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그래도 언니는 간다 -
김현진/개마고원
10대에 첫 책을 낸 후 단행본을 다섯 권도 넘게 냈지만 이름이 흔하고 시대가 병신이다 보니 나같은 인간이랑 같이 ‘20대 논객’으로 얽혀서 거론되기도 하는 그녀의 책에 대해 리뷰를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단행본 짬밥 소거당하고 나랑 같이 엮이는 것도 억울할 텐데, 새로 나온 책이 ‘그분’의 서거로 인해 안드로메다로 사라질 지경이다. 그분이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인 거야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개별적인 사건들은 일어나고 그 사건들에 대해 우리는 말을 해야 한다.
나는 사실 김현진의 책을 읽기를 철학책 읽기보다 더 어려워하는 편이다. 물론 이건 취향문제다. 내 관점에서 볼 때 그녀의 글은 언제나 너무 달거나 너무 쓰다. 말하자면 그녀의 책은 성분비율이 일정치 않은 카카오 초콜릿의 다발이다. 하나하나 까먹으면 맛있을 수도 있지만, 주식으로 삼는다거나 소주를 까놓고 오래도록 안주로 즐기기엔 좀 그렇다. 좋게 표현하자면 글 한편 한편의 완결성이 단행본 전체에 대한 몰입을 방해하는 거다.
김현진의 글을 읽는 사람은 그녀가 놀랍도록 깔끔하고 알기 쉽게 경험이나 사태를 정리한다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녀의 글은 팬시하다. 하지만 문제는 그 팬시함의 정체는 무엇이냐는 거다. 벤야민의 특이한 문체가 논문을 쓰지 못하고 잡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본인의 처지에서 나오듯이, 나는 김현진의 문체 역시 그녀가 여러 잡지에 기고를 하면서 하루하루 살아왔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여기까지는 별스러울 것 없는 분석이다. 하지만 그 팬시함을 낳은 그 글쓰기 활동의 이력이 그녀가 언제나 스스로 벌어야 할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나왔다는 유물론적 조건까지 말한다면, 이 사태는 하나의 역설이 된다.
그녀의 글은 깔끔하기는 하지만, 정서는 대개 ‘한번 더 건드리면 울어버릴 것 같은 여자아이’의 그것이다. 이것 역시 ‘대중적’이지만, 그것도 가진 것이 없는 그녀의 환경에서 나왔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그녀는 생활을 위해 역설의 조각들을 차곡차곡 채워나간다. 이 책 역시 그러한 기록의 연장선이다. 그녀가 시나리오를 썼지만 망해버린 (나는 ‘썼다가 망해버린’ 이라고 쓰다가 리뷰 안 써도 좋으니 제발 까지는 말아달라는 저자의 당부를 떠올리며 문구를 고친다.) 영화 <언니는 간다>를 패러디(?)한 제목 역시 그러한 역설에 부합한다. (영화가 망했어도 언니는 가야지...)
그런데 여기서 다시 한번 찾아오는 반전, 그녀의 이번 책을 이전의 것들과 구별짓는 반전은 그런 그녀가 사회문제에 대해 발언하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하긴 탈학교론이나 신세대 담론의 상징처럼 활용된 십대 시절의 <네 멋대로 해라> 이후의 글쓰기도 정치적이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그녀의 글쓰기의 방향을 그러한 ‘새로운 형태의 정치의식’에서 ‘오래된 형태의 정치의식’으로 돌려놓았다. 그녀가 구닥다리가 되어서가 아니라, 사회 자체가 그렇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참여정부 말에 시사저널 사태를 겪고 시사in에 필자로 합류하면서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형태의 김현진의 새로운 글쓰기가 시작되었다고 알고 있다. 여기서 ‘새로운’이란 표현은 의미가 없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문체나 정서는 여전히 그대로니까. 여기서 역설은 다시 한번 뒤집혀서 역설의 역설이, 혹은 지나치게 반듯한 것이 된다. 돈 없고 가난한 여성 필자가 돈 없고 가난한 걸 한탄하면서 돈 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을 옹호하는 진귀한(?) 사태가 벌어진 거다.
그렇게 이루어진 김현진과 개마고원의 만남은, 비록 이 팔릴 만한 책의 판매부수가 지옥의 바닥으로 가라앉을 지라도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표지는 ‘개마고원’이란 네글자를 뺀다면 도무지 개마고원의 것 같지가 않다. 하지만 여러분은 김현진의 글 속에서 개마고원이라는 출판사가 지향했던 것들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른다’고 눙친 것은, 이 초콜릿 더미에 손을 집어넣어 하나를 꺼내들었을 때, 함량이 몇 프로일지 나도 보장해 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김현진은, 자신을 뒤집고 또 한번 뒤집어서 ‘상투적인 과잉’의 세계로 나아간다. 돈 없고 힘 없는 여자가 돈 없고 힘 없는 사람들 옆에서 같이 울음을 삼키며 (혹은 그냥 울어버리면서) 행동하고 지키는 것 말이다. 아무도 상투적인 일을 하지 않는 이 쿨한 시대에 생겨버린 하나의 기적이다.
김현진이 개마고원과 비정규직을 만났을 때, 종래의 김현진의 독자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게 될까? 촛불시위에서부터 시작된 그녀의 여정이 비정규직 연대 활동으로 흘러들어갔을 때, 그녀는 촛불시위의 내부인가, 혹은 외부인가?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면 조금 시간을 두고 보아야겠지만, 우리가 이 시대 젊은이들의 정치성의 향방을 예측하기 위한 좋은 지표가 될 것 같다. 아마도 이 책은 저술가로서의 김현진의 이력에 하나의 전환점, 혹은 분수령이 될 것이다. (경각심을 주자면, 여기서 그냥 폭삭 망해버리는 수도 있다!) 그리고 그녀의 여정은 “앵그리 영 걸의 이명박 시대 살아남기”라는 부제로 요약하기에는 적절치 않다는 점도 지적해야겠다. ‘앵그리’도 맞고 ‘걸’도 맞는데, 솔직히 ‘영’하진 않잖아. 영계를 밝히는 수컷들의 음험한 욕망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의 20대들이 어려서 깽판을 못 치다가 성년이 넘어서 깽판을 쳐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돌입했다는 점을 표현하기 위해서라도 (물론 김현진 여사는 어려서부터 온갖 일을 다 했지만 그건 그거고) ‘영’은 ‘올드’로 변해야 마땅하다.
“앵그리 ‘올드’ 걸의 이명박 시대 살아내기”. 좋은 캐치프라이즈 아닌가. 건투를 빈다. 책많이 팔고 많이 먹고 살아남아 다시 우리에게 책을 주기를.
새로운세상
제 기억에 당시 김현진씨는 '최연소 한예종 입학생=신지식청소년' -정확히 김현진을 신지식청소년으로 지칭하는 문헌은 없었습니다만- 으로 부각되었지 아무리 관대히 보더라도 결코 탈학교론의 상징이 아니었습니다. 차라리 창비와 이인규 교사, 그리고 조한혜정 교수가 주목했던 '(근대적) 학교(급) 붕괴'의 상징이라고 하신다면 또 모르겠습니다.
단지 고등학교를 중퇴했다고 그들에게 '탈학교론의 상징'이라는 호칭을 붙여준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당시 언론을 통해 회자되었던 김현진, 전한해원씨 같은 이들이 비록 고등학교는 중퇴했지만 이후 각각 영상원과 서울대등을 진학했던 것을 생각했을 때 이들에게 붙여주는 '탈학교'라는 명칭이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고민하게 됩니다.
제가 아는 '탈학교론'이라는 것은 엘리트 고등교육기관에 진학하기 전에 1~2년 정도 개인적인 시간을 갖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남의 좋은 경사에 괜히 초를 치는 것 같아 죄송스럽지만,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어떤 이들에게는 소중할 수 있는 기억들이, 타인에 의해 왜곡되이 기록되지 않았으면 하는 의미에서 말씀드립니다.
누군가 한윤형씨의 서평을 보면 제 리플도 보게 될 가능성이 높겠죠. 그저 그런 마음에서 남겨봅니다.
백면서생
위의 글에서 제기되는 '탈학교'에 대한 이야기는 이반 일리히가 주장한 급진적인 이론의 그것이 아니며, 탈학교 출신인 김현진이라는 개인에 대한 시대적 평가(그것이 언론이건 학계건 말이지요)를 다만 빌려온 게 아닐까해요. 글의 맥락과는 큰 연관도 없고 말이죠 ^^
물론 탈학교 출신임에도 명문대(?)에 진학함으로써 나름의 문화자본을 획득한 것은 소위 말하는 '보편적(?) 탈학교 출신'의 삶과는 다를 수 있겠지요. 저도 지나친 학벌 및 엘리트주의는 반대하거든요.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하나의 성공사례를 (서울대 가려고 탈학교하던 시대는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강의석씨는 좀 다른 맥락이긴 하죠.) 전혀 다른 외계인 급의 표본으로 둘 필요까지는 없다고 봐요.
p.s 1)새로운 세상님께서 고민하는, 혹은 메세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친구들도 이해해주리라 생각합니다. 한집단을 동일한 무엇인가로 규정하는 것의 어려움과도 그 원인이 맞닿아있다고 봅니다.
p.s 2)지식문화와는 배격된 도시에 살아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지금 국내의 탈학교 운동의 이념적 기반이나 실상은 매우 궁금합니다. 학교를 떠나는 친구들은 점점 늘어가는데 말이죠. 이건 나중에 :)
아마 탈학교론자들이 들으면 의아해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