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그 불안은 달리 표현하면 문명 자체의 불안이다. 초자연적인 생명체인 오를라는 브라질의 상파울루 지방에서 프랑스로 건너왔다고 설정되어 있다. 유럽에게 억눌리던 비유럽세계에서 나타난 공포의 존재는, 의식에 억눌리던 무의식 -내부이면서 외부인 그것-의 반란과 유비적으로 일치한다. 이 불안 속에서야 우리의 공포가 제대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유럽인이 아닐지라도, 우리는 근대적인 기획에 의해 성립한 주체이며 그런 한에서 주체의 분열에 대한 불안을 같이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판타스틱에 보낸 모파상 <오를라> 리뷰의 일부분. 말하자면 거의 끝부분이다. 오를라가 19세기 말 근대적 주체의 불안과 유럽의 균열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는 얘기인데, 쓰다보니 어쩌면 우리는 이들이 느끼는 공포의 절반밖에 못 느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체의 균열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문명세계의 균열과 정확히 일치하는 그들은, 우리에게 낯설다. 가령 미국인들에게 그들의 나라가 정의롭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데미지를 입겠지만, 한국인들에게 그렇게 말해봤자 "그래서 뭐 어쩌라구?" "그렇게 말하는 넌 한국인이 아니야. (혹은, '한국인이라면 그렇게 말해선 안돼.')라고 반응할 것이다.
이 상황은 매우 세속화시켜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오야붕과 꼬붕은 공포를 느끼는 방식이 다르다. 오야붕은 자신의 힘과 권위를 넘어서는 상황을 맞닥트렸을 때 공포를 느낀다. 하지만 꼬붕은 자신의 오야붕의 한계를 잘 알지 못한다. 꼬붕은 오야붕이 자신을 승인하지 않을 때 공포를 느낀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일상적인 삶에 균열이 생긴다 해도 커다란 공포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 상황은 우리가 미국을 충분히 닮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균열이니, 한미 FTA를 통해 그 균열을 봉합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차라리 한국인들이 공포를 느끼는 순간은, 조승희가 한국인임이 밝혀졌을 때나 (정작 미국인들은 조승희를 미국인으로 여기고 있고,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들 국가의 환상은 지탱될 수 없는데도) 미국인들이 <디 워>를 재미없다고 비난 할 때다.
,,,,,,한국의 공포소설가들은 이런 지점을 고려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이렇게 국가적(?)으로 쓰는 건 호러소설이 아니니, 한국인들을 가장 벌벌 떨게 만들 것은 한국판 톰 클랜시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에 봉합도 안 시켜주는 톰 클랜시라면, 너무 무서워서 팔리지 않으려나?
P.S 요새 글자 크기를 키워서 올리고 있는데, 마음에 드시는지? 눈팅 제현의 의견을 부탁-.
노트북 화면이 작아서 큰 글씨는 한 눈에 많이 안들어오네요. 글자 줄여서 보면 오른쪽 메뉴 글씨가 너무 작아지고..
작은 쪽 한 편 던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