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이 상황들이 잘 이해되지 않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문제를 넘어서는 일일 수 있다. 어쩌면 ‘마왕’이라는 단어에 스며들어 있는 서구적인 ‘악’의 개념에 생소하기 때문에, <마왕>이 붙들고자 하는 분위기가 우리에게 전달이 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왕>은 <부활>의 제작진이 다시 뭉쳐 만든 드라마로 기대가 높았고, 아직까지 시청률은 낮지만 마니아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수많은 단서들과 복선, 짜임새 있는 구성 등을 근거로 두 드라마를 같은 부류로 묶기에는 주저함이 있다.
   

<마왕>은 어떤 지능적인 살인범이 형사인 오수(엄태웅)에게 단서를 하나씩 던지는 듯한 구성이다. 또한 시청자들에겐 사건의 주모자인 것처럼 보이는 승하(주지훈)가 내뱉는 알듯 모를 듯한 말도 단서가 된다. 그러나 이 단서들은 시청자들에게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나 긴박함을 크게 주지 못한다. 그것은 무엇인지 알아차리기가 우리에겐 버겁기 때문이다.


오수에게 날아드는 타로카드를 보자. 물론 타로카드가 일반화된 사회의 구성원이라 해도, '정의'나 '심판'카드를 보고 당장에 어떤 의미를 떠올리고 드라마 속 사건과 연결짓기는 어렵다. 하지만 오수는 해인(신민아)에게 도대체 타로카드는 무엇인지부터 물어봐야 하는 입장이다. 타로카드에 적힌 편지 문구들은 어떠한가. 1화에 등장한 "진실은 친구들을 자유롭게 해주지 않는다. 헌법 제 11조 1항" 정도는 실제로 그 헌법 조항을 찾아본 후 비교해서 무언가를 추론할 수 있다. 하지만 2화에 등장한 "모든 요소가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 하나하나가 밀접하게 살아서 움직인다"에 대해, 우리는 3화에 해인에게 그것이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대사임을 확인받아야 한다. 또 "파우스트가 뭡니까?"라고 물어보는 오수에게 해인은 서양인이라면 누구나 그 설정과 결말을 알고 있을 [파우스트]의 대략의 내용에 대해 설명해줘야 한다. 승하가 던지는 암시 역시 마찬가지다. 해인은 승하가 읽던 스캇 펙의 [거짓의 사람들]에서 어떻게 아름다운 빛의 천사 루시퍼가 사탄으로 전락했는지에 대한 구절을 발견하고 낭독한다. 이건 마치 모건 프리먼과 브래드 피트가 등장한 영화 <세븐>에서 도중에 누군가 "그러니까 천주교의 칠죄종이란 게 도대체 뭡니까?"라고 외치는 꼴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에서 해인은, 마치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레골라스가 그러는 것처럼 '포털서비스 지식검색'의 역할을 해야한다. 이런 상황들은 분명 미스터리물의 긴장감을 떨어뜨린다.
   

하지만 이 상황들이 잘 이해되지 않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문제를 넘어서는 일일 수 있다.어쩌면 '마왕'이라는 단어에 스며들어 있는 서구적인 '악'의 개념이 생소하기 때문에, <마왕>이 붙들고자 하는 분위기가 우리에게 전달이 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왜 악에 굴복하는가]라는 책의 저자인 찰스 프레드 앨퍼드는 일찍이 한국인의 심성에는 서구의 '악'에 대응할 만한 개념이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즉 '선'과 이분법적으로 대비되며, 마치 외부에서 우리를 타락시키는 '악'에 대한 개념이 우리에겐 없다는 것이다. 한국인으로서 그 말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우리의 관념세계엔 선(Good)과 악(Evil)의 개념보다는 좋음(Good)과 나쁨(Bad)의 개념이 더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푸닥거리하는 무당은 온갖 잡신들에게 나쁜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혹은 나쁜 일을 벌이지 말아달라고 간청한다. 우리는 온갖 '나쁜 일'들에 대해선 쉽게 상상하지만, 그것들을 보편적으로 추상하여 어떤 '악'으로 묶는 것엔 주저하고, 게다가 그것을 주관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에는 이르지 못한다.


<부활>에서 서하은(엄태웅)은 신을 향해 "당신이 진정 존재한다면 절 탓하지 못할 겁니다"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 말부터가 자신의 복수를 정당한 것으로 이해하는 시선을 깔고 있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이나 박찬욱의 복수극들에서 볼 수 있듯, 원래 복수하는 자의 심리는 다른 이들이 챙기지 못한 '정의'를 사적으로 실현하겠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인들은 유교 사회에서조차 충(忠)보다 효(孝)를 더 앞세운 나라답게 가족과 관련된 원한에는 정서적으로 관대한 경향이 있다.


그런 상황에서 원한을 가진 자신을 '악'으로, 빛에서 추락한 어둠으로 지칭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것은 기독교적인 선악개념과 죄의식을 뼛속 깊이 밑바탕에 깔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왕>은 전혀 다른 문화의 맥락에 와서 고생하는 한 불쌍한 서양 악마의 이야기이며, 승하가 천주교 신자라는 설정 또한 그 불행을 감추기 위한 필사적인 봉합의 시도로만 보인다. 현재까지 <마왕>이 시청자들에게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한윤형 (드라마틱 21호, 2007년 5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sort
941 이명박과 폭력시위, 그리고 주민소환제 [13] 하뉴녕 2008-06-08 1579
940 김용과 주성치 [7] 하뉴녕 2007-10-13 1576
939 쉽지 않은 성매매 논쟁 [1] 하뉴녕 2004-09-25 1569
938 [펌] 중권고교 1화 - 질문자의 전학 [24] 하뉴녕 2008-06-15 1560
937 [펌] 김택용 테란전 하뉴녕 2008-01-01 1551
» 마왕 : 엉뚱한 곳에 와서 고생하는 서양의 '마왕' 하뉴녕 2007-05-27 1546
935 두 개의 대체역사소설 [8] 하뉴녕 2008-04-12 1544
934 블러드플러스 [15] 하뉴녕 2007-10-29 1543
933 [황해문화] 루저는 ‘세상 속의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부분공개) [5] 하뉴녕 2009-07-25 1541
932 노혜경 님의 허수아비 논증에 대해. 하뉴녕 2003-07-25 1536
931 지금이 노무현 탄핵 투쟁을 할 때다 하뉴녕 2004-06-29 1528
930 김동렬의 최장집 비난에 대한 핀잔 [3] 하뉴녕 2007-01-29 1522
929 유토피아, 그리고 좌파의 유토피아. 하뉴녕 2003-06-20 1519
928 호빗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9] 하뉴녕 2007-10-06 1517
927 [씨네21/유토디토] MB냐 관료주의냐 [6] 하뉴녕 2008-12-19 1515
926 딴지일보 기사 리플에 대한 답변 [13] 하뉴녕 2009-08-28 1509
925 강준만의 노무현 비판을 보고 하뉴녕 2004-08-26 1507
924 반지의 제왕 : 톨킨의 향기를 느끼다. 하뉴녕 2003-02-10 1505
923 [경향신문] ‘허수아비’ 대학 총학생회 [1] 하뉴녕 2009-12-12 1499
922 민주노동당 : 이건 분당이 아니라 파당이다. [15] [6] 하뉴녕 2008-01-02 14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