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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88만원 세대', 그리고 파시즘

조회 수 862 추천 수 0 2007.12.04 11:51:40
'88만원 세대'가 보통 명사가 된 것 같다. 그것이 이미 우리 사회에 존재했던, 그러나 아무도 인지하기를 거부했던 경제적 현실을 밝혀 드러나도록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88만원 세대>라는 책의 가치는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또한 한편으로는 '정치의 계절'에 정책적으로 얘기하는 후보들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언론들이 이 얘기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그런 부분도 있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보도는 차이가 있지만 한 부류로 뭉뚱그려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이 현상의 경제적 원인을 '몇년 동안 경기가 안 좋아서 20대가 (특정한 세대가) 취직을 못해서 생긴 문제'라고 정의한다. 새롭게 형성된 경제 구조의 문제로 보지 않고 경기순환의 문제로 본다는 것이다. <쾌도난마 한국경제> 논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무슨 놈의 경기가 7-8년 동안이나 계속 저점에서 멈춰있나? 여하간 이런 논법에선, 그렇게 경기를 바닥으로 만든 건 좌파/반기업 정서의 참여정부, 따라서 정권교체가 너희 젊은이들의 희망, 뭐 이런 등식이 성립한다. 이렇게까지 말은 안 하지만 의도는 그렇다. 조선일보의 경우 이게 지금껏 추구(?)해 왔던 386과 포스트 386에 대한 이간질의  경제적 판본인 것 같다.

경향신문의 특별 취재는 책의 의도를 충실하게 따라가고 있다. 취재된 개별사례 중에는 아는 사람도 있어서 개인적으로 마음이 짠했다. 취재의 시작은 이렇게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정말 같은 사회에 사는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만큼 힘들게 사는 젊은이들이 많다. 하지만 '88만원 세대' 담론을 부정하는 윗 세대들에게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려면, 이젠 좀더 일반적인 청년들 얘기를 할 필요가 있다.

비율로 어떻게 되는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88만원 세대'에 어느 정도 공감하기도 하고 그래서 뭐 어쩌라구, 라고도 말하는 (구)중산층 자녀들의 경우 20대 중반은 아직 (어느 정도는) 부모님 용돈으로 살면서 취업준비를 하는 단계다. 문제의 핵심은 이 친구들이 자신은 이렇게 해서 스펙을 높이면 취직할 수 있을 거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다는 것이고, 설령 그렇지 않다 해도 다른 방도가 뭐가 있냐고 볼멘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윗세대들의 냉소어린 손가락질은 대개 이들의 찌질함에서 기인한다. (가령, 김형태의 '카운셀링'을 생각해 보길.)

하지만 이들이 이러고 있다는 것 자체가 또한 사회문제인 것이다. 찌질하니까 그러는 게 당연하다고? 사실 조직에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공부하고 있으면, 어지간히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 이상 찌질하기 마련이다. 많은 사람들이 찌질한 상태에서 취업해서 그 안에서 깨지고 박살나면서 소위 사회성이라는 것을 학습해 나간다. 그런 기제가 없다면 이들은 서른이 넘어도 여전히 이 상태일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계속해서 타당한, 혹은 부당한 경멸을 받을 것이다.  

윤리적인 판단을 떠나 두려움이 든다. 일전에 몇몇 냉소주의자들과 얘기해 보았지만, 이들은 정치성을 지닌다는 것 자체가 386세대에게 놀아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야 정동영의 내용없는 사탕발림에 넘어간다면 그렇게 되겠지만, 다른 방식의 정치성도 있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20대의 상당수가 정규직이 된다는 것은 도저히 그들의 상상 속에서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20대에게 숨통을 트이는 방법으로 윗세대들이 모두 (혹은 대다수가) 비정규직이 되는 해법을 주문하고 있었다. 이런 해법은, 이번 경향신문 취재에 응했던 어떤 이에게서도 나온다.

5-6년 후, 이들이 더 이상 용돈을 받지 못할 처지에 내몰렸다고 치자. (당연히 그렇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경기가 안 좋아서 그랬다'는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사탕발림이 이명박 집권 기간 동안 '오류'로 판명되었다고 치자. (이 역시 99% 그렇게 될 것이다.) 지금도 이들의 네이버 댓글에선 월수 200을 넘는 모든 노동자들에 대한 원한감정이 스멸스멸 기어나오는데,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이미 한국 정치는 정당 정치나 기타 시스템과는 상관없이 '바람'에 의해 움직이는 취약한 구조가 되었는데. 이명박 이후의 파시즘을 운위하는 건 결코 과장이나 왜곡이 아니라 그저 약간 비관적인 현실 진단일 뿐이다.

사회문제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니겠는가. 재수없으면 철밥통들도 모두 잘려나갈 수 있다. 만일 20대들이 자신들의 에너지를 포지티브한 데 쓰는데 실패한다면, 그들은 몇년 후 그것을 다른 모든 이들을 자신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데 사용할 것이다. 특히 386들은 정신차려야 한다. 그들이 일어났을 때 누가 먼저 타깃의 대상이 될지는 분명하니까. 88만원 세대의 문제가 단지 '그들 세대가 불쌍하다'의 문제가 아닌 이유는 그것이다. (누가 누가 더 불쌍한가? 따위의 논쟁을 시작하면 끝이 없다. 이게 무슨 군대 내무반의 군번 논쟁도 아니고.)  가장 최근에 이택광 선배와 만나 술을 먹을 때 주로 논의되었던 얘기가 바로 이것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이타적인 것' 따위 바라지도 않는다. 제발 우리 모두, '현명하게' 이기적으로 처신하자. 당장 빼먹기엔 곶감이 달다고 인생이 끝나는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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