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편집부에서 제목과 문단 나누기를 좀 바꾸기는 했습니다만 (당연한 수순이죠.) 이 블로그엔 그냥 제가 쓴 대로 올리겠습니다.
기사링크는,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10708182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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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 대학 캠퍼스에서는 많은 학생들이 이른바 운동권 학생들이 보여주는 과격한 행동들에 의문을 제기한다. (...) 이러한 비난의 이면을 살펴보면 삭발과 같은 과격한 투쟁에 나선 이들이 대부분 운동권 학생들이라는 점에 이유가 있다. 평범한 학생들은 운동권 학생들이 정치 세력과 결합해 학내문제보다는 사회문제에 목소리를 높이고 학생들을 동원하려는 모습에 냉소적이 됐다. 운동권 학생들의 목소리가 마치 우리 대학 전체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일까 우려하는 학생도 많다. 또 그들의 과격한 행위가 결국 정치인이 되기 위한 스펙을 위해서라는 비난도 서슴지 않는다.(p47-48)
마지막 행진까지 함께 하며 10시간 동안 6.10 촛불시위를 취재한 예스 조단비 기자는 “대학생들만의 순수하고 주체적인 모습이 아니라 한 대련과 정치권이 함께 시위를 벌이는 게 불편하기도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결국 이 문제가 정치권의 노력 없이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라는 점을 인정하면서 보다 많은 학생들이 등록금 문제를 위해 목소리를 내길 바란다는 바람을 전했다.(p101-102)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예스 내에서도 이러한 현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우리는 대학생이라는 동일한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지만 개개인의 생활수준은 다르다. 그리고 이러한 생활 수준의 차이는 전적으로 등록금을 부담할 수 있는 여건의 차이에서 비롯된다.(p148)
현행 대학등록금이 지나치게 비싸다는 데에 공감하지 못하는 이는 거의 없다. 원혜영 민주당 의원과 참여연대가 공동으로 진행한 한 여론조사에서 20세 이상 남녀 1,000명 중 92.3퍼센트가 ‘너무 비싸다’고 응답했다니(p150)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에 대해 운동이 필요한지, 만약 필요하다면 어떤 운동이 필요한지에 대해선 사람들의 생각이 천차만별일 것이다. 그리고 반값등록금 촛불시위라는 공간은 물론이고, 이 문제가 여론화될 때의 대학사회의 반응 역시 이 ‘천차만별’ 속에 있었을 것이다.
예시안들의 서술에서도 드문드문 보이듯 이 안에선 운동권 학생과 일반학생의 대립이 나타나고, 순수한 당사자와 불순한 외부세력의 이분법이 횡행하며, 함께 활동하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경제적 조건이 어떤 단층선을 만들어 낸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운동권 학생들의 의사도 존중받아야 하고, 정치세력의 개입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며, 경제적 조건이 다르더라도 함께 연대해야 한다는 식의 ‘정답’을 반복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그런 말이야 몇 십 년 전에도 그리고 몇 십 년 후에도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현재의 대학생들과, 예시안이나 나같은 사람들의 심리에도 그와 같은 단층선들이 존재하며 그것들에 대한 불편함을 우리가 떨쳐내지 못한다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각을 ‘정답’으로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불편함과 이견들을 그대로 드러내고 토의하는 것일 게다.
나는 예시안들이 운동에 대한 반대자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다녔어야 했다고도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견은 운동의 외부가 아니라 운동을 지지하고 고민하는 ‘우리들’ 사이에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치부를 드러내는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들에 대한 논의를 드러내야 한다는 생각이 운동의 확산이나 설득력을 고민하는 입장과도 연결될 수 있다고 본다. 많은 평범한 사람들은 운동을 하는 이들이 자신들과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거리감을 가지게 된다. 그런 이들을 향해 그들과 우리가 함께 가지고 있는 고민거리들을 열어 두는 것은, 운동을 ‘우리’의 문제를 넘어 ‘모두’의 문제로 만들기 위한 가장 좋은 방책이 아닐까? 내가 이렇게 얘기하기 이전에 이미 예시안들에게도 고민이 많았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단행본이란 체제에 맞춰 지나치게 미끈한 글들을 만들어낸 측면이 있어 보인다. ‘청춘의 연대’는 미끈한 기하학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울퉁불퉁한 우리네 삶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일일 게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록은 그 울퉁불퉁함을 모두 드러내고 고민으로 담아내는 것이어야 한다.
이 책의 큰 매력은 예시안들의 글 사이사이에 틈입해 있는 ‘선배 지식인’들의 각양각색의 글에 있다. 박원순, 강신주, 정혜윤, 이해영, 고재열, 조국, 강남훈, 우석훈, 박경철 아홉 사람은 각각 길지 않은 글을 통해 반값등록금 문제와 그 운동에 대한 본인의 견해를 말하는데, 이 정도 분량으로 정리된 아홉 사람의 견해를 접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대학등록금 문제를 둘러싼 다양한 정보와 논점들을 정리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마지막에 수록된, 예스의 대표이며 이 조직의 유일한 기성세대라는 안치용의 보론 역시 읽기에 즐겁다. 그런데 ‘활동하는 청춘’에 연대하는 선배들의 임무를 생각한다면, 이렇게 정리된 이야기가 다소 따로 놀고 있지 않은가라는 느낌도 준다. 반값등록금 문제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활동이 돌파해야 할 지점에 대해선, 예시안들이 시위현장에서 만난 어느 시위를 반대하는 대학생이 가장 명료하게 제시했다.
"우리는 (헌법에 명시된) 대의민주주의를 믿어야 하고, 제도권 정치의 틀 안에서 전문가들의 토론과 논의를 통해 반값등록금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p100-101)
이 문장은 더 줄일 것도 없지만, 굳이 두 개의 키워드를 집어 내자면 ‘제도’와 ‘전문가’로 요약될 수 있다. 전문가의 논의와 제도를 경유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떠한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 대한 반박을 ‘선배’들의 글에서 찾는다면 다음 구절을 찾을 수 있다.
“법의 목적은 평화이고 거기에 이르는 과정은 투쟁이다.” 제가 좋아하는 독일의 법철학자 예링의 말입니다. 아이가 울어야 젖을 주듯이 대한민국 대학생들은 더 울어야 합니다.(p32, 박원순)
이것은 ‘운동’이 없다면 ‘제도’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국민의 요구로 인해 ‘제도’가 움직이게 될 때에, ‘전문가’가 논의하여 그 요구에 맞는 대책을 강구해 내야 한다는 원론으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원론’들에 이견은 없다. 그러나 현실이 원론들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공무원 혹은 전문가가 국민들의 요구에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라 보더라도, 그 원칙들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현실세계에서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개혁정책’이란 것이 작동하는 방식은, 고전적인 괴담인 ‘악마에게 소원빌기’의 구조와 유사하다. 2천만원이 필요하다고 소원을 빌면 가족을 죽여 보험금을 가져다주는 악마처럼, 현실세계의 관료들은 그 요구가 담고 있는 ‘가치’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희생하여 그 요구조건을 채워줄 뿐이다. 크게는 공공지출을 확대하기 위해 빚더미에 올라앉은 그리스 정부의 사례를, 작게는 무상급식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토건예산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기간제 교사들이 해임당하는 사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냉소적인 사람들은 이러한 ‘부작용’에 대한 책임을 복지를, 무상급식을, 반값등록금을 주장한 사람들에게로 돌린다. 이 문제를 돌파하려면 반값등록금을 주장하는 이들이 이 정책의 합리적 실행방법과 그 실행과정에 대한 개입까지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청년들에게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요구하는 강신주나 인간성 회복을 강조하는 정혜윤의 조언이 매우 소중한 것임을 알면서도 당장에 그것이 멀리 느껴지는 이유는 이와 같은 녹록치 않은 현실 때문일 것이다.
나는 청춘의 활동에 대한 선배 지식인들의 임무는 ‘활동가의 요구’를 껴안아 ‘관료들의 논리’에 맞설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그러한 설거지라고 보는 편이다. 다행히 이 책엔 경제학과 정책문제에 밝은 지식인들의 글이 많이 수록되어 있고, 특히 이해영, 조국, 강남훈, 박경철의 글은 그 자체로 그런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명문대생들의 숫자가 너무 많은 것이 근본문제라는 박경철의 지적, 반값등록금 문제를 통해 대학 공공성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는 이해영의 지적은 반값등록금 문제가 단순히 대학에 대한 정부지출을 몇조원 늘리는 문제가 아니라 다른 여러 사회문제와 연동된 문제라는 점을 조금은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각기 조금은 다른 종류의 생각과 방책을 가지고 있는 듯한 이들 선배 지식인들이, 반값등록금 문제가 이슈화된지 몇 달이 지나도록 어떤 종류의 공적 논의를 통해 단계적인 해법의 과정을 공유하거나 논쟁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우리의 요구가 ‘악마’에 의해 왜곡될 우려를 여전히 가지게 한다.
더 울퉁불퉁하게 기록하고, 더 섬세하게 요구하라. 아마도 이는 반값등록금 문제를 넘어서, 우리 시대의 어떤 정치적 운동들 일반에 대해 적용할 수 있는 문제의식일 것이다. 우리가 각각의 사회문제를 고민함에 있어 이런 지점들을 좀 더 고민하게 될 때에, 우리는 우리의 소원을 악마의 왜곡된 손이 아니라 우리의 손으로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다.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이 책의 기록 역시 우리의 사회운동이 봉착해내 있는 그런 딜레마들을 드러내 보인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늘타리
언론이나 인터넷을 통해 보인 등록금 투쟁의 양상이, 학생들은 '울퉁불퉁함'이 없이 무조건 반값 내려달라고 막무가내쓰고, 반면 선배들이 좀 더 현실성있으면서도 균형잡힌 시각으로 공감할만한 정책적 대안 쪽을 '섬세함'을 가지고 가닥을 잡으면서 제시하는 모습은 잘 안 보였고, 대신 마음 급한 정치인들이 갈피못잡고 이정책 저 정책 남발하고... 그러다가 평창하고, 한진중공업 쪽으로 이슈는 움직여 버린듯 하고. 그렇게 '반값 등록금'투쟁이 소비된 것 같아서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