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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디 워>, 페티시즘

조회 수 1938 추천 수 0 2007.09.20 14:00:56
 

*이글은 디빠 여러분 보라고 쓰는 글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읽고 나서 ‘글이 너무 어려워서 계속 디빠해야겠다.’고 투덜대실 바에야, 스킵하시는 것이 현명할 듯도.


**페티시즘의 정의에 대해서는 김상환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의 5부 2장 “문학 안팎의 물신들”을 참조 인용하였음 



페티시즘(fetishism)이란 말은 신이 아닌 것을 신으로 착각하고 숭배하는 현상을 지칭하는 것으로, 본래 계몽기 시대 아프리카를 다녀온 종교학자들이 처음 사용했던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여러 학자들에게서 풍부한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마르크스는 그의 상품분석에서 페티시즘이란 말에 훨씬 더 복잡하고 풍부한 의미를 집어넣었는데, 그의 개념을 번역한 말이 물신숭배(物神崇拜)다. 상품교환이 일반화될 때 등가적 교환의 척도로 도입된 황금은 어떤 특수한 상품임에도 불구하고 선험적이고 절대적인 단위인양 모든 상품과 인간 위에 군림하게 된다. 이때에 인간의 관계나 물건 사이의 관계가 오로지 황금을 매개로 해서만 성립할 수 있다는 착각, 혹은 미신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를 물신숭배, 물신주의, 혹은 상품 물신주의라 부른다.


<디 워>의 문제를 마르크스적 의미에서의 물신숭배에 대입해서 설명하면 물론 꽤 많은 것이 설명된다. 심형래의 논법은 문화를 자동차와 같이 산업의 역량에서만 바라보는 것이며, 사실 이전에 충무로를 지배해 왔던 문법이기도 하다. 영화산업의 영역에서 물신숭배는 구조적으로는 제작사와 극장주가 한 몸뚱이를 이루는 독과점 체제를 통해 실현되고, 상징적으로는 해외 영화제 수상이나 한국 영화의 해외진출 등 독자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모든 가치를 ‘수출’이라는 황금의 잣대로 평가하고 수출상품을 국내에서 더 소비해줄 것을 요구하는 자본의 논리를 통해 나타난다. 심형래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비판은 우리가 문화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반성하고 바꾸어 나갈 때 이루어진다. 그 비판은 “문화산업은 문화를 산업으로 대우하지 않을 때 더 번성한다.”는 아이러니한 명제를 역설하면서 이루어질 수도 있고, “다양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문화는 오래 존속할 수 없다.”는 다윈주의적인 시각을 끌어들이면서 이루어질 수도 있겠다. 아마도 이 블로그에 있는 김기연님의 몇몇 덧글은 이러한 지점을 의도한 것 같다.


이 설명은 <디 워> 뿐만이 아니라 한국 영화산업 전체에 관련된 것이고, 더 나아가선 한국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다. 물신숭배는 한국 땅에서는 당연한 공리이며, 차마 의심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한국 땅의 페티시즘은 정말이지 원래의 의미 그대로 신적(神的)이다. 이것은 이 논지를 근본적인 것으로 만들지만, 또한 무력하게 한다. 말하자면 이러한 설명은 <디 워> 사건이 다른 사건과 왜 구별되는지를 전혀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 사회가 총체적으로 잘못되었다는 말은 옳다. 그리하여 그것은 심형래를 통해 대한민국을 돌이켜보게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심형래가 왜 특출나게 잘못인지를 알 수 없게 만든다. “충무로도 애국주의 마케팅 안 했냐, 뭐가 문제냐.”는 디빠의 논리도 거기에 있고, “한국사회가 그런 행동을 집어내어 준엄하게 질책할 만큼 품위 있는 사회는 아니”라는 김규항의 판단도 그 지점에 있다. 원래 좌파들의 논법은 원산지에서는 급진적인 비판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한국 땅에만 오면 ‘원래 세상이 다 그런거지.’류의 냉소주의를 정당화하는데 쓰이곤 한다. 한국 땅에서 지식이란 것이 소비되는 방식이 그렇다.   


한편으로는 영화산업에서 물신숭배를 벗어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라는 문제도 있다. 물론 우리는 ‘작품성’이란 것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하지만 “문화산업은 문화를 산업으로 대우하지 않을 때 더 번성한다.”라는 아이러니한 명제가 증명하듯, 이 작품성이라는 것이 결국 산업을 종속시키기 위한 논리가 된다면 물신숭배와 크게 다를 것도 없다. 영화는 어떤 문화 컨텐츠보다도 산업논리에 충실한 장르다. 평소에 영화를 즐기고 그 결과 영화가 다양하게 발전하게 된다면 그것보다 좋은 것이 없겠지만, 후발주자의 입장에서 그러한 것이 가능할 것 같지 않다. <디 워> 논란은 우리가 느끼는 ‘재미’라는 것이 정말로 순수한 ‘취향’의 영역에 위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런 점에서 강준만과 김규항의 비평은 핀트가 엇나갔고 그래서 무기력하다. 하지만 이런 사정 역시 <디 워>뿐만 아니라 다른 한국영화에서도 성립할 것이다.


그러면 정말로 <디 워>는 범상한 사건인가? 그렇지는 않다. <태극기 휘날리며>가 흥행할 때 네티즌들은 이 영화가 그 어떤 전쟁영화보다도 더 훌륭한 것처럼 설레발을 쳤지만 이 애국주의적 판단이 ‘태까’를 양성하지는 않았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물론 <라이언 일병 구하기>만은 못한 영화지만, 그래도 영화적으로도 어느 정도의 성취는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 성취가 ‘짝퉁’으로서의 성취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성취인지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렸지만. 관객들의 판단은 존중받았다. 왜 그들은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만은 못한 그 영화를 소비했을까?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키우기 위한 애국심 때문일 수도 있고, 한국전쟁이란 소재가 외국 전쟁영화보다 와닿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자막을 안 보는 메리트가 질의 차이를 메꾸었을 수도 있다. 기타 다른 영화들에서도 이러한 판단은 가능하다. 문제는 <디 워>에선 아예 기준이 무너졌다는 데에 있다. <디 워>는 영화라고 일컬어질 수준이 아니다. <디 워>를 충무로의 블록버스터나 조폭물과 비교하는 것은 독과점으로 과자를 파는 사람과 독과점으로 불량식품을 파는 사람을 비교하는 수준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디 워>가 재미있다는 사람들에서 충분히 얘기했으니 더 말하지 않겠다.


한국 땅에도 미국 땅에도 <디 워>를 평가할 평론적인 잣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평론할 가치가 없다’는 진중권의 말만이 정론이다. 미국관객들은 자기네 나라 블록버스터도 쓰레기라고 부르는데, 한국 평론가들은 <트랜스포머>에 별 두 개 반 정도밖에 안 주는데, 블록버스터를 표방했지만 그걸 제대로 베끼지도 못했고 영상언어에 전혀 무지한 영화 이하의 영화가 하나 나온 것이다. <인디팬던스데이> 따위와 비교해도 이게 영화가 아니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도대체 이런 영화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나? 미국 소년이 6분 동안 호러블을 수십번 외치는 것도 당연하다.


이 영화를 묘사할 적당한 개념을 찾다보니 나는 페티시즘의 또 다른 의미를 떠올린다. 그것은 정신분석학의 것인데, 흔히 절편음란이라고 번역되는 것이다. 이것은 전체와 부분 사이에 일어나는 대체에 관한 이야기다. 이성을 대신해서 가령 그의 속옷 같은 소유물이 성적 흥분의 대상으로 자리잡는 일종의 성도착을 가리킨다. 정신분석의 설명에 따르면, 이런 성도착은 거세의 부인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여기서 부인은 한편으로는 인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다. 어린아이가 거세의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끝내 받아들이지 않을 때 절편음란이라는 성도착에 빠지게 된다.


심형래가 <용가리>와 <디 워>를 만든 심리는 정신분석학의 페티시즘으로 비유해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티라노의 발톱>이 <쥬라기 공원> 때문에 망했을 때, 그는 그 아득한 간극에서 단지 CG만을 보았다. <쥬라기 공원>이 비록 CG로 성공한 영화이긴 했지만, CG 이외의 영화적 요소도 탁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겐 그런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쥬라기 공원>의 탁월함을 CG라는 측면에선 인정했지만 기타 부분에선 부인했다. 그리하여 그는 영화를 총체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단지 CG에만 페티쉬를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심형래같은 사람이 탄생했다는 것이 그 사회의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그런 이들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많은 자금을 모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페티쉬의 결과물이 <용가리>와 <디 워>다. <용가리> 때는 사람들이 잘 몰랐다지만, <디 워>를 위해 그가 자금을 끌어모으는데 성공했다는 것은 불가사의다. 페티시즘의 위대한 승리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는 <용가리>의 실패를 페티시즘의 실패로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페티시즘을 더욱 강화하고 확장함으로써 대항하고자 했다. 미국 평론가들의 신랄하기 이를 데 없는 평가 중에서도 가끔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니 대단하다.’는 순수한 경탄이 보이는데 (물론 그것이 영화의 수준에 대한 경탄은 아니지만) 그 느낌이 이해가 간다. 오르가즘을 느낄 수 없자 계속해서 더 비싼 속옷을 구매하면서 컬렉션을 구축해온 어느 소년의 아지트를 열어젖혔다고 치자. 그로테스크한 광경이고, 그들이 느끼는 경탄이 이해될 듯도 싶다. 디빠들이 말하는 심형래의 불굴의 의지에 대한 존경은 바로 그 그로테스크에 대한 존경이다. 으스스하다. <디 워>가 망해도 심형래는 다음 영화는 더 강력한 CG를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서사나 연출이 문제라고는 믿지 않는다. 그러니까 절편음란이다.


<디 워>에 이르러 몇몇 관객들은 페티시즘에 동조하게 되었다. 만일 그들이 거기서 실제로 쾌락을 느꼈다면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미국관객들도 그 쾌락에 동조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그다지 훌륭하진 않았지만 그를 지지하면 (그가 돈을 벌게 해주면) 다음번엔 더 훌륭한 영화가 나올 거라는 (여전히 그는 절편음란자로써, 단지 CG만 보완할 텐데도?) 디빠들은 잠시 여기서 제끼자. 우리는 <디 워>의 미국흥행이 가능할 거라고 진심으로 믿었던 디빠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미국관객들도 비싼 속옷 컬렉션에 질질 쌀 거라고 믿었던 그들. 가상적인 ‘미국 대중’이란 집단을 상상하고, 그들이 자기들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믿었던 그들 말이다.


‘미국 대중’을 상상하는 순간 그들은 영화의 제작자가 되었다. 말하자면 심형래가 대중에게 줄 쾌감을 상상하면서 영화를 만들었듯 그들은 미국 대중에게 줄 쾌감을 상상하면서 디빠질을 했다는 말이다. 이 쾌락의 욕망은 자본의 논리를 벗어난다. 손해를 봐도 와이드 릴리즈면 된다는 그들의 논법, 그래서 <괴물>보다 <디 워>가 위대하다는 그들의 집요한 논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윤이야 어쨌든 미국인들이 많이 보는 게 중요하다는 그들의 쾌락을 함축하고 있지 않은가? 미국인들의 <디 워>에 대한 분노가 그들에게 가장 타격을 입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호러블 보이'에 대한 그들의 분노는 상처입은 환상을 위무하기 위한 것이다. 미국 관객의 평가에 영향을 받는 게 사대주의라는 논란은 그래서 가당치도 않다. 애초에 헐리우드에 진출하겠다는 영화니 미국 관객의 평가를 받는 것이 제일 정당하다는 논리적인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디 워>를 사랑하는 이들의 쾌감은 애초부터 미국 관객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쯤되면 집단적인 성도착이라고 부를만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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