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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논쟁의 효과, 그리고 인문학과 과학

조회 수 3923 추천 수 0 2008.03.15 14:18:33

혼자서 공부하고 추론하는 것보다는 논점을 잡고 박터지게 싸우는 쪽이 더 많이 아는데 도움이 된다.


좋은 논쟁상대를 만나야 한다......라는 말은 자기 연민에 불과하고, 자기 자신부터 논점을 제대로 잡고 성실히 논쟁하면 언제나 일정 수준 이상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물론 내가 성실해도 상대방이 리프 무한 반복 녹음기인 경우가 존재하지만, 그 경우엔 어느 순간에 논쟁을 그만두면 되니까.  


아이추판다 님과의 논쟁을 처음부터 끝까지 복기해 보고 새로운세상 님과 노정태 님의 글도 다 읽었는데, 아주 흥미로웠음. 논쟁 초기의 내 주장은 다소 맥락을 파악하지 못한 감이 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전체 논쟁을 이끌어내는 데엔 도움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 역시 자신의 무식함을 드러낼 각오를 하고 논쟁을 하는 쪽이 더 많은 정보를 드러내는 길이라는 사실에 대한 증명이 되겠지. 아래는 링크 목록.


라캉을 모르면 막장인가효? (아이추판다)
정신분석학은 심리학이 아닌가? (아이추판다)
정신분석학과 심리학 (한윤형)
일관성 (아이추판다)
정신분석학과 심리학 재론(한윤형)
프로이트, 융, 라캉 (아이추판다)
라캉과 정신의학, 그리고 관념론 (노정태)
한국라깡학회 저널을 구경하고 - 라깡을 읽지 않기로.. (새로운세상)


그나저나 인문대생의 입장에서는 조금 서글픔을 느꼈달까. "소칼 논쟁을 통해 드러난 프랑스 철학자들의 모습은, 비유하자면 과학이라는 유방을 욕망하지만 미국이라는 엄마는 부정하고 싶어하는 도착증 환자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노정태의 주장은 타당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된다. (정신분석학의 언어는 이렇게 비평적으로 탁월한 구석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편으로는, "분석철학자들이 과학을 지지하는 것은 단지 편의상의 문제"라는 스티브 풀러의 지적 역시 핵심을 찌르는 구석이 있다. 방식은 다르지만 철학의 제 정파들이 어떻게든 과학의 위력을 등에 업으려는 시대. "제1학문의 위상은 어디 갔는가?"라는 노정태의 일갈에는 심히 동의하는 바이지만, 결국 이런 세태는 스스로의 역할을 정당화할 자신이 없는 무기력한 인문학의 위상에 기인한다. 그 자신감 부족을 그저 질타만 하는 것은, 신지식인의 논법일 뿐.


군대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내무반에 앉아서 김기현 교수가 쓴 <현대 인식론>이란 책을 읽고 있었다. 한국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 다른 욕망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면, 참을 수 없어 하는 인종들이다. 6개월 고참이 나를 잡아 먹을 듯한 어투로 "도대체 그딴 걸 읽으면 무슨 쓸모가 있는데?"라고 시비를 걸어 왔다. "뭐 하나라도 세상에 도움이 되나??" 씩씩 거리며 재차 답변을 요구하는 그를 쳐다보며 나는 책에서 눈을 뗀 후 조용히 말했다. "AI 연구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고참은 머쓱해 하며 내무반 반대편 구석으로 가버렸고 다시는 책을 읽는 내게 시비를 걸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읽던 것이 <현대 인식론>이 아니었다면 뭐라고 대답할 수 있었을까?


이집트 인들은 쓸모를 위해 측량술을 만들었지만, 그것을 받아들인 후진적인 그리스인들은 그저 심심해서 그걸 가지고 이런 저런 소리를 하다가 기하학이란 특수한 학문을 만들어 냈다. 프레게의 철학적 기획은 러셀이 제기한 패러독스에 의해 무너졌지만, 결국 그 실패한 기획 때문에 기호논리학이 생겼고 튜링 머신이 생겼으며 오늘날의 컴퓨터가 나왔다. 인문학의 쓸모라는 것은, 이렇게 멀리 돌아서 오거나, 아니면 오지 않지만, 만일 인류의 조상들이 한국인들처럼 쓸모만 따지는 인간들이었다면 나는 지금 이 순간 블로그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세상에 살고 있었을 것이다. 아예 쓸모라는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때에 인문학은 그 쓸모를 발휘하게 된다는 뻔한 소리를 하고 싶지만, 사실 이런 소리를 늘어놓는 것 자체가 이미 매우 구차한 일인 것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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