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어제 2010/04/01 - [문화/생활] - ‘나는 다르다’고 믿는 자의식에 대해 라는 글을 올렸고, 이에 대해 여러 독자들의 반응이 있었다. 자의식에 관한 논의라는 게, 사실 논리적으로 엄밀하기는 힘들고, (글에 대해 변명하려고 하는 말은 아니다.) 비슷한 종류의 체험에 접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글이 되기가 쉽다. 특히 예전에 쓴 2010/01/04 - [문화/생활] - [아주문화] 우리 시대에도 ‘교양’은 가능할까 라는 글과 논지가 다르지 않느냐는 지적이 가능할 법도 한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진 않지만) 그 점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여 (사실 한 편의 글에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나중에 보강하는 글을 한 편 더 올려볼까 하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문제와는 별개로, 어제 달린 한 분의 '악플'은 좀 짱이었다능. (굵은 글씨는 내가 강조한 부분)
사실 한윤형의 '자의식 과잉'에 대한 비판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회귀하는 비판이다.
한윤형은 자신의 소박한 경험으로부터 글을 시작하고 있다.
자기는 뭐 자신의 한계를 깨달았다네?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안다고 잘난 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 까지는 칭찬해줄만 하다.
여기에서 글을 끝맺었다면 이 글은 훌륭한 글이었을 것이다.
훌륭한 반성문으로써.
그러나 문제는 자신의 병적인 문제를 타인에게 투영시켜, 타인을 중 2병 환자로 몰아가는 데 있다. 자신의 병을 타인에게 전가시키고자 하는 오류. 그리고 상대방이 왜 '쓸모 없는 공부'를 하느냐고 비방하기도 한다. 쓸모가 있는 지 없는 지는 궁극적으로는 저자와 그 글을 읽는 독자 사이에 결정 될 문제이지, 한윤형이 결정할 문제는 아니다.
이 글에서 한윤형은 환자이자 의사이며, 무의미와 의미를 결정하는 절대적 주권자이고,
자신이 잘 났다고 생각하지 않는 척하면서, 타인과 그 사람을 제외한 세계의 동일성을 보증하는 하나의 신이다.
'자의식 과잉'이나 '유아론'이나 '독아론'은 한윤형 자신에게 돌아가야 할 말인 것이다.
이에 대한 내 반응은 해당 포스트의 덧글을 확인하면 볼 수 있으니 생략하고, 왠지 무언가 찔리는 듯한 이분의 말씀으로 어떤 글이 쓸모가 있는 지 없는 지는 궁극적으로는 저자와 그 글을 읽는 독자 사이에 결정 될 문제라니까 그의 글이 좀 더 많은 독자들에게서 평가받도록 하는 것은 내가 그에게 베풀 수 있는 하나의 은총(!)이 될 것 같다.
(그리고 노파심에서 한마디 하는데, 내 글 읽어보신 분은 알겠지만, 나는 '쓸모가 없는' 이란 말로 누군가를 비방하고 있지 않다. 그 평가는 사회의 시선을 말하는 것이며, 그 평가대상에는 나 자신이 포함된다. 나는 본문에 이 점이 명쾌하게 드러나 있다고 생각했는데...아닌가? ;; 중심적인 논점을 말하자면, 물론 나는 사회적 시선에 대항해서 손쉽게 '나는 다르다'는 자의식을 가지는 것이 좋지 않은 일이라고는 말하고 있다. '교양'에 대한 이전의 논의와 연결지어 말하자면, 나는 우리가 하는 일이 어째서 쓸모가 있는지를 - 자의식의 문제와는 상관없이- 계속 고민해 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있는 거다. '교양'에 관한 글에서 나는 '솔직히 쓸모가 어딨어? 그냥 공부하는 거지.'라고 일갈하는 조류도 비판하는데, 그 이유는 그런 관점이 성찰을 포기하고 '나'를 뭔가 다른 짓을 하는 존재로 포장하여 방구석에 틀어박히는 데에나 '쓸모'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당연히 쓸모가 있다고 말하는 태도나, 당연히 쓸모가 없다고 말하는 태도나, 불성실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불성실을 채우는 것이 바로 '나는 다르다'는 자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그 자의식에 대해 비판하는 건 그래서이기도 하다.)
일단 어렵지 않게 찾아낸 이 분의 보금자리 주소는
http://blog.hani.co.kr/differ1a1nce/ 이다. 글 제목과 내용이 워낙에 주옥 같아서 뭘 퍼와야 하는지는 감이 안 잡히지만, 본인이 자랑스러워 하는 것 같은 글 중에서 몇개를 추려 보자. 나는 이 글들에 대해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설명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보여주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그러니 직접 보고 판단들을 하시길.
<요새젊은 것들>과 거대서사의 종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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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태를 종결지으며-미시 권력과 혐오의 문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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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성에 반대하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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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신분석학에 대해서 한 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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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이론은 사실은 구조주의 자체의 필연적 결과인데, 구조주의에 의하면 언어는 기호와 지시대상의 '자의성'에 기반을 둔 체계로서, 기호는 지시대상의 그림자가 아니고, 기호는 지시대상을 재현하거나 복제해야 할 의무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자의적인 규약에 의해 뛰어노는 하나의 '시뮬라크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이론은 들뢰즈와는 달리 '기호'가 중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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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인문학을 비판하는 공대생의 시선으로는 ('인문학 비판'이 언제나 그릇되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런 친구의 잠언(?)이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의 텍스트나 비슷한 진리치를 가진다고 보는 것일 게다. 좀 끔찍하다. 컴퓨터 프로그램과 동문서답을 하면서도 자신이 인간과 얘기를 나누었다고 믿는 수준의 '완전체'가 되어 버리면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지 않겠는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