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묵향>의 천마신교와 한국 사회

조회 수 1415 추천 수 0 2007.05.16 08:21:16

묵향. 23 상세보기
전동조 지음 | 스카이미디어 펴냄
전동조 장편 환타지 소설 『묵향』제 3부 "묵향의 귀환" 제23권 '급변하는 전장'편. 마법진으로 열리는 익숙한 나라, 무림으로 귀환하는 묵향의 이야기를 그렸다.


판타스틱 마감을 위해 대충 고등학교 때 조금 읽다가 만 <묵향>을 다시 읽어야만 했다. 나는 <묵향>을 판타지 파트보다는 무협 파트를 더 재미있게 읽는 편이다. 평소에 한국인들이 쓴 무협지에 대해서 생각하던 바이기도 하지만, 특히 <묵향>의 경우 어떤 측면에서 한국 사회를 너무 잘 드러내 준다는 느낌을 새로이 받았다. 좌백의 <혈기린 외전>이 그것을 의식적으로 수행하고 있다면, <묵향>은 무의식적으로, 그러나 더 적나라하게 수행한다.


묵향이 생활하는 천마신교야 말로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한국사회다. 그것은 실제의 한국 사회보다는 이상적이다. 말하자면 그건 한국인들이 한미 FTA를 통해 도래할 거라고 기대하는 한국 사회의 모습과 비슷한 거다. 혹은 그들이 잘못 알고 있는 미국 사회의 모습이거나.


먼저 마교에 끌려온 아이들은 부모도 이름도 없다. 애초부터 뿌리가 잘려나간 이들이다. 묵향은 단 한번도 자신의 부모가 누구였는지, 실제 자신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편리한 망각이다. 물론 현대 한국인들은 그만큼 이상적으로 '쿨'하지는 못 하기 때문에 <환단고기>나 <주몽>과 같은 여러가지 민족주의 판타지를 끌어들인다. 여러 평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민족주의의 과잉은 바로 민족의 부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가능한 만큼 자신의 전통을 긁어담으려 하지 않고, 그런 행위가 애초에 불가능한 과거로까지 올라가려는 것은 전통을 계승하려는 행위가 아니다. 50년 전도 돌이키지 못하는 이들이, 어찌 4천년을 돌이킨단 말인가?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한국인들은 '아버지의 법'에 안착하지 못한 고아들이다. 복거일 같은 자유주의자들은 그냥 쿨하게 그 사실을 인정하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묵향이 복거일이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그만큼 쿨하진 못 하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여러가지 '증상'을 드러낸다.


다음으로 묵향에겐 수련 중에 사라져간 동료들이 있다. 동료라? 묵향은 그들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 소설의 설정상, 사라져간 그들이란 죽어간 그들이다. 그럼에도 묵향의 시점에선 그들은 그저 사라져간 것으로 묘사된다. 묵향은 그들이 어디로 갔을까를 질문하는 법도 없다. 정말 대단히 편리한 망각이다. 이것 역시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이상'적 자아의 모습이다. 한국 전쟁과 군부독재를 거치면서 한국인들은 사라져가는 이들을 모르는 척하는 것이 생존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아니, 전두환 정권을 지나면서부터는, 그들 사라지는 이들 때문에 내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일 거라는 확신에 이르렀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대놓고 그렇게 말한다. 약자는 죽어야 하고, 내가 약자라도 죽어도 불만이 없다는 '이기적 전체주의자'의 발화는 그런 맥락이다. 묵향에게 무공의 자질이 있다는 것, 자질이 있는 이들은 살아남았고, 자질이 없는 이들은 말없이 사라져 갔다는 것 또한 이와 다른 얘기는 아니다. 스승인 환사검 유백을 만나기까지의 묵향의 무공수련은, 한국의 근대화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이다. 저 짤막짤막한 서술을 보건대, 묵향은 그들을 그저 잊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쿨할 수 없다. 한국인들은 그들을 은폐하려 든다. 이로써 의문사진상규명위에 대한 온갖 억압이 설명된다.


그렇게 살아남은 마교는 실력있는 자가 (무공이 고강한 자가) 높은 지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불문율이 있는 조직이다. 이것 역시 하나의 판타지다. 한국 사람들이, 한국 사회가 이랬으면 하고 원하는 그런 판타지다. 묵향은 그 조직에 충성하며 부교주에 머문다. 무공은 교주보다 강하지만, 조직을 건사하기가 싫어서 그 자리에 머문다. 그게 그의 패망을 자초하는 비극이 된다. 그는 친한 자들에게 배신당하며, 기억을 상실하고 마교 바깥을 떠돈다. 그러나 실력이 있기에 금세 조직력을 추스려 다시 그에게 합당한 위치 -교주- 에 이른다. "강자지존!" 그 한마디에 장로들은 승복한다.


그러니까 한국 사람들은 사민주의 사회는 역동성이 없다고 (까놓고 말하면 재미가 없다고) 배격한다. 그들은 한국 사회가 천마신교만 못 하다는 건 알지만, 적어도 미국은 이쯤 될거라고 야무지게 착각한다. 묵향이 자라나는 천마신교는 이렇듯 미국 사회의 배설물과 한국 사회의 이상이 중첩되는 곳이다. <아르미안의 네딸들>에 나오는, 신들이 자신의 단점만을 모아 만들어낸 에이레스신. 한국 사회는 미국 사회에 대해 정확히 그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인들은 미국을 자신의 이상으로 생각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한국은 미국의 부재"다. 이 빛과 그림자. 그러나 빛은 망가져서 어둠으로 내려오고 있고, 어둠은 FTA를 통해 스물스물 빛의 영역으로 기어오르려 한다. 영화 <300>이 미국식 공화주의의 파산을 보여주고 있다는 이택광의 평론은 이런 지점에서 흥미롭다. <300>은 미국보다는 차라리 한국을 보여주고 있으니까. 유럽이 복지병으로 썩었다고 말할 수 있는 무식한 야만의 무리들을 보여주고 있으니까. 그러나 묵향의 '천마신교'는 빛과 어둠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어둠에서 올려다본 빛의 형태이며, 실상은 아름답지도, 가능하지도 않은 것이므로.


묵향은 '인권' 따위는 모르지만, 자기 주변의 인간들의 목숨과 안전에는 민감하다. 가령 스승인 환사검 유백이나, 잠시나마 자신과 유사-가족 관계를 유지했던 양녀 소연에 대해선 철저하게 신경을 쓴다. (유백은 스승임에도 '아버지'로써 등장하지 않고 그저 묵향이 신변에 신경을 쓰는 지인 몇 중 하나로 취급된다. 그런 유백이 독고구패라니. 이건 정말 김용 소설에 대한 모독이다.) 소설은 그런 묵향의 태도를 '인간적인 것'이라 칭한다. 그렇다. 이것이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인간적인'이란 낱말의 정확한 의미다. 이 등식에 정확히 대응하는 인물이 한화그룹의 김승연 회장이다. 그를 향한 대다수의 분노는 질투에 지나지 않는다. 내겐 그런 일을 저지를 힘이 없다는.


묵향의 <천마신교>는 완벽하게 한국 사회의 이상을 복사한다. 한국 사회 그 자체는 아니고. 문제는, 그 이상이 실체화 될 경우에도 끔찍해 보인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끔찍한 판타지는 워낙에 성찰이나 이론과는 상관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이런 식으로 가장 대중적인 오락물에서 그것의 실체를 똑똑히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딱히 마교를 걱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교에서 도저히 살아나갈 길이 없는 멍청한 인간들이 그 질서를 숭앙하고 있다는 점은 걱정이 된다. 그건 너무도 자멸적인 코미디이기 때문이다.
 

연애편지

2007.05.17 15:29:46
*.237.202.22

잘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전민희씨 판타지를 넘 좋아해서.. 룬의 아이들! + 세월의 돌! ㅎㅎ 묵향은 아직 안읽어봤구요.. 비슷한 소설은 읽어본적이 있어요.. 수호령이었나..;;

정말 한국사회에 대한 비유가 적절하네요.. 갑자기 비나리님 글이 생각나네요.. 증오의 경제학...

슬픈것은 환상속에 갖혀서 현실을 보지 못한다는 점..
저두 오랜만에 쓸데없는 세상이야기를 써봐야 겠네요..ㅋㅋ

생존을 위해 전투적으로 변하는 삶.
자신도 어찌할수 없는 강자가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죽음을 강요하는 삶. 난 꿈을 꾸어요.

언젠가는 모든것을 이해하고 내일을 바라볼수 있는 꿈을

하뉴녕

2007.05.17 18:35:31
*.176.49.134

전민희씨 훌륭하죠. 옛날에 세월의 돌은 읽어봤는데 아직 룬의 아이들은 안 읽어봤어요. 흑;; 언제 한번 시간내서 읽어야 할텐데...;;

시만

2007.05.17 23:41:08
*.237.245.239

연애편지 / 혹시 태양의 탑 5권 뒤로 출간 여부를 아시는지요;;;

연애편지

2007.05.18 14:18:36
*.237.202.22

시만/ 아쉽게도 전민희 작가님이 세월의 돌 수정판을 낸다고 하던데 아직은 계획이 없다는..ㅠ.ㅠ

아큐라

2007.05.18 16:04:09
*.241.136.2

코미디라고 하면 남한사회와 필자 사이의 거리감이 너무 멀게 느껴지네요. 좀비물이라고 보면 어떨지?

kritiker

2007.05.20 06:16:48
*.238.59.60

혹시 이번에 새로 나온 잡지 '판타스틱' 이야기하는거야? 나 그거 서점정기구독자가 될 것 같은데;

하뉴녕

2007.05.20 09:12:42
*.180.10.135

응. 좀 있으면 짤릴지도 모르지만 일단 2호에는 객원에디터로 들어가 있어. -_-;;;

노정태

2007.05.20 10:59:51
*.124.55.33

기왕이면 가입정기구독자가 되시는 것이 좋겠지 말입니다~

kritiker

2007.05.21 13:28:06
*.140.91.156

즈어...한 번에 낼 만한 목돈이 아직 없어서요-_ㅜ

Leinhard

2007.07.26 14:04:06
*.95.187.43

저에겐 생각지도 않았던 시선들입니니다~ 묵향.. 과연 연재 10년을 돌파할까요.

2013.02.18 03:28:43
*.204.137.85

굉장하다... 이런 걸 짚어낼 수 있는 사람이 한윤형 말고도 많이 있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sort
901 ‘마케팅’론, 정치적 주체, 그리고 목수정 [32] [1] 하뉴녕 2009-04-07 1444
900 [짤방편집] 프로토스 유닛들의 본질 file [4] 하뉴녕 2007-06-15 1440
899 라캉과 현대철학 하뉴녕 2005-08-09 1440
898 (뮤비추가) 김택용 vs 마재윤 동영상 모음 [10] 하뉴녕 2007-12-12 1437
897 [펌] 레디앙 박상훈 인터뷰 [1] 하뉴녕 2009-08-03 1432
896 20대는 정말로 정치에 무관심한가 [7] 하뉴녕 2010-01-22 1429
895 앤 라이스, 뱀파이어 연대기 [1] 하뉴녕 2006-06-27 1428
894 (강준만의 글에 대한)유시민의 반응에 대하여 하뉴녕 2004-08-27 1426
893 <왓치맨>을 어떻게 볼 것인가? file [10] [1] 하뉴녕 2009-03-26 1424
892 팜므 파탈 하뉴녕 2005-12-22 1423
891 비극의 탄생 : 어쩌면 ‘성숙한’ 니체 철학보다 더 납득하기 쉬운 [3] 하뉴녕 2007-03-27 1421
890 <대한민국 개조론> 비판 : 2. 한미 FTA [26] [1] 하뉴녕 2007-08-20 1416
» <묵향>의 천마신교와 한국 사회 [11] 하뉴녕 2007-05-16 1415
888 태왕사신기 : ‘판타지’도 아니고 ‘민족’도 아닌 하뉴녕 2007-10-27 1411
887 이택광-조정환 논쟁 요약정리 (1) [6] 하뉴녕 2009-05-14 1404
886 FTA 체결과 민주적 리더십의 문제 [6] 하뉴녕 2007-04-05 1402
885 택빠라서 행복해염 ㅋ file [1] 하뉴녕 2009-01-04 1398
884 김창현 비판, 어디까지 정당한가? 하뉴녕 2004-05-12 1388
883 허경영의 콜 미, 그리고 콘서트 file [9] [1] 하뉴녕 2009-09-09 1386
882 민주당 지지자의 안티조선, 민주당의 안티조선 하뉴녕 2001-11-16 13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