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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고미숙, 엄마의 늪

경제구조나 교육제도의 비리 같은 건 누구나 감지할 수 있다. 어쨌거나 공론장 속에서 행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의 이름으로, 엄마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일들은 당사자도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철저하게 사적인 행위로 치부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그것은 ‘늪’이다.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폭력이 "철저하게 사적인 행위로 치부"되기 때문에 늪과 같다는 진단에 동의하지만, 이 현상을 이와 같은 비평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싶다. 스캇 펙의 <거짓의 사람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아이가 부모의 선의가 자신을 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거짓의 사람들>의 사례에서와 달리, 한국에서 중산층의 자녀들은 사교육 시장에서 단지 부모의 볼모로 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공모자이다.


그들은 "의식주에서 입시와 취업정보, 친구 관계까지 일일이 챙겨주는 ‘엄마’들에게 몸과 마음이 온통 길들여진 탓에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 속으로’ 발을 내디딜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겐 정글의 법칙에 순응하는 싸움 자체가 엄마 아빠와 함께 해야 하는 일이다. 부모들만 자식들을 다른 집 자녀들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학생들은 다른 부모를 거론하며 부모들에게 더 많은 사교육을 요구한다. 그것이 그들에게 이득이 된다고 당연히 생각하기 때문이다. 슬픈 현실이지만, 어떤 도덕적 당위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나라면 중산층들에게 좀 더 경제적인 관점에서 조언을 해주고 싶다. 사교육 종사자들을 지나치게 살찌우는 대신 보험 설계사의 타당한 조언을 받아보라고 말이다. 나는 중산층들에게 사교육을 시키지 말라고는 말할 수 없다. 한국 사회의 실정에서 그건 너무 크나큰 희생을 요구하는 (그러므로 아무런 울림도 없을) 주장이다. 나는 사교육비의 한계비용과 한계편익의 균형점을 찾아보라고 중산층들에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쉽게 말하자면 이런 얘기다. 어느 중산층이 고등학생 자녀에게 50만원 어치의 사교육을 시키고 있다고 치자. 그리고 그 사교육 비용이 발생시키는 편익이 50 정도라고 치자. 이 중산층이 자신의 욕심으로, 혹은 자녀의 입방아에 넘어가 100만원 어치의 사교육을 시킨다면 그 편익은 어느 정도나 될까? 55나 60이나 되면 다행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사교육비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중산층이 자녀에게 제공할 수 있는 교육레벨에서는 더 이상 편익의 증가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계효용이 급격하게 체감하는 것이다. 상류층이나 강남 중산층들을 쳐다보면 분통이 터질 수도 있겠지만 현실은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50만원은 자녀가 아무리 다른 집 자녀 얘기를 하면서 투덜거리더라도 연금보험에 들어두는 것이 이득이다.


부모들의 노후설계는 지금과 같은 경제구조에서는 결국엔 자녀들에게도 이득이 된다. 88만원 세대는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매우 오랫동안 부모의 용돈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많은 비용을 때려박더라도 결국 좋은 직장에 집어넣으면 회수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물론 자녀의 '싹수'에 따라 사례별로 그 판단은 달라지겠지만, 상당히 많은 경우 부모들이 그냥 돈을 쥐고 있는 쪽이 훨씬 이득이 되고, 결국엔 자녀 입장에서도 용돈줄이 고갈되지 않는 상황이 더 좋다고 여길 수 있다. 지금 강남에선 조기유학을 다녀와서도 취직이 되지 않는, 할줄 아는 건 영어밖에 없는 실업자들이 스타벅스에 앉아 교사가 될 궁리나 하고 있다고 한다. 이명박과 이경숙의 영어 교육 강화(?)는 그 친구들을 교사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겠다는 것이다. 오직 부자들의 실패만 정부가 나서서 변상해주는 나라라니 꼬라지가 말이 아니다. 이건 시장경제도 아니고 자본주의도 아니다. 하여튼 강남중산층이 저럴 정도이니 평균적인 중산층들은 자식에 대한 투자의 합리성을 재검토해봐야 한다. 그들의 자식들을 이명박이 챙겨줄 리는 없으니 말이다.  


나의 경우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께서 암수술을 받으시며 가세가 기우는 바람에 고등학교 시절 거의 사교육을 받지 못하다시피 했지만, 여동생은 특목고에 다닌 탓에 거의 한달에 100만원씩 사교육비를 지출했다. 어머니는 여동생이 들으면 안 좋아하겠지만, 이란 단서를 붙이면서도 요새 그 사실을 후회한다. 그렇게 돈을 들여 등록금이 싼 대학을 보낸 것도 아니고, 그때 한달에 50만원씩만 연금보험을 들었다면 지금 훨씬 덜 답답할 것 같다는 거다.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말이다.  


한국의 경제상황이 안 좋기는 하지만, '고용없는 성장'의 문제는 세계적인 추세며 경기가 좋아진다고 해결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캐나다에서도 문제는 비슷한데, 다만 정부가 사회적 기업 등을 동원하며 젊은이들에게 월수 50만원 짜리 직장을 주고, 그 50만원으로 겨우 먹고 살 수는 있을 정도의 주거혜택이나 의료혜택을 지원해준다고 한다. 부모 돈 타먹으며 사는 건 아니니까 우리 젊은이들처럼 찌질해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잘 먹고 잘 사는 건 아니다. 그렇게 십년쯤 지내다 일자리가 하나 생기면 한명 씩 한명 씩 겨우 겨우 취직을 한단다. 이 실정이 바뀌긴 힘들 것이고, 게다가 한국에선 정부가 이런 식의 지원을 하는 꼴을 보기도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중산층 부모들의 선택은? 바뀐 현실을 직시하고 돈줄을 자기가 계속 쥐고 있는 쪽이 더 이득이다. <88만원 세대>에 나온 경제적 현실을 보고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자녀들도 능력 이상의 돈을 끌어다 쓰고 취직 잘한 '엄친아'들과 비교당하느니 차라리 먼저 부모를 이런 식으로 설득해 볼 수 있다.


중산층들만 이렇게 정신을 차려도 사교육 거품이 조금은 꺼질 것이다. 중산층 이하 집단들은 그냥 대학진학을 포기하는 쪽이 경제적으로 더 현명할 수 있다. 자녀가 아주 공부에 취미가 있다면 모르겠으나, 대학을 졸업해서도 88만원짜리 비정규직 정도밖에 얻을 수 없다면, 대학을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학력을 보지 않는 외국계 보험회사에 세일즈맨으로 입사하는 쪽이 더 현명하다. 공부를 잘하는 축이라서 투자를 한다 하더라도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공무원 시험 학원에 들어가는 쪽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이미 어떤 이들은 그렇게 하고 잇는 것으로 안다. 대학을 간다 해도 날로 치솟는 등록금 속에서 졸업을 포기할 확률이 높을 뿐더러, 졸업에 성공한다 해도 높은 금리의 빚만 지고 나올 뿐이다. 지금은 대학진학율이 85%에 이르지만, 어차피 조금 있으면 많은 대학들이 망할 것이다. 그들이 등록금을 이렇게까지 올리는 데에는 학생수가 줄어들 거라는 예상 속에서 미리 실탄을 조금이라도 쌓아두려는 계산이 있다. 교육열이 높고 계층이동의 욕구가 강한 한국인들의 심성상 받아들이기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이제는 우리도 자식들의 삶은 부모의 경제력에 상당부분 구속되어 있음을 받아들이고 그에 맞춰 대책을 세워야 한다. 보험설계사가 되어 사교육비를 100만원씩 쓰는 중산층 가정에 들어가 50만원짜리 연금보험 가입을 권유하는 것이, 이 엄혹한 환경에 적응하는 사적인 대응일 수가 있다.


공적으로 문제에 대응해야 한다는 고민을 하는 사람들 역시 반드시 필요하겠지만 사적인 자기구제책 역시 언제나 중요하다. 일자리도 없고 복지정책도 없을 우리의 미래에서 중산층과 서민이 가져가야 할 키워드는 보험밖에 없는 것 같다. 부자가 되려는 욕망을 버리고 조신하게 방책을 세우면 그럭저럭 버텨나갈 수는 있을 것이다. 적어도 효용 없는 경쟁에 밑빠진 독에 물붓듯 돈을 쏟아붓는 것보다는 낫다. 그것이야말로 '희망의 늪'이며, 거기에서 빠져 나와야 뭔가 대책이 나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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