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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자살하지 말아야 할 이유

조회 수 1264 추천 수 0 2006.01.10 13:43:00
글쎄, 그런 이유가 있을까? 여하간 카이만, 군인, 상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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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9월의 일일 것이다. 8월에 크게 휴가를 다녀오고 휴가적응도 미처 안 된 상태에서 보급병들의 지병인 검열병에 시달리던 나는, 그 즈음 모든 고참과 간부들로부터 전방위 갈굼을 먹는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검열을 나흘 쯤 앞두고 당시 나의 처부장이었던 간부가 밤중에 나를 불렀다. 본인이 당직근무를 서면 처부 계원들에게 야간 작업을 권유(?)하는, 군간부들의 바람직하지 못한 관습의 연장선상이었다.

업무에 대해 알려주겠다며 불러내렸지만 업무에 대해선 별 말이 없었고 1시간 내내 갈굼이었다. 불침번 초번을 서고 12시쯤 지휘통제실로 내려가 1시가 넘어서야 중대로 올라올 수 있었다. 그래, 그것은 좋았다. 그 즈음의 나는 하도 갈굼을 많이 먹어서 갈굼에 내성이 생긴 상태였기 때문이다. 당시 L병장은 ('고참의 취향'에 나오는 나와 친한 L상병이 어느덧 말년 병장이 되었다.) "맞아. 지금은 별로 안 아파. 근데 나중에 갈굼 안 먹는 추세로 간다 싶었는데 간혹 갈굼먹는 상황이 오면 그럴 땐 무지하게 짜증이 나. 짜증이 팍 나서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내 밑으론 다 뭐한 거야!!!!'라고 외치게 되지."라고 얘기했었는데, 비록 나는 후임을 찾기는 커녕 후임들이 뭐하고 있나 주위를 두리번 거린 적조차 없었지만 여하간 나중에 먹는 갈굼이 더 짜증이 났던 건 사실이다.

그때, 내가 자괴감에 한숨을 내쉬며 중대로 올라와 잠을 청하려 했을 때, 중대를 통제하는 당직부사관은 마침 우리 분대의 분대장이었다. 그 즈음엔 그조차도 나를 싫어하고 있었고, 내가 신고를 하고 취침한다고 하자 정말로 의례적인 '고생했어.' 한 마디로 나를 돌려보냈다.

문제는 그 다음날 아침이었다. 식탁에서 분대장은 -지금은 이미 전역한지 몇 개월 지난 사람이다.- 어제의 일을 언급하며, 내가 중대에 올라가기 전 간부의 전화를 받았다고 얘기한 것이다.

"전화해서 그러더라구. '카이만 방금 중대로 올라갔다. 3분 내로 안 올라오면 전화해라.'라고."

그 순간, 자괴감으로 인해 억압되어 있던 내 본성의 가장 저열한 부분이 깨어났다. 그 녀석은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더니, 한번의 러시로 내 감정을 지배해 버렸다.

'아, 그러니까, 그는 자기 자신이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권능을 가졌다고 믿었던 게로구나. 감히 말이야.'

존중해야 할 이유를 세 가지도 찾기 힘든 한 남자가 우연히 내 인생의 한 시간대에서 나의 상관이라는 이유로 그런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는 그 사실이 나를 자극했다. 나는 웃어버렸다. 얼굴로는 미소를 지었고, 마음 속으로는 깔깔깔 웃어제끼고 있었다.

그날은 내가 자살하지 말아야 할 가장 큰 이유를 발견한 날이었다. 내가 자살하면, 어떤 어줍잖은 인간이 나의 죽음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려 들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가장 가혹한 경멸의 방식이 될 터였다.

물론 디오게네스식으로 따지자면, 죽어버리면 경멸감을 느낄 그 녀석이 없어지니 상관이 없는 일일 테지만, 나는 그러한 쪽팔림과 함께 한 세상 하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날 이후 나는 조금 변했다. 단순히 갈굼을 잘 참는다는 수준이 아니라, 좀더 자신감 있고 능글능글하게 간부들과 고참들을 대하게 되었다. 나에겐 그럴 필요가 있었다. 그들에게 나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한을 허락해 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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