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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어떤 포스트 구조주의자에게

조회 수 1270 추천 수 0 2007.09.21 18:47:02
 

'레비나스'라는 아이디의 네티즌의 글 


진중권 선생님께


디워에 관련해서 진중권 선생님은 이를 너무 가볍게 다루고 있는것 같습니다. 또한 여기 계시는 몇몇 분들도 디빠?들의 출현을 너무나 쉽게 파시즘의 전조로 이야기하고 있지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이들의 출현은 시대를 나타내는 극단적 표면이며 포스트모던의 결말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진중권 선생님의 결말은 여전히 네그리 다중입니다.


진중권 선생님은 주체들에게 서로의 공간을 침해하지 않는 그런 곳을 원하시나 봅니다. 그렇지만 현대 철학의 극단은 우리가 언어로서 말을 하는 순간 타자의 공간을, 시선을 두는 순간 타자를 침략할 수 밖에 없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매끄러운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세상을 보는 눈은 기본적으로 왜곡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중권 선생님의 비판도 그 자체로 타인의 영역을 침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진중권 선생님이 애매한 위치에 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재적으로 우리는 분열되어 있고 그 분열은 서로를 침입하는 하에서 상징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즉 감출 수 없는 진실은 디빠들이 파시즘같다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하는 순간 이미 진중권 선생님께서 비판하는 그 주체로 다가설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스피노자에게 다중은 애매하나는 슬라보예 지젝의 주장은 어떻습니까?


다중은 스피노자에게 양면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파시스트일 수 있고 아닐 수 있다는 거지요. 진중권 선생님은 이를 단순히 순화 시켜서 다중론을 내세우지만 그런면은 솔직히 말해서 너무 보수적인 생각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 상징계 내에 분열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진중권 선생님의 비판은 기실 그 자신의 논리와는 다르게 매우 보수적입니다. 그래서 비판받아야하는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내가 진중권 선생님의 말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여기에 있습니다. 비판은 날카롭지만 저들의 환상과 이데올로기를 횡단하지 못합니다. 진중권 선생님의 해결책과 주장은 그와 같은 논리로 비판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예컨데 디빠들이 똘레랑스를 들면서 국가주의든 파시즘이든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고 했을때, 또는 폭력을 담보하지 않는 방식으로 파시즘을 지키려고 했을때 진중권 선생님의 주장은 무효가 됩니다.


진중권 선생님은 파시즘 비판에 아무런 적실성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외려 진중권 선생님은 파시즘을 방조하고 계신 겁니다. 진중권 선생님은 저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너희들의 환상을 유지해라. 단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그러므로 진중권 선생님의 날카로운 칼날은 순식간에 타인에 대한 도덕론으로 변질되게 됩니다. 또한 여전히 그들은 환상을 스크린에 상영을 할 것입니다.


진중권 선생님은 파시즘 비판에 아무런 적실성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외려 진중권 선생님은 파시즘을 방조하고 계신 겁니다. 진중권 선생님은 저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너희들의 환상을 유지해라. 단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그러므로 진중권 선생님의 날카로운 칼날은 순식간에 타인에 대한 도덕론으로 변질되게 됩니다. 또한 여전히 그들은 환상을 스크린에 상영을 할 것입니다.


우리는 다중이지 않은게 아니라 이미 다중입니다. 다중이지만 그 분열점을 감추기 위해 무엇이 되어있을 뿐입니다. 무의식으로 인해 구조화 되었던 자아처럼 말입니다. 자본주의가 계급과 잉여를 감추는 하에서 유지되듯이. 그러므로 환상의 윤리학은 단지 서로의 전선을 확인하는데서 머무를게 아니라 이미 우리가 그러한 것을 인정하고 승인하는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진중권 선생님의 모든 포지션은 명백하게 가식적입니다.


진중권 선생님께 저는 구좌파를 더 나아가 계급론을 껴안길 바라고 있습니다. 합리론, 똘레랑스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은 어느 나라에나 있는 것이지 계몽주의를 거치지 못한 한국만의 상황은 결코 아닙니다. 영국에서 차도르 금지는 어떻습니까? 프랑스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억압은.. 이런 상황은 똘레랑스가 아닌듯 보이지만 똘레랑스의 결과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타성의 윤리라고 하는 똘레랑스는 명백히 기독교의 윤리와 닮아 있습니다. 즉 내 이웃을 내 몸과같이 사랑하라는 기독교식 윤리인데, 이것의 문제는 이웃이 내 모습과 같을때만 사랑할 수 있다는 겁니다. 반대로 말해 이웃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향락을 누리거나 어떤 짓을 했을때 내 공간을 친입한듯이 느껴졌을때 무효화된다는 거지요.


우리가 자존감을 느끼거나 주체로 느끼는 것은 하나의 판타지에 속합니다. 반대로 우리의 공간이라는 것에 침입을 당했다는 것도 기실 판타지에 속하지요. 그러므로 얼마든지 우리는 똘레랑스하에서도 정당함이란 이유로 불법침입을 정당화 할 수 있을겁니다. 그것 자체가 주체성을 느끼는 현실감을 유지시켜주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진중권 선생님의 주체는 여전히 파시스트에 가까울 겁니다.


저는 그러므로 디빠들에게 명백하게 뒤틀린 진중권적 주체라고 주장합니다. 디빠들이 삼켰던 포스트모던(모든 권위가 사라진 시대)에서의 권위는 주체로의 탄생을 위한 그들의 몸부림이였다고 생각합니다. 이 즈음에서 선생님의 합리론이 오이디푸스와 닮아있다고 주장하는게 어떨지요. 즉 아이가 주체로 탄생하기 위해서 받아들여야했던 법, 언어말입니다. 그러므로 현 세대의 보수화도 사실 이런 흐름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여전히 주체들에게 결핍을 상정하고 언어와 법을(합리성) 삼키라고 강요하고 있는 겁니다. 황우석-심형래-이명박으로 이어지는 귄위에 대한 열광은 불안한 주체들이 느껴야알 어떤 만족감을 주지요. 우리는 이들에게 횡단의 조건을 귀뜸해 줄 수 있습니다. 선생님.


합리성이라는 무시무시한 남근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우리는 결핍된게 아니라는 것. 우리는 이미 다중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후의 주체. 디워가 아무것도 아님을 승인한 후의 주체는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를 한 후에 할 수 있었던 철학적 혁명처럼, 명백히 다른 주체가 탄생할 것임을 확신합니다.



레디앙에도 게재된 진중권의 문예중앙 원고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7686 에 달린 리플이다. 리플이 길게 안 달리는 모양이다. 위 글의 한 문단이 리플 하나씩이다. 물론 시간역순으로 거꾸로 정렬해 있었지만, 보기 좋게 다시 편집하니 위에서 보듯 한편의 글이 나온다.



1.

먼저 말해야 할 것. 레비나스는 변희재나 김휘영보다는 훨씬, 비교할 수 없을만큼 똑똑하다. 변이나 김은 사이트 장사나 진중권에 대한 콤플렉스, 혹은 증오를 분출하기 위해 글을 쓸 뿐이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진지하다. 또 변이나 김의 텍스트가 개념어와 상식 수준의 편견이 짬뽕된 것에 불과하다면, 레비나스의 견해나 용어 사용은 나름의 일관성과 정합성이 있다. 말하자면 적어도 그는 책에 근거해서 사유하고 있는 것이다. 변이나 김은 그것도 안 되는 친구들이고. 레비나스는 포스트-구조주의 좌파의 포지션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문제는 레비나스의 글이 진지하게, 그것도 현학적으로 ‘놀고 있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구별했듯이, 모든 글은 일하고 있거나 놀고 있다. 그리고 그의 글은 분명 놀고 있다. 포스트-구조주의 좌파로서의 그의 포지션은 지젝의 언어에 크게 영향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별스러운 일이 아니다. 지금 이순간 한국 땅에서 포스트 구조주의 좌파를 하려면 제일 찾아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것이 지젝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는 변희재나 김휘영 따위보다는 이십배쯤 부지런하지만, 그 이상으로 부지런하지는 않은 것이다. 지젝밖에 안 읽었다고 해서 그가 폄하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나도 읽은 텍스트만 두고 본다면 그보다 더 부지런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는 포스트-구조주의가 다른 사조와 어떤 식으로 투쟁을 벌이고 있는지에 대해서 별다른 성찰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언어만 받아들여 사태를 재단하는 것이고, 결국 글을 ‘놀도록’ 방치하는 것이다.


3.

한국 사회의 비합리성은 서구적 합리성의 이면이며, 그림자이며, 배설물일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이 근대적 이성의 결과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인식’이 한국인들의 비합리성에게 합리성을 요구하는 ‘기획’을 반대하지는 못한다. 영국이 차도르를 금지하든, 프랑스가 외국인 노동자를 억압하든, 그런 나라들에선 황우석이나 심형래와 같은 사기꾼이 나타났을 때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지는 않는다. 진중권은 지금 서구적 근대성 전체를 조망하는 철학자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를 넘어서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냥 이런 일 안 생기게 하려면 저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레비나스의 발화는 ‘진중권 선생님’이라는 개인을 향할 수가 없다. 양자는 다른 층위의 문제를 바라보고 있고 따라서 대화의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논문을 쓰든, 자기 블로그에서 글을 쓰든) 전 문명에 대해서 발언하거나 전 인류를 향해서 발언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역할은, 되도록 전문적인 철학자들에게 맡기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4.

포스트-구조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는 “진중권 선생님의 비판은 기실 그 자신의 논리와는 다르게 매우 보수적입니다. 그래서 비판받아야하는건 아니지만 말입니다.”는 레비나스의 말이 정답이다. 포스트-구조주의는 진중권을 보수적이라고는 말할 수 있어도, 그 사실 자체를 비판할 수는 없다. 그래서 레비나스 글의 후반부는 자신이 등대로 삼은 사조를 이탈한다. “진중권 선생님의 주장은 무효가 됩니다.” “그런면에서 진중권 선생님의 모든 포지션은 명백하게 가식적입니다.” “저는 그러므로 디빠들에게 명백하게 뒤틀린 진중권적 주체라고 주장합니다.” 다 틀렸다. 지젝의 입장에서 진중권이 ‘환상을 횡단’하는 차원에 이르지 못했다고 해도, 그가 강요하는 윤리의 효과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한발짝 더 물러나 그의 단어사용을 인용한다면, 진중권의 포지션은 가식적일지라도, 효력을 지닌다.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 ‘진리는 오인을 통해 구성된다.’는 헤겔의 말이 인용된 건 못 보았던가?


주체가 가상이라고 하더라도 그 가상의 규제는 나름의 효과를 지닌다. 지젝은 칸트나 헤겔을 뒤집어 읽으면서 결국 그런 말을 하고 있다. 포스트-구조주의는 결국 ‘진리’를 ‘오인’으로 단어만 바꾸었지 그 효과는 부정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칸트의 윤리학은 그것이 사드의 것과 같은 욕망에 기초했다고 분석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런 윤리학이 쓸모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5.

4번 논의에 입각한 구체적인 실례 하나.

“내가 진중권 선생님의 말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여기에 있습니다. 비판은 날카롭지만 저들의 환상과 이데올로기를 횡단하지 못합니다. 진중권 선생님의 해결책과 주장은 그와 같은 논리로 비판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예컨데 디빠들이 똘레랑스를 들면서 국가주의든 파시즘이든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고 했을때, 또는 폭력을 담보하지 않는 방식으로 파시즘을 지키려고 했을때 진중권 선생님의 주장은 무효가 됩니다.”
무효 안 된다. 앵똘레랑스 세력에겐 똘레랑스할 수 없다고 똘레랑스 전파자 홍세화가 말했고, 그 얘긴 서구 정치학계의 견해를 대변한다. 물론 이 견해를 자세히 뜯어보면 일관성이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무효가 되는 건 ‘자유주의의 일관성’이지 파시즘 억제의 효과가 아니다. 라캉은 일관성 있는 담론이란 존재할 수 없고 사실 그 담론의 비일관성이야말로 담론의 중핵이며, 실재가 틈입한 흔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모든 담론에 걸쳐서 나타나는 일. 여기서 레비나스는 자유주의의 비일관성을 공격하면서 무슨 자신이 이 상징계의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특단의 대책이나 있는 것처럼 까불고 있다. 용가리 통뼈인가? 


6.

진짜 포스트-구조주의자라면, 진중권은 진중권 하는 대로 냅둬야 한다. 그리고 레비나스 본인이 가능하다면 좀 더 다른 방식으로 심빠들의 난동을 비판하는 것이 좋겠다. “우리는 이들에게 횡단의 조건을 귀뜸해 줄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궁금하다. “명백히 다른 주체가 탄생할 것임을 확신합니다.” 어떻게 탄생시키겠다는 것인지가 매우 궁금하다. 그런데 그의 글엔 정작 중요한 이런 내용들에 대한 얘기는 빠져 있다. 대신 그가 하고 싶은 말들은 이런 얘기다. “네그리는 틀렸고, 지젝은 옳다.” “진중권은 틀렸고, 레비나스는 옳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것인지?


7.

지젝의 모든 글들은 모종의 행위다. 그래서 지젝의 글이 재미있는 것이다. 나는 지젝이 대상 a를 어느 사물에나 지정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상 그의 분석은 이렇게도 될 수 있고 저렇게도 될 수 있다는 어느 일본 평론가의 지적이 꽤나 그럴 듯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젝의 글이 재미있는 건, 그가 취하는 구체적인 정치적 포지션 때문이다. 지젝이 한국인이었다면 먼저 자신이 현상 자체를 분석했지 현상을 분석하는 남에게 ‘틀렸다’는 소리나 하고 있진 않았을 것이다. 진중권은 옳다. 설령 그가 신봉하는 이론이 틀렸다 하더라도, 이 경우 그의 행위가 옳다는 건 논증도 변명도 필요없는 사실이다. 고작 수사 몇 개에 흥분하여 “니가 막말(?)했으니 너에 대한 사이버테러는 정당하다.”고 방방뛰는 대중들 틈에 끼기 싫다면, 내 말에 동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디 워>가 평론할 가치가 없는 영화고, 디빠들의 사이버테러를 보면 꼭지가 돈다는 말이 막말이라면, 나 역시 그런 막말은 하루에 한다스씩 내뱉어줄 수 있다. 레비나스의 글이 ‘놀고 있다’는 말도 마찬가지. 그의 글은 실제로 ‘놀고 있’으니, 이 수사를 양보할 수가 없다. 



P.S 언젠가 노정태와 술을 먹다가 "NL은 자신들의 무지함을 활동력으로 커버하려 들고, PD들은 자신들의 무력함을 지적 유행에 편승하면서 커버하려 든다."고 내뱉은 적이 있었는데, 정말 위 텍스트는 '지적 유행에 편승한 무력한 PD'의 글로 기념해야 할 듯싶다. 이왕 유행에 편승했으면 그걸 좀 실천적으로 써먹으면 어디가 덧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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