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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김규항의 어설픈 정치행위...

조회 수 1370 추천 수 0 2007.09.09 16:17:45
 

바빠서 싸울 기력도 없으니까 한발 떨어져서 조소한다면, (어차피 ‘저쪽’도 처음부터 ‘힌트’나 던지고 자빠졌으니까) 근 한달 전에 자기 자신이 조갑제보다 나쁘다고 주장했던 강준만의 입을 빌려 자신의 글을 옹호하며 "역시 강준만!"을 운운하는 김규항의 행태는 참으로 역겹다. 그건 정치고, 이건 문화라는 것일까?


“강준만은 조갑제보다 악하다.”라는 명제는 어차피 이데올로기적인 명제라서 반박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누군가 내게 그런 말을 한다면 그냥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면 그만이다. 김규항이 직접 내게 그런 말을 한 건 아니기 때문에 그저 나는 “역시 김규항이군.”이라고 피식하며 지나갈 뿐이다. 하지만 “평론가는 대중에게 선빵을 날렸다.”는 명제는 경험적인 명제다. 별다른 근거없이 저런 소리를 하면 당연히 욕을 먹게 되어 있다. 이것 역시 대중의 심리에선 이미 경험적인 명제가 아니라는 쟁가님의 지적은 물론 합당하지만, 그게 내가 김규항에 대한 비난을 멈추어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물론 나는 강준만의 글도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글은 김규항의 글만큼 나를 자극하지는 않는다. 거기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이유는 강준만의 경우 적어도 양비론을, 혹은 양시론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이들을 방패로 삼아 평론가라는 집단을 아예 부정해버린 김규항과는 궤가 다르다.


둘째 이유는 강준만은 전주에 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지방에 산다는 것은 여러 종류의 재화를 공급받는데 차별을 받는다는 의미인데, 반대급부로 '서울‘이라는 소용돌이의 핵심에서 벌어지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있다는 장점을 누리고 있다. 종종 어떤 서양인들이 (혹은 서양의 사회학자가) 한국인 유학생들을 보고 “너희 나라는 심심하지 않아서 좋겠다. (혹은 연구할 게 많아서 좋겠다.)”라고 말했다는 풍문을 전해 듣게 되는데, 지방과 서울의 관계도 어느 정도는 외국과 한국의 관계와도 같다. 전주에서 바라볼 때 서울에서 벌어지는 이 ’패싸움‘(?)은 꽤나 재미있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강준만의 문화비평에선 종종 이러한 경향이 감지되는데, 그것을 나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용인하는 편이다.


셋째 이유는 순전히 심정적인 것이다. 누가 뭐래도 강준만이 한국 사회에 끼쳐온 긍정적인 영향은 김규항의 그것을 압도한다. 이런 ’이유‘를 스스로에게 들이밀기 이전에 이미 나는 좀처럼 그에게 화가 나지 않는다. 비록 동의는 못할지언정.


이미 진중권은 <디 워> 사태에서 자신과 다른 견해를 제시한 강준만, 김규항, 김정란, 그리고 기타 듣보잡들을 비판하는 글을 썼고 어느 월간지에 실릴 예정이라 한다. 그러니 더 이상 내가 김규항에게 신경쓸 이유는 없을 것이다.  


N.

2007.09.11 18:25:09
*.128.61.39

고마* / 별 뜻 없는데요. 여기서 논다고 님한테 꼭 관심 보여야 할 필요는 없죠.

봉구

2007.09.11 18:32:48
*.39.213.114

고마/참 말귀도 못 알아먹고 드립다 센 척은 쯧쯧.. 쿨한 남한테 남의 글 읽으면서 의도 멋대로 추측하지 말라고 센소리하면서 정작 본인이 누가 누구 친구라느니 너도 기분나쁘지? 등등 혼자 추측쇼를 하고 앉았네요. 멍청한 동어반복 계속해 봐야 Tango님글하고 뉴욕펑크글 구분도 못하는 주변머리만 계속 드러날 뿐이니.. 계속 그렇게 사시길 바랍니다. 딴데가서.

하뉴녕

2007.09.11 19:04:03
*.176.49.134

자자, 이제 이 글 아래로 고마님의 덧글은 삭제입니다. 저는 충분히 설명드렸구요. 님은 그 설명을 이해하지 않으려는 의지로 충만해 있어요. 그러니까, 이 사안으로 더 말씀하시려면 님의 블로그를 이용하세요-.

이상한 모자

2007.09.11 20:12:07
*.136.138.83

이.. 이럴수가... OTL

허허..

2007.09.11 21:58:25
*.157.204.82

저 분 참 진짜 끈질기게 댓글다는데
오기만 잔뜩 서려있네요--; 재미도 없고 뭐도 없고..
수고하세요 주인장님

고마*

2007.09.11 22:34:58
*.85.69.113

트랙백으로 사과글 올렸습니다.
댓글 주고 받은 분들을 트랙백 따라 오시기 바랍니다.

눈노가다

2007.09.12 01:58:15
*.109.44.165

일련의 요런 흐름에 대해
시방까정 김규항의 대응 방식은
혹 그만의 두려움 때문인지 모른다.
진즉부터 그의 스탠스는 물밑의 백조다리 형용이었다.

영화 <화려한 휴가>까지 욕을 봤다.
그 이바구는 자기 이바구일 수밖에 엄따.
그러니 '50'년까정 걸릴 필요가 있겠는가.
...머시기가 뭐 그리 대 머라고.

그러니까, 고마 진즉 날샜다는 거이다.

이상한 모자

2007.09.12 01:59:30
*.79.125.161

다시 조심스레 써봅니다..

여러분, 논쟁은 이제 그만 하시고 불우이웃을 도웁시다. 제 블로그에 오시면 불우이웃을 도울 수 있음.. 쩝..

나그네

2007.09.12 03:18:16
*.116.147.201

돌치/

님의 말씀입니다.

"분열증은 아니라고 봐야죠. 김규항씨는 강준만씨와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입장에 서 있지만 평소 그의 능력을 인정해 온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 능력이 자기가 볼 때 잘못된 방향으로 쓰여졌을 때 조갑제보다 위험한 게 되는 거구, 이번 경우는 자기가 볼 때 제대로 쓰여졌다고 본 거죠. 그래서 '역시, 강준만'이라고 했을 겁니다. 뭐 그 역시가 맞는지는 별개로 하고, 이런 걸 분열증이라고 볼 수는 없죠."

그렇다면 김규항은 평소에 '강준만의 생각은 옳지 않지만(님의 말씀대로 강준만씨와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입장에 서 있기에) 능력은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겠지요. 그러면 그 '능력'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1. 문제 제기의 능력
2. 수사적인 능력
3. 킹메이커로서의 능력
4. 대중들을 선동하는 능력

위의 4가지 중 하나라고 보았을 때, 강준만의 글에 대한 김규항의 '역시, 강준만.'이라는 말의 의미는,

1.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대로 이번에도 강준만은 문제 제기를 잘했어.'
2.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대로 이번에도 강준만은 수사적인 능력이 뛰어났어.'
3.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대로 이번에도 강준만은 킹메이커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했어.'
4.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대로 이번에도 강준만은 대중들을 많이 선동했어.'

중의 하나라는 것인데.. 아무래도 이상하군요. 김규항의 '역시, 강준만.'이라는 말은 명백히,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대로 이번에도 강준만의 생각은 옳았어.'라는 의미로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김규항은

1. '강준만이 조갑제보다 더 나쁘다.'라는 말이 진심이 아니었거나,
2. '역시, 강준만.'이라는 말이 진심이 아니었거나,
3. 분열증이거나,

적어도 셋 중의 하나겠지요..

돌치

2007.09.12 14:24:12
*.121.171.41

네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흐음

2007.09.12 13:17:05
*.153.255.86

한윤형씨 아직 어린애네요. 저도 김규항의 글을 동의하지 않지만 그글이 이렇게까지 논쟁을 불러올만한 글인지는 모르겠네요. 솔직히 남의 관점을 행해 억지로 시비거는걸로 밖에 안보입니다. 혐오하는 심빠와 똑같은 부류로 보입니다. 남의 관점은 무조건 무시하는....그의 관점이 옳을지 틀릴지는 아무도 알수 없죠. 그걸 누가 판단할수 있을까요? 애초에 논쟁의 대상이 아닌걸 논쟁하고 있는걸로 밖에 안보입니다. 심빠도 무섭지만 여기 님을 옹호하는 집단또한 심빠와 별다를바 없어 보이고요.

수영

2007.09.12 14:31:51
*.171.79.143

너도 옳고 나도 옳고 누가 판단할 수 있겠어? 하고 우아하게 사는 거 참 좋네요. 사실 저도 우아한 거 좋아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이 사건 이전엔 진중권 씨 별로 안 좋아하기도 했는데요, 그렇게 우아만 떨고 있어서는 안 될 문제도 있더라는 거죠. <후회하지 않아> 블로그 들어가서 수만명이 개떼같이 덤벼들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로 한 독립영화감독을 짓밟는 거 보니까 꼭지가 돌더라고요. 그런데, 그렇게 시작된 싸움을 '타인의 취향에 대한 몰이해'라는 식으로 얘기한 건 김규항의 오류고, 거기에 대한 지적에 뉴욕펑크니 강준만이니 끌어들이는 건 삽질이거든요. 왜 오류다 삽질이다 말하면 안 되나요?
제가 한윤형을 "옹호하는 집단"씩이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억지로 시비거는", "심빠와 별다를 바 없"다는 님의 양비론이 과연 얼마만한 고민을 거쳐 나온 것인지 대단히 의심스러워요. 팩트 확인도 없이 인상만으로, 책임질 수 없는 비방이나 툭 던지는 거라면, 그것도 별로 어른스러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김기연

2007.09.12 16:42:09
*.39.243.88

여기서 올려진 글들을 읽고 든 생각들입니다. 주인장이 쓰신 글에서 공감되는 부분도 많았지만 논의가 지나치게 분석적이고 논증적으로 전개됨으로서 김규항을 옹호하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는> 사람들에게는 이 일의 본질이 오히려 가려진다는 인상이 들기에 적어보는 글입니다.


심형래라는 사람은 좌파논객 김규항 씨가 그 동안 줄곧 비판과 비난의 화살을 쏟아부었던 권력에 의해 신지식인으로 추대되었고 그 수혜를 입었던 상징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영화 한 편이 자동차 얼마얼마를 만들어 파는 것 이상으로 수익을 올린다고 하는 식의, 이른바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투기적 발상으로 똘똘 뭉쳐진 천민자본주의적 사고의 원형이 심형래라는 인물과 <디워>라는 영화에 집약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간 김규항이 아니라 그가 표명하는 사상을 지키고픈 사람들은 이 점을 스스로에게 분명히 해두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김규항 씨가 자신의 신념에 대해 그 동안 제대로 된 성실한 글쓰기를 해왔다면 그의 독자들이 이런 문제에 있어서 핵심을 놓칠 리가 없습니다.

영화감독 심형래와 그의 영화 디워의 배경을 흐르는 정서는 진보주의를 표방하는 정치 진영이 내세운 전형적인 문화정책이기도 합니다. 매체만 바뀌었고 신자유주의적인 경제논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합리적인 선택과 투자를 보이겠다는 외관을 띠긴 했지만, 이것은 근본적으로 박정희적인 마인드와 패러다임의 반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영화로 돈벌이 하는 입장에서 스스로 그런 생각과 목적의식을 가진 정도로 만족하지 않고,

그저 영화를 보며 즐기는 선에서 충분한 관객에게까지 그러한 물신숭배적 사고와 가치관을 투입하려는 것에 있었고 또 그 시도는 무섭도록 성공적이었습니다.

전세계에서 어떤 나라가 이까짓 영화 한편으로 - 그것도 그 사회의 내노라 하는 이름값을 가진 식자들까지 끌어들여서 - 이런 해괴한 헤프닝을 벌일 수 있는지 가공할 일인 것입니다.

그것도 강준만이니 김규항이니 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이런 소동이 다만 <취향의 문제>라는 말이 되어 튀어나올 정도니 이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제가 보기에 이 논란의 근거는 <디워>라는 영화의 성격에 있다기 보다는, 그동안 그토록 변질되지 않은 순수혈통(?) 좌파임을 주장했던 김규항이란 인물이 - 꼭 좌파가 아니라 해도 일반적인 양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눈쌀이 찌푸려질 만한 - 독점자본과 시장주의의 화신과도 같은 영화에 대해,

또 우리에게 그러한 담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끔 온나라가 법석이 나도록 선동질된 이 진저리 나는 영화에 대해 언뜻 매우 순진하고 소박해보이는 소시민적인 의견을 피력했다는 것과, 그 과정에서 뚜렷한 반지성주의적인 적개심을 보인 것에 있습니다.

그의 이런 적대적인 태도는 한편으론 심정적으로 왜 그랬을런지 이해가 갑니다. 진중권을 비롯해 어떤 지식인도 <디워> 라는 영화가 선전하는 그 물신숭배적 이념의 위험성에 대한 비판을 보이지는 못했으니까요. 그런 소리 해봐야 다 하나마나한 소리가 되었고 낡아빠지고 고리타분하게 들릴 뿐인 세상이 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정말로 실망스런 일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민족주의 코드, 애국심 코드....모조리 다 개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해 아무리 말해도 씨도 안먹힙니다. 사실은 모든 것이 다 돈에서 시작되고 돈에 대한 환상으로 귀결되는 소동일 뿐이니까 말입니다.

때문에 평론가들이 아무리 그들이 발견한 사회과학적 심리학적 코드를 이리 꼽고 저리 꼽아봐도, 어떤 날카로운 논증을 제시해도 그 사람들은 꿈쩍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들이 그렇다고 실제로 돈에만 환장한 사람들일까요? 그렇다면 그나마 그런 주제에 한해서 논리적인 설득이나 토론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고 여기서는 <미국인들에게 인정받는다=달러를 많이 벌어들인다=국익에 도움이 된다=우리 힘, 우리 문화로 초강대국 미국과 대등하게 경쟁한다>는 등등의 이러저러한 등호들이 쇠사슬처럼 엮여 있는 것 뿐입니다.

<디워>를 비판한 진중권은 이러한 등호들의 묶음이 문화라는 개념의 본질일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워낙 못난 영화 <디워>는 그러한 엄청난 일을 수행할 만한 재목이 아닌 천하의 쫄짝인데 왜 그걸 모르냐고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는 <디워>라는 영화가 제시하는 대전제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영화로는 그러한 일을 수행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건희로는 빌 게이츠를 기대할 수 없다는 식인데, 현실적인 파악이긴 하지만 이것을 심지가 있는 미학자이자 문화비평가로서의 사유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디워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디워라는 영화의 질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주장하는 대전제를, 그것의 지배사상을 소비하는 것이기에 거기에 대한 비판적 진술과 논증이 없는 이상, 대중을 향한 그의 저항과 계몽의지는 이미 중심을 잃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전선을 보편적 대중과 시대정신으로 확장해야 함에도 자신의 주제를 사이버테러라는 지점으로 한정함으로서 스스로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는 차원에 머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러한 잘못된 등호들의 사슬을 끊어내는 지적을 해주기를 기대할 수 있는 사람은 김규항같은 사람일 겁니다. 우리가 그렇게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김규항 자신이 사회를 향해 스스로를 그렇게 자부해 왔기에 그런 것입니다.

이것은 논리 이전에 뚜렷한 가치관의 문제이고, 그것이 그가 그 동안 보여왔던 주장과 태도의 일관성인 것이죠.

오늘날 김규항과 같은 사람들이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영화가 있다면 <화려한 휴가>가 아니라 <디워>와 같은 영화입니다. 그것의 CG기술이나 시나리오에 대한 평가, 관객들이 느끼는 만족도와 같은 따위가 아니라 그것에 뒤따르는 가치론적 담론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가 어린이잡지에 정성을 쏟을 정도로 미래 세대의 가치관 교육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그는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 아이들을 데리고 극장에 다녀온 자기의 사적인 소감과, 영화라는 문화적 매체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자기의 무관심과 무지를 인정하며 소시민적인 의견을 피력할 권리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전혀 어떤 주의주장이라든가 논쟁의 꺼리가 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나 지식인으로서 지식인을 비판한다는 명분으로 지식인의 본분을 매도함으로서 대중의 타락한 정서에 영합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불과 몇줄 되지도 않는 글로 한 인간 전체를 재단해서는 안되겠지만 이 부분에 대한 비판은 분명히 견지되어야 합니다.

하뉴녕

2007.09.12 18:32:42
*.111.244.169

논의가 너무 피로하게 전개되어서, 그런 부분들이 언급하기도 쉽지 않고 말씀하시는 대로 가려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디 워> 흥행과 정치적 소비의 문제"에서 조금 더 심도깊은 논의를 하려고 했으나 (김기연님 보시기엔 역시 변죽정도일지라도) 그 밑에선 여전히 논지와는 큰 관련이 없는 도돌이표 논쟁이 진행 중인 실정이니까요.

좋은 지적 감사드립니다.

N.

2007.09.12 18:46:28
*.128.61.39

말씀하신 바가 본질이라 생각합니다. 이송희일 감독의 글이 언론에 의해 엉뚱하게 왜곡됐으나, 그 첫 문단에서 지적한 것이 바로 그것. 다만 그 비유가 너무나 왜곡돼서 퍼지면서, 논의가 엉뚱한 곳으로 튀어버렸습니다. 왜 700억짜리 영화 한 편이 아니라 70억짜리 열 편, 7억짜리 백 편이 더 소중한지... 문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무리 '상품'의 형태로 나타날지언정, 그 문화상품이란 것이 어떻게 자동차나 토스터기와 다른지... 바로 그런 것들이 이야기돼야겠죠. 왜 타란티노는 그 흔한 CG 전혀 없이 카체이스신과 자동차 폭발씬을 찍는지, 말입니다.

봉구

2007.09.13 02:48:55
*.39.213.114

진중권씨가 그걸 모르고 몸을 사린(?) 것 같지는 않고, 황우석 사태때 감금당했던 전례도 있고 원래 상대의 논리 그대로 받아서 되돌려치는 게 그 양반 방법이라 그랬던 게아닌가 싶습니다. 그간의 경과를 보면 아시겠지만 자기 얘기 열심히 만들어 한다고 상대한테 통한다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아무튼.. DJ시절 '신지식인 심형래'를 보면서 그냥 자잘하게 써먹으려고 '노동영웅' 칭호 만들어주는 건 줄 알았는데, DJ-노정권 10년동안 진행돼 왔고 거의 완결 직전인 산업자본->금융자본으로의 진화(?)가 남한 자본의 '대한민국에서 손털기' 절차였고.. 심형래가 그것을 '돈 끌어모아서 세계시장에서 승부를 보자'라는 이데올로기로 호도하는, 민중을 속이기 위한 아이콘이었다는 걸 요즘 들어 깨닫고는 눈물이 앞을 가리는.. 암튼 뭐랄까, '금융자본화'는 정확히 말하자면 박정희 체제 종말의 완결인 듯 싶기에 좀 더 세심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디워는 정말 포니가 될 수 있을까?' 이런 제목 어떨까요 -_-

... 스티비 원더 틀어놓고 듣다 보니까 젊은 목소리로 이렇게 외치는 군요. '핏줄에 주사바늘 꽂아넣으니까 행복하냐? 응?'

김기연

2007.09.14 00:50:18
*.39.243.88

봉구님, 디워는 미국에서 벌써 삼성전자와 비교되었다고 하네요....

제가 보기에 논객으로서의 진중권은 너무나 오랫동안 너무나 저질스런 - 도저히 한자리에서 앉아 상종하기 힘든 부류의 - 인간들과 붙들고 다툼을 벌이며 씨름하느라 스스로 많이 다운그레이드 되어 있습니다.

얼굴을 봐도 푸석푸석하게 부쩍 많이 피폐해져 있어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대방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쳐서 까부신다는 논쟁에 있어서의 - 받은대로 돌려준다는 식의 방법론, 이거 옆에서 보기엔 재미나고 통쾌해도 정작 본인은 보통 피곤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도 논리도 논리같지도 않은 논리를 붙들고 그래야 한다면 말입니다. 모르는 사이에 자기 자신도 조금씩조금씩 깍여나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봉구

2007.09.14 02:50:21
*.39.213.114

1. 네, 저도 그 소식 접했습니다. 서구에서도 '봉건적 가신 집단'으로서의 현대, 삼성 등의 존재를 대하는 느낌은 황당하다..는 것일텐데요, 그 점을 사람들 앞에 '폭로'한다고 해도 '그건 양넘들 방식이지'하고 되튕겨낸다는 것을 황우석 사태때의 '연구윤리' 건에서 확인하셨을거라 생각합니다. 미국화가 개방이고 글로벌 스탠다드로의 적응이라고 강변하는 자들 앞에서 사실 할 말은 태산이지만, 이 나라에서 '좌파'란 '보트도 제대로 못 몰면서 사람들한테 해적 무찌르자고 부추기는 무리'쯤으로 인식되고 있으니..
잠깐 딴 소리를 하자면, 지금 일본에 진출해 있는 허다한 한국산 게임들 중 성공 케이스는 딱 두 개라고 하더군요. PC에 끼워팔기 마케팅으로 물량공세를 퍼붓고 있는 리니지하고, 이름은 가물한데 현지 소수 매니아 취향에 소구해서 안정적인 작은 성공을 거둔 게임 하나 외에는 전멸했다고 합니다. '렙업'과 '아이템빨'로 상징되는 한국식 온라인 게임 내의 극심한 계층구조가 전혀 먹혀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설득력 있더군요. 극소수 엘리트를 제외하면 나머지 사람들 사이에서는 '평등'이라는 관념이 뿌리깊은 일본의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한국식 '까라면까라' 마케팅에서 벗어날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아무튼 미국 상영까지 포함해서 디워 소동이 좀 진정되면 깊이있는 분석이 진행될거라 생각됩니다.

2. 진중권씨..얼핏 듣기로는 개인적으로 마음이 썩 편하시지는 않은 상태라고 들었습니다. '당사자의 논리 그대로 받아서 되돌려치기'는 뭐랄까 상대방의 언어에 대한 이해력이 떨어지고 A->not A,just B 라는 우기기만 반복되는 한국식 토론의 일상을 벗어날 수 없는 상태에서 어쩔수 없는 선택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서민

2007.09.12 21:39:11
*.102.200.1

일전에 인사드렸던 서민이라고 합니다
(앗 노바리님도 반가워요 글구 벤지아빠라고 해주신 분두요^^)
학생이셨군요 지금 네이버 찾아보니 '최고의 대학생 논객'이라고 되어 있네요.

언젠가부터 전 논쟁이라는 게 과연 얼마만큼 가치가 있을까 회의를 갖습니다.
글의 전체를 보기보단 헛점을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그럴듯한 걸 찾으면 '허접한 논리' 이래가면서 공격을 하고
상대를 '빠'로 몰아부치고...

각자의 블로그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대신
유명인의 블로그를 찾아 주인장을 공격하는 건
역시 관심을 받고 싶은 측면도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겁니다.
끝이 안나는 지리한 말싸움,
상대방은 어차피 승복을 안할 마음인지라 결말도 없는...
기껏해야 "이번 댓글이 마지막이다""나는 더이상 글 안쓸 거다"같은 멘트로 정리되는 그런 싸움들
이런 걸 통해 논리력이 길러지긴 하겠지만
인간에 대한 따스한 마음은 잃어버리지 않을까 뭐 이런 걱정을 전 한답니다.
그것과 더불어 나이가 들면서
남이 저와 다른 주장을 하면 "넌 그렇게 살아"라고 해버리게 됐다는...

아무튼
나름의 논리력을 갖춘 분들의 공격에 일일이 답을 해주시는 님의 모습을 보니
존경의 마음이 절로 생깁니다
하루 천명이 넘게 오는 블로그를 운영한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습니다.
건승하시고, 한 수 배우러 다음에 또 들르겠습니다.

김기연

2007.09.14 02:30:10
*.39.243.88

윤형님의 디워와 정치적 소비에 관한 글을 잘 읽어 보았고 공감되는 부분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저와는 문제의 접근에 있어서 전제 자체가 다른 지점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어떤 논쟁을 하자는 의도에서 쓰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분들도 만일 이 글을 읽는다면 이왕 얘기가 나온 걸 듣는 김에 그냥 어떤 지나가던 사람의 평소에 가지고 있던 소견을 조금 더 흘려들은 정도로 생각하시면 고맙겠습니다.


시민들이 영화 산업의 정책적 관점에서 어떤 올바르고 지혜로운 선택이 있어야 한다고 했을 때, 사실상 그 주장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협의나 정치적 혹은 계몽적인 의식의 변화 이외에,

먼저 그에 따른 자유로운 선택의 환경이 구축되어야 하고, 또 영화 관객 자신이 영화와 관련한 일정 수준의 교양이 요구됩니다.

거기에 대한 제 의견은 이렇습니다.

영화라는 문화 매체에 대해 합리적인 산업적 선택을 하든 예술적 선택을 하든 그것은 우선적으로 영화인들이 알아서 할 일입니다. 또 실제로 그렇겠지요. 그것이 그들의 일이니까요.

미국 영화의 관객들이 미국영화의 시장성이나 회화벌이, 산업경쟁력 따위를 함께 고민하며 미국 영화의 시장규모를 키우도록 공조했을까요? 제가 알기론 그렇지 않습니다. 관객은 항상 자신들의 고유한 삶과 정서에 맞추어진 선택을 할 뿐입니다.

제3의 길이라 할 수 있는 유럽식 정치적 소비라는 선택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이러한 전제가 깔려진 한도에서 의미를 가집니다.

즉 사람들은 영화라는 쟝르에 대한 그들 자신의 요구와 기준을 적용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선택을 함이 온당합니다.

헐리우드는 그런 요구와 기준을 때때로 대중들의 일반적인 기대치에 비추어 훌쩍 뛰어넘는 작품을 내놓으며 자신의 덩치를 기하급수적으로 불릴 수 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심형래가 들먹이기 좋아하는 스필버그와 루카스,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들이 그 중심축이었죠. 사실상 그들은 시장을 정복한 사람이 아니라 지금과 같은 시장의 크기를 <만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의 누구도 관객을 향해 미국영화를 살리고 키워야 한다, 국부에 도움이 된다, <미국인이라면> 우리 영화를 지지해달라는 이상한 주장을 펴지는 않았을 겁니다.

디워가 옳으냐 스크린 쿼터가 옳으냐, 여기에는 논증이란 개념이 있을 수 없고 어떤 것도 아직 아무것도 증명되어지지 않았으며 사실상 단지 이러저러한 주장들, 실천적으로 옮겨질 수 있는 신념들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역시 영화인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관객을 끌어들여야 할 사회적인 운동의 성격이 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지식인층이 생각해야 할 바는 있을 수 있는 이러저러한 시도들이 사람들의 정신과 내면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살펴야 하는 것이겠지요.

지식인의 본분이 어떤 올바르고 탁월한 정책제시가 아닌 사물과 현상에 있어서의 중심이 잡힌 가치판단에 있다고 본다면 말입니다.

영화가 도대체 인간의 삶에 있어서 어떤 것일 수 있을까요? 굳이 따지자면 사실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있으면 좋고 없으면 아쉽지만 그럭저럭 살아갈 수는 있는 것으로, 없다면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위 <문화>니 <예술>이 하는 것들이 가진 현실적인 가치의 한 속성이라 생각됩니다.

<영화산업을 지켜야 한다>는 명제가 <우리 쌀 우리 농산물을 지키자>는 주장들과는 달리 사회적으로 공통된 담론이 되지 못하고 모호하게 공허하게 울리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이러한 전제를 인정하지 않고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그 어떤 절대적인 의미의 가치를 두려고 한다는 것은

영화라는 매체의 산업적인 가치와 그것의 논리적인 귀결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관객 자신이 영화라는 매체를 접하면서 느끼는 감동의 깊이라는 경험의 성격에 의거하는 것입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적 경험과 감정의 가치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천만관객>은 그 존중을 무참하게 짓밟는 푸닥거리에 불과합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충무로도 심형래와 다름없이, 되도록 순수하게 보존되어야 할 관객의 정서를 영화에 대한 영화 외적, 정치적 혹은 집단주의적 사고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작업을 언론과 비평활동을 통해 그 동안 끊임없이 자행해왔다는 점에서 지금과 같은 분란에 대한 책임이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충무로와 또 거기에 영합된 - 누구와 붙어먹어도 살아남게끔 되어있는 - 언론은 봉준호나 박찬욱 등의 영화를 <해외영화제 = 국제적인 명성 = 국위선양> 이라는 등의 등식으로 그간 나름의 선전작업을 구사해왔습니다. 해외영화제 수상 여부가 올림픽 금메달 중계하듯이 사람들의 관심속에 무슨 강박관념처럼 심어진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의 누구라도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바로 작년만 해도 지금 못지않게 난리가 났었고 김기덕 감독 거의 자해공갈단식 몸부림을 쳤지만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100분토론에서 보여진 광경의 참담함은 올해 진중권 주연작이 아니라 작년 김기덕 주연작이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자신이 해외영화제를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인물이었지만 <시장가치에 따른 기준>을 내세운 충무로의 예우는 무례하고 냉담하기 짝이 없었고 결국 대중의 무차별한 공격적 반응에 무방비로 노출되도록 암묵적인 동의를 표시한 것입니다.

사실 이 무렵에 진중권이니 김규항이니 하는 사람들이 나서야 했지만 - 워낙 오지랖들 넓으니까 이상한 일 아닐 텐데 - 그러지 못했습니다.

진중권은 물론 다른 더 지긋지긋한 일로 몸살을 겪은 중이었으니 무리한 요구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지금이라도 대체 영화에 대한 이런 엽기적인 과열이 어떤 배경에 선 것인지를 고찰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디워만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영화>라든가 <문화>라는 것에 대한 어떤 비정상적으로 과열되고 외곡된 시장론적 담론화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일상화 되어 있기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서 심형래와 디워 비판이 뒷끝이 없게 온전히 수행되려면 충무로 비판과 더 나아가서 한류 비판으로 논의가 전개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사회적인 현상의 본질은 어떤 지엽적인 소동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거기에 속함으로서 그 소동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어지도록 이끌어지는 그 전체의 바탕개념일 것입니다.

제가 보기엔 이 나라에서 이런 비판적 논의의 근본을 찾아들어가기 어렵게끔 만드는 일종의 지배담론이 바로 <한류>라는 문화지배개념입니다.

이 한류라는 거대한 조류에 충무로도 올라타고 심형래도 올라타며 이른바 <돈되는> 연예인들이 세상 위에 올라서서 세상을 가르치려고 드는 기형적인 풍속이 일상화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이 한류에 대해 어떤 충분한 개념적 이념적 비판을 거친 일이 없습니다. 오직 한류가 어떻게 하면 더 지속적으로 성공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만 논하기에 급급합니다.

그들이 한류에 더 이상 <실체>가 없다는 비판을 하면 그것은 한류가 사실은 무슨 류라 할 만큼 수익성이 없다는 정도의 경제적인 관심사를 표명하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이 주장에서 보여지는 바는 정부의 야만적인 문화정책 이외에 문화계와 이어진 지식층의 야합과 방관이 현재와 같은 풍토를 낳게 된 큰 배경이 됩니다.

먼저 글에서 김규항의 비평계와 지식층에 대한 적대감이 심정적으로는 이해간다고 했었지만, 저는 김규항의 글에서도 그와 같은 관점에서의 관심과 숙고와 비판, 또 거기에 수반되어야 하는 진지성과 열정이 담긴 글들을 접해본 적이 없습니다.

배운 사람들이라고 해도 대체로 둔감하고 무지하기 짝이 없었고 <한류!> 라고 하면 그저 무슨 옛날 코미디언처럼 고개 끄덕끄덕거리며 <잘 돼야 할 텐데!>하는 수준에 불과했던 거죠. 그 결과 우리는 무엇이 문화적 가치이고 무엇이 정신적 가치이며 자부심인지에 대한 철저한 망각과 혼돈 속으로 빠져들어 있습니다.

다문제일

2007.09.15 22:00:28
*.145.59.152

디빠들과 동일한 저연령적인 흑백논리에서 논의의 첫걸음을 떼면 지식인들의 수사를 흉내내고 반자본적인 제스처를 취해 봤자 지적이고 문화적인 글을 쓰실 수 없답니다.

1. 내 맘에 안 드는 한국 영화계=충무로.
(내 맘에 드는 한국 영화계=비충무로.)

2. 영화 언론은 충무로에 매수.

3. 충무로 시장 전략의 알파와 오메가는 애국심 호소.
.
.
.
뭐 님 수준 문제겠습니까. 대한민국 수준 문제죠.

"<디 워>를 비판하는 입이라면 마땅히 무엇무엇도 비판했어야 옳은데 평론가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는 논리 구사도 디빠들이 차고 넘치도록 생산한 것들인데,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내지 '내가 못본 건 세상에 없는 거다' 식의 유아적 사고가 배어 있는 말과 글의 허섭쓰레기들이죠.

김기연

2007.09.15 23:05:01
*.39.243.88

다문제일/ 내가 쓴 글에서 무엇이 문제란 건지요? 디빠들이 차고 넘치도록 생산한 무언가에서 정당한 질문이 하나라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신의 자신에 대한 과대망상과 오만일 뿐이죠.

그들이 <애국심 호소 충무로는 하지 않았나?> 할 때 당신은 무어라고 대답할 겁니까?

무식한 디빠 논리니까 허접쓰레기라고 대답할 겁니까?

당신이 내 글에서 불만을 제기하고 대답하려 한다면, 아니다 당신은 무언가 잘못 알고 있다며 거기에 대한 적절한 사례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나는 내가 제기한 문제에 대해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사례를 제시했으니까요.

하지만 당시에겐 그런 성의나 자세가 되어 있지도 않지요.

당신이 알고 있는 바가 대체 무엇입니까? 얼마나 대단한 것을 알기에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은 채 이토록 거만하게 잘난 체하는 건가요?

나는 충무로가 맘에 들지도 않고 맘에 들지 않지도 않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충무로와 내가 말하는 충무로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역시 충무로입니다. 이것이 이상한 말처럼 들린다면 당신이말로 전형적인 유아론적 사고에 빠져 있는 거지요.

나는 당신을 위해 지적이고 문화적인 글쓰기를 하고 싶지도 않으니까 괜히 착각하지 마시고, 제발 주제넘게 남을 가르치려고도 하지 마세요.

봉구

2007.09.15 23:41:06
*.39.213.114

<100분 토론>때 김조광수 대표도 '스크린 쿼터 축소 반대할 때 충무로도 애국심 호소 했었다'라는 인정은 했었죠. 다만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 전체 시장의 크기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는 소박한 목적에서 그런 것이었다라고 양해를 구했었습니다. 충무로는 영화산업일 뿐이고, 영화산업구조의 독점화가 진행되면서 '대중'에 대한 접근을 '마케팅'으로 처리하려는 경향이 강해지는 것은 필연적이죠. 다만 처리당하는 입장에서 불만이 없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영화 매체들의 입장을 좌우하는 제1변수는 투자/배급을 독점하는 메이저들이고 나머지 변수들에 비해 그 힘이 점점 강해지고 있죠. 분야 막론하고 다른 매체들도 마찬가지구요. 미디어가 제 목소리를 내기 어려워지고, 대중은 대중대로 에세이 수준 이상의 평론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 우리나라 영화시장에 '마케팅'만 횡행하는 이 상황을 심형래가 이용한 것이고, 그런 상황을 만든 데는 분명 영화산업쪽의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김기연

2007.09.16 02:28:56
*.39.243.88

봉구님 저도 그 발언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토론에서 그 부분은 매우 흐지부지하게 넘어갔을 뿐입니다. 왜냐면 설사 다양성을 위한 목적론을 제시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상태에서는 개선의 여지가 없고 악화될 뿐이라는 것은 자명하고 - 한국영화산업 내부의 독점자본화가 헐리우드 뺨치고 돌려치는 수준으로 치닫고 있는 점은 작년 괴물 소동 때 백분토론에서도 지적된 바입니다 - ,

겨우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더욱 더 막대한 이익을 올린 투자자들의 도의심이나 관용에 기댄 돈부스러기로 언젠가는 그 다양성인가 뭔가를 추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그 쪽 바닥 사람들이 가진 사고라든가 희망이라든가 하는 청사진의 베이스를 보일 뿐이니까요.

그러기 위해서 어쨌든 더 많이 봐야 한다, 천만관객이면 좋고 이천만관객이면 훨씬 더 좋고 이는 한국영화를 위한 <축복이다>.... 이 식이죠. 사정이 그렇다면 이건 양해를 구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이런 식이라면 어떤 제정신 가진 관객이 그 소박한 목적을 위해 <그렇담 앞으로 더욱 열심히 내 주머니를 털어서 영화를 보겠습니다!> 하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있죠. 네, 그것이 문제인 겁니다. 그것이 제가 문제삼고 싶은 것입니다. 실제로 한국사회에서는 이러한 터무니없는 논의가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산업의 발전을 위해 더욱 열심히 한국영화를 소비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천만관객> 영화 뜨면 <밀어주자>는 소리가 나옵니다.

그래서 저는 윤형님의 <올바른 정치적 소비와 선택>이란 것이 적어도 지금의 상태에서는 관객의 영화보기를 위한 적절한 관점이나 제안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한 것이구요.

즉 이미 다양성의 선택이 있는 환경이 마련된 가운데, 그런 가운데 관객의 시야가 고도화되었을 때에야 올바른 정치적 소비란 것이 기대될 수 있는 것이지, 다양성의 선택을 위한 정책적인 의미에서의 올바른 정치적 소비란 것은 적어도 저의 시각과는 부합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논쟁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고 다만 소견일 뿐이라고 했음에도 사정은 이렇습니다.

그저 자기의 하찮은 만족감과 허영심을 위해 다른 사람의 논지를 훼손하며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속을 상처입히기에만 눈이 뜨이고 귀가 트인 사람들이 어딘가에 꼭 하나씩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둘 더 모여서 우글우글거리게 되면 김규항 블로그 짝이 나는 거죠.

저기 위에, 다문제일이라는 사람 잘 들으세요. 날 보고 반자본적인 제스쳐를 취했다고 했는데, 당신 제정신입니까? 날 알아요? 내가 미친사람으로 보입니까?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 앞에 나서서 주절주절 정치적 제스쳐를 취할 만큼 미친사람으로 보는 근거가 당신에게 분명한 겁니까? 흉내를 내요? 내가 원숭이로 보입니까? 허접쓰레기라는 말도 거침없이 쓰는데 당신이 보인 것과 같은 글이 쓰레기라고까지도 못하겠고 그냥 아무런 실체가 없는 허접이라고 하는 겁니다. 어디서 배워먹은 행태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건 당신 친구들한테나 하세요. 난 당신 친구가 아닙니다.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 틱틱 갈겨놓는 글쓰기가 무언가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진지한 생각들을 말해보려는 사람들, 말해보고픈 사람들, 나와 같은 이른바 <듣보잡>인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을 얼마나 상처내고 닫혀지게 만드는지,

그 세치혀를 조심하지 않으면 당신과 같은 사람들은 한평생 단 한 순간도 세상을 위해서나 스스로를 위해서나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살펴 볼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무슨 지식을 제대로 배운다거나 마음을 바로잡는다거나 하는 정도는 고사하고 그 추한 입이나 좀 닫아놓고 생각을 하든 판단을 하든 하는 습관을 길러보도록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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