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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사고가 터졌다. 김진표 원내대표가 범인으로 지목된다. KBS 수신료 인상과 관련한 여야의 일정 합의와 관련된 것이다. 야권 지지층에서 술렁이는 여론이 인터넷 곳곳에서 감지된다. 심한 표현으로 김진표 원내대표 물러나라고 하는 글도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살인범이라도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 일단 김진표 원내대표의 주장을 들어보자. 그의 주장은 이렇다. 22일 한나라당이 국회상임위에서 KBS 수신료 인상안을 상정했다. 어떤 안건을 어느 날짜에 상정하고 토론해서 어느 날짜에 표결처리 하겠다는 계획을 보통 의사일정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의사일정은 보통 여야 상임위 간사가 합의해서 결정한다.


   
▲ 민주당 손학규 대표와 김진표 원내대표 ⓒ 연합뉴스

하지만 KBS 수신료 인상안에 대한 안건 상정은 합의된 의사일정이 아니었다고 한다. 즉, 한나라당의 일방적인 안건 상정이었던 셈이다. 실제로 민주당 측 간사인 김재윤 의원 등이 반발하며 의사봉을 빼앗고 몸싸움까지 벌였지만 전재희 문방위원장이 책상을 손바닥으로 두드려서 의사 진행을 했다고 하니 아마 이것은 사실일 게다.

회의 규칙상 안건 상정이 이루어진 후에는 바로 표결처리도 가능하다. 회의의 의장인 문방위원장이 의사진행을 하면 된다. 의장이 “찬반토론을 종결하고 지금부터 표결을 시작하겠습니다. 찬성하시는 의원님 거수해주십시오.” 라고 말한 후 손을 들어 표결하고 의결을 선언하고 집에 가면 된다. KBS 수신료 인상안이 한나라당 단독으로 처리될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국회에서의 의사일정 등에 관한 사항은 보통 원내대표가 책임을 진다. 그런 거 하라고 있는 원내대표다. 여기에서 결단이 필요했다는 것이 김진표 원내대표의 말이다. '한나라당이 날치기를 하게 내버려 두고 끝까지 반대하는 모습을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랬다가는 영수회담 등의 이후 정치 일정이 꼬일 수 있었다'라는 게 김진표 원내대표가 하는 주장의 요지다. 실제 민주당이 한나라당과 표결처리에 합의한 날짜는 28일 오후이다. 영수회담은 27일로 예정되어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영수회담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꺼내지 않을 수가 없다. 영수회담은 손학규 대표가 직접 꺼낸 카드다. 이걸 꺼내지 않았더라면 민주당이 KBS 수신료 인상안에 대한 표결처리 일정을 합의하고 비난을 받는 상황을 겪지도 않았을 것이다. 손학규 대표가 영수회담 카드를 꺼낸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대개 이런 경우는 '정국주도권을 빼앗아 오기 위해서' 라는 말을 덧붙이는 경우가 많다. 뭔가를 제안해서 어떤 주도적인 역할 수행을 통해 활로를 찾으려는 것이다. 손학규 대표의 말로 영수회담의 주제는 '민생' 이라고 했다. 즉, 그가 원하는 그림은 야당의 대표로서, 그리고 유력한 야권의 대선주자로서 대통령과 머리를 맞대고 민생고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런 그림을 좋아할만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민주당 보다 급진적인 사람들인가? 그렇지 않다. 명백하게 이 기획은 합리적인 중간층을 공략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지난 4월 재보선에서의 승리 후 손학규 대표의 당선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는 이인영 최고위원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이인영 최고위원은 모 방송사의 라디오 인터뷰에서 ‘앞으로 손학규 대표의 우클릭 행보가 시작되면 야권연대가 힘들어질 수 있는데 어떤 해결책을 가지고 있는가?’ 라는 요지의 질문에 ‘손학규 대표의 그러한 행보가 시작되더라도 나 같은 사람이 민주당의 맨 왼쪽에서 야권연대를 위해 노력하면 충분하다’라는 답변을 한 일이 있다.

실제로 민주당 내 ‘손학규계’의 대선 플랜은 중간층 흡수와 야권연대 모색의 투 트랙으로 진행되고 있는 듯 보인다. 영수회담이 중간층 흡수를 위한 카드라면 ‘부동산 계급사회’로 유명한 민주노총 대변인과 진보신당 심상정 의원실 출신의 손낙구 보좌관을 정책보좌관으로 채용한 것은 야권연대 모색을 위한 카드라고 볼 수 있다. 즉, 영수회담 중간층 흡수를 위한 행보를 한 축으로 하고, 손낙구 보좌관 채용을 통해 진보진영 내에서 범민주당 계열과의 연립정부 구성을 주장하고 있는 심상정 전 의원과의 교집합 고리를 만들면 이러한 전략의 초석이 다져질 수 있다고 생각할 여지도 분명히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고 있다. 손학규 대표는 재보선에서의 승리 이후 정치적으로 어떠한 인상적인 모습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고, 지지율은 두 달째 정체상태이며, 이번 사태로 인해 오히려 기존 지지층의 충성도를 잃을 수도 있는 위기에 처해있는 상황이다.

더욱 문제는 앞으로도 얼마간은 이 상황이 바뀌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다. 당장 영수회담의 전망이 어둡다. 실질적인 성과를 내기 힘들 것이다. 이 정부가 어떤 정부인가? 자기들끼리 이명박, 박근혜 회담을 해도 “우리 사이 덜 어색해졌어요.” 이상의 효과를 연출할 수 없는 정부이다. 손학규 대표를 위한 선물을 내줄 리가 없다. 손학규 대표가 그 자리에서 대통령 멱살이라도 잡지 않는 이상, (물론 이러면 합리적인 중간층의 지지 같은 건 앞으로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식사를 같이 하며 우려의 마음을 전달하는 것 이외의 무엇이 가능하겠는가?

손학규 대표의 투 트랙 전략은 큰 그림에서 뿐만 아니라 디테일에 있어서도 정밀하지 않다는 것이 또 하나의 문제이다. 정치를 사고하는 데에 있어서 ‘통치논리’와 ‘피치논리’가 있을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KBS 수신료 인상 표결일정에 합의한 내용 자체는 통치논리의 일부로서 정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피치논리의 입장에서는 정당성 없이 국민들에게 부담만 안기는 결과로 이어질 뿐이다. ‘정치’의 기술적 본령이 피치논리를 이용하여 통치논리를 쟁취하는 것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손학규 대표의 전술은 정확히 그 반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데에서 우선 문제의식을 느낄 필요가 있다. 한-EU FTA 처리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도 그렇지 않았던가?

이러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BBK 이외의 거의 모든 이슈에서 갈팡질팡하며 무기력했던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대통령 후보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추측하건대, 손학규 대표의 참모진들이 무능하거나 손학규 대표가 너무 잘나서 참모진들의 말을 듣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이러다가는 아직 대통령 되기 ‘시기상조’인 사람으로 찍힌 채 2012년이 지나가버릴 수 있다. 젊은 사람은 차기를 기약할 수 있지만 손학규 대표에게 남은 시간은 별로 없다. 손학규 대표는 1947년생이다. 2012년에 그가 대권을 꿈꿀 수 있는 시한은 만료될 가능성이 높다. 대권을 꿈꾼다면 마음을 새로 먹어야 한다. 지금도 아주 늦지는 않았다.

* 이 글은 미디어스에 게재되었습니다. :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8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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