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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한나라당 홍정욱 의원의 소신행보가 화제다. 지난 15일 한-EU FTA를 다루는 외교통상위원회의 법안심사소위에서 한나라당이 법안심사를 강행처리 하려고 하자 기권의사를 표시하고 퇴장해버린 것이다.

이를 두고 민주당 박지원 원내대표는 '경의를 표한다'고 발언했고 야권의 몇몇 인사들도 긍정적인 평가를 보였다. 한편 소위 보수진영에서는 매우 당연하게도 부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루었는데 '소신은 괜찮았으나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잖은 충고부터 '좌파의 귀염둥이가 되었다'는 격한 비난까지 등장하는 상황이 연출됐다.

홍정욱 의원은 기권을 하는 그 순간에 앞으로 논란의 중심에 설 것을 예상하지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EU FTA는 정부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의제이고 일정상 시급히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한나라당이 이번 회기 내에 처리하기 위해 조급히 움직였던 것도 그때문이었다. 여당 의원으로서 여기에 사실상의 반기를 드는 행위에는 큰 정치적 부담이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이 상황은 단지 여당 의원이 정부안에 반대해 소신을 지켰다는 평가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맞다. 보수정치가 늘 그렇듯이 말이다.

대체 홍정욱 의원은 왜 이러한 선택을 했던 것일까? 첫번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홍정욱 의원이 '국회 바로세우기모임' 소속이라는 점이다. 이 모임은 한나라당 소장파들이 주축이 된 모임으로 알려져 있다. 남경필, 원희룡 등의 젊은 중진의원들과 개혁적 성향의 초선의원들 모임인 민본21 등이 2010년 연말의 예산안 날치기 통과에 대해 반성의 의미를 담아 만든 모임이라고 한다.

이들은 만일 국회에서의 일방적인 강행처리와 물리적 충돌에 함께하는 일이 있다면 19대 총선에서 불출마를 하겠다고 약속할 정도로 높은 수준의 결의를 모은 바 있다. 때문에 홍정욱 의원이 이러한 소신을 지키기 위해 한-EU FTA 법안심사에 기권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아직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일부에서 지적하듯 법안심사소위에 참여하지 않는 방법으로 조용히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곧 한나라당 원내대표 선거가 눈 앞에 닥쳐있다는 사실이다. 대진표는 이미 짜여졌다. 이상득계, 이재오계, 그리고 2명의 중립 성향의 후보들이 대립하고 있다. 원내대표 선출을 당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권력을 둘러싼 쟁탈전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의원들 사이에서 각 계파간의 세를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새로운 합종연횡의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중립후보를 자처하는 후보들은 친박계와 인연이 있다. 친이는 이상득계와 이재오계로 나뉠 것이다. 이 상황에서 소위 소장파는 '중립적 성향의 인사가 원내대표를 맡아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어떻게 판단하면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는 상황일 수 있다. 홍정욱 의원의 선택은 소장파의 이러한 메시지를 어필하기 위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도 홍정욱 의원의 처신을 완전히 이해하기엔 역부족일 것이다. 세번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홍정욱 의원을 포함한 소장파의 다수 의원들이 수도권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명박 정부는 수도권 민심을 배려하기 위해 지방을 뒤흔들어 놓았지만 상황이 나아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수도권은 중앙정치이슈에 민감하여 야권의 정권심판론이 수월하게 먹힐 수 있는 토양을 갖춘데다 전월세대란, 물가상승 등의 정부 정책 실패의 피해를 고스란히 받고 있는 상황이다.

때문에 한나라당 수도권 의원들의 대다수는 다음 총선에서 살아남기 위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인기가 없는 이명박 정부와는 거리두기를 하면서 대중적 인기가 높은 박근혜 전 대표를 총선에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는 것이다. 이것은 최근 정두언 의원의 소위 '대구발언'에서 명백하게 드러난 바 있다. '재보선 이후 당이 환골탈태해야 하며 총선에서 박근혜 대표가 전면에 나서야 한다'. 이 발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를 생각해보면 지역구가 '서울 노원구병'인 홍정욱 의원의 처신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생각하더라도 왜 하필 '민본 21'소속도 아니고, 소장파의 주요한 핵심 인물로 거론되는 것도 아니던 홍정욱 의원이 이렇게 튀는 행보를 일부러 했는지 100%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마지막 퍼즐 조각을 맞춰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홍정욱 의원이 소위 '정몽준계'로 분류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각에서는 정몽준 의원이 요즘 대권행보에 막 시동을 걸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정몽준 의원은 '고리원전1호기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 '한나라당 민주당이 매일 싸워 정치가 풍비박산 난다', '대한민국의 새로운 정치를 창업하겠다' 등 그로서는 다소 개혁적으로 보일 수 있는 발언을 이어가며 심상치 않은 행보를 하는 눈치다.

즉, 재보선, 원내대표 선거, 전당대회, 총선, 대선후보 경선이라는 일정표를 고려해보았을 때 홍정욱 의원의 처신은 소장파와 수도권, 비-친이계를 연결하는 ‘고리’로서의 한 수를 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민들이 홍정욱 의원의 소신에 걸었던 기대가 정몽준 의원의 대권 획득으로 이어지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홍정욱 의원의 처신은 소위 여당 내 소장파들의 흥망성쇠의 역사에서 반복해서 나타났던, 유력한 대선후보 중 누구를 지지할 것인가를 두고 분열하여 소장파의 개혁성이 퇴색되는, 그러한 운명을 예고한 것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저 풍문을 끼워 맞춰 얄팍한 꼼수를 헤아려 보는 수준의 시기상조일 뿐인 추측일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보수정치에 거는 우리의 정치적 기대가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보수정치의 일탈에 아무런 대가없는 선의가 존재했던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 이 글은 미디어스에 게재되었습니다. : :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211

WD

2011.04.20 10:48:25
*.116.201.223

홍정욱에게는 딱히 관심이 없는데, 홍정욱이 주목을 받을 때마다 노회찬이 안타깝습니다. 왜 하필 노원 병으로 가서.

대학생들이 딱히 진보적이지는 않다지만 그래도 서울여대, 삼육대, 서울과기대, 광운대가 있고 '아파트'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적고 저소득계층이 상대적으로 더 많은 노원 갑이나 노원 을로만 갔어도 사정이 좀 나았을 거 같은데...

이상한 모자

2011.04.20 11:04:17
*.114.22.71

그게 아마 임채정의 불출마를 그전부터 예상해서 그랬지 않았나 싶네요.

2011.04.20 10:51:18
*.132.77.213

좋은 글이군요.

처절안한기타맨

2011.04.20 13:53:26
*.122.199.57

미디어스는 고료는 후하게 잘 주는징? 그게 궁금...ㅎㅎ

이상한 모자

2011.04.20 14:45:30
*.114.22.71

제가 그런걸 막 계산하고 그럴 처지가 못되어서..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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