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정말 참을 만큼 참았다. <신현모양처>의 허명필(김호진)을 보는 순간 나는 정말로 뚜껑이 열리고 말았다. 드라마가 나빴다는 건 아니다. <신현모양처>는 최근 방영된 드라마 중 가장 감명깊은 드라마다. 어떤 의미에선 작가의 지독한 관념론에 기대고 있었던 <고맙습니다>와 같은 드라마의 감동보다, 훨씬 높은 차원의 감동을 보여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소소하게 억압받았던 이들의 처지가 연대의식에 의해 위로받고 주체적인 결단에 의해 (어느 정도는) 뒤집히는 판타지를 관람하는 것은 언제나 기분좋은 일이다. 비록 주인공인 경국희(강성연)의 처지는 아직 좋지 않을 지라도. 그것도 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 어느 정도는 시정이 될 테고.
문제는 이 드라마의 한쪽 측면을 지탱하는 어떤 판타지다. 그 판타지가 이 드라마에만 나온 것도 아니고. 요새 드라마에선 아예 ‘마초’를 보기가 힘들다. “밖으로 집결!!”을 외치는 <메리대구 공방전>의 무협소설 작가 강대구(지현우)가 차라리 요 근래 드라마에서 마초에 가장 가까운 인물인 것 같다. 많은 드라마들은 ‘마초만도 못한 찌질한 남자’들을 그리는데 골몰해 있다. 지금 그 극한에 <신현모양처>가 서 있다. 그런 남자 많으니까, 그것 자체가 불만인 건 아니다. 왜 그런 남자들을 그릴 때 언제나 그들을 ‘문어체 남성’으로 묘사하냐는 것이 한 마리 문어체 남성인 나의 불만이다.
<내 이름은 김삼순> 1화, 민현준. “지금 너의 몸 속에는 폭력적인 행동을 유발할 수 있는 호르몬이 가득차 있어.” 뭘 이딴 것을 문어체 남성이라고. 나같으면 “그럼 지금 네 대갈빡에는 지적으로 저능한 소리를 지껄이는 호르몬이 가득하냐?”라고 쏘아붙여줬을 것을. <신현모양처>에서 허명필이 잘난 척하며 아내에게 “너는 뇌에 보톡스 맞았냐?”고 할 땐 어떻고. 그렇게 지껄이던 인간이 다음날 눈앞에 있는 대머리 방지 약을 못 찾아서 헤맸다면 (김호진씨 머리숱이 좀 없긴 없더라.) 마땅히 “니 눈깔에는 뉴런이 장착이 안 됐는가봐?”라고 쏘아붙여줘야 할 것 아닌가.
대사빨로 유명한 김수현 할머니까지 포함해서, 어설픈 문어체 남성들을 문어적으로 단죄할 기회는 주지 않고 문어체 남성 전체를 나쁜 놈으로 몰아가고 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그들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1) 문어체 남성은 잘난 척을 한다. 2) 문어체 남성은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다. 3) 문어체 남성은 그 인기를 토대로 양다리를 걸치거나, 바람을 핀다. 4) 대개의 한국 남편들을 그래도 바람을 피면 아내에게 잘해주는데, 오직 문어체 남성만은 바람을 펴도 반성은 않고 요상한 자기 정당화 기제를 들이대며 아내를 괴롭힌다. 5) 대개 아내들은 그들의 궤변에 그 자리에서는 당한다.
이 모든 전형성은 전적으로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첫째로 문어체 남성은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다. 인기가 없으니 당연히 양다리를 걸치거나 바람을 피기도 어렵다. 궤변? 특별히 배운 놈들이 궤변을 더 잘 구사한다는 얘기는 못 들었다. 나는 어휘력이 빈곤한 이들이 어떤 궤변을 개발새발 펼치는지 너무도 잘 안다. 여자들이 문어체 남성들의 궤변에 당한다고? 그것도 헛소리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그 정도로 지적인 사람에 대한 존중심이 있다면 오죽 좋았을까. 어휘력이 부족한 궤변이든, 어휘력이 풍부한 궤변이든, 여자들은 참거나 참다가 안 되면 하이톤으로 소리를 빽 지르거나 한다.
남자들이, 특히 남편들이, 지들이 좀 더 싸돌아다닌다는 이유로 여자들을 무시한다는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문어체 남성이 아니다. 문어체 남성은 한국 사회에서 정말로 적다. 내가 군대에 갔을 때 이런 일이 있었다. 나는 처음에 ‘다나까’로 말을 끝내라길래 문어체를 쓰면 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조교에게 가서 “조교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서울에서 여기까지 편지가 오가는데 며칠이나 걸립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조교가 “너... 참 말을 이상하게 하는 구나?”라고 말했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훈련병들이 다 웃었다. 내가 상병 5호봉 때 <연애시대>가 방영되었는데 거기서 조민기가 교수님으로 나왔을 때, 내무반의 우리 고참들은 이렇게 말했다. “야... 저 아저씨... 꼭 한윤형처럼 말한다!” 그들에게 나는 문어체 남성의 보통명사였다. 왜 군인들이 무조건 ‘말입니다’로 말을 끝내겠는가. 구어체 쓰면서 ‘다나까’로 말을 맺으려면 그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는 거다.
차라리 <아줌마>의 장진구나 <내 남자의 여자>의 홍준표가 <신현모양처>의 허명필보단 낫다. 장진구나 홍준표는 문어체 남성들이 삽질을 할 때 어떤 곤경에 처하는지를 보여준다. 허명필은 그게 아니라, 어머니에게 어리광 부리다 그 자질 그대로 아내에게 어리광 부리는 ‘애’로 나오는데, 그 주제에 문어체로 잘난 척을 한다. 이쯤이면 여자 입장에선 ‘절대악’이다. 왜 그런 인물의 주둥아리에서 문어체가 나오도록 하는 걸까? 한국 남자들이 얼마나 되도 않은 구어로 효과적으로 잘난 체를 하는데? 그리고 왜 그런 ‘아이’를 거두어 주고 싶어하는 부르주아 여성까지 만들어 놓은 걸까? 어떤 여자가 그런 남자를 거두고 싶어한다고? 경국희와 아줌마들의 입장에서는, 그러니까 큰 틀에서는 이 드라마는 좋은 드라마다. 하지만 악역들을 묘사하는 디테일에서 이 드라마는 한 부류의 소수자들- 즉, 나와 같은 문어체 남성들-에게 크나큰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비슷한 놈들은 끼리끼리 노니까, 내 주변에는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문어체 남성들이 있다. 그 친구들이 개차반이냐고? 글쎄, 보는 이에 따라서 다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 친구들보다 훨씬 개차반인, 초딩 수준의 어휘력으로 완벽한 구어체를 구사하며 재수없이 잘난 척하는 인간들을 굉장히 많이 만났다. 문어체 남성들은 적어도 자기보다 어휘력이 좋은 문어체 남성을 만나면 쫄기라도 한다. 하지만 빈약한 어휘력에 구어체로 잘난 척 하는 것들은 젊은 나이에 자기가 세상 경험 다 해본 것처럼 잘난 척을 하고 심지어 자기보다 경험이 많은 노인네들을 만나도 그 뻣뻣한 모가지를 숙일 줄도 모른다.
요약하자면, 재수없는 남자는 세상에 그득하다. 하지만 그들을 문어체 남성이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왼손잡이> 가사를 인용하자면, “우린 아무 것도 망치지 않”는다. 제발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라. 괜히 비주류인 인간들을, 무슨 이상한 주류인 것처럼 만들어서 쓸데없이 까대지 말고. 만약 어떤 멍청한 구어체 남성을 어떤 여성이 ‘문어체 남성’으로 착각한다면 그건 그 여성분의 어휘력이 부족한 것에 책임을 돌려야지 문어체 남성의 죄는 아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