 책의 내용들이 내 것이 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어차피 책을 읽은 후 그 책의 내용에 대해 잡생각을 하게 될 거라면, 책을 읽는 도중에 짬짬히 잡생각을 개입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 생각의 내용을 그 책의 다음 논의에서 발견하게 될 때의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기도 하고.
잡생각하는 시간과 통장 잔고의 기회비용을 검토하면서, 나는 그리스인들이 부러워했을 ‘자유인’의 삶을 살아간다. 조금만 더 있으면 이렇게 못 살게 될 지도 모른다. 나같은 사람은 한국보다 더 잘 사는 나라에도 있고 더 못 사는 나라에도 있지만, 적어도 이 나라에선 지나치게 사치스런 사람이다. 그 사치의 수준은 명품족들을 훨씬 능가한다. 그걸 알지만 그렇다고 잡생각을 멈출 수는 없다. 잡글을 안 쓸 수도 없고. 성경 말씀처럼,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저는 열심히 여기 저기 블로깅 하다 보니까 내 잡생각할 새가 없어져서 불안해지던데...
일찌기 쇼펜하우어 할아버지가(왜 그는 저에게는 할아버지라고 입력이 되어 있는지 참..) 독서광들을 일컬어 맨 남의 생각이나 따라다니느라 바쁜 바보라고 일갈했다던 말이 생각납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