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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세대론과 X세대 키보드 워리어들

조회 수 2312 추천 수 0 2007.09.29 04:06:28

 <디 워> 사태를 통해 드러나는 큰 문제는 대중의 문제와 지식인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대중의 집단-감성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그 문제에 대해 왜 이토록 지식인은 무력한가, 뭐 이런 문제들이 큰 줄기다. 하지만 이 큰 줄기를 벗어나 왜 변희재나 김휘영 같은 친구들은 진중권을 향해 저렇게 짖어대는가를 생각한다면, 지엽적이지만 ‘X세대 키보드 워리어’의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 이들의 영역은 협소하다. 하지만 <88만원 세대>가 보여준 인식을 통해 바람을 일으켜보려는 사람들의 영역도 협소하긴 마찬가지고, 협소한 이들이 그릇된 방식으로 세대론을 선점하여 희망의 불씨에 재를 뿌린다면 불씨가 터질 확률은 그만큼 더 줄어들게 된다. 안 그래도 극히 낮은 확률인데.

 


먼저 '키보드 워리어'라는 명칭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나는 ‘논객’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논객이라 불러주는 것보다는 키보드 워리어라고 불러주는 쪽이 편이다. 심지어는 진중권이 스스로를 ‘검객’이라 칭할 때에도 닭살이 돋는다. 인터넷에서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 있다면, 그것은 진중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내가 ‘인터넷 논객’이란 말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의 세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논객’이란 낭만적인 단어를 사용하다보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자타칭 논객이라 불리는 이들을 ‘진정한 논객’과 ‘사이비 논객’으로 구별해야 한다. 이런 식의 구별법이 필요한 용어는 특정한 종류의 멋이나 감수성은 표현할 지 몰라도, 사태를 서술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다. 어떤 조직폭력배가 건달이냐 양아치냐를 구별하는 것이 이 세계의 세력다툼을 기술하는데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그냥 드라이하게 ‘키보드 워리어’와 ‘사이버 칼럼니스트’가 있다고 기술하고, 그중 쓸만한 놈은 몇 명 없더라는 식으로 말하는 쪽이 훨씬 간편하다.

 


이 기준으로 보면 나같은 사람은 가끔 칼럼을 쓰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키보드 워리어고, 1세대 키보드 워리어의 제왕이라 볼 수 있는 진중권도 그건 마찬가지다. 변희재는 키보드 워리어질도 가끔 해본 사이버 칼럼니스트다. 가끔 인터넷엔 완결된 자기 글은 올리지만 리플 논쟁이나 덧글 논쟁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사이버 칼럼니스트’라고 볼 수 있다. 주로 웹진 주변에 많이 서식하는 분들이고, 수준은 천차만별이다. 대자보에 글을 쓰는 나와 노정태와 동갑내기인 김수민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이 친구 글을 읽는 것은 내 오랜 즐거움이었다. 논객이란 단어만으로는 이런 식의 설명이 힘들다.

 


둘째, ‘논객’이란 단어가 성립하려면 논쟁을 보증하는 장(場)이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나는 한국 사회가 대개의 경우 그 장을 마련하고 있지 않다고 보며, 인터넷은 특히나 더 그렇다. 그래서 키보드 워리어는 논쟁의 기술과 별도로 비-공론적인 장에서 생존하는 기술을 체득하고 있는데, 이들을 ‘논객’이라 부르면 이런 특성들이 설명되지가 않는다.

 


가령 진중권은 조선일보 독자마당에서 ‘밤의 주필’로 행사할 때, F5 한번 누를 때마다 자신이 올린 글의 조회수와 추천수가 어떤 식으로 변화할지를 꿰고 있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예측보다 추천수가 다소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하면 (조선일보를 비판하는 그에게 우호적인) ‘민주당 알바’가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추천수가 폭등하여 조회수를 오버하는 현상이 발생하면 당연히 (진중권의 추천수는 조작일 뿐이라고 증명하고 싶은) ‘한나라당 알바’가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런 능력은 정말이지 그가 ‘인터넷 폐인’이 아니고서야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인데, ‘논’에 관련된 것은 아니다. “김대중은 빨갱이다.”라는 제목으로 멀쩡한 글을 써서 ‘파블로프의 개’ 실험을 했던 그의 초기 조독마 개척 작업도 ‘논’과는 거리가 멀다. 웬만한 키보드 워리어들은 남 모르게 멀티 아이디로 자신을 옹호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정말이지 키보드 워리어라는 단어가 아니면 설명이 안 된다.

 


나도 그렇다. 덧글이 탄생하기 이전, 모든 논쟁을 리플로만 해결해야 했을 때, RE: 로 시작되는 글이 달리면 RE: RE: 가 달리고 그 다음이 달리고... 끝이 없었다. 그러면 RE: 글은 원 글 밑에 오른쪽으로 한줄 밀려서 달리는 게시판의 특성상 논쟁이 한번 지나간 곳은 RE:의 악무한이 이어지는 거대한 대각선이 생성된다. F5 한번 누를때마다 그 대각선은 길어진다. 그 모습을 보면 뭔가 쾌감이 솟구쳐 오르고 전투의지가 솟구쳐 오르던 것들이 키보드 워리어들이다. 이런 건 ‘논’이랑은 별 상관없는 일이지 않나.

 


셋째, ‘논객’이란 명칭을 사용하려면 가령 ‘협객’이 그렇듯이 자기들끼리 이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부여한 모종의 책임윤리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거 없다. 있다 한들 제각각이다. ‘검객’ 진중권이 서프라이즈 키보드 워리어들이 청와대 인사들에게 밥을 얻어먹었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는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그게 사실이라면 너희들은 인터넷을 떠나라고 일갈한 적이 있었다. 그때 저 ‘논객’들과 그 지지자들의 반응은 “청와대는 우리편이고 우리는 밥을 먹든 말든 앉으나 서나 노빠인데 우리편한테 밥 얻어먹은게 무슨 잘못이야? 잘못이라면 조선일보 기자와 술먹은 너에게 있지.”라는 것이었다. 누구 말이 온당하고는 차치하더라도 이렇게 정체성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큰 집단을 ‘논객’이란 말로 묶을 수는 없다.

 


키보드 워리어들의 몰락은 서프라이즈 때부터 시작되었다. 한국의 인터넷 토론문화의 본질적인 문제점은 각 생활세계의 직장인들의 참여가 활발하지 않고, 지지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논쟁의 장이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으니 앞서 말했듯 온갖 반칙의 기술이 횡행하게 되고 인터넷에 시간을 많이 쏟을 수 있는 학생이나 백수가 승리하게 된다. 자기 생활도 하면서 인터넷에 시간을 쏟아부어서 이런 친구들을 혼쭐내주는 진중권이라는 네티즌의 존재는 그래서 돋보이지만, 경향적으로 보면 한국 사회에서 많이 나올 수 있는 캐릭터는 아니다. 그는 일종의 사기유닛이다. 하여간 이런 친구들이 2002년에 키보드 워리어질을 하다가 운동을 하다가 청와대나 여당으로 들어갔고 그 동네에서 생에 첫 월급을 받게 되는 감격을 맛보았다. 학생이나 백수가 키워질을 하다보면 돈을 벌 수 있게 되리라는 망상을 심어준 게 참여정부였는데, 그 쉰 떡밥을 물고 서프라이즈의 마케팅이 시작되었다.

 


모든 노무현 관련 서적은 2002년 대선 전에 나왔지만, 서프라이즈 논객(?)들의 책은 대선 후에 출판되었다. 말하자면 다른 책은 노무현 대통령 선거 운동 하려고 낸 책이었는데, 이들의 책은 우리가 선거기간에 이렇게 열심히 키워질을 했으니 밥 좀 달라는 숭고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진중권은 일찌감치 인터넷 글질로는 수익이 나지 않는다고 서프라이즈의 시도에 대해서 일갈했다. 자기 생계수단을 찾은 후 틈틈이 키워질을 하려고 하지 않고 키워질 자체를 통해 돈을 벌려고 한 순간 키보드 워리어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질 운명이었다. 문제는 그들이 적어도 네트에서는 엄청난 정치적 난국을 겪은 세대이기 때문에 쉽게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디 워> 사태 같은 이슈가 생기면 그들은 다시 대중의 욕망과 권력의 욕망을 번갈아 빨아대면서 말 같잖은 글을 써재끼며 목숨을 연명한다. 그래서 날이 갈수록 글의 수준은 낮아지니, 마치 일본 AV 스타가 데뷔하고 은퇴하기까지의 과정을 보는 것 같다. (AV를 폄하하려는 의도는 없다.)

 


이들의 짓거리는 앞으로도 비전이 없다. 그저 하던 짓거리라서, 박은 돈(sunk cost)이 아까워서 이 바닥을 못 떠나고 있을 뿐이다. 진중권은 디씨뉴스 인터뷰에서 다시 한번 논객질은 돈이 안 된다는 사실을 천명했다. 칼럼 여기저기 써봤자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정력적으로 활동하면 활동할수록 자신에겐 (금전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손해라는 것이다. 떡고물도 없는데 그걸 뺏어먹겠다고 망둥이들이 날뛰는 꼴이다. 자기 블로그에 자기 얼굴과 계좌번호를 올려놓고 제발 돈 좀 부쳐달라고 생떼를 쓰는 공희준이라는 키보드 워리어가 있다. 이 분의 진중권 비평은 “그는 노점상 아주머니들의 감성을 모른다. 그러므로 그의 <디 워>비판은 무효다.”로 집약된다. 백수질을 하면서 방바닥을 오래 긁다보면 일년에 1억도 못 버는 진중권이 부르주아로 보이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에 대한 계급적 원한을 표출하면서 자신이 ‘민중의 벗’이라고 착각할 수 있는 모양이다. 야무지다. 하지만 키워질을 계속 하는 한 그는 프롤레타리아의 벗이 아니라 룸펜의 벗일 뿐이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X세대 키보드 워리어들은 심정적으로 사정이 더 절박하다. 386들처럼 운동권 연줄로 뭘 해볼 수 있는 가능성도 없고, 같은 짓을 해서 빌빌거리려고 해도 언제나 386들에게 뭔가 밀린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랫 세대를 선동하여 어떻게든 권력을 쟁취해 보려고 한다. 원래 386세대에 가장 박탈감을 느끼는 건 X세대다. 내 또래의, 그러니까 20대 중반의 젊은이들은 386세대가 연대해서 일을 하는 걸 실제로는 본 적이 없고, 이제 막 취업시장에 나왔을 뿐이므로 무엇을 빼앗기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아직 확실히 모르며, 이 경쟁을 ‘세대 내 경쟁’으로 인식하여 토익점수를 올리면 문이 열릴 것이다라는 50대 아버지 어머니들의 충고를 철썩같이 믿고 있다. 반면 X세대는 다르다. 그들은 386들의 연대성을 눈으로 보았고, 지금 이 순간 그들에게 발리고 있으니 분통 터트릴만 하다. 게다가 키보드 워리어의 세계에서조차 그런 일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그리하여 공론이 없는 사회에서 과도한 시간을 인터넷에 투입하여 여론을 과잉대변하는 이들은 ‘포스트 386 세대론’을 반복 재생산하게 된다. 이것은 386세대의 어줍잖은 ‘20대 혐오론’과 적대적 공생관계처럼 맞물려서 앞으로 더욱 퍼져나갈 것이다. 지금까지는 ‘20대 혐오론’쪽이 선빵이었고 원인이었지만, 앞으로는 후세대의 386경멸론도 더 심해질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세대론이 이렇게 정립되어서야 <88만원 세대>에서 지적한 문제들과 이미 그 책에도 충분히 예시로 제시된 해결방안 등을 고민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회문제가 지적으로 논의되지 않고 감성적 선동과 결집을 통해 일부의 이익만이 대변되는 작태가 이 사안에서도 반복될 공산이 높다. 20대는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X세대 키보드 워리어들은 포스트 386이 사실은 386보다 더 똑똑하다고, 386세대 정치인과 평론가들을 미워하면 그들의 권력을 끝장낼 수 있다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한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가 흘러간 방향으로 보면 오히려 이들의 감언이설이 20대의 감정이입을 이끌어내기 더욱 쉬운 구조다. 물론 대다수의 20대들은 키보드 워리어의 말에 귀를 기울일 만큼의 시간이 없지만, 무관심한 다수의 침묵과 찌질한 소수의 잘못된 지지가 결합되면 충분히 나쁜 일이 일어난다. 사실 <디 워>의 경우도 이 영화를 정말로 재미있게 본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느냐를 물어보면 확실한 대답을 낼 수 없다. 어쩌면 디빠들의 생각보다는 훨씬 적었을 지도 모른다.

 


<88만원 세대>가 ‘찻잔 속의 태풍’으로나마 센세이션을 일으킨 건 세대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이 포지션이 유효하다는 걸 X세대 키보드 워리어 등이 깨달으면, 세대론의 감성적 파급력은 더 이상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386 세대에 가장 적대적인 이들은 세대론을 그저 박형준류의 386에 대한 20대의 볼멘소리로 전락시켜 버리거나, 변희재가 그러하듯이 ‘포스트 386’을 반 참여정부 노선에 동참시키려는 조선일보의 정치적 기획에 투항시켜 버린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문제를 지적으로 취급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이 한국 땅에선 어떠한 맥락도 없다고 강하게 주장하려는 건 아니지만, 우리에겐 이론적 사유에 대한 옹호가 필요하다. 월터 옹의 말을 이어받은 진중권의 말을 빌리자면, 구술문화에 비해 빈약한 문자문화의 정립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대중에게 먹히지 않는다는 푸념은 그저 희망이 없다는 말과 동의어일 뿐이지, 다른 방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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