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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워>의 흥행과 정치적 소비의 문제

조회 수 1374 추천 수 0 2007.08.31 09:35:28

 

드라마든 영화든 소설이든, 어떤 대중문화 텍스트가 흥행을 하면, 그것의 수준을 논하기 전에 그것이 어떤 부분에서 대중의 욕망을 꿰뚫고 있는지를 분석하는 것이 문화비평의 기본이다. 그런데 <디 워>의 경우 흥행 이전에 ‘디 워 현상’이 존재했기 때문에 (개봉 이전에 영화 잡지 사이트와 기자들에 대한 조직적인 덧글 공세가 있었다.) 이것을 논하기가 힘들어진다. 단순히 그 텍스트 안에 대중의 욕망을 꿰뚫은 것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진중권은 <디 워>의 흥행요인을 민족주의, 애국주의, 인간극장, 시장이라는 네 개의 코드로 분석했지만, <디 워>의 팬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물론 진중권의 말대로 <디 워>의 팬들은 사실상 진중권이 분석한 틀 안에서 발언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영구 없다’를 반복하는 이유가 있다면, 진중권이 그 코드를 텍스트 안에 위치한 것이라고 판단한 반면, <디 워>의 팬들은 그것이 ‘코드’가 아니라 텍스트 바깥에 위치한 현실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디 워>의 흥행은 ‘정치적 소비’의 결과라고 봐야 한다. 유럽에서 ‘정치적 소비’라는 것은 가격경쟁력이나 품질경쟁력이 아닌 다른 정치적 요인에 의해 소비할 상품을 결정하는 소비자들의 행태를 의미한다. 가령 유럽의 노동자들은 노동자에 대한 처우가 좋은 기업의 제품을 소비함으로써 연대의식을 과시하고 장기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복리후생을 도모한다. 또 많은 유럽의 시민들은 친환경적인 기업의 제품을 소비함으로써 생태주의에 대한 지지의사를 드러낸다.


한편 한국에서는 유럽과는 다른 종류의 비경제적 소비 행태가 존재했다. 바로 박정희의 산업정책에 부응하는 소비였다. “국산품을 애용하자.”로 대변되는 이러한 소비형태를 ‘정책적 소비’라고 부를 수 있을 텐데, 크게 보아 ‘정치적 소비’로 봐도 될 것 같다. 유럽과 한국의 차이가 있다면 유럽에서는 비경제적 소비의 판단의 준거가 개인의 정치성이었지만, 한국에서는 독재자의 산업정책이었고 이에 대한 시민들의 자발적/비자발적 호응이었다는 것일 테다.


<디 워>의 애국주의에 대한 평론가들의 비판이 시민들의 냉소에 부딪힌 이유를 분석해 보자. 그들은 평론가들에게 그러는 너희들은 왜 한미 FTA를 반대했으며 스크린 쿼터에 찬성하느냐고 묻고 있다. 이런 의문은 ‘논리적으로는’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가령 변희재가 진중권을 까면서 한미 FTA 운운했을 때 나는 여기에 대해선 대꾸할 가치조차 없다고 보았다. 그의 머릿속의 정신병까지 내가 해석해 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논변이 많은 사람들에게 먹힌다면 대꾸할 가치가 있는 문제가 된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분석이 필요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들은 <디 워> 관람을 한미 FTA 찬반이나 스크린 쿼터 찬반과 동등한 ‘정책적 선택’의 문제로 파악하고 있다.


물론 모든 <디 워> 비판자들도 이 사실을 어렴풋이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디 워>의 텍스트의 문제와 컨텍스트의 문제를 구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진중권을 포함해서 그 누구도 이 문제를 말끔하게 개념화하진 못한 것 같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디 워>는 텍스트의 면에선 다른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혹은 괴수영화와 비교되어야 한다. 한편 <디 워>에 묻어난 심형래의 “한국 영화 산업 키우기”라는 정책은 다른 종류의 정책들과 비교되어야 한다. 양자는 범주가 다른 문제다. 전자의 범주로 <디 워>를 아무리 비판해봤자 <디 워>의 많은 지지자들이 동의하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인 것 같다.


박정희 시대 그의 산업정책에 부응한 시민들의 정치적 소비는 한국 경제의 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즉, 그것은 성공을 거두었다. 유시민의 말처럼 박정희를 ‘성공한 독재자’로 보지 못할 사람들이라도, 그의 산업정책이 그 시대에 성공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 시민들의 정책적 판단에 의한 선택은 아니었다는 점인데, 물론 박정희 당시에는 결과가 좋으니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이제 와선 시민들이 정책적 판단을 내리는데 장애가 되고 있다.


<디 워> 네티즌과의 맞장토론에서 진중권이 황우석 사태와의 유사성을 언급하자, ‘아나키스트9’이라는 아이디를 쓰는 네티즌은 꽤 흥미로운 말을 했다. “황우석 사태를 통해서도 대중들이 학습효과가 없다고 말씀하시는데.... 결과론적인 얘기인 것 같습니다. 황우석이 옳았다면 그런 소리 못하실 겁니다.” 물론 이 말은 엉터리다. 진중권은 결과론적인 얘기를 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발언에 대해 신뢰를 하는 과정이 너무 단순하다는 과정의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정책적 판단을 내리는 습관이 들지 않은 사람들로서는, 그 과정의 문제가 번거로울 수밖에 없고, 하나의 정책을 화끈하게 제시하는 사람들에 대한 옹호로 정치적 소비가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황우석의 경우는 원천기술이 있다고 애초부터 주장한 것이었으므로 정치적 소비와 큰 관련이 없지만, 심형래의 경우는 그런 부분이 더욱 두드러졌다. 이게 황우석과 심형래의 차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 지지자들은 대충 이 차이를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 같다. “황우석은 줄기세포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사실의 문제였다. 하지만 우리는 심형래의 영화가 지금 이 순간 대단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으며, 다만 <디 워>를 지원해야 더 높은 수준의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두 가지다. 첫째는 심형래가 선택한 한국 영화산업의 해법이 올바르냐는 것. 그는 자본을 집중하여 헐리우드의 CG 수준을 따라잡아 세계시장(=미국시장)에서 승부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고, 그것이 한국영화의 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 시장을 노린 CG영화가 아닌 헐리우드를 노린 CG영화라는 것이 한국의 전략으로 가능한 것인지 관계자들은 친절하게 따져줘야 할 것이다. 나의 경우는 만약에 심형래가 가령 메이저리거들처럼 완전히 미국에서 자금을 조달받아 그런 시도를 한다면 지지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고 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는 국내의 자금을 그러모아 거대한 규모의 (한국 실정에선) 영화를 만들게 될 것이므로, 오히려 한국 영화의 다양성을 침해하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 경제적으로 말하면 그가 한편의 영화를 만들게 되면 다른 감독들이 수 십편의 영화를 못 만들게 될 거라는 거다. 그리고 그의 한편의 영화가 흥행에 성공할지는, 자신할 수 없는 일이다. 이건 리스크가 너무 큰 선택이다.


둘째는 시민들의 정치적 소비의 방식이 더욱 신중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경제적 요인에 의해 소비를 하겠다는 시민들의 자체는 기본적으로 환영할 만한 것이다. 그것은 올바른 방향으로 작용할 경우 시장의 비인간성을 제어하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정치적 소비의 주체자인 소비자들이 얼마나 현명하냐는 것이다. 가령 심형래의 한국 영화 산업정책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다른 사람들의 한국 영화 산업정책과 비교해서 판단할 역량이 시민들에겐 필요하다. 그 사실을 인지한다면 심형래의 방식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도, 평론가들에 대한 무분별한 테러도 부질없는 일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스크린쿼터 논쟁 때 시민들은 스크린쿼터의 정책적인 효용보다 영화 제작사들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사실 스크린쿼터가 사라진다고 해서 영화 산업에 종사하는 비정규직들의 처우가 좋아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대개는 그 반대라고 볼 수 있다.)


왜 너희 평론가들은 (물론 나는 평론가가 아니다.) 스크린쿼터에 찬성하면서 <디 워>의 애국주의는 비판하느냐고? 그것은 한국 영화산업 육성(그것이 필요하다는 점에 반론을 제기할 이는 거의 없다.)에 대한 정책적 관점이 심형래와는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스크린쿼터 찬성과 <디 워>에 대한 조소는 논리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다. 오히려 이쪽 입장에선, 스크린쿼터라는 정책적 보호망이 있으면 자기가 좋아하는 한국영화만 골라봐도 충분할 것을, 왜 굳이 다 열어놓고 애국심으로 몇몇 영화만 밀어줘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디 워>의 흥행이 보여주는 한국 영화산업의 동향이 결코 장밋빛 미래를 담보하지 못한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스크린쿼터도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다만 <디 워>의 청사진과 비교할 때는 그렇다는 것이다.


<디 워> 논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려면 영화계 안팎에서 한국 영화산업 정책에 대한 백가쟁명식의 대안이 쏟아져 나올 필요가 있다. 그래야 시민들은 <디 워>를 밀어주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었구나라는 사실을 좀더 쉽게 납득하게 될 것이다. 물론 시민들의 관점도 바뀌어야 한다. 박정희 경제정책이 성공했던 건 박정희가 민족주의, 애국주의, 인간극장의 코드를 지니고 있는 청렴한 독재자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산업정책의 방향이 옳았기 때문이다. 박정희 시대에 한국인들은 선택할 권리가 없었지만, 운이 좋았다. 민주주의 이후에 시민들의 선택이 독재자의 개인적 선택보다 뒤떨어진다면 그것보다 슬픈 일은 없을 것이다. ‘시민’의 이름에 걸맞는 주체가 되려면 모든 문제를 좀 더 세심하게 판단해야 한다.      




P.S 물론 아이들, 아이들과 같이 영화를 본 김규항, 영화를 잘 안 보다가 영화를 본 사람들 등 <디 워>를 정말로 재미있게 본 사람도 있을 게다. 이러한 '타인의 취향'에 대해선, 이 글에선 편의상 논의하지 않았다. 이 논의는 <디 워>가 만족스럽지는 않았다는 점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의 논의다.

P.P.S 이쯤 쓰면 이제 제가 <디 워>에 대해 더 쓸 말은 없을 것 같습니다. 나머지 문제는 영화나 영화산업에 좀 더 관심있고 정통한 분들에게 맡겨야겠죠.

P.P.P.S 그 동안 제 블로그에 들러주신 <디 워> 옹호자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아마 더 이상은 들르실 일이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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