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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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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당대회 결과를 두고 안팎으로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당대회 직후에는 나 역시 그러한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그러나 잠시 숨을 고르고 나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찬찬히 복기하며 돌이켜 보았다. 내가 당대회에서 읽지 못했거나 오해했던 부분이 없는가?
그 결과 나는 많은 사람들이 당대회가 보낸 신호를 잘못 해석하고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고, 그 왜곡을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내 생각은 아직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같은 프로토콜로 당대회를 해석할 수 있다면, 언뜻 보기에 우리에게 불가능한 임무를 지우는 것처럼 보이는 당대회 결정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독자파와 통합파라는 서로 따로 노는 신호체계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신호체계를 찾아내는 것은 당 바깥과의 소통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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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 임파서블
 
“진보정당 통합 빨간불!”, “독자파의 완승”, “지도력 손상”이라는 언론들의 반응.
솔직히 고백한다. 당대회가 진행되는 내내 나는 웃는 얼굴을 하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대단히 화가 난 것도 아니었다. 전국위원회에서 팽팽한 논의를 거쳐 만들어졌던 안이 이제 와서 모조리 수정되는 상황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대의원들의 열띤 토론은 매순간 나 자신의 판단이 왔다갔다 할 정도로 생동감 있고 매력적이었다.
수정안이 대거 올라오게 된 당대회까지의 과정은 납득하기 힘들었지만, 그 과정을 잊어버리고 당대회만 본다면 더없이 즐거운 토론장이었다.
그러나 거듭 고백하자면, 역시 그 즐거움보다는 당대회의 결정 후 당이 도대체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인가 하는 우려가 나를 억누르고 있었다.
 
당대회가 끝나고 당 게시판에는 자발적으로 당비를 인상한다는 글들이 연이어 올라왔다. 얼굴을 직접 보지는 못하지만 연속되는 글들 속에서 아주 유쾌한 웃음이 느껴진다.
그런데 또 한쪽에서 날린 목소리. 정당이 “좌익 보이스카웃 캠핑”, “틴에이져 소셜리스트 카페”냐라는 조롱.
 
사람들은 사물을 이해하는 자기 나름의 공식이 있다. 기나긴 세월을 스스로 활동가로 살아왔다고 하는 사람들 역시 그 공식에 익숙해져 있다. 오랜 활동 경험 속에서 공식은 서로 닮아간다. 그리고 그에 맞는 해법도 함께 가지고 있다. 그래서 곧잘 사용되는 용어가 있는데 바로 ‘선수’라는 말이다. “선수끼리 왜 그래.” 한번쯤은 들어보거나 사용해 본 말일 터이다. 공식에 따른 과정과 결과를 잘 알고 있으면서 괜히 어깃장 놓지 말자는 말을 하고 싶을 때 이 말을 쓴다. 이 말을 사용하면 신기하게도 적어도 80% 정도는 ‘정상 궤도’로 돌아간다. 이른바 코드를 맞추게 되는 것이다. 세상 살아가는 훌륭한 지혜가 아닌가!
 
그런데 때때로 이 공식이 안 통할 때가 있다. 그러면 어떤 태도를 보이게 되는가. 대부분의 경우 적대적으로 된다. 오랜 경험을 가진 노련한 사람이더라도,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공식과 어긋나는 현상에 대해서는 부정적 태도를 취하고 그것을 잘못된 것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하여 자신의 공식에 오류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반성적 태도를 보이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는 대규모의 집단현상이었던 촛불 시위와 같은 강렬한 경험을 할 경우이다. 그때는 저 이명박조차 청와대 뒷산에 올랐다고 하지 않는가! 다수가 옳다 한다고 해서 다 옳은 것일 수는 없다. 소수가 이야기한다고 해서 틀렸다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규모와 강도가 사람들의 태도에 큰 영향을 미치곤 한다. 하지만 사물과 현상을 이해하는 공식이란 언제 어디서든, 다수가 요구하든 소수가 요구하든, 요란하게 계속되든 외마디 절규로 그치든 끊임없이 수정되고 다듬어져야 함을 나는 확신한다. 당대회를 통해 배워 얻은 선물이다.
 
당대회가 끝난 후 스스로 당비를 인상하며 즐거워하는 당원들의 모습이 과연 독자파들이 승리를 자축하는 모습으로 보이는가. 진중권은 이를 조롱했는데 그는 필리핀에 너무 오래 있은 것 같다. 통상적으로는 표정을 관리해야 할 판에 즐거워하고 있으니 ‘독자파’는 얼마나 유치하고 어리석은 집단인가. 굳이 보이스카웃이니 틴에이저니 하는 단어를 고른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현장에 있었던 나의 눈에는 오히려 성향상 분명히 진중권에 호의적인 사람들이 ‘독자파’에 더 많이 합류한 것으로 보였다. 게다가 나에게는 연이은 당비 인상의 결의가 승리의 팡파레라기보다는 절박함의 표현처럼 비친다. 
 
3/27 당대회는 하나의 시선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외부적 시선과 내부적 시선을 교차시켜야 한다. 당대회가 내린 ‘미션 임파서블’을 성사시켜 내기 위해서는 좀더 복잡한 시선, 복잡한 방정식이 필요하다. 9월까지 새로운 진보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과제, 그리고 도저히 협상 상대에게 먹히지 않을 것 같은 입장의 선언이 동시에 있었다. 단순한 접근으로는 불가능한 임무다. 하지만 이 임무를 성공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길이 가능하다는 것을 밝혀야 한다. 물론 나 역시 문제를 해결해야 할 당사자의 한 명이기에 완벽한 시야를 가질 수 없고 한계가 있다. 앞으로 할  나의 이야기는 아직 암중모색하는 사람의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

대의원들의 반란인가, 새로운 소통 방식인가
 
이번 당대회에서 나타난 대의원들의 판단 기준은 정파도 세대도 아니었다.
관악의 한 젊은 청년 대의원은 당대회에 수정안이 대거 올라온 것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렇지 않겠는가. 작년 임시 당대회의 결정에 따라 당대회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준비위원회는 다양한 입장을 반영할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준비위원회가 토론을 거쳐 만든 안을 가지고 각지에서 당원들을 모아 안건설명회까지 마쳤다. 더군다나 실무책임자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민감한 안건에 대해 전국위원회 직전에 다른 입장의 준비위원들이 모여 조정까지 거쳤다. 전국위원회에서 열띤 토론이 있었고 표결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당대회 안건이다. 미리 공지된 수정안은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3/27 당일에 무더기로 수정안이 제출되었고 그 수정안들은 하나도 부결되지 않고 다 관철되었다. 미리 공지된 수정안은 압도적으로 표차로 부결되었다. 그럴려면 뭣하러 준비위원회를 만들어 그토록 오랜 시간을 고민하고 토론하고 조정했는가 하는 문제 제기가 나올 만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 제기는 아무런 힘을 받지 못했다. 전통적인 관행이 부정당하였다. 조직적 결정과정의 절차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로서는 정상적이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이러한 일이 이루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전국위원회 결정에 대한 명시적 거부인가. 당 지도부에 대한 대의원들의 반란인가. 그렇지만 수정안에 동의했던 대의원들은 지도력을 훼손시키려는 생각은 전혀 없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언가?
 
“입장을 떠나 즐거운 경험이었어요. 토론은 활기찼고, 이 정도의 토론은 경험하기 쉽지 않아요.” 
함께 당대회에 참가했던 지역의 한 남성 대의원의 말이다. 그는 이런 토론이 가능한 정당이 없어진다면 정말 아까울 것 같다는 말도 한다. 그의 옆에는 같은 지역의 여성 대의원이 함께 앉아 있었는데, 그 여성 대의원은 수정안이 나올 때마다 손을 들더라고 했다. 그 여성 대의원은 입당한 뒤로 당 활동이 처음이다. 남성 대의원은 자신은 굳이 분류하자면 독자파적 성향일 수 있는데 그래도 수정안을 다 찬성하진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오히려 당 활동이 처음인 그 여성 대의원이 수정안에 계속 손을 들어 표결이 자꾸 엇갈렸다고 한다. 그래서 서로 마주보고 웃었다며 즐거운 듯 말을 한다. 앞으로 당이 헤쳐나가야 할 일이 상당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것과 별개로 당대회의 경험은 즐거웠다고 했다.
 
지역마다 사정이 다 달랐을 테니 일반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 당대회의 결정이 어떤 정파의 승리 또는 패배, 또는 당 대표의 편지가 불러온 역풍 등등 주요 언론들이 좋아하는 몇몇 관점으로만 해석될 수 없음을 당대회 현장에 있었던 많은 이들이 동의할 것이다.
전국위원회의 출석률, 당대회의 출석률을 보면 당의 진로에 대한 당원들의 관심이 어느 정도로 큰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자신의 생각을 결정에 반영하겠다는 생각이 없다면 그토록 출석률이 높을 수 없다. 발언을 하건 하지 않건 간에 보고 듣고 판단하겠다는 모습이다. 그러니 전국위원회의 결정이라고 해서 대의원들이 무조건 존중하고 따라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겠는가. 과정과 절차에 대한 비판은 당대회 준비위원이나 전국위원들의 책임성, 윤리성에 대한 문제제기일 수는 있겠지만, 당 대의원들은 그 책임에 얽매일 이유가 없었다.
 
이번 당대회에서는 젊은 대의원들의 목소리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고참 활동가의 의견을 따라가는 신참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당당했고, 논리가 있었고, 책임감이 있었다. 그 결과가 정치적으로 현명했는지에 대해서는 따로 이야기해야 한다. 하지만 적어도 그 순간 대의원들은 최선을 다했다. 노동조합 활동이나 그간 당의 조직활동을 통해서 습득된 매뉴얼의 지침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선수’끼리 통하는 규칙은 다 무시되었다. 심지어 지도력이 손상될 수 있다는 호소도 난데없는 소리로 취급당했다.
 
선수의 감각으로 판단한다면 이번 당대회는 반칙이었다. 선수들이 암묵적인 룰을 어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통의 규칙이 바뀌었다. 당 대의원들은 직접 소통의 방식을 원했다. 사전 조율은 큰 의미가 없다. 의미가 없다기보다는 그것을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가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직접 소통의 방식이 다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소통 방식은 때로는 대단히 위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규칙이 작용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해야말로 앞으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핵심이라고 본다.

대의원들은 회피라는 문제해결 방식을 부정했다
 
‘선수’들끼리 협상할 때 가장 잘 쓰는 방식은 무엇인가. 흔히 조정과 절충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핵심은 예민한 문제를 비켜가는 것이다. 이는 아주 일반적인 방식이고 이 기술을 익히지 못하면 협상가가 될 수 없다. 회피라는 기술을 사용하지 않고 이루어진 협상의 사례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당대회 준비위원회에서 마련한 안도 이러한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그 안은 앞으로 새로운 진보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당 외 세력과의 협상에서도 마찬가지의 과정을 거칠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 이건 기본이다.
 
그런데 대의원들은 핵심적인 문제를 회피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핵개발과 부자 3대 세습이 잘못이면 명확히 반대한다고 표명하는 것이 맞다고 했다. 연립정부 구성도 잘못이라고 아예 못을 박았다. 당대회는 당내 최고 기관이니 그 결정을 어기는 어떠한 협상도 불가능하다. 그런데 당대회가 여지를 주지 않았다. 협상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퇴로가 끊어진 상태에서 협상 카드 한 장 없이 서 있는 꼴이 되었다. 이처럼 난감한 일이 어디 있나.
 
일반적으로 이 난감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다시 당대회나 그 이상의 권위를 가진 방법을 통해 3/27 당대회의 결정을 수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당대회를 보면 그런 방법을 찾는 것은 당을 심각한 위기 상황에 빠뜨릴 가능성이 높다. 당대회가 그 수정을 쉬 용납할지도 의문이고, 그렇다고 당원 총투표를 허용할지도 의문이다. 당대회 반대파를 조직하는 과정에서 갈등은 더욱 가중될 수 있다. 수정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자칫 더 큰 절망감을 느끼는 당원들이 생겨, 당이 분열될 수 있는 위기가 올 수도 있다.
 
그런 위기를 맞이하지 않으려면 정면으로 현 상황을 돌파해야 한다. 출구는 정면밖에 없다.
마주 달리는 두 대의 기차를 연상해서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태도와 입장이 명확해야 진정한 소통이 가능해진다는 의미로 읽어야 한다. 미래에 당을 함께 할 동지가 누구인지 결정하는 문제인데 서로 숨김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주문이다. 이건 나와 입장이 똑같아야 같이 할 수 있다는 완고한 자의 태도가 아니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알아야 동행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고 같이 길을 가다가 문득 뒤통수를 맞지 않을까 걱정할 일이 없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번 당대회는 그러한 확인이 가능하다면 언제든 새로운 태도를 가질 수 있다는 신호도 함께 보냈다고 해석한다. 
 
당대회의 결정을 두고 새로운 진보정당의 건설을 사회당과의 통합만으로 마무리지으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일고 있다. 이번 당대회에서 통과된 수정안을 두고 미루어 짐작하면 충분히 그런 혐의가 가능하다. 사회당과의 소통합이 정세에 미칠 영향과 정치적 파장에 대해서는 여기서 논의하지 말자. 그러나 선수의 감각으로 너무나 뻔히 읽히는 그 전술은 내가 해석한 이번 당대회의 정신과 어긋난다. 그 안도 함께 통과되었으므로 소통합도 당대회 결정의 진정한 의미 중의 하나라고 한다면,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이라는 과제는 완성될 수없다. 왜냐하면 그건 정면에서 출구를 찾는 것이 아니라 미리 후퇴할 곳을 보아놓고 트릭을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 역시 회피의 문제해결 방식이며, 추진위원들이 할 일은 시간을 벌기 위한 허수아비의 역할뿐이다.
나아가 만약 3대세습반대를 어느 누구라도 절대 풀 수 없는 잠금장치라 전제하고 그 해결을 요구한 것이라면 이 역시 회피의 의도를 숨기고 있는 건 아닌지 질문해야 한다.

진보의 재구성의 실패
 
진보의 재구성이 실패했다는 단정이 당내에서 엄청난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렇게 말해 보자. 미래를 바라보는 지향적 관점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에 대한 진단만 내린다면 진보의 재구성은 성공하지 못했다. 성공하지 못했다는 말과 실패했다는 말은 동전의 양면에 불과하지만, 당원들이 그 말에 그토록 반발했던 것은 우리는 한번 제대로 해보지도 못했다는 통렬한 문제의식 때문이지 이 사태를 당 대표와 완전히 다르게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조금 도식적으로 표현하자면 진보의 재구성은 가치의 재구성과 세력의 재구성으로 이해되었다. 가치의 재구성은 현대의 진보적 가치를 찾기 위한 과정이고 평등, 생태, 평화, 연대로 표현되었다. 세력의 재구성은 진보적 가치를 공유하고 하나의 정당으로 같이 할 수 있는 세력을 찾기 위한 과정이었다.
당이 처한 모순적 상황은 재구성을 위한 노력은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급격하게 정치일정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 증폭되었다. 이는 이른바 통합파건 독자파건 똑같이 처한 현실이다. 독자파라 해서 진보의 재구성을 위한 노력을 더 했던 것도 아니며 통합파라 불린다 해서 정치일정만 쫓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기에 독자파와 통합파의 분열이 현재 당 위기의 원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먼저 세력의 재구성, 즉 구도적 접근의 방식으로 살펴보자. 이는 ‘도로민노당’이냐는 문제의식과 관련되어 있다.
현재 통합을 가장 강하게 요구받고 있는 정당은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이다. 민주노총이 가장 절박하게, 어찌보면 위협이라 할 정도로 요구하고 있다. 이 두 정당의 통합에서 가장 문제로 꼽혔던 것이 신뢰의 문제다. 패권주의를 방지할 여러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패권주의를 막을 수 있는 제도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결국 신뢰의 회복이 당의 통합에 가장 핵심이다. 하지만 상호간에 신뢰가 회복되었다는 어떠한 신호도 없다. 신뢰를 회복할 만한 강한 경험도 공유하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신뢰를 회복하기에 3년이란 기간은 너무 짧다. 신뢰가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통합을 하려다 보니 패권주의를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의 수준을 끌어올리자는 식으로 일을 진행하려 한다. 하지만 여전히 서로를 의심한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하게 살펴야 할 문제는 이른바 지형의 문제다. 진보의 ‘재구성’을 통해 지형의 변화를 만들어 내지 못한 상태에서의 통합이란 낡은 지형으로 회귀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낡은 지형이란 80년대부터 질곡으로 작용했던 NL-PD라는 운동 지형인데, 또다시 한 정당으로 묶어 놓으면 낡은 노선투쟁은 여전히 계속될 수밖에 없다. 진보의 재구성은 낡은 지형을 타파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기반하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지형이 무엇인지는 고사하고, 과연 낡은 이 지형이 타파될 수 있는지 아니면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는 도저히 타파될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해서조차도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진보의 재구성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통합이라는 구도를 뛰어넘어야 하는데, 새로운 지형은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논의는 두 당의 통합에 머물러 있다.
 
가치의 재구성, 즉 내용적 방식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많은 사람들이 의도한 결과는 아닐지 모르지만 진보신당은 이념중심적 정당이 아니라 가치중심적 정당을 내걸었다. 진보신당은 평등, 생태, 평화, 연대의 정신을 내세웠다. 가치중심적 접근은 낡은 이념정당의 모습을 탈피하고 당을 현대화시킴과 동시에 함께 할 수 있는 세력을 넓히겠다는 전략이다.
이것이 당에 생기를 준 것은 사실이다. 상상력에 제한을 두지 않으려 했으므로 당원들에게서 여러 가지 활력 있는 아이디어들이 나왔다. 당장 생존의 위기에 빠지지 않는다면 진보신당의 상상력은 진보정당 운동의 새로운 길을 열어나갈 수 있으리라는 즐거운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당은 곧 침체 상태에 접어들었는데 이것은 단지 경험 있는 활동가의 부재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당은 대안사회에 대한 전망과 집권 전략이 없이는 대중의 신뢰와 지지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진보신당은 이를 분명하게 제시하지 못했다.
새로운 진보정당을 건설하겠다면서도 그 새로운 핵심 가치가 제시되지 않았다. 완곡하게 표현하자면 공감을 얻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아주 자연스럽게도 민주노동당과 분당할 때의 논쟁이 재연되고 있다. 물론 북한에 대한 문제가 새로운 진보정당에서 가장 핵심적인 가치라고 주장할 수 있다. 태도의 문제인지 가치의 문제인지, 강령적 차원인지 정치적 입장의 차원인지 논의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의식으로는 진보의 재구성을 주도할 수 없다.
  
가치중심적 접근방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복지를 핵심 가치로 모든 정치세력을 묶어내자는 구상이 그것이다. 하지만 복지는 수준의 문제일 뿐 이념적 차별성을 가지기 쉽지 않다. 애초 발생의 측면에서 보자면 복지는 보수세력의 전략이었다. 현재 복지가 새로이 진보적으로 해석되고 접근되는 것은 신자유주의의 단말마적 고통을 해소하기 위한 대응책이 긴급하게 요청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복지는 제정치세력의 연대를 위한 가치이지 새로운 진보정당의 중심가치일 수 없다.
가치중심적 접근방식에 포함할 수 있는 또 다른 접근은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정치세력을 모두 묶는다는 전략인데, 새로운 진보정당의 메시지로서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나는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정책 의제가 아니라 대안사회의 전망 및 집권전략과 연결시킬 수 있는 진보정당의 핵심 가치, 곧 이념화할 가치를 찾아야 한다. 진보의 재구성의 실패를 기분 나쁘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 그것은 진보의 재구성이 도달해 있는 현 단계의 진단일 뿐이다. 당대회가 우리의 입장을 명확히 나타낼 것을 요구한 것처럼, 우리의 한계 또한 정확하게 진단해야만 길을 찾을 수 있다.

이념정당과 가치정당
 
이념정당에서 가치정당으로의 전환은 발전인가 퇴보인가. 결론적인 의견을 먼저 말하자면 가치정당은 새로운 이념정당을 위한 징검다리 역할이다.
 
낡은 이념을 대신할 새로운 이념은 무엇인가. 민족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니라면 진보정당의 이념은 무엇인가. 국가사회주의의 오류를 극복하면서도 사회주의의 이상과 원칙을 계승하는 이념은 어떤 것인가. 진보신당은 그 이념을 찾기 위한 오디세우스의 항해를 떠났다. 물론 우리가 들러야 할 몇몇 항구는 이미 정해져 있다. 평등에서 출발해서 평화와 만나고 생태와 조우하고 연대의 바다를 건넌다. 우리의 항해는 어디까지 왔는가. 아직은 도착을 알리는 신호기를 올릴 때가 되지 않았다.
 
위험이 있다. 항해를 마치기 전에 사이렌의 노랫소리에 빠져들 수 있는 위험은 항상 도사리고 있다. 벌써 그 위기가 찾아왔다. 바로 복지라는 가치다.
자유주의 정당에서도 진보의 나팔이 울려대고, 보수정당에서도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국가 대안으로 복지사회를 들먹이고 있다. 마치 세상이 갑자기 급변한 듯하다. 하지만 풍랑을 보지 못하고 노랫가락에 귀기울이다가는 곧바로 좌초할 운명에 떨어진다.
 
복지도 우리가 만나야 할 중요한 가치의 하나다. 나는 내년 선거를 염두에 둔다면 복지라는 화두를 중심에 놓고 복지동맹이라도 맺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고민을 했다. 이 고민은 여전하다. 하지만 이는 매순간 정세를 살피면서 가장 적정한 선을 어디에 그어야 할 것인가 판단하는 전략적 수준의 고민이지, 복지가 진보정당의 이념적 정체성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치 복지라는 가치가 구원의 밧줄인 양 선전하는 세력이 나타났다. 가치 중심적 접근에서 나타날 수 있는 위험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양상이다. 논리의 함정에 빠졌다고 일단 판단하지만, 미국식 양당구조를 만들기 위한 의도적 접근은 아닌가라는 혐의도 있다.
 
가치정당은 진보의 재구성을 위해 불가피하게 겪어야 할 과정이지만, 그러기에 그 한계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가치정당은 언젠가는 이념정당이 되어야 한다. 오디세우스의 항해를 마칠 때 우리는 나라를 운영할 이념을 가져야 하며, 이것이 우리가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에 나섰던 이유이다.

동행인가 조우인가
 
이념의 동아리를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아직은 답을 내릴 때가 아니다. 이념의 동아리는 참으로 편하다. 거기에는 소파에 앉아 자기가 보고 싶은 채널만 틀어놓는 행복감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밖으로 나와 정당이라고 하는 배, 파도와 싸우는 조각배를 선택한 것은 결국 이 바다를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이다. 그러니 섣불리 답을 내릴 생각은 말아야 한다.
 
그러나 항해가 끝나지 않았다고 해서 항해 뒤에 우리가 얻을 보물을 상상해 보는 자유까지 없는 건 아니다. 나는 노동을, 진보신당의 가치용어로 표현하자면 평등을 핵심가치로 생각한다. 국민의 정부가 네덜란드의 폴더 모형을 제시하였을 때 그건 비정규직을 인정하고 차별을 구조화하는 것이라 우리는 비판했다. 민주노총과 당 일각에서 사회연대전략을 제시하였을 때 이는 노동자의 양보를 전제한 것이라고 노동계 내부로부터 비판받았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냐 비정규직 차별철폐냐의 논쟁도 아직 답을 내지 못했다. 지금 비정규직 문제의 해법에서 가장 중심으로 등장한 것은 비정규직 사유제한이다. 하지만 이는 정책과제로 제시되어 있을 뿐이다. 비정규 노동의 문제를 정책의 문제를 뛰어넘어 대안사회의 전망 및 집권전략과 연결시키는 구상은 아직 뚜렷이 제시되지 않았다.
아니면 생태사회로의 전환을 상상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제시하고 있는 가치가 하나의 이념 속에 녹아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큰 전략은 비판받기 쉽다. 당연하다. 큰 것은 그만큼 잘 보이고 그러기에 때릴 곳도 많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진보의 가치, 이념으로 국민적 동의를 얻어낼 수 있는 전략이 아니라면 구태여 정당이라는 이 길을 택할 이유가 없다.
 
아직 우리가 그 답을 찾지 못했는데 무엇을 기준으로 함께 할 사람이나 세력을 찾을 수 있는가. 진보의 재구성을 위한 오디세우스의 항해를 함께 하는 데 동의하는가, 나는 이것이 기준이라고 본다. 진보신당이 내걸고 있는 가치의 기준이 온전히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충분히 대화하고 토론해야 한다. 당연하다. 진보신당이 답을 던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께 배에 오른다는 것은 분명 낡은 과거와 절연한다는 뜻이다. 당대회는 이를 덮어두거나 회피하는 방식이 아니라 정면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쓸데없는 말을 하나 덧붙이자면 진보신당 역시 과거와 절연할 수 있는 용기를 내야 한다. 
 
키가 두 개인 배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누가 키를 잡는가에 따라 항로가 달라지겠지만, 서로 다른 키를 잡고서는 배를 운항할 수조차 없다. 가는 길에 만나 한동안 방향을 같이 가거나, 아니면 하선할 곳을 명확히 정한 채 잠시 같이 배를 탈 수는 있다. 하지만 끝까지 배를 타고 갈 이들이 누구인지는 분명해야 한다.  
 
못다 한 이야기는 따로 시간을 내어야겠다. 나의 어조가 누군가에게 불편할지는 모르나 많은 것을 열어두고 사고하자는 내 생각은 확고하다. 많은 제안에 혐의를 두는 이유는 신뢰가 부족하기 때문이고, 냉소를 보내는 것은 왜 우리랑은 이야기하지 않느냐는 항변이다. 무조건 신뢰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신뢰의 부족이 더 큰 신뢰의 부족으로 악순환되는 과정은 막아야 한다.

대중을 믿어라. 함께 한 결정을 믿어라. 의심하지 말고 가라.
죽을 곳으로 들어가 살 길을 찾으라.
그렇다. 이것이 당 대회가 내린 임무다.



황상

2011.04.03 16:47:13
*.137.102.221

탁블로그보다 여기가 읽기 편하군요. 모자님의 코멘트도 원합니다.

이상한 모자

2011.04.03 17:08:45
*.208.114.70

저 블로그에 제가 단 코멘트도 퍼옵니다.

이상한 모자 2011/04/03 16:05
코멘트를 달라 하셨는데 제가 늦었네요. 저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과거에 당직에 있던 때를 돌이켜보면 민주노동당 출신 당원이 한 30%, 민주노동당적을 가지지 않았던 당원이 한 70%였던것 같은데요. 얼마나 변했는지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도 비슷하리라고 보고, 혹자들은 활동가들이 당원의 의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의원의 구성 역시 언급한 당원들의 성향에서 크게 벗어난다고 보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직시하고 인정해야 하는데 과거 정파연합당의 습관에 묶여서 서로를 과도하게 불신하고 비난하는 모습이 안타깝네요.

이상한 모자 2011/04/03 16:06
로마에 왔으면 로마의 법을 따르랬는데, 과거의 습관, 과거의 사고방식, 과거의 행동요령을 다 벗고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구요. 그런데 이게 전국위원회 구성은 또 다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걱정스럽네요. 하여튼 이 글은 전에 말씀드린대로 제 홈페이지에 퍼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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