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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그곳에 숭례문은 존재하지 않았다.

조회 수 1121 추천 수 0 2008.02.12 14:32:37

숭례문 방화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이 문화재가 불타서 사라졌다는 사실이 아니다. 사람들이 어째서 애도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질문이다. 문화의 가치를 인지하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한 공분은 언제나 가능하다. 그것에 관해서는 이택광 님의 이나  umberto 님의 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도대체 사람들은 왜 분노하는 것일까? 사실 사람들은 문화를 소중히 여기는데 정치권이 도외시한 걸까? 숭례문에 설정된 화재보험금이 겨우 9500만원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그런 견해는 적절하지 못하다. 이 사건은 몇몇 개인이나 특정한 집단을 넘어선 사회 전체의 증상을 보여준다.


일관성을 지키는 척하는 냉소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사람 하나도 죽지 않고 그깟 건물 하나 불탔다고 왜 이렇게 난리를 치는 거야? 이틈에 또 좌파들이 준동해서 2MB나 까려고 하는 구나.” 다른 한편의 냉소주의자들은 또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2MB 찍었을 때 이런 일 있을 줄 몰랐어? 다 니들이 잘못한 거지. 이제 와서 뭘 한탄해?” 이들의 견해는 물론 평소엔 문화에 관심이 없다가 숭례문의 화재에 충격을 받은 사람들의 그것보다는 일관적이다. 하지만 그들은 일반적인 냉소주의란 가능하지 않다는 것, 냉소주의란 것은 결국 자기 마음에 안 드는 누군가를 조소할 때에나 가끔 꺼내어 드는 흉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 점에서 그들은 상식인들보다 무지하며, 상식인들을 이해하는데 참조가 될 만한 관점을 제시하지도 못한다.



얼마 전에 어느 신문인가에서 ‘착한 소비’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 제3세계 노동자들을 좀 더 배려하는 공정무역을 통해 수입된 좀 더 비싼 상품들을 소비하는 선진국의 조류가 드디어 우리나라에도 흘러들어오고 있다는 기사였다. 포털사이트에 달린 덧글들이 가관이었다. “공정무역이니 뭐니 하지만 결국엔 기업이 물건을 비싸게 팔아먹으려는 수작에 불과하다.” 바로 이런 말을 하면 한국의 냉소주의자들로부터는 날카로운 견해를 제시했다고 칭찬을 듣는다. 5천만 중에 3천만 정도는 그렇게 떠드는 데도 그들이 모두 날카로운 위인들이라니 대한민국 국민들은 세계에서 가장 샤프한 분들인 모양이다.



당연히 시장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 그런데 문제는 소비자가 그런 것들을 원한다는 거다. 간단히 뒤집어 말하면 ‘착한 소비’라는 것이 발생하는 이유는 그런 상품에 좀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소비자들의 습성 때문이다. 여기에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들이 반응하여 공급을 시작한다. 돈보다 소중한 어떤 가치를 발견했을 때, 그것을 돈으로 환산해주는 것, 그것이 자본주의의 마력이다.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시민들은 19세기 좌파들이 재앙처럼 언급한 ‘자본주의 노동자’의 삶을 벗어나 다양한 삶의 맥락을 들여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그 모든 것들을 당연하게도(!) 다시 돈으로 환산해준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힘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돈이 아닌 모든 종류의 가치를 도외시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힘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믿어 왔다. 다운로드받을 수 있는 MP3가 있는데도 음반을 사보는 친구는 우둔하거나 부르주아일 것이다. 인터넷에 스캔이 되어 올라오는 잡지를 돈내고 구독해서 보는 친구도, 몇 만원이면 살 수 있는 자전거 대신 수백만원짜리 로드 바이크를 사서 거리를 질주하는 아저씨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그것 자체로는 아무런 내용도 가지지 않는, 모든 종류의 가치를 매개하는 추상적이고 선험적인 형식일 뿐이다. 그것이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은 내게 무엇을 원하는가? 어떤 명령을 내리려는가?” 당신은 이렇게 명령을 내린다. “내가 원하는 것. 그것은 너 이외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네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것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은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하나의 비정한 코미디다.



당연하게도, 그 자체로 패러독스를 품고 있는 저 명령은 시행될 수 없다. 냉소주의자보다 더 날카로운 시각을 가진 사람은 저 명령이 이상한 방식으로 관철되는 사이에 있는 자들만 몸집을 불리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한다. 이것은 좌파적 접근도 원한감정의 발로도 아닌, 사태에 대한 간단한 브리핑이다. 몸집을 불리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 명령이 윤리적인 것이라고 믿으면서도 - 주류경제학이 실증경제학에서 규범경제학의 위치로 내려와 마르크스주의와 경쟁한다. 신기한 일이다. - 사실 그렇게 사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위안거리를 찾는다.



대한민국은 전통을 존중하는 국가가 아니다. 서울은 역사를 간직하는 도시가 아니다. 스콧 버거슨의 <대한민국 사용후기>를 보면, 옛 정취를 간직한 피맛골이 어떻게 ‘학살’되었는지가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대한제국 황실의 일원이 거처했던 인사동의 한옥건물을 주차장에 쓰려고 허물었으면서도 벽안의 외국인이 그 사실을 지적하기 전까진 인지하지도 못하는 게 한국인들이다.


대한민국 사용후기 상세보기
J. 스콧 버거슨 지음 | 갤리온 펴냄
한국학 에세이! <발칙한 한국학>의 저자 J. 스콧 버거슨의 『대한민국 사용후기』. 1996년부터 대한민국의 비주류 문화를 주제로 한 1인 잡지 [버그]를 발행하고 있는 저자의 책으로, 교양 있는 유쾌한 수다와 경계 없는 날카로운 비판이 공존하며 우리가 모르는 한국의 역사를 애증을 담아 소개한다. 이 책은 서울에서 살고 있는 미국인의 관점으로 쓴 한국학 에세이다. 저자는 자신을 '물먹은 흰둥이'라고 소개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역사가 망각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하고, 그 사실이 드러날 때엔 수치스러워 한다. 그런 면에서 숭례문의 폐허 앞에서 한국인들이 느끼는 당혹스러움은 통속적인 사이버펑크의 주인공의 감정과 닮은 데가 있다. 어느 날 면도날에 살갗이 베인 그는 몸 안의 금속질의 물체를 인지하면서 그제서야 “나는 인간인가, 아니면 사이보그인가?”라고 질문하는 것이다. 대운하라는 이름의 전신 성형수술을 앞둔 그가 미묘하게 감지하는 파국의 느낌. 하지만 그는 자신이 수술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어떻게든 그 느낌을 은폐하려 든다. 노정태의 우려
는 그 은폐의 시도가 사회적 약자들에게 향할 경우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방화범을 사형시키라는 네티즌들의 ‘악플’은 그런 우려를 어느 정도는 뒷받침하고 있다.


숭례문이 우리의 가장 훌륭한 문화재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한국인들이 일상적인 행동으로 그 존재를 부인하는 4천년의 퇴적된 역사는 그보다 더 훌륭한 유형 무형의 자산도 많이 남겼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없애버렸거나, 없애버리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숭례문이 존재할 때 사람들은 국토가 어떻게 뒤집히든 말든 자신들이 4천년 역사의 계승자라는 생각을 하고 살아갈 수 있었다. 재개발 이후 집값 폭등을 기대하면서도 서울 시민들은 자신들이 600년 역사를 지닌 도시의 시민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숭례문은 그런 환상을 지탱하는 구조물이었다. 그 위안을 위한 환상의 실체를 이택광은 ‘민족’이라고 부른다.


민족 한국 문화의 숭고 대상(민예총문고 005) 상세보기
이택광 지음 | 로크미디어 펴냄
'민족'을 통해 한국 문화 현상들을 분석한 책. 민족이라는 숭고 대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한국 문화, 특히 대중문화의 이데올로기와 결합해서 작동하는지를 분석한다. 최근 이슈가 되었던 몇 가지 문화 현상들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위안의 지점은 진리가 억눌리는 지점이기도 했다. 화마(火魔)가 환상의 건축물을 무너뜨렸을 때 그 아래로 진실의 사막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 숭례문보다 시간적으로는 나중에 나타났지만 구조적으로는 먼저 있었던 곳이다. 그곳에 숭례문은 존재하지 않았다. 삼풍이 무너질 때 어느 종이신문이 “여기가 서울이 맞습니까?”라고 물었던가. 그 질문이야말로 뒤집혀진 진리를 드러낸다. 외면하지 마라. 저곳이야말로 바로 우리들의 나라, 대한민국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적어도 숭례문이 무너졌을 때 진짜로 아팠던 사람이라면 저 개방된 진실의 공간에 대한 책임을 특정한 누군가에게 떠넘겨서는 안 된다. 더더구나 방화범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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