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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왓치맨>을 어떻게 볼 것인가?

조회 수 1424 추천 수 0 2009.03.26 23:20:03




앨런 무어 원작의 그래픽노블 명작 <왓치맨>의 영화화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1984년에 출판되고 1985년이 배경인 <왓치맨>을 영화화하면서 배경을 21세기로 바꾸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잭 스나이더는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하긴 원작의 스토리를 그대로 구현해도 재해석이 될 수밖에 없을 진데 배경마저 바꾸었다면 <왓치맨>은 아예 균형을 잃어버리고 허접한 액션물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배경을 원작 그대로 고정시킨다 해도 지금은 1984년이 아니라 2009년, 따라서 <왓치맨>에 대한 문화적인 해석은 포장지를 한 겹 더 뒤집어쓴다. 1984년의 <왓치맨>이 지닌 해석의 틀 위로 2009년의 시점에서 그 배경을 고정한 바깥 액자의 의미가 따로 있는 셈이다.  



‘왓치맨’들은 무엇인가? 원작의 내용을 살핀다면 그들은 1930-40년대의 산물이다. 1대 나이트 아울 홀리스의 자서전을 보면 2차 세계대전 후 엘비스 프레슬리가 등장하자 그들은 ‘이런 것에 열광하는 젊은이들을 위해 내가 나라를 지켰다니’라고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왓치맨’이 활동하고 억압받는 저 평행우주는 분명 우리 세계보다 더 ‘우익적’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 세계는 오히려 우익의 허상을 ‘폭로’한다. 왓치맨들은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극우파다. 우리로 치면 시청 앞에서 순진하게 성조기를 흔드는 할아버지들이랑 비슷한 거다. 반면 닉슨의 3선으로 상징되는 <왓치맨> 세상의 미국-국가는 체제의 기득권을 고수하는 실존적인(?) 극우파다. 이 낭만적/환상적 극우파와 체제수호적/실존적 극우파들의 사이에는 심연의 간극이 있다. ‘왓치맨’이면서 ‘국가’를 위해 일하는 코미디언은 이 간극을 조크로 메꾸는 자다. 칸트가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의 간극을 미학으로 메꾸듯이 말이다.


오지멘디아스가 코미디언을 가장 먼저 살해하는 이유는 물론 그가 코미디언 식의 ‘매개’에 결코 동의할 수도 만족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한때 왓치맨은 시대정신인 듯 했지만, 이제는 시대로부터 거부당하는 처지다. 정의롭고 강한 미국의 상징이었던 그들은 체제부적응자가 되었다. 왓치맨을 거부하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며 ‘이것이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말하는 코미디언의 진술은 완벽하게 현실을 짚은 것이다. 그들은 주류 이데올로기의 환상을 완벽하게 구현했지만, 그 환상은 현실에 구현된 순간 현실로부터 거부당할 수밖에 없다. 베트남전에서 돌아와 자신이 찐따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람보> 시리즈 1편의 람보처럼, 그들은 은폐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가장 급진적이고 일관된 극우 또라이인 로어셰크는, 가장 반사회적이고 반체제적인 ‘위험한 인물’이 된다.


오지멘디아스는 양자 사이의 간극을 코미디언처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로어셰크처럼 한쪽의 윤리를 택한 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지도 않는다. 그는 국가주의자들의 문법을 적극 활용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낭만적(?) 꿈 아래 종속시키려고 한다. 그의 투쟁이 그 자체로 심오한지는 모르겠다. 사실 원작 <왓치맨>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로어셰크가 투옥되는 1권 끝부분이지, 오지멘디아스의 음모가 표면화되는 2권 끝부분은 아니다. 하지만 양자의 간극에 대한 ‘왓치맨’들의 다양한 반응들은, 저 극우파들의 세상에서 우익들의 허구성을 폭로한다. 그리하여 그 폭로는 우리 시대의 문제도 되는 것이다. ‘왓치맨’은 우파들이 너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우파-텍스트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잭 스나이더가 <왓치맨>을 영상으로 옮겼을 때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가? 이 영화에서 추억되는 것은 1930년대의 로망인 히어로-왓치맨들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추억되는 것은 배경음악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처럼 1960년대의 어떤 분위기다. 1985년에 전 세계는 두 패거리로 나뉘어서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6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기까지 젊은이들은 그 ‘아버지’들, ‘어른’들에게 히스테리컬하게 반항했다. 그것은 이미 지나간 얘기지만, 영화 <왓치맨>에서 은연 중에 보이는 건 자신들이 세상을 멸망시킬 수도 있었을 것 같았던 그 시대에 대한 미국인들의 그리움이다.


LBJ가 아닌 닉슨이 1968년의 대통령인 저 ‘왓치맨’의 평행우주에서 닥터 멘해튼은 베트남으로 가서 1주일만에 베트콩을 진압한다. “체 체 체 체 게바라! 호 호 호 호치민!”을 외치던 그때의 시위대는 그 사건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을까?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왓치맨은 물러가라고 시위하는 시위대의 모습은 60년대의 히피들의 모습을 연상케한다. 이 장면에서 영화의 묘사는 원작과는 달리 왓치맨들보다는 오히려 시위대를 향한다.


과거를 향한 이 추억의 눈길은 일종의 아이러니를 담는다. 그들은 국가에 대한 반항을 추억한다. 그러나 그 추억은 역설적으로 그러한 반항을 필요하게 했던 - 가능하게 했던 강대한 아버지-국가의 존재도 추억하게 한다. 현실 사회주의권은 붕괴했고, 국가는 권력을 시장으로 넘겼으며, 시장은 ‘아버지’가 될 수 없다. 워렌 버핏은 당신의 욕망을 직접적으로 통제하지 않는다. 그저 투자하는 법을 쓴 책을 당신에게 팔아먹을 뿐이다. 이 재미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아버지 - 국가를 호출해낸다. 그것도 실제로 역사에 존재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국가를. 오오, 베트콩에게 신으로 숭배받는 저 닥터 멘헤튼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라!


닥터 멘헤튼은 국가가 소유한 물리력의 의인화다. 그의 존재감이 엔딩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영화와 원작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멘헤튼이 강조되면서 영화 <왓치맨>은 더더욱 낭만적인 반항이 가능했던 저 시대의 강대한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대목에서 나는 한국 사회의 박정희 향수도 아울러 떠올리게 된다. 박정희 신드롬은 한국인들이 반민주주의적이며 극우파라는 증거인가? 그것은 그와는 조금 다른 범주의 심리적인 기제를 지니고 있지 않을까? 박정희를 그리워하는 이들이라고 해서 유신체제의 억압으로 다시 돌아가 행복할 수는 없을 듯 하니 말이다. 그러나 68혁명의 히스테리를 경험한 서구인들과는 달리, 우리는 반항과 아버지를 동시에 추억할 수는 없지 않은가? 7-80년대의 민주화투사들에게 박정희나 전두환은 ‘싸우다보니 정들더라...’고 말하기엔 너무 막강하고 무서운 존재였다. 적당히 희화화될 수 있는 닉슨과는 달리 말이다. 하지만 진영을 막론하고 대통령 씹는 것을 취미활동으로 삼는 근 십년 동안의 조류는 확실히 어떤 히스테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 ‘왓치맨’을 감싸고 있는 그들의 욕망을 보면서 한국 사회의 뒤틀린 욕망을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적절한 시점에 표출되었어야 할 금지된 욕망들이 한꺼번에 표출된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을 띄게 될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한국 사회의 현실 그 자체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P.S 똥을 싸다 만 느낌으로 스스로 쓴 글을 몇 번 더 읽다가 떠오른 것인데,

잭 스나이더의 경우 "히피를 그리워하지 마라. 걔들을 살려냈다간 닉슨도 살아난다." / "닉슨을 그리워하지 마라. 걔들을 살려내려면 히피도 살려야 된다.' 라는 말을 좌우파에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한국의 실정에선 '독재세력'과 '반독재 민주화 세력'의 투쟁은 여전히 정치현장에서 환상적으로 진행 중이기 때문에 잭 스나이더식 충고가 무의미할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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