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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트위터 세계에 황당한 일이 있었다. 제 이름을 인지하지 못했단 이유로 주민센터 여직원을 폭행한 민주노동당 소속 시의원 이숙정에 대한 규탄이 진행되는 와중에, 누군가가 철지난 기사를 꺼내온 것이다. 그 기사는 오마이뉴스 2008년 3월 25일자에 실린, "뉴라이트 대안교과서, <친일파를 위한 변명>과 판박이"라는 기사였다.( 해당기사 ) 이 기사를 퍼온 이들은 "신지호와 이영훈은 위안부가 자발적 성매매요 공창제라고 주장하는데 고작 이숙정이나 비판하고 있단 말인가! 왜 신지호와 이영훈을 비판하지 않는가!!"라고 생떼를 부리고 있었다.


뉴라이트 대안교과서를 나름대로 꼼꼼히 읽어본 나로서는, 이 교과서에 대한 이런 수준의 비판에 동의할 수 없었지만 이건 해석의 '질'의 문제니 그렇다고 치자. 이런 수준의 인식이 난무함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고 이미 단행본 한 권(<뉴라이트 사용후기>)에서 그 문제점에 대해 논박도 했는데 3년 지난 기사를 누가 퍼온다고 해서 또 반복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신지호나 이영훈이 종군위안부가 '자발적 성매매'라고 주장했다는 허위사실 유포에 대해서만큼은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뉴라이트 대안교과서를 비판하고 있는 해당기사에서도 대안교과서에 그런 얘기가 써있다고는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당신들은 그런 주장을 했는데 어째서 교과서엔 그런 내용을 쓰지 않았느냐고 호통을 치고 있을 뿐이다. 해당 부분을 보자.


이영훈 교수가 전국적인 유명세(?)를 누린 계기는, '정신대 발언'이다. 이영훈 교수의 당시 발언을 돌아보자.

"정신대는 일제가 강제동원한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상업적 매춘이자 공창제였다."

(...)

총선에 출마한 신지호씨도 마찬가지다. 신지호씨가 2006년 11월 당시에 주도했던 '뉴라이트닷컴'은 자유주의연대의 후원으로 전국 주요 도시를 돌며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저자와의 만남'이라는 이영훈 교수의 공개강좌를 개최한 적이 있다.

신지호씨는 '도봉갑' 주민들을 향해서도 "정신대는 일제가 강제동원한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상업적 매춘이자 공창제였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곧 죽어도 신념은 이야기하는 것, 그게 바로 학자와 정치인의 공통점이 아니던가.


즉 박형준 기자는 이영훈이 '정신대 발언'을 했는데, 그 이영훈과 신지호가 같이 놀았으니, 신지호도 도봉갑 주민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런 걸 주장이라고 하고 있다. 그래서 한동안 트윗이 돌더니 신지호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는 '자정작용'이 일어나기는 했다. 그렇다면 이영훈은?


"정신대는 일제가 강제동원한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상업적 매춘이자 공창제였다."


적어도 기사에서 큰따옴표를 달아놨으면 뭔가에 대한 인용이어야 한다. 위에서 박형준의 기사는 이영훈 교수가 실제로 이런 발언을 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사실'을 '전달'하고 있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이라고 말한 것도 아니고 "당시 그의 발언을 돌아보자."고 했다. 나는 당시 문제가 된 백분토론의 VOD와 녹취록을 꼼꼼이 훑은 사람이다. 그런 발언은 없었다. 그렇다면 위 문장은 박형준의 작문이었나? 그건 아니다. 가령 구글링해보니 한국일보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우리 국사교과서가 위안부 등 일제의 침탈상을 지나치게 과장하고 있다고 주장해 물의를 빚은 서울대 이영훈 교수는 '정신대는 일제가 강제동원한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상업적 매춘이자 공창제였다'는 취지의 발언으로도 논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는 지난해 9월 과거사 진상규명 논란을 주제로 열린 ‘MBC 100분 토론’에서 “조선총독부가 강제로 위안부를 동원했다고 어느 학자가 주장하느냐”며 “정신대 보고서를 안 읽어보고 하는 말”이라고 밝혀 정신대 할머니 등으로부터 반발을 샀다.
- 기사 원문


'취지의 발언'을 '당시 발언'으로 둔갑시킨 것은 박형준의 실수겠지만 이쯤되면 이건 박형준만의 문제가 아니다. 2004년 9월 문제의 백분토론회(과거사진상규명법에 대한 찬반토론회였다.) 당시 저널리즘 그룹 전체가 이영훈의 발언을 '오해'하고 있었다. 진보언론들이 펄펄 뛴 거야 그럴법한 일이었지만, 이영훈의 주장을 옹호해야 할 보수언론들조차 이영훈이 무슨 소리를 했는지 밝혀내지 못했다는 건 정말이지 한국 언론의 수준을 드러내는 코미디였다고 할 수 있다.


일단 이영훈은 당시 과거사진상규명법을 반대하는 패널 자리에 앉아서 토론에 참여했다. 당시 그가 해당 법에 반대한 근거를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하자면 이랬다. 1) '인권' 문제에 대한 법적 청산은 명료한데, ('친일파'란 단어에서 드러나듯) 과거사 문제에 '민족' 잣대를 들이대면 애매한 부분이 많다.(가령 일제로부터 '효행상' 받은 사람들도 친일파인가, 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2) 연구자들이 연구를 잘 해서 당시의 인권범죄들에 참여하고 협력했던 사람들의 증언도 확보하고 자발적인 성찰까지 유도해내야 과거사 청산이 의미있게 되는 것인데, 그런 과정없이 일부 사람들만 친일파라고 법적으로 공표해버리면 그 청산을 통해 우리 사회의 도덕수준이 향상될 수 없다고 본다. 즉, 그는 과거사청산을 전적으로 반대하는 입장까진 아니었고, 그 청산의 근거와 바람직한 절차 등에 대한 이견을 가지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과거사에 대한 법적인 접근에 반대했다.  


그런데 토론회의 전체 맥락을 살피면 이영훈은 "지금 개정중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법'에서 열거하고 있는 22가지 죄목 가운데, 다른 죄목에 대해서는 이의가 있지만, "일본군위안부의 강제동원에 적극 협력한 자"의 죄목에 관해서만은 그것이 인류 문명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보편적 반인륜의 범죄에 해당하므로 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끝까지 추적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 (토론 이후 이영훈의 해명서. 해명서가 실린 프레시안 기사 ) 하였다. 왜냐하면 종군위안부 문제가 '민족'의 잣대가 개입하기 이전에도 '인권'의 차원에서 심각하고 흉악한 범죄임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이건 사건 이후에 급조해낸 변명이 아니다. 미디어오늘에 실린 조귀동의 지적처럼, "토론이 시작된 지 40여분 경에 그는 '친일청산은 반대하지만 위안부, 그러니까 전쟁 성노예 같이 보편적인 반인륜범죄는 끝까지 추적해야한다'는 발언을 분명하게 했었다." ( 원문 ) 당시 토론의 녹취록을 보면 그는 "일본군 위안부"라고 말했다가 "그러니까 전쟁 중 성노예"라 고쳐 말하고 있다. '성노예'란 말은 위안부에 대한 일본군의 인권범죄를 명료하게 규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말이지만, 피해자 분들이 이렇게 불리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위안부 피해자'란 명칭을 공식적으로 대체하진 못하고 있다. 이영훈은 그런 맥락을 모두 숙지하고 있기 때문에 바로 저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였던가. 이영훈이 과거사진상규명법에 회의적이었던 이유 두 가지를 상기해보자. 종군위안부 문제는 명백한 인권범죄이므로 첫 번째 이유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도 두 번째 이유는 문제가 된다. 이영훈은 앞서 말한 두 번째 이유 때문에, 위안부 문제에 대해 토론회에서 두 가지 얘기를 하려고 했다. 첫째로, 젊은 여성들을 전쟁터로 끌고 들어가는 범죄가 조직적으로 일어나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개입이 있었다. 끌고 가는데 동참한 조선사람도 있었고,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군위안소를 이용한 조선인 남성도 있었다. 이런 이들의 증언, 자기고백, 반성 및 성찰이 함께 이루어지지 않는 일률적이고 일회적인 법적 단죄는 의미를 지니기 어렵다. 둘째로, 과거사 청산은 과거가 현재의 우리를 규정한 모습을 함께 성찰하면서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 전쟁 중 미군과 한국군과 '위안부'를 운용했고, 한국은 성매매가 지나치게 성행한 나라이기도 하다. 이런 역사적 흐름을 알아보고 함께 성찰해야 진정한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질 수 있다.


물론 이 주장들은 이영훈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법적 청산에 찬성한다는 전제 위에서 나온 것이다. 만일 이영훈이 글을 썼다면 이런 견해가 "종군위안부가 자발적 성매매라 주장했다."로 요약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TV토론의 현장에 있었고, (앞에서 위안부 범죄에 대해 무슨 얘기를 했던 간에) 과거사진상규명법 반대 패널 자리에 앉아 있었으며, 자신의 말이 대중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 그리고 문제의 그 상황이 나온다.


송영길 "지적할 게 있다. 일제 시대 정신대의 문제와 지금 미군부대의 문제를 등치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일본우익이 지금도 주장하는 것은 정신대가 총독부와 국가 권력에 의해 강제로 동원된 것이 아니라 상업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일종의 공창의 형태로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이미 증거자료에 의해 정신대는 조선총독부 권력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서 일종의 성적 노예 상태에 놓인 것으로 근본적으로 (미군의 경우와) 차원이 다르다."

이영훈 "누가 주장했나. 어느 학자가 주장한 것인가. 조선총독부가 강제로 동원했다는 게 명백하다고 말씀하셨는데..."
(해당 토론의 녹취록 일부가 실린
오마이뉴스 기사 )


이영훈이 한국 전쟁 당시 한국군 위안부와 그 이후 미군 위안부에 대해서 얘기를 하자 송영길이 그것들과 일본군 위안부의 차이를 명백히 하고자 했다. 여기서 이영훈이 "물론 나는 종군위안부가 공창제였다 생각하지 않으며, 성매매 여성이 동원된 미군/한국군 위안부와 그것의 성격이 다르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나 한국군이 일본군을 모방하여 위안부란 것을 만든 것은 사실이고, 그런 사실을 지적하고 인정하는 것 또한 과거청산의 큰 부분이다."라고 말했다면 별다른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영훈은 송영길의 인식의 한 부분에 시비를 건다.


솔직히 '민간인'의 입장에야 "일제가 끌고 갔다." / "일본이 끌고 갔다." / "조선 총독부가 끌고 갔다." / "조선 총독부 권력이 끌고 갔다." / "일본군이 끌고 갔다." 사이에 뭔 구분이 있을 거라고 여기지도 않을 거다. 이중 한 방식으로 발화하면, 나중에 자신이 정확히 뭐라고 얘기했는지 기억할는지도 의문이다. 그러나 이 각각의 문장들은 역사학자 입장에선 엄연히 다른 진술이며, 사료를 통해 입증해야 할 주장들이다. 이영훈은 그런 차원에서 송영길의 진술에 시비를 걸었다.


당시 VOD나 해당 녹취록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영훈이 일본 극우파와 '같은 주장'을 했다고 오인할만도 하다. 도대체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 알아볼 목적으로 처음부터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던 나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지금 송영길에게 이상한(?) 시비를 거는 저 사람이 몇십 분전에 다른 친일청산엔 반대하지만 위안부는 인권문제이므로 거기에 대해선 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처벌하는 것에 찬성한다고 말했던 그 사람임을 인지하기는 어렵다.


만약 역사 문제에 있어서, 1) 일본 극우파, 2) 한국 민족주의자 들의 주장만 있는게 아니라, 그 주장 사이로 여러 견해가 있음을 인지하는 사람이라면, 이영훈 교수의 발언을 통해 그가 그 사이 어딘가에 발디디고 있는게 아닌가 추론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역사에 대한 통념과, 그 통념을 송두리채 부정하는 '나쁜' 일본 극우파 녀석들의 '역사왜곡', 이외의 견해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영훈이 일본 극우파와 같은 입장을 지니고 있으며, 종군위안부가 자발적 성매매이므로 처벌할 수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널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토론회 전체 맥락을 파악해서 기사를 써야하고, 토론회에서 나온 발언만으로 이영훈의 진의가 파악되지 않을 경우 직접 그를 취재하여 입장을 들어봐야 한다. 납득이 가지 않는 얘기가 있다면 직접 물어보고 파악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당시 저널에선 그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조중동에서도 그런 역할을 안 한 이유는, 실제로 물어봤다가 이영훈이 정말로 일본 극우파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일 경우 곤란할 거라는 당파성의 발현이었을 수도 있고, 대중의 거센 분노는 일단 피해가고 보자는 기회주의적 행동이었을 수도 있다.)


녹취록이나 해명서를 봐서는 이영훈이 "정신대는 공창제요, 자발적 성매매였다."란 주장을 직접 한 적이 없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 그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어떤 견해를 지니고 있는지를 알 수는 없다.(사실을 말하자면 정신대는 위안부와 전혀 다른 성격의 조직으로, 어떤 학자가 '정신대'를 주어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품평을 했다면 일단 뭘 잘 모르시는 분으로 취급해도 무방하다.) 그래서 이영훈이 명확히 말을 안했을 따름이지 실제로는 '일본 극우파'와 입장이 같은 본심을 숨기고 있는게 아니냐는 문제제기를 하는 분들도 있었다.


2004년의 사건 당시에는 대중의 입장에서 이영훈의 견해를 쉽게 접하기가 어려웠지만, 지금이라면 간단하다. 이영훈이 2007년에 펴낸 <대한민국 이야기>를 읽으면 된다. 이 책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강의>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아무래도 학술도서인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시리즈의 주제의식을 쉽게 풀어서 학생/시민들에게 전달하는게 목적인 듯 하다. 물론 이영훈의 생각은 재인식에 논문을 실은 특정 필자의 생각과 결이 다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이 문제와 관련해선 이영훈이 그날 토론회의 일까지 포함해서,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낱낱이 밝히고 있다는 의미가 있다. (7장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체, 8장 그날 나는 왜 그렇게 말하였던가 참조)


이영훈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은 일본 극우파와도 사뭇 다르지만 우리들의 단순한 통념과도 어긋난 부분이 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지금까지의 사료를 통해 말하는 최소한의 추정이라 주장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다른 학자의 설득력있는 반박을 들어본 적이 없는 고로 나는 그 주장에 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최대한 간결하게, 하지만 꾸밈없이 그것을  드러내자면 다음과 같다.


1) 위안소의 형태는 대략 세종류였는데, 하나는 군이 직접 경영하는 것(소수), 둘은 민간업소를 군 전용으로 지정한 것, 셋은 군이 지정하지만 민간인도 이용하는 매춘숙이었다.

2) 전쟁 초반에는 일본인 성매매 여성들을 위안부로 데려갔는데, 전선이 넓어지면서 식민지/점령지 여성들을 동원하게 되었다. (이영훈은 언급하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일본 극우파들은 '성매매 여성을 데려간 것 아니냐.'라고 언급하는 게 아닌가 추정됨. 일본의 상황과 조선의 상황이 다름.) "조선인이 9할"이었다는 한국 사학계의 주장은 별다른 사료적 근거가 없다. 처음엔 분명히 일본인 여성 위주였는데다, 나중에도 가령 중국 점령지에서는 중국인 위안부가 다수였다는 증언이 있는데, 결정적으로 뒤집을 사료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쪽이 더 상식에 부합하는 것 같다.
 
3) 생존 위안부 175명의 증언에 의하면, 그녀들이 동원된 방식은 (민간 업자들의) '협박 및 폭력', '취업사기'가 대부분이었다. 이영훈의 생각에 이 둘은 명확히 구분이 되지 않는다. '취업사기'가 들통나는 순간 '색시장수'들은 협박 및 폭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좋은 곳에 취직시켜 준다고 부모를 유혹하여 거액의 선대금(1천원인 경우도 있었다.)을 지불한 후 딸을 데리고 가기도 했다. (이 경우엔 딸을 팔아먹은 경우나 다름이 없었다.) 어떤 여성은 집이 너무 가난해서 위안소로 가는 것을 알면서도 따라나서기도 했다. (이영훈이 송영길에 대해 문제삼은 바가 사실상 이것이다. 위안부 문제의 권위자인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는 이 문제에 대해 "말단에서 관헌의 직접적인 관여를 나타내는 자료는 현재까지 나오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4) 색시장수들의 배후에 일본군과 총독부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일본군 수뇌부는 위안소 설치를 명령했고 업자를 지정하여 여인들을 모으도록 지시했다.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가 방위청 도서관에서 이를 입증하는 문서를 찾아냈다. 총독부 자료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한국 민족주의자들도 이 사건은 중요하게 보도한다.) 당시 열차를 타고 국경을 넘거나 항구에서 배를 타기 위해서는 여행증명서가 필요했으므로, 여성을 동원하기 위해선 총독부 관헌들의 적극적인 협력이 필요했다. 따라서 이것은 일본군과 총독부가 공모한 인신약취의 범죄행위다. 위안소로 간 여성들에겐 행동의 자유가 없었고, 정기적인 위생검진을 받아야 했으며, 자유외출이 금지되었다. 따라서 연구자들은 그들이 '성노예'였다고 평가하는데, 이는 타당한 것이다.

5) 요시미 요시아키의 정리에 따르면, 일본군과 일본국가는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국제법이 금하는 반인륜범죄를 저질렀다. 첫째, 매춘업을 위한 부인과 아동의 매매를 금지한 1911년 국제조약 위반, 둘째, 1907년에 체결된 강제노동을 금지한 국제협약 위반, 셋째, 노예제를 금지한 국제법 위반, 넷째, 미성년 강제노동을 금지한 국제노동 위반.(위안부 중 상당수가 21세 미만의 미성년.)

6) 위안부들의 처지는 다양했다. 선대금이 과도할 때, 악덕업자를 만났을 때, 한푼도 받지 못한 여성들도 있었다. 그러나 업자와 위안부가 5대5로 이익금을 나눈 곳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군표'를 모아놨다가 전쟁 이후 그것이 가치없는 휴지조각이 되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돈을 착실하게 저축하여 고향에 보내기도 하였다.


우리는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대개 '민족의 순결한 딸을 강도 일본이 강제로 뺏어가 전쟁터에서 성적으로 약취하고 버렸다.'는 정도의 통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위안부 피해자 여성 중 일부가 화류계 여성이었다거나, 위안부로 가는 줄 알고 있었다거나, 위안부 운영에 있어 피해자들에게 돈이 건네졌다는 '사실'들은 필사적으로 억압하려고 한다. 이런 인식은 우리들끼리 일본 제국주의를 악마화하는데엔 편리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계인들 앞에서 일본인들에게 당신들의 전쟁범죄가 어째서 악랄한 것인지를 조목조목 따지는데엔 장애가 된다.


만일 어떤 일본인이 우리보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어서 악의적인 물타기를 시도한다고 하자. 위안부 문제에 대해 통념만을 알고 있는 당신은 그에 대해 별다른 답변을 하지 못하고 "피해자가 엄연히 살아 있는데!!!"라고 호통을 치며 분한 마음에 울어버리는 것 밖에 더 할일이 없을 것이다. (심지어 당신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보고서를 읽어본 적이 없고, 피해자의 증언에 입각한 주장을 하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그런 당신을 눈앞에 둔 일본인이나 세계인은 처음에는 "아 정말 많이 억울하구나. 내가 뭘 잘못 알고 있었나 보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안에 대해 좀더 공부를 하거나 자료를 찾아보면 뭔가 어긋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조선반도라는 데는 솔직하지 못한 분위기가 있다. 종군위안부 건만 해도, 상당수의 일본인 여성이 위안부 노릇을 했고 위안부를 돈을 주고 샀던 남자들 가운데에는 조선인 남자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말하지 않고 있다."라는 일본 우파의 주장이 그릇된 것만은 아닌 것이다.


일본인들이 주어진 자료를 일본인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고픈 욕망을 지닌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들이 그렇게 할 때, 당신이 할 말이 "어떻게 가해자의 자료를 믿을 수 있냐!!! 피해자의 증언을 믿어야지!!!!"라고 소리지르는 것밖에 없어서야 곤란하다. (일단 당신 역시 피해자의 증언을 읽지 않았다. 그저 통념만 알고 있을 뿐이지.) 그런 과정들을 거치다 보면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의 주장에 '설득력'을 느끼지 못하고 '반일정서'만을 감지하게 되는 것도 자연스럽다. (적다 보니 운동권들이 부실한 논증을 무한반복하여 시민들의 신망을 잃어버리는 얘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만약 어떤 일본인과 위안부 문제로 첨예한 토론을 하고 싶다면 오히려 이영훈과 같은 사람이 정리한 자료를 숙지하고 가는 편이 훨씬 낫다. 어떤 방식으로 끌고 갔건, 중간에 돈이 오갔건 안 오갔건, 이러저러한 이유에서 그것이 인권범죄, 전쟁범죄임이 명백하고 직접 여성을 끌고 가지 않았다 뿐이지 일본군과 관헌이 이러저러하게 개입한 증거가 있다고 명명백백하게 말하면 일본인들도 할 말이 없다. 제시하는 자료조차 거의가 일본 쪽에서 나온 것임에야. 피해자의 증언 역시 그 자료와 모순되지 않는다면, 사태의 진상은 대략적으로 파악된 셈이다.


사람들은 흔히 "일본 학자들도 인정한 위안부의 강제성을 한국인 학자가 부인하다니 그야말로 쪽바리가 아니냐."며 흥분하지만 위안부 문제의 대가인 요시미 요시아키가 밝혀낸 것들은 이영훈의 견해와 하등의 모순이 없다. 이를테면 아래 두 개의 기사를 읽어보자. 하나는 1993년의 기사인데, "조선총독부 군대위안부 직접 관여 사실 밝혀져"란 제목의 기사다. 이영훈의 발언 중 한 문장과 기사 제목을 비교해보니 이게 이영훈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주장으로 들리겠지? 그러나 살펴보자면,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일본 중앙대)교수 등 '일본의 전쟁 책임 자료 센터'(민간단체)연구팀은 최근 한국을 방문,부산에 있는 정부기록보관소에서 일본군 특무기관으로부터 이동 허가증을 발급 받은 사람중 군대위안부가 다수 포함돼 있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문서를 찾아 냈다. (...)  이는 조선총독부가 위안부의 움직임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중명해 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강조했다."
기사 링크


위에서 한 얘기와 뭐가 다른가? 어떤 사람들이 이런 기사를 퍼오면서 이영훈이 친일파임이 명백하다고 주장하는 건 글을 눈으로 읽는게 아니라 코로 읽기 때문인가?


1997년에 나온 "군위안부 동원에 조선총독부 관여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봐도 마찬가지다. 일단 이 기사 제목은 조금은 덜 자극적인지라 이영훈의 위안부에 대한 견해를 반박하고 있지는 않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새로 밝혀낸 그 관여의 수준이란 건 어떤 것인가?


"이 논문에 따르면 관동군은 지난 41년 7월에 2만명 가량의 조선인 위안부를 징집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조선총독부에 요청, 실제로 8천명의 조선인 위안부가 모집됐다는 사실이 관동군 후방담당 참모였던 하라(原善四郞)의 증언에 의해 밝혀졌다는 것이다.

또 일본이 중국의 漢口를 점령한지 3개월이 지난 39년 11월 漢口의 일본총영사가 본국 외무성에 보낸 서신은 `병참, 헌병대, 영사관이 허가한 군위안소가 20개소에 이르는 포화상태인데도 한구로 몰래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으니 통제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이 서신은 탁무성을 통해 조선총독부에도 전달된 만큼 조선총독부가 조선인 군위안부의 도항을 통제.관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게 尹씨의 분석이다."
기사 링크


잘 보면 군이 요청해서 총독부가 조치해줬다는 얘기이지 총독부 관헌이나 군인이 직접 가서 여성들을 끌고 갔다는 얘기는 없다. 농촌에서 여성들을 밀어내는 요인들이 워낙 많아서 민간업자들만 활용하면 충분했다는 이영훈의 주장과 하등 모순될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뭘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보다 훨씬 잘 아는 사람을 친일파라 비난하고 있었던 것이니 얼마나 황당한가.


피해자의 증언 역시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은 이영훈이 일본인들이 만든 문서만 믿고 우리 민족인 '정신대 할머니'들의 증언을 묵살한다고 비방했다. 정말로 그러한가? 이영훈은 문제의 상황에서 송영길에게 "정신대 보고서를 안 읽어보시고 하는 말인데."라고 말하고 있다.(이영훈은 근로정신대와 종군위안부를 명백하게 구별하고 있지만, 이 보고서의 이름이 정신대 보고서인 것 같다 ;;; ) 세간의 인식과 모순된다.


하지만 실제로 피해자 증언들을 찾아서 읽어보면 조선총독부가 관헌이나 군을 동원해 여성들을 끌고 갔다는 증언은 거의 나오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만주 쪽에선 군인이 끌고 갔다는 증언도 나오니 당연히 좀 더 상세한 연구가 필요하다. 한 가지 재밌는 건 북한 쪽에서 제시한 증언자료에서 일본군이 직접 끌고 갔다는 얘기가 너무 많이 등장한다는 거다. 근데 이것들은 남한 쪽 자료와 내용상 차이가 너무 커서 신뢰성에 의심이 간다. 어찌보면 남한 사회보다 훨씬 더 역사왜곡과 체제 합리화가 심한 북한 체제의 특성이 낳은 자료왜곡이라 볼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이건 피해자의 증언을 믿지 못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체제의 가공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한국의 피해자들의 증언에 대해서 이영훈이 부정한 적은 없다. 이영훈은 당시 사건이 터진 후 어느 고등학교 교사가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치란 말이냐."며 비난하자 "정신대 보고서를 읽어 보시고 나온대로 가르치면 될 것 아닙니까."라고 응수하기도 했다. 황당하게도 '친일파 이영훈'을 규탄하는 그 교사는 이에 대해 "내가 그런 걸 왜 읽어야 한단 말입니까."라고 응답했다고 전해진다.(이영훈의 저서 <대한민국 이야기>에 나오는 에피소드다.)


증언들을 살피면 이영훈이 말한 것처럼 취업사기나 인신매매 얘기가 많이 나오고, 원래 술집에서 일하다가 위안부가 무엇인지 알고 갔다는 사람도 있다. 알고 갔지만 그렇게 심할 줄은 몰랐다고 한다. 위안부 피해자를 성매매 여성과 전적으로 단절시키고 '민족의 순결한 딸'로만 위치시키려는 욕망은, 피해자 집단 내부를 분열시키는 행동은 아닌가? 어떤 식으로 갔든 목적을 알았든 몰랐든 일본군의 전쟁범죄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데 말이다.  


송영길은 자못 진지하게 "이 교수의 지적대로 고백적 성찰이 필요했지만 해방 후 남북이 분단되면서 친일청산 상황이 없어졌고 동시에 송진우나 김구, 여운형이 암살되는 비극이 발생했다. 오히려 친일분자들이 중용되면서 국가건설이라는 측면에서 친일이 전혀 부끄럽지 않은 상황이 되고 애국자로 둔갑했다. 반성하고 싶어도 반성할 기회가 없었다. 이제야 말로 뒤늦었지만 이제는 그 때처럼 형사적 처벌이 뒤따르는 상황이 아니므로 오히려 차분하게 역사를 되돌아볼 기회가 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 주장은 위안부 문제에 관련해서만큼은 '오류'일 가능성이 크다.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이 이루어졌더라도 위안부 문제가 처벌대상이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위안부 문제는 해방 후 한국에서도 쉬쉬 넘어가다가, 수십 년이 지나서야 (일본과 한국의 시민운동가들의 노력에 의해) 이슈화되었다. 딸을 팔아먹은 부모들, '색시장사'를 한 아저씨들이 숱하게 남아 있는 실정에서, '남성'들은 여성에 대한 성약취의 공모자가 된 자신의 모습을 덮어두고 싶어 했을 수도 있다. 이영훈은 중국이나 싱가포르 등 중국어권에선 위안부 문제가 중요한 이슈가 아니라고 지적하는데, (그래서 위안부 범죄가 별 문제가 아니라는 게 아니라) 이는 그 사회의 가부장 문화의 수준이 위안부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요인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네덜란드 위안부 피해자는 남편과 함께 국제사회에 나와서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하지만, 우리의 피해자 여성들은 가족과의 교류가 거의 끊긴 것이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당시 부끄러운 짓을 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잊혀지고 사회의 여권이 어느 정도 신장되고 나서야 위안부 문제는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심각한 범죄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이영훈은 알고 있었고, 그리하여 과거청산이 오늘날의 사회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에 비해 도대체 무엇을 더 알고 있었던 것인가?


여기까지 적어보면 이영훈의 견해가 일본 극우파의 것과 동형이라는 사실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중상모략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영훈 교수를 비판할 수 있는 논거들은 있을 법하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이영훈 교수가 토론회에서 조선총독부가 여성들을 끌고 갔다는 사실을 부인했지만, 맥락상으로 볼 때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송영길은 '조선 총독부 권력'이란 표현을 사용했고 사태를 잘 알지 못하는 그가 (아마도 이 사실에 이영훈은 개탄했을 것이다. 과거사진상규명법에 찬성한다고 패널로 나온 정치인이 그런 기초적인 것도 모르다니!) 이 말로 "조선 총독부가 직접 사람을 보내 여성을 끌고 갔다."란 사태를 의미한 것 같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영훈이 그 말을 부정했으니 오해를 받아도 싸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비판을 수용하더라도 이 경우 이영훈의 문제는 '대중토론에 적합하지 않은 언어구사의 문제'나 '맥락적 사고를 제대로 하지 못한 실수'가 된다. 이런 논거로 이영훈이 종군위안부가 공창제이며 자발적 성매매였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당장 오해가 있었더라도 훗날에라도 진의가 파악됐다면 그의 발언 진의를 왜곡해서 보도했던 매체에서 정정해주는게 합당하다. 사정상 그러기 어렵더라도 이영훈이 "정신대는 일제가 강제동원한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상업적 매춘이자 공창제였다."라고 발언했다는 인식이 버젓이 유통되고 확산되는 것만큼은 막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둘째로 견해야 어찌됐건 미군/한국군 위안부와 일제시대 종군위안부를 엮어서 설명한 건 오류라는 비판이 가능할 것 같다. 그러나 이 비판 역시 문제의 핵심을 벗어난다. 이를테면 누군가 "난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비슷한 수준의 범죄라고 생각해."라고 해서 그가 살인이 범죄가 아님을 주장했다는 견해가 성립하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더구나 이영훈은 일본군 위안부와 미군/한국군 위안부 사이에 '인과관계'를 설정한 것이지 (일본군 위안부의 영향을 받아 해방 후에도 블라블라...) 양자에 대한 윤리적 평가가 '동등'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한 이영훈 자신의 설명은 이렇다. "공식 호칭이 같다고 해서 미군의 위안부를 일본군의 위안부와 동일하게 간주할 수야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본군의 위안부는 행동의 자유가 박탈된 성노예였습니다. 그에 비하자면 미군의 위안부는 자유로운 신분에다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계약이었지요. 그 점은 확실히 그러합니다만, 그렇게 끝낼 일만도 아니라는 찜찜한 생각이 드는군요. 솔직히 말해 저는 일본군이나 미군이나 다 제 나름의 방식으로 여성의 성을 약취했다는 점에서는 서로 통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점을 깡그리 부정한다면, 다시 말해 미군 위안부들의 비참했던 사정이 오로지 그녀들의 선택과 책임이라고만 치부한다면, 무언가 위선이라는 느낌이 드는군요." <대한민국 이야기> p152)


셋째로 이영훈의 견해가 일본 극우파와 동일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 견해가 일본 극우파와 일부라도 비슷한 건 사실이기 때문에 문제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역사학이란 학문의 자유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주장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한국 학계에서도 "발해는 한국사라고 보기 힘들다."는 견해를 펼치는 분(들)이 있는데, 그런 이들에게 "당신은 동북공정을 찬성하는 거지! 매국노!!!"라고 규탄하는 것이 타당한 일인가? <환단고기>를 숭상하는 유사역사학자들은 "우리의 주장을 부인하는 이들은 친일파"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가 대중의 통념을 토대로 현대사에서 같은 수준의 논증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넷째로 이영훈의 견해는 '피해자의 증언'이 아니라 '가해자들의 문서'에 근거했기 때문에 오류라는 식의 비판이 있을 수 있다. 물론 나는 앞서 이 비판이 오류임을 입증했다. 피해자들의 증언을 읽어보지도 않은 이들이 피해자의 권위를 무기로 이영훈을 비방하고 있다. 그런데 비판의 형식만을 보자면 이 비판 역시 세번째 비판과 성격이 비슷하다. 사료를 통해 진실에 접근하는 역사학의 방법론은 사라져버리고, 우리 입맛에 맞는 자료를 가공하여 특정한 관점을 구축하는 관변사학의 논리만 남는거다. 나는 그런 주장을 하시는 분들은 이명박 정부의 원전 수주 자랑, G20 자랑, 아덴만 해적 소탕 자랑 등을 비판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 말을 따르자면야 사실이야 어찌됐든 정부가 내세우는 자료만 믿고 끄덕끄덕 하면 막 국위가 선양되는 느낌도 들고 좋은게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피해자의 증언도 가해자의 문서도 사태파악에 도움을 주는 자료일 뿐이다. 그 자료들을 모으고 해석해서 진실에 근접하는 것이 역사학의 책무일 게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일제의 범죄가 잔혹하니 사과를 요구하는 것이지, 일본인들이 처음부터 한국인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DNA를 가지고 태어난 것도 아니다.


정리하자면 '이영훈 사건'은 통념적 인식에 의거한 대중적 분노를 저널이 여과없이 중개하여 반대파 지식인 하나를 매장한 사건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2004년 이 사건이 일어난지 7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도, 이영훈이 뭐라 말할 수 없을만큼 명백하게 자신의 견해를 드러보이는 책을 펴낸 2007년에서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영훈은 종군위안부가 자발적 성매매라고 주장했다."는 인식이 진실처럼 우리들 사이를 배회한다. 이영훈이 <대한민국 이야기>에서 조정래 소설의 어느 에피소드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음을 비판하자 조정래는 논점에 대해서는 대꾸하지 않고 "위안부를 성매매로 보는 교수에게 배우는 학생들이 불쌍하다."는 마타도어로 대응했다. 나는 조선일보의 그릇된 보도 때문에 멀쩡한 학자들을 (지금도) '빨갱이'로 인지할 조선일보 독자들과 우리들이 뭐가 크게 다른지 모르겠다.




주류언론의 한심함을 비판하려면 그 언론들보다 나은 의사소통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2004년 당시 이영훈의 발언이 오해를 사기 쉬운 것이었다 하더라도, 교양도서까지 펴낸지 4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그런 오해를 확대재생산하는 행동은 결코 긍정적인 일일 수 없다. 정보가 한번 단순하게 가공되면 다시는 원래의 맥락에 있는 정보값을 되찾지 못하는 이 넷세상에서, 우리는 그릇된 정보가 진실로 둔갑하는 것에 저항해야 한다.


이 경우에 당신이 그것에 '저항'하는 방법은, 좀 길더라도 이 글을 끝까지 읽고, 사태에 대한 진실을 깨닫고, 주위 사람들이 '잘못' 말할 때마다 그것을 교정해주는 것이다.




참고자료 :
오마이뉴스 최초 보도 기사 2004년 9월 3일 (해당 토론회의 해당 부분 녹취록 포함됨)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47&aid=0000050024

이영훈 교수 해명서를 비판한 2004년 9월 6일 프레시안 기사 (토론회 논란 이후 이영훈 교수의 해명서 포함됨)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2&aid=0000013087

당시 본인이 쓴 이영훈 교수 옹호글 2004년 9월 9일
http://yhhan.tistory.com/111

여성학자 정희진의 사태 관련 글 2004년 9월 16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28&aid=0000078481

오마이뉴스 보도를 비판한 조귀동의 미디어오늘 기고문 2004년 9월 25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4&oid=006&aid=0000008066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e역사관 홈페이지
http://www.hermuseum.go.kr/main.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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