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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 내가 싫어하는 이유들

조회 수 863 추천 수 0 2007.06.10 13:22:16
 

변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창해(2005)


*판타스틱에 히가시노 게이고 책 리뷰를 보내면서 못 다한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글이다.

*이 리뷰는 <변신>을 까는 것이다. 하지만 이후 쓰게 될 <아내를 사랑한 여자> 리뷰는 무지막지한 칭찬이 될 게다.    


소심한 성격인 주인공 나루세 준이치는 머리에 총을 맞고 뇌이식 수술을 한 후 자신을 잃어가는 듯한 느낌에 괴로워한다. 뇌이식 수술과 그로 인한 자아 정체성 혼란은 SF소설에서 흔하게 다루어 왔던 소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성격이 변해가는 이유를 도너(donor : 신체의 일부를 제공한 자, 이 경우엔 뇌를 제공한 사람)에게서 찾는 순간, 문제는 도너의 성격이 무엇이었는가, 수술을 시행한 연구진은 무엇을 숨기고 있는가, 숨겨진 ‘진짜’ 도너는 누구인가 등으로 요약된다. 그의 삶 전체가 이러한 비밀을 규명하지 않고는 해명될 수 없는 투쟁의 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이 히가시노 게이고가 SF소설의 통속적인 설정을 들여와 미스터리물을 만드는 방식이다.


그러나 <변신>은 통속적인 설정을 들여와서 이상하게 만들어 버린 것 같다. 아예 뇌 전체를 이식하는 수술이라면, 사람들은 대개 원래 뇌의 주인의 의식이 남을 거라고 기대하며, 그의 의식이 새로운 몸에서 적응하는 과정을 관찰할 것이다. 뇌가 의식현상을 관장하는 기관이며 사실상 그것의 전부라고 믿는 물리주의의 관점에서 얘기가 진행되겠지만, 주인공은 문득 ‘몸’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느끼며 당혹스러워 할 것이다. 물리주의에서 불가지론으로 관점이 옮아갈 수도 있고, 주인공 혹은 의료진들은 검증되지 않은 새로운 가설이나 깨달음을 제시할 수도 있다. 이 정도가 SF소설이나 판타지소설이 이 문제를 다뤘을 경우의 일반적인 문법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변신>의 주인공은 진짜 도너가 누구인지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 뇌의 20% 정도를, 그것도 체질에 적합하다고 판정된 뇌의 일부를 이식했을 뿐인데, 자신의 성격이 전혀 다른 것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는 공포 때문이다. 이는 남자 주인공이 사변을 통해 자기 내부의 이물질을 조심스럽게 자각하는 SF의 문법에 어긋난다. 그렇다면 어째서 도너의 성격이 호스트(host : 신체의 일부를 이식받는 사람, 이 경우엔 주인공인 나루세 준이치)를 압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합리적으로 제시되어 있는가? 저자의 다른 소설인, 히로스에 료코 주연 영화로 유명한 <비밀>에서야 고작 두 세 명의 평범한 사람이 추리하고 있을 뿐이기에 그것이 그들에게 상식적인 설득력과 심정적인 위안을 줄 정도의 내용이면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의료진이 등장하는 <변신>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변신>의 도겐 박사는 일부에 불과한 이식된 뇌가 전체 의식을 통괄하는 것에 대해 “도너의 의식이 나루세의 잠재의식에 불을 붙이고, 다시 영향을 증대시키는 공명현상을 낳고 있는 것”이라 설명한다. 뇌과학과 정신분석학을 엮어서 설명하다니. 내가 알기론 양자는 전혀 다른 범주의 학문이다. 억압된 잠재의식이 활성화된다는 것은 뇌파를 스캔해봐도 알 수 없는 이야기다. 플로지스톤이나 에테르가 존재하지 않음을 엄격하게 증명할 수 없는 것처럼, 그런 일이 전혀 불가능하다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개연성이 심하게 떨어지는 것 같다. 차라리 시미즈 레이코의 <월광천녀>에서처럼 달의 힘을 받아서 도너가 호스트를 장악하고 있다고 설명하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게다가 이런 식의 설정을 통해 완전히 묻혀버리는 것은 도너로 밝혀지는 살인범 교고쿠 슌스케의 인간성이다. 물론 소설은 그의 아픈 과거를 제시한다. 그러나 주인공 나루세 준이치는, 자신이 교고쿠 슌스케로 변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완전히 그로 변하게 된다면 잔혹한 살인범이 될 거라는 것만 인식하지 교고쿠 슌스케의 인격이 살인범이 아닌 다른 형태로 발전할 수 있었을 가능성은 떠올리지 못한다. 만일 그의 성격이 교고쿠 슌스케의 것으로 완전히 변한다 해도, 그는 여전히 나루세 준이치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지닌 교고쿠 슌스케일 것이며, 두 사람은 공존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자신을 위해 할 일은 그저 나루세 준이치를 강박적으로 지키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아니라 슌스케의 인격, 혹은 성격이 살인범의 그것으로 전락하지 않을 방법을 찾아내는 일이 아니었을까?


그 인격이 준이치의 것이냐, 슌스케의 것이냐의 문제도 너무 가볍게 다뤄지고 있다. 준이치는 그림을 잘 그리고, 슌스케는 피아노를 잘 친다든지, 준이치가 좋아하는 여자가 메구미인데 메구미가 더 이상 예쁘게 보이지 않으면 슌스케의 인격으로 변한 것이라든지, 이런 설정은 헛웃음이 나올 뿐이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고, 인간이 그렇게 단순한 동물은 아닐텐데. 


교고쿠 슌스케의 쌍둥이 여동생, 교고쿠 료코를 만났을 때의 에피소드를 보면 심지어 마음이 아프기 까지 하다. 교고쿠 슌스케의 인격을 가진 이가 살인범으로 전락하는 걸 막으려 했다면, 그를 사랑하는 쌍둥이 여동생 곁에 두는 게 가장 바람직했을 것이다. 설령 두 사람이 연인이 된다 해도 말이다. 게다가 이젠 ‘몸’이 다르니 근친상간도 아니지 않은가? 더 이상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메구미)를 옆에 두고 계속 좋아해야겠다고 강박적으로 다짐하는 것보다야 훨씬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비밀>에서 아버지와 (아내의 영혼을 가진) 딸 사이의 육체적 관계를 허용하지 않았던 그 조심성으로,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들의 관계를 허락해 주지 않는다. 준이치가 슌스케로 변하고, 살인범으로 전락하는 극단적인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작가가 너무 잔인하게 개입한 것이 아닌지?


그래서 나는 <변신>이 싫다. SF소설을 모르고, 뇌과학이나 정신분석학에도 관심이 없어야, “와우. 재미있는 설정이다. 소름이 끼친다.”고 느낄 수 있는 소설 같아서. 인간에게 너무 잔인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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